#겨자씨 한 알처럼
율곡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이 세상에 살면서 배우지 않으면 사람으로 살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누구한테서 무엇을 배우느냐겠지요.
중국 사람들은 정치가 바로잡혀 나라가 든든할 때 공맹(孔孟)을 읽었고, 반대로 정치가 어지러워 나라가 흔들릴 때 노장(老壯)을 읽었다더군요. 제 생각입니다만, 공자·맹자는 나무 뿌리와 줄기를 그냥 두고 잘못된 가지를 바로잡거나 병든 잎을 다듬는 방법을 말하고, 노자·장자는 아예 새 묘목을 심어 제대로 된 나무를 길러내는 법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한 나라가 서서 신선한 출발을 할 때에는 사람들이 공맹을 읽었고, 그 나라가 세월과 함께 늙어서 아무래도 새 나라로 바꿔야겠다는 민심이 움직일 때는 노장을 읽었을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우리 나라 교육이 근본부터 새롭게 바뀌어야 한다는 말에 동감하지 않는 사람은 아마 드물 것입니다. 그런데 왜 아까운 세월만 흐르고, 온 국민이 바라는 교육개혁을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걸까요?
그 까닭은 우리가 교육개혁에 대해 잘못된 기대를 하기 때문이라는 거이 제 생각입니다. 뭔가 거창하게 전체적으로, 그것도 일시에 바뀌어야 ‘개혁’이라 할 수 있다는, 군사혁명가다운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있는 눈으로 보니까 이 나라 교육에 아무런 개혁의 낌새조차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 아닐까요?
그러나 참다운 개혁은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류에게 진정한 행복과 진보를 가져다 준 혁명들은 모두가 저 변두리에서 사람들 눈에 잘 띄지도 않게, 예수의 겨자씨 한 알처럼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관점만 달리하면 이 나라 구석구석에 보석처럼 빛나는 교육혁명의 겨자씨가 뿌려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배움의 길
무슨 일이 배움터에서 일어나는지,/ 그것은 설명될 수 없다/ 설명될 수 있는 것은/ 배움터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일이 어떻게 일어나는가/ 그것이 道다/ 배우는 과정에서 일이 어떻게 일어나는가/ 그것이 배움의 도다/ 사람 말로 표현되는 배움의 길은/ 참된 배움의 길이 아니다
배움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자 애쓰지 말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판단하지 말고,/ 그것에 자신을 열어 놓아라
일이 어떻게 일어나는가, 그것이 道다.
#말 없이 가르침
세상에 있는 것들은 모두 반대편 짝이 있다/ 저마다 세상에 있기 위해서는 짝이 있어야 한다/ 선과 악, 가득 참과 텅 빔, 부와 가난, 흑과 백
그러기에 슬기로운 교사는 말 없이 가르치고, 하는 일 없이 한다/ 모두가 그가 이눌 것이지만/ 그것을 자기 것으로 삼지 않는다/ 일이 다 끝나면,/ 그는 사라져 보이지 않는다.
#일삼아 하지 않음
슬기로운 교사는 누구를 내세우거나, 내세우려고 점수를 높이 주거나 하지 않는다. 그러면 다툼과 시샘만 자란다.
슬기로운 교사는 일을 일삼아 하지 않음으로써, 배운 바를 버림으로써 가르친다.
슬기로운 교사는 학생들로 하여금 안다고 생각하는 것을 모두 버리게끔 도와주고, 스스로 안다고 생각하는 학생들에게 물음을 던진다.
그는 일삼아 일하지 않음을 연습하고 실천한다. 그래서 학생들은 자기네가 받은 선물을 스스로 알게 된다.
#물처럼 흐르기
그대 배움 안에 생명이 절로 흘러넘치게 하라. 기대하지 않았던 것들, 몰랐던 것들이 예고 없이 나타나게 두어라. 그런 일이 일어날 때 교사와 그의 가르침은 전혀 새로운 내용을 경험할 수 있다.
#멈출 때
말을 너무 많이 하면 들으려 하지 않는다. 너무 오래 앉아 있으면 학생들은 지쳐 떨어진다. 너무 열심히 하면 길을 잃고 만다.
교사와 학생은 배우기를 멈추고 서로 떨어져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 거리가 교사와 학생에게 학습으로 돌아가 서로 만날 수 있게 한다.
슬기로운 교사는 멈출 때를 안다.
#몸 풀기
그대가 볼 때 그것은 보이지 않는다. 들을 때 그것은 들리지 않는다. 손으로 잡을 때 그것은 잡히지 않는다.
배움터에서 일어나는 일이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을 때 그것을 밝혀 보려고 지나치게 애쓰지 말라.
그 대신, 몸을 풀고 그대 마음으로 하여금 무엇이 일어나는지 보게 하여라. 그대의 인식과 직관으로 하여금 그대를 안내하게 하여라.
그대는 모든 것을 알 수 없다. 그러나 모르는 것에 자신을 열어 놓고, 신비로운 것 앞에서 편히 쉴 수는 있다. 모든 사물의 근원에 깨어 있을 때 그대는 지혜의 심장은 안다.
#놀이 정신
두려움이 배움터를 지배해서는 안 된다. 두려워하면서 배우는 일은 지속되지 않는다. 아이들은 놀이를 통해서 배운다. 어른들은 배우기 위해서 논다. 진지한 배움 속에도 놀이 정신은 있을 수 있다.
#조산원 교사
슬기로운 교사는 가르칠 때 학생들은 그가 있는 줄을 잘 모른다. 다음가는 교사는 학생들에게 사랑받는 교사다. 그 다음가는 교사는 학생들이 무서워하는 교사다. 가장 덜 된 교사는 학생들이 미워하는 교사다.
교사가 학생을 믿지 않으면 학생들도 그를 믿지 않는다. 배움의 싹이 틀 때 그것을 거들어 주는 교사는 학생들로 하여금 그들이 진작부터 알던 바를 스스로 찾아낼 수 있도록 돕는다.
교사가 일을 다 마쳤을 때 학생들은 말한다. “대단하다! 우리가 해냈어!”
#혼돈 속 질서
배움의 도가 잊혀질 때 순종과 굴복이 생겨난다…배움터가 어지러울 때 질서가 머리를 내민다.
#중심에 머무르기
판정과 규칙을 치워버려라. 학생들이 바르게 처신할 것이다. 빡빡한 과제와 등급을 대다버려라. 아무도 잔꾀로 속임수를 쓰지 않을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치 않거든, 그대 교실 중심에 머물러 배움으로 하여금 스스로 제 길을 가게 하여라.
#지혜 가르치기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들로 가르쳐라. 그것을 해석함으로써 어떤 특별한 것을 창출하여라. 해석을 한 뒤에야 학생들은 특별한 가르침이 어떻게 있게 되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교사는 단순한 일을 실천으로 보여 주며 가르치고, 그럼으로써 학생들을 단순한 진리로 이끈다.
날마다 되풀이하는 일 없이는 배움도 없다. 놀라움 없이는 지혜도 없다.
#역설
교사와 학생의 역할은 다르다. 배움의 세계에 음양을 이룬다.
만일, 한 교사가 전체이기를 바란다면, 그는 부분이 되어야 한다. 가득차기를 바란다면 스스로 텅 비어야 한다. 얻기를 바란다면 버려야 한다. 슬기로운 교사는 배움의 도를 통하여 학생들에게 본보기가 된다.
옛적 교사들이 “모든 것을 얻고자 하거든 모든 것을 버리라’고 했을 때, 그들은 진실을 말한 것이다.
#위대한 신비
훌륭한 교사는 학습계획을 부드럽게 짠다. 교제에 묶어 진도 나가는 데 허둥대지 않는다. 선입견에 얽매이지 않고 눈앞에서 일어나는 것에 언제나 마음을 열어 놓는다.
좋은 학생은 나쁜 학생의 교사 아닌가? 나쁜 학생은 좋은 교사에게 도전 아닌가?
#다 때가 있다
그대 세상을 구원하고 싶은가? 그대가 그럴 수 있다고 나는 생각지 않는다. 세상은 거룩한 것! 사람이 구원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대가 만일 세상을 땜질한답시고 집적거린다면 세상을 더울 못쓰게 만들 것이다. 그대가 세상을 물건처럼 다룬다면 세상을 잃고 말 것이다.
슬기로운 학생은 사물을 지배하려고 애쓰는 일 없이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 그는 원의 중심에 머물러 있으면서 그것들로 하여금 제 길을 가게 한다.
#자족
배움의 도를 따르는 사람은 문제를 억지로 풀려고 하거나, 벌을 줌으로써 학생들을 이기려고 하지 않는다.
모든 작용에는 반작용이 있기 때문이다. 벌은 아무리 좋은 뜻에서 준다 해도 반발심을 불러일으킨다.
슬기로운 교사는 자기 일을 하고 거기서 멈춘다. 그는 세상이 대부분 자기 통제권 밖에 있음을 안다. 그리고 모든 것을 통제하려 하는 것이 배움의 도를 거스르는 짓임을 한다.
#단순함
배움의 도 안에 중심을 잡은 학생은 그가 바라는 곳에 어지럽지 않게 갈 수 있다. 그는 혼돈 속에서도 큰 그림을 본다. 이는 그에게 평화로운 가슴이 있기 때문이다.
#덜 하기
도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일이 도를 통해 이루어진다…아무런 욕망이 없을 때, 배움의 장은 평화롭다.
#비웃음
슬기로운 교사는 도를 듣고 곧장 그대로 한다. 괜찮은 교사는 도를 듣고 반신반의한다. 어리석은 교사는 도를 듣고 비웃는다. 그가 비웃지 않으면 그것은 도가 아니다…배움의 도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만물을 기르고 완성한다.
#함 없이 함
말 없이 함, 함 없이 함, 이것이 곧 배움의 도다.
#어리석어 보임
참된 인생길은 구부러질 수 있다. 참된 지혜는 어리석어 보인다. 참된 기교는 아무 기교가 없는 듯이 보인다.
#지금 여기 있음
공부를 많이 할수록 그대는 더 많이 모른다.
뛰어난 교사는 떠나지 않고 여기 와 있으며, 보지 않고 빛을 보며, 아무 일 하지 않고 일을 이룬다.
#다투지 않음
교사는 날마다 배운 것을 덜어내는 데 힘써/ 마침내 아무 것과도 다투지 않음에 이르러야 한다…참된 배움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두고 배운 것은 없애버림으로써 비로소 얻을 수 있다. 다투어서는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신뢰
믿음직한 학생을 믿고 믿음직하지 못한 학생도 믿는다. 이것이 진짜 신뢰다.
#시작과 끝
슬기로운 학생은 마음에 속임수가 없고 몸에 캥기는 바가 없다. 계획을 세워 행동하는 일도 없다. 그의 행위는 모두 그의 중심에서 절로 나온다.
#쉬운 길
선으로 가는 길은 쉽다…농민이 땅을 잃을 때 돈 많은 은행가가 번영을 누린다면, 정부가 책보다 무기를 만드는 데 더 많은 예산을 쓴다면, 가난한 이들이 굶주릴 때 부자들이 아랑곳 않고 사치 부린다면, 그것은 범죄요, 뒤죽박죽이다. 사람들이 道와 버성길 때 그런 일이 생긴다.
#갓난아기처럼
학생의 힘은 갓난아기의 힘과 같다. 아무 욕심 없이, 또 애쓰지도 않고 모든 것을 오고 가게 한다. 그는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그래서 실망을 모른다. 실망하는 법이 없기 때문에 그의 정신은 언제나 젊고 희망에 넘친다.
#덜 하는 것과 더 하는 것
뛰어난 교사가 되고 싶거든 도에 따르기를 배워라. 억지로 지배하려 하지 말고, 미리 예정하거나 생각하기를 그만두어라. 배움의 장이 스스로 꾸려나갈 것이다.
…그러기에 슬기로운 교사는 말한다. “내가 규칙을 정하지 않아서 학생들이 정직하다. 내가 구속하지 않아서 학생들이 내 기준을 뛰어넘는다. 내가 재촉하지 않아서 학생들이 과제를 완수한다. 내가 善을 요구하지 않아서 선이 돌맹이처럼 흔해진다.”
#생선 조리듯이
배움이란 작은 생선을 조리는 것과 같다. 젓가락질을 너무 많이 하면 요리를 망치고 만다.
#무지함
옛적의 교사들은 학생들을 교육하지 않고 그들이 무지하다는 것을 가르쳤다.
학생이 자기가 무엇을 안다고 생각할 때, 그들을 가르치기는 어려운 일이다. 자기가 아무 것도 모른다고 생각할 때, 학생은 스스로 자기 길을 찾을 수 있다.
#존경
경험 있는 교사들은 말한다. “시작할 때 잘못 움직이는 것보다 기다려 두고 보는 것이 낫다. 무엇을 얻고자 밀고 나가는 것보다 한 발 뒤로 물러서는 것이 낫다.”
이것을 나가지 않고 나가는 것, 윽박지르지 않고 다스리는 것이라 한다.
#신뢰
규칙이 지나치게 엄격하면 학생들은 반발한다. 환경이 지나치게 억압적이면 학생들은 정신을 잃고 만다.
#끝없는 배움
교사는 끊임없이 배운다. 가능성에는 끝이 없기 때문이다.
#기회
실패는 기회다. 남을 탓하면 끝없이 탓하게 된다.
슬기로운 교사는 자기 몫의 일을 충분히 감당하고, 자기 과오를 스스로 고쳐 나간다. 자기가 꼭 해야 할 일을 하되, 남에게 자기처럼 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단순한 진리
단순한 진리, 그것으로 충분하다. 복잡하게 꾸며낸 말들은 필요 없다.
슬기로운 교사는 자신의 요점을 구차하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자신의 요점을 굳이 설명해야 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슬기로운 사람이 아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KBS청주 문화산책을 담당하고 있는 박혜령작가입니다. 저희가 이번에 가을기획으로
‘독서의 계절 가을, 당신은 어디에서 어떤 책을 읽고 싶나요’라는 주제로 충북지역의 다양한 동네책방들을
취재하려합니다. 그 중 탑골만화방도 취재하고 싶어 찾아보다가 이렇게 글을 남깁니다. 그 공간을 많이
아끼고, 또 이용하고 계신것 같아서요. 괜찮으시다면, 직접 통화하고 싶은데… 연락주시겠어요?
애석하게도 제가 sns이용자가 아니다보니, 방법이 답글 남기는 것 뿐이네요.
제 연락처는 010-3120-7611 …전화로 주셔도 좋고, 아래 이메일로 연락할 방도를 남겨주셔도 좋겠습니다.
그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오늘도 쨍하게 좋은 가을 보내세요.
제 이메일은 lee@leeyoon.com입니다. 탑골만화방 취재라면 더 좋은 분을 소개해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