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뽑힌 나무는 비가 와도 말라 죽고, 줄 끊어진 연은 바람이 불어도 추락한다. 시공을 초월하여 한결같은 진리에 그 뿌리를 내리지 않는 한, 온갖 현란한 문명의 꽃들과 소위 진보된 제도라는 것들이 한갓 포장된 쓰레기일 따름이다.
노자를 가운데 모시고 선생님과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눔이 나에게는 분에 넘치는 영광이요 즐거움이었다. 그 즐거움을 이웃과 나누고 싶어서 이 책을 만든다.
세계는 하나다.
인간은 하나다.
그러므로 우리의 소망 또한 하나다.
“선생님, 이대로 가셔도 제가 마치겠습니다. 선생님은 늘 제 속에 계시니까 제 속에 계신 선생님과 이야기를 계속해서 마치도록 하겠어요…”
“그려, 그렇게 하라구. 자네가 하면 내가 하는 거지.”
이 책에는 독자들께서 명심해 둘 만한 문장이 하나도 없다고 한 상권의 머리말을 기억해주시고 말보다 저 너머 우리가 가리켜보려고 한 그곳에 눈을 돌려주시기 바란다.(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봐라!)
#1장_일컬어 道라 하느리라
道를 말로 하면 말로 된 道가 道 그 자체는 아니다. 이름을 붙이면 이름이 곧 이름의 주인은 아니다.
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
말에 얽매이지 말라
노자가 시종일관 얘기하고 있는 게 말하자면 모순 통일이요 대립물의 자기 동일이지. 대와 소가 따로 없고 선과 악이 따로 없으니까….
그렇지요. 따로 있으면 이미 둘 다 아니니까요.
그러니까 노자는 뭐냐 하면, 모순 통일의 자리에서 모든 것을 들여다보라는 거 아닌가?
예수는 결국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자기를 비우는 일에 성공한 사람이었지요.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십시오’를 최후 순간까지 실천한 사람 아닙니까? 그런 철저한 자기 부정 또는 자기 포기지만 그보다 더 완벽한 자기 긍정이 없다고 봅니다
흩어져서 하나로
누구 말대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 게 아니라 반대로 뭉치면 죽고 흩어져야 산다는 건데 흩어져서 제각기 대자연의 품에 안기면, 대자연은 한 어머니의 품이니까, 거기서 모두 하나가 된다는 그런 말씀이겠지요. 땅에 뿌리를 박고 사는 데야 장소가 무슨 문제겠습니까? 원주 살든 제천 살든 아니면 저 뉴욕이나 멕시코에 살든 땅은 땅이요 한분이신 어머니시거든요. 그러니까 굳이 말로 하자면 산지사방 흩어져서 모두가 하나로 되는, 그런 세상이 돼야겠지요. 앞으로 세상이 변한다면 그렇게 변해야 하고 그런 쪽으로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깨어져버릴 수밖에 없겠구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소국과민, 마을에 세상을 구한다)
삶의 축을 자연에 두고
삶의 축을 ‘자연’에다가 둬야지.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현상계에다가 축을 심고 살자고 한다면 더 이상 견뎌낼 방도가 없잖은가?
저는 자연과 자유를, 같은 내용을 나타내는 두 가지 말로 보는데요. 자연은 스스로 그러함이고 자유는 스스로 비롯함인데, 굳이 가리자면 자연은 체體요 자유는 용用이 아닌가 생각합니다….서양 사람들은 자연을 객관화해서 보고 즐기거나 그 힘을 이용할 대상으로만 보는 경향이 있는 것 같은데요. 여기서 우리가 말하는 자연은 그게 아니라 그렇게 하는 인간들의 이쪽 뒤에 있어서 인간이 그럴 수 있도록 하는 어떤 힘 아닙니까?
다르긴 다른데 둘은 아님
하기는 전에 나도 그 무명이니 유명이니 하는 말이 잘 풀리지 않아 무척 헛갈렸더랬는데. 한번은 누가 조주趙州 스님께 물기를, 스님 개한테도 불성이 있습니까, 스님이 대답하기를, 없지, 그런데 그 뒤에 누가 또 묻기를, 스님 개한테도 불성이 있습니까, 스님 대답이 이번에는, 있지, 그러시거든. 자, 이래 놓으니 배우는 놈은 없다 있다 그 말에 그만 헛갈릴 수밖에. 사실은 있다 없다에 얽매이지 말라는 게 스님의 뜻인데 말씀이야. 절대의 경지에서는 말씀이지. 유有다 무無다가 따로 없거든.
고장난 교회? 기계론적 사고방식에서 나온 것. ‘병든 교회’라고 해야 되지 않겠는가
말 없는 가르침
중요한 것은 노자가 말하는 ‘불언지교不言之教’를 행하는 것인데, 그게 뭐냐 하면 도를 가르키는데 어찌 말로써 가르칠 수 있겠느냐, 그런 말인데 그게 간혹 마음에 걸리지. 그러나 삶의 이치를 깨우치자니 어쩔 수 없이 옛 어른들의 글도 읽고 또 훌륭하신 분의 말씀도 듣고 그러는 건데, 그게 말하자면 말이 필요 없는 경지에 이르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말이거든. 그렇기 때문에 그 ‘말’에 붙잡혀서는 안 돼.
그렇지. 그래서 자네가 아까 말했지만, 부처님 말씀하시기를 “사십구년불일설四十九年不一說”이라, 나는 한 마디도 설한 바가 없다 하셨는데, 그동안 내가 한 말은 강을 건너기 위한 나룻배처럼, 듣고 그 뜻을 얻은 뒤에는 반드시 버려야 하는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는 그런 말씀이셨지.
‘개인’은 없다
간혹 소승에 속하는 아라한을 그런 식으로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지. 그러나 아라한은 깨달은 사람이거든. 아라한을 자기 구원만 생각하고 중생 제도에는 관심 없는 그런 사람으로 비난하는 것은 자네 말대로 잘 몰라서 그러는 거야. 왜냐하면 개체와 전체는 둘이 아니라 하나니까. 그러니까 뭐냐 하면 한 사람의 깨달음이란 그게 전우주적인 사건이거든. 아라한쯤 되면 제도해야 할 중생이 자기 몸 밖에 어디 따로 있는 게 아니란 말씀이야. 따라서 중요한 것은 성경의 말로 해서,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시는 그런 전일적 존재로 서느냐 못 서느냐, 그게 중요한 거지.
돌아가는 길
그렇지. 진리는 먼 데가 아니라 가까운 데 있으니까. 그렇지만 그 가까운 데 있는 진리를 깨닫고자 때로는 지구를 몇 바퀴씩 돌기도 하지. 그런데 간혼 그렇게 돌아다니는 걸 삶의 목표로 삼는 사람이 있거든. 그래서는 안 되는 건데. 여기 누가 있다 하면 그리로 가고 저기 누가 있다 하면 또 그리로 가고…그러다 보면 아는 것만 자꾸 많아지고 그래서 깨달음과는 점점 더 거리가 멀어질 수가 있단 말씀이야. 그런 걸 경계하려고 노자는 “문 밖을 나서지 안고 천하를 안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돌아간다는 게 중요하지….
방금 선생님 말씀을 들으면서 떠올랐는데요. 그럼 탕아는 도대체 언제 구원을 받았을까 생각해 보면, 그가 아버지 집에 가서 좋은 옷 입고 은가락지를 낀 그때에 구원받은 게 아니라, 사실은 돼지우리에서 갑자기 아버지를 생각하게 된 바로 그 순간, 성경은 그때 탕아가 제성신을 차렸다고 했는데요. 바로 그 순간에 이미 그는 구원받은 게 아닌가, 그렇게 봅니다.
그러니까, 이건 아니다, 여기는 아니다, 돌아가야지, 하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향하는 바로 그 순간이 구원받은 때라는 말씀이지요.
#2장_머물지 않음으로써 사라지지 않는다
성인은 모든 일은 무위로써 하고 말 없는 가르침을 베풀며 만물을 이루어내되 그 가운데 어떤 것을 가려내여 물리치지 않으며 낳고는 그 낳은 것을 가지지 않고 하고는 그 한 것을 뽐내지 않으며 공功을 이루고는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머물지 않음으로써 사라지지 않는다.
분별지를 여의라
사람들이 그러는 건 불가의 말로 하면 분별지에 갇혀 있기 때문이겠지요? 이것과 저것을 따로 나누어서 보는, 그런 눈으로는 아름다운 건 아름다운 거고 더러운 건 더러운 거니까요. 우리 모두 그렇게 살고 있지 않습니까? 분별지를 여윈 자리에서 볼 적에야 비로소 노자 할아버지처럼 말할 수 있겠지요.
그래 그러니까 지금 그 대목은, 상대적인 것이 하나라는 얘기지. 모순의 통일이라, 길고 짧은 건 모순이지만 그러나 짧은 게 있으니까 긴 게 있고 긴 게 있으니까 짧은 게 있거든.
그렇긴 한데요. 사람이 살다보면 판단을 안 할 수가 없잖습니까? 여기서 노자 말씀이 판단하지 말라는 건 아닌 것 같구요. 다만 판단을 하려면 무슨 기준이 있어야 하는데 그 기준이라는 게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임을 늘 기억하고 따라서 자신의 판당을 절대화하지 말라는 말씀 아닐까요?
인간 세상에 절대 기준은 없다
노자는 그 기준을 道로 삼으라는 것이지. 그러니까 道를 기준으로 삼고 보면, 그게 불가의 말로 하면 불안佛眼으로 보라는 것이고, 예수님 말씀으로 하면 아버지 눈으로 보라는 건데, 그렇게 보면 길고 짧은 게 서로 다른 둘이 아니라 하나의 다른 모양이거든.
가장 인간을 위한다는 행동이 사실은 가장 인간을 괴롭히는 결과로 나타나거든요. 문자 그대로 인간 위주라, 인간을 주인으로 모시는 행위가 결과에 가서는 인간을 파멸시킨다는 말씀입니다. 소위 개발이라는 것이 그렇잖습니까? 모든 개발이 오직 인간을 위한 것이지요. 철새를 위한 개발이라든가 한강을 위한 개발이란 말은 없으니까요. 오로지 인간만을 위해서 개발하는 건데 그게 결국 인간을 죽인단 말씀이에요 이게 바로 자기는 잡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사실은 아무것도 잡은 게 없다는 것 아닙니까?.
수동적 적극성의 길
무위지심으로 일에 처한다? 철저하게 수동적인 거야. 간섭하지를 않는다는 말일세. 다시 말하면 수동적 적극성이라고 할까? 철저하게 수동적 적극성으로 돌아가게 되면, 그렇게 되면 일체의 근원과 합일한다는 거지. 무위란 천리天理에 따라서 가는, 순천順天하는 것이거든.
천리天理를 어기고 사리私利를 도모하는, 그게 바로 작위作爲가 되는 거라.
가끔 무위라고 하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젊은이들이 있는데, 그게 아니지. 예수님 말을 빌리면 아버지 뜻대로 하는 것, 아버지와 함께 하는 그것이 무위라. 도와 함께 하는 것이 무위고.
업이라는 게 하늘의 道에서 어긋나는 것이거든.
천지지도天地之道라 할까 우주의 그 본연의 모습 있잖은가. 그 모습으로 함께 돌아가야 한다는 데 생명 운동의 핵이 있는 거지.
내 것이라는 게 어디 있는가?
공을 이루거든 머물지 말라
대개 공을 이루고 거기에 머물러 있는 까닭은 처음부터 공을 이루고자 해서 이루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곧 의도를 앞세우고 무슨 일을 했다는 말씀입니다. 제가 바르게 생각하는 건지는 모르겠는데요. 요즘 들어 부쩍 공동체란 말이 유행하는 것 같은데요. 심지어는 공동체 운동이라는 말도 있습니다만 특수한 수도원이나 수녀원을 제외하면 ‘공동체를 한다’고 소문을 내면서 시작한 공동체가 제대로 잘 되는 경우를 아직까지 보지 못했어요. 역시 인위적인 의도가 앞선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만.
바로 그 점은 우리가 이 엄청난 격변의 시기에 잘 처리하고 넘어가야 하네. 우선 개체라는 게 어디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우주와 합일 속에 개체가 있다는 사실을 파악해야 하고 그 다음에는 사람들이 모여서 세勢를 이루면 큰일을 해낸다는 생각이 인류 역사에 얼마나 많은 잘못을 저질렀는지 알아야지. 종교라는 것도 처음 시작할 때는 꽤 신선하고 발랄하다가도 세월이 지나면서 굳어지고 그 껍질을 고집하면서 생명력을 잃지 않던가?
저에게는 뭐 이렇다할 생활 신조라는 게 따로 없습니다만 틈틈이 스스로 다짐하는 건 하나 있는데요. 뭐든지 억지로는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뭐든지 말입니다. 사회에 이익이 되는 일이라든가 칭찬받을 만한 일. 심지어 사랑하는 일까지도 포함해서요.
“위학일익이요 위도일손이라”라고 했는데, 사람이 깨달으려면 배워야 하니까 배우는 동안에는 날마다 쌓이는 거라. 그런데 도를 깨달으면 그걸 모두 버리게 되거든. 배워서 알게 된 것을 쌓아두고 자랑하면 그게 모두 업장業障이라, 잘못 돼 가는 거지.
한평생을 허깨비한테 홀려서
제가 이런 말씀ㅇ르 드리긴 뭣합니다만, 저 자신이 얼마나 지독한 아상에 사로잡혀 있는지 모릅니다. 누가 저를 화나게 하거나 하면, 말 그래도 전광석화처럼 그를 해코지하려는 마음이 생기거든요. 그래서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르다가 얼마 뒤에 가서야, 아이쿠 이거 내가 또 허깨비한테 홀려 허깨비 짓을 했구나, 하고 제정신이 드는 겁니다. 我라는 게, 그게 허깨비라는 것이 석가의 가르침 아닙니까? 예수님도 나를 따르고자 하는 자는 ‘자기’를 버리라고 하셨는데요. 바로 아상을 여의라는 말씀이라고 생각됩니다.
노자의 제2장은 모순의 통일을 얘기하고 있거든. 선이 계속 자기를 고집할 때에는 곧장 악이 돼버리잖나?
잡으면 놓친다
공성불이거라는 게, 그게 결국은 ‘나’를 버린다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요, 나를 버린다고 하는데 깨닫고 보면 결국 버릴 ‘나’가 없는 것 아닌가요? 처음에는 내가 나를 버리려고 애를 썼는데 깨닫고 보니 버릴 ‘나’가 없는 걸 가지고 버리려고 애를 썼구나, 그런 것 아닙니까?
#3장_그 마음을 비우고 그 배를 채우며
잘난 사람을 떠받들지 않음으로써 백성으로 하여금 다투지 않게 하라. 얻기 힘든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음으로써 백성으로 하여금 도둑질 하지 않게 하라. 욕심낼 만한 것을 보이지 않음으로써 마음을 어지럽히지 말라. 이로써, 성인의 다스림은 그 마음을 비우고 그 배을 채우며 그 뜻을 약하게 하고 그 뼈를 강하게 하며 언제나 백성으로 하여금 아는 바가 따로 없어 욕심이 없게 하고 무릇 한다는 자로 하여금 감히 나서서 일을 하지 못하게 한다. 무위로써 하면 다스려지지 않는 것이 없다.
자연에는 경쟁이라는 게 없지 않나? 그런데 인간 세상에서 잘난 것을 받들게 되면 저절로 다툼이 일어나게 마련인 거라.
가끔 무슨 경연 대회를 구경하는데요. 상당히 재미있게 보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재미있게 보는 동안에 그만 저도 모르게 세뇌를 당하고 있는 거지요. 게다가 저희 세대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온통 그런 상황 속에서 자라지 않았습니까?
하느님이 천지를 지으실 때 사람을 포함한 생물체가 살아가는 데 가장 기본으로 필요한 것일수록 흔하게 만드시고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게 아닌 것들은 드물게 만드셨거든요. 저는 그래서 금보다 쌀이 흔하고 물이 흔하고 물보다 공기가 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고 보면 가장 귀하다고 하는 다이아몬드 같은 것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데 사실은 별로 소용없는 물건이지요.(교환가치보다 사용가치를 회복해야)
그러니까 “욕심낼 만한 것을 보이지 않음으로써 마음을 어지럽히지 말라”라는 말은 무엇을 보지 말라는 게 아니라 오히려 모든 것을 제대로 보라는 그런 뜻으로 읽어야 할 게야. 제대로만 보면 어느 것을 봐도 욕심이 동할 까닭이 없거든.
흔히들 ‘무심’이라는 말을 하는데 그게 말 그대로 마음을 없앤다는 뜻은 아니지. 마음을 어떻게 없앨 수 있겠는가? 여기서 마음을 비우라는 말은, 차별심을 갖지 말라는, 또는 차별심을 갖지 말게 하라는 뜻이야. 평등심을 갖도록 하라는 말이지.
배는 거짓말을 못하거든요. 그것은 그만큼 ‘마음’이 자연에서 거리가 멀어져 있는데 ‘배’는 자연 그대로이기 때문 아닐까요? 그렇다면 “허기심하여 실기복하라”라는 말은 자연의 법도, 그 순환의 도리에 순응하는 태도로 살아가라는, 그런 뜻으로 읽어도 되겠지요?
욕심이 앞서면 억지를 부리게 되고
이치를 깨달으니 욕심이 생기지 않는다
그래 여기 이어서, “사민무지무욕하라”, 말하자면 백성으로 하여금 무지무욕하라는 건데, 여기서 ‘무지’는 아무것도 모르는 걸 말하는 게 아니라 자연에 따르는 게 그게 곧 ‘무지’라, 안다 모른다의 차원을 넘어선 경지를 이르는 말이지…학문을 한다는 게 결국 ‘知’를 쌓아가는 건데 그 쌓여진 앎을 모두 버리지 않고서는 말이지 여기서 말하는 ‘무지’의 기슭에 가서 닿을 수 없는 거라. 강을 건너려면 배가 있어야 되고…
그러니까 ‘무지무욕’이라는 말은 아는 게 없어서 욕심을 내지 않는다는 그런 단순한 말이 아니라 사물의 이치를 바로 깨달아 도의 경지에 이르러 저절로 욕심이 발동하지 않는다는 말로 풀어여 하겠네.
옳습니다. 백성을 무식한 바보로 만들어 아무것도 넘보지 못하게 하는, 그런 우민 정책을 펴라는 말은 아니겠지요.
#4장_빛을 감추어 먼지와 하나로 되고
도는 비어 있음으로 작용하여 언제나 차지 않는다. 그 깊음이여, 만물의 근원 같구나. 그 날카로움을 무디게 하여 얼클어진 것을 풀고 그 빛을 감추어 먼지와 하나로 된다. 그 깊음이여, 영원한 존재 같구나. 나는 그가 누구의 자식인 줄 모르는데, 어쩌면 하느님보다 먼저인지 모르겠다.
#5장_말이 많으면 자주 막히니
하늘과 땅은 치우친 사랑을 베풀지 않아 만물을 짚으로 만든 개처럼 여긴다. 성인은 치우친 사랑을 베풀지 않아서 백성을 짚으로 만든 개처럼 여긴다. 우주는 풀무와 같아서 비어 있음으로 다함이 없고 움직일수록 더욱 나온다. 말이 많으면 자주 막히니 차라리 그 비어 있음을 지키는 것만 같지 못하다.
공평무사한 우주
만물을 짚으로 만든 개처럼 여긴다? 천지는 사사로운 정을 품지 않는다! 자비심이 없다가 아니라 편애하지 않는다
#6장 아무리 써도 힘겹지 않다
힘을 줘서 따로 하는 일이 없으니 아무리 한들 무슨 힘이 들겠는가? 자연 그대로니까, 아무런 작위도 없고 억지를 부리지 않으니 힘들어 고단할 이유가 없지.
그러니까 덕동 골짜기에서 자연농을 하는 원식 군 얘기가 생각나는군요…자기는 왜 농사 일이 힘들다고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겁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 그러니까 자기 힘으로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면 힘들 까닭이 없다는 거예요.
#7장 천지가 영원한 까닭은
천지는 영원하다. 천지가 영원한 까닭은 그 생을 자기 것으로 삼지 않기 때문인데, 그래서 오래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런즉, 성인은 그 몸을 앞세우지 않으므로 오히려 추대를 받고 그 몸을 도외시하므로 오히려 영원히 존재한다. 성인에게는 사욕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닐까? 그런 까닭에 능히 대아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8장 가장 착한 것은 물과 같다(상선약수)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 다투지 않고 뭇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한다. 그러기에 도에 가깝다.
그렇지요. 물한테는 고유의 형태가 없지요. 모난 그릇에 담기면 모난 모양을 하고 둥근 그릇에 담기면 둥근 모양을 하고 뜨거운 곳에서는 증기가 되고 추운 곳에서는 얼음이 되고….
에고가 없는 거지. 에고가 없기 때문에 뭐냐 하면 모든 것에 도움이 되는 짓을 할 수 있단 말이야.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남에게 도움이 되는 짓을 힘들어하고 고달파해. 그래서 싫어하는 거지.
다투지 않으니 근심이 없고
#9장 차라리 그만두어라
가진 바를 자랑하는 일은 그만두는 게 옳다. 날카로움을 주장하는 것은 오래가지 못한다. 집 안에 가득한 보물을 지켜낼 수가 없다. 재물이 많고 벼슬이 높다고 교만하면 스스로 허물을 남기게 된다. 공을 이루고 이름을 얻었거든 몸을 뒤로 빼는 것이 하늘의 도다.
#10장 하늘 문을 드나들되
#11장 비어 있어서 쓸모가 있다
문을 내고 창을 뚫어 방을 만들되 거기가 비어 있어서 방을 쓸 수가 있다. 그러므로 있음은 이로움의 바탕이 되고 없음은 쓸모의 바탕이 된다.
#12장 배를 위하되 그 눈을 위하지 않는다
#13장 큰 병통을 제 몸처럼 귀하게 여기니
내게 큰 병통이 있는 까닭은 내게 몸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 내게 몸이 없다면 무슨 탈이 내게 있겠는가?
#14장 모양 없는 모양
#15장 낡지도 않고 새것을 이루지도 않고
#16장 저마다 제 뿌리로 돌아오는구나
#17장 백성이 말하기를 저절로 그리 되었다고 한다
최상의 지도자는 아무도 모른다
#18장 큰 도가 무너져 인과 의가 생겨나고
큰 도가 무너져 인과 의가 생겨나고 지혜가 존중받아 큰 거짓이 생겨나고 가족이 화목하지 못하여 효와 충이 생겨나고 나라가 어지러워 충성스런 신하가 생겨난다.
세상에서 값을 쳐주고 있는 이른바 인의나 효자니 충신이니 하는 것들이 왜 나왔느냐는, 그 까닭을 밝히는 건데, 그것들이 나오게 된 것은 큰 도가 쇠퇴했기 때문이라는 거라. 그러니까 거꾸로 사람이 도에 돌아가기만 하면 그런 것들이 죄다 쓸모없는 것들이라는 얘기지.
#19장 분별을 끊고 지식을 버리면
분별을 끊고 지식을 버리면 백성에게 백 배나 이롭다. 자선을 끊고 도를 버리면 백성이 저절로 효성과 자애를 되찾는다. 잔재주를 끊고 이익을 버리면 도적이 없어진다. 이 세가지는 겉을 꾸미는 것이 지나지 않으므로 부족하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속해야 할 곳이 있으니, 바탕의 순진함을 드러내고 타고난 본성을 지키며 자기 본위의 자기와 강한 욕심을 버리는 것이 그것이다.
#20장 나홀로 세상 사람과 달라서
사람들한테서 배우기를 그만두면 근심이 없다…나 홀로 세상 사람들과 달라서, 어머니한테 얻어먹고 자라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사람이 아니라 자연에서 배워라
나야말로 바보구나
#21장 큰 덕의 모습은 오직 도를 좇는다
#22장 굽으면 온전하다
#29장 억지로 하는 자는 실패하고
억지로 하는 자는 실패하고 움켜잡는 자는 놓친다.
#36장 거두어들이고자 하면 베풀어야 하고
거둘어들이려 하면 반드시 베풀어야 하고 장차 약하게 하려면 반드시 강하게 해야 하고 장차 무너뜨리고자 하면 반드시 세워야 하고 뺴앗고자 하면 반드시 줘야 한다. 이를 일컬어 보이지 않는 빛이라 한다. 부드럽고 약한 것이 단단하고 강한 것을 이기고 물고기는 연못을 벗어날 수 없으며 나라의 이로운 그릇은 남에게 보이면 안 된다.
#37장
고요하여 의도하는 바가 없으면 세상이 바르게 될 것이다
#38장
높은 덕을 지닌 사람은 덕을 마음에 두지 않는다. 그래서 덕이 있다. 낮은 덕을 지닌 사람은 덕을 잃지 않으려고 한다. 그래서 덕이 없다.
#43장 부드러운 것이 단단한 것을 부리고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것이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것을 부리고 형체가 따로 없는 것이 틈 없는 사이로 들어가니 나는 이런 까닭에 무위의 유익함을 한다. 말하지 않고 가르치는 것과 무위의 유익함은 세상에서 이를 따를 만한 것이 없다.
세상에 아마 줄 긋고 달리기 시합하는 생물은 인간종밖에 없을 것입니다.
서윤복씨 보스톤 마라톤 1등, 전국에서 환호가 대단했지. 그때에 김구 선생이 무슨 말을 했는고 하니, 내가 서윤복 씨의 마라톤 일등을 폄하하자는 건 아닌데 뛰는 걸로 얘기하자면 말이 사람보다 더 잘 뛴다고, 그러니까 참된 독립을 준비해야 하는 이때에 모든 것을 깊이 생각하고 착실하게 생각하자고.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지. 세상이 온통 마라톤 일등으로 미쳐 돌아가니까…
#46장 만족을 모르는 것만큼 큰 화가 없다
#47장 문 밖을 나가지 않고 천하를 안다
밖으로 남에게서 찾지 말라. 도를 밖에서 찾으려고 할수록 도에서 멀어진다.
무지무식. 모든 걸 다 아는 데 아는 바가 없다
#56장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을 하는 사람은 모른다
#60장
큰 나라를 다스리기를 작은 물고기 조리듯 하라
#63장
하지 않음으로 함을 삼고 일 없음으로 일을 삼고 맛 없음으로 맛을 삼고 크고 작고 많고 적음에 원怨을 덕德으로써 갚는다. 어려운 일을 그 쉬운 데서 꾀하고 큰 일을 작은 데서 하니 세상의 어려운 일은 반드시 쉬운 데서 비롯되고 세상의 큰 일은 작은 데서 비롯된다. 이런 까닭에 성인은 결코 큰 일을 하지 않으니 그래서 큰 일을 이루는 것이다. 쉽게 하는 승낙은 믿기 어렵고 너무 쉬우면 반드시 크게 어려우니 이러 까닭에 성인은 오히려 일을 어렵게 여기는지라, 그래서 끝내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
#67장 세 가지 보물
나에게 보물이 셋 있어서 솢ㅇ하게 지니는데 하나는 사랑이요 둘은 검소요 셋은 스스로 우쭐대며 사람들 앞에 나서지 않는 것이다. 사랑하기에 용감하고 검소하기에 넓으며 사람들 앞에 스스로 나서지 않기에 뭇 관리의 머리가 된다.
#71장 병을 병으로 알면 병을 앓지 않는다
자연 치유법을 얘기하는 어떤 분의 말을 듣자니까, 우리가 ‘무슨 병 무슨 병’ 하고 말하는 병은 병이 아니고 증세일 뿐이라고 하더군요. 예를들어 생활 환경이 나쁘고 음식이 불결하면 복통이 나는데 복통은 증세일 뿐이고 진짜 병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나쁜 환경과 불결한 음식을 개선하지 않는 그것이 진짜 병이라는 얘기입니다.
왜 유식을 드러내려고 할까요?
온 세상이 유식한 놈을 떠받들고 상을 주고 그러잖아?
그 안다고 하는 것이 사실은 제대로 아는 것도 아닌데 그런단 말씀이지요?
그래, 온 세상이 병든 거라.
깨달은 사람이라면 그에게는 유식을 자랑할 ‘자기’도 없지 않습니까?
없지.
결국은 사람이 진리를 깨닫지 못한 데서 이런 모든 병통이 생겨나는 거군요?
진리를 알면 자유롭게 된다고 예수님이 그러셨지. 병을 병으로 안다는 말은 병의 근원을 안다는 말이고 그건 곧 진리를 바로 보았다는 얘기 아니겠어?
#73장 하늘 그물은 성기어도 빠뜨리는 게 없다
억지로 하는 데 용감하면 죽고 억지로 하지 않는 데 용감하면 산다.
#76장
사람이 살아 있으면 부드럽고 약하다가 죽으면 단단하고 강해지며 만물 초목이 살아 있으면 부드럽고 연하다가 죽으면 바싹 말라 단단해진다. 그러므로 단단하고 강한 것은 죽음의 무리요 부드럽고 약한 것은 삶의 무리다. 이런 까닭에 군대가 강하면 이기지 못하고 나무가 강하면 꺽이나니 강하고 큰 것은 아래에 있고 부드럽고 약한 것은 위에 있다.
묵은 해니 새 해니 분별하지 말게
겨울 가고 봄이 오니 해가 바뀐 듯하지만
보게나 저 하늘이 달라졌는가
우리가 어리석어 꿈속에 사네
저도 병원에서 돌아오면서 집사람하고 말을 나누었습니다. 결코 무엇을 하겠노라고 미리 계획을 세우지도 말고 지난날에 대해서 후회하거나 미련을 두거나 하지도 말자고요. 그저 날마다 그날 하루의 삶을 제대로 살아가는 것에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두자고, 그렇게 얘기했습니다.(삼무곡! 소유없음, 계획없음, 판단없음)
문자 그대로 하루살이 인생을 사는 걸세.
그게 이른바 ‘종말론적 삶’이지요.
맞네. 날마다 오늘이 끝날이라는 그런 마음으로 살면 말이지, 그러면 살아가는 동안 일일시호일이라, 날이면 날마다 좋은 날인 거라.
#78
세상에 물보다 더 부드럽고 약한 게 없지만 단단하고 강한 것을 치는 데는 물을 이길 만한 것이 없다. 무엇으로도 물의 성질을 바꿔놓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고 부드러운 것이 단단한 것을 이긴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능히 그대로 하지는 못한다.
#80장 소국과민
낭비를 부추기는 세상
위에서 욕심을 부리지 않으면 백성은 저절로 소박해진다고 했지요.
그랬지. 내면으로 만족하게 되면 말이지 밖으로 무엇을 구하러 나갈 필요가 없는 거라.
사람이 눈을 위주로 해서 살지 않고 배를 중심으로 해서 살면 그렇게 되겠지요. 배는 나물국이 들어가는 고깃국이 들어가든 마찬가지니까요.
맞는 얘길세. 그래서 성인은 위복爲腹하되 불위목不爲目이라고 하지 않았나?
#81장
믿음직한 말은 아름답지 못하고 아름다운 말은 믿음직하지 못하다. 착한 사람은 말을 잘하지 못하고 말을 잘하는 사람은 착하지 못하다. 아는 사람은 아는 게 많지 않고 아는 게 많은 사람은 알지 못한다. 성인은 쌓아두지를 않는지라 있는 것으로 남을 위하되 자기는 더욱 있게 되고 있는 것으로 남에게 내어주되 자기는 더욱 많아진다. 하늘의 도는 이로움을 주되 해를 끼치지 않고 성인의 도는 하되 다투지를 않는다.
속이 없는 말일수록 겉꾸밈이 요란하지요.
말이나 사람이나 똑같으니까. 빈 수레가 소란하다는 말도 있잖어?
옳습니다. 만물 박사로 통하는 사람치고 도리를 제대로 깨우친 경우가 거의 없지요. 이것도 우리가 경험으로 다 알고 있는 얘기 아닙니까?
사람이 살아가는 데 정작 긴요한 지식은 말일세. 그건 넓이에 있지 않고 깊이에 있거든. 뭘 여러 가지 말이 알아서 제대로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게 아닌 거라. 한 가지를 알아도 깊이 알아야 그 지식이 뭐냐 하면 모든 것의 근원인 도에 가서 닿게 된단 말씀이야.
남과 더불어 다투지 않으니 마음은 늘 고요하고
사심 없이 일을 하니 꿈자리마저 한가롭다.
“무위당 장일순의 노자 이야기 | 도덕경”에 대한 2개의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