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올의 아침놀. 김용옥. 127
수탉은 강간하지 않는다. 한 닭장 안의 다른 암탉들이 생식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성교를 하지 않는다. 그런데 사람은 어린 학동을 강간한다. 요즘 한국의 정치는 강간이다. 박정희가 인혁당 사람을 죽인 것도 강간이다.
미국은 인류의 과거이지 미래가 아니다. 미국사회로부터 우리가 배울 수 있는 미래성은 거의 없다.
글을 쓰려면 피로 써라.
결국 한 나라는 국고가 비면 망한다. 조선왕조는 결국 국고가 텅 비었기 때문에 망한 것이다. 이명박 정부는 대한민국을 망하게 만들었다. 국고를 비우는 데만 총력을 기울이고 국고를 채우는 데는 아무런 창조적이고도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았다.
싸이의 성공은 오직 그가 그의 인생을 성실하게 살았기 때문이다. 싸이는 고통 속에서, 시대의 상식을 거스르며 실력을 쌓았다. 싸이는 고통과 대면하면서 정직하게 그것을 극복했기 때문에 감정이 안정되어 있고 모든 상황에 즉하여 여유가 있다.
싸이는 언어 이전의 언어로써 인간의 원초적·보펴전 공감을 자아냈다. 싸이의 ‘강남스타일’은 문명 이전의 동작, 소리, 리듬이다. 그리고 그 가사를 씹어보라. “이때다 싶으면 묵었던 머리푸는 여자, 가렸지만 웬만한 노출보다 야한 여자, 점잖아 보이지만 놀땐 노는 사나이, 근육보다 사상이 울퉁불퉁한 사나이, 뛰는 놈 그 위에 나는 놈, 나는 뭘 좀 아는 놈.” 가사에 배인 감정적인 반전의 깊이가 지구를 돌고도 남는다.
하루를 건강하게 산다는 것, 그것은 인간의 최대 문제상황이다. 매일 아침 그것을 검증할 수 있다.
희망을 갖는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희망은 존재의 최소한의 의무에 속하는 일이다.
컴퓨터게임처럼 사악한 것은 없다. 컴퓨터게임을 제조하여 돈을 버는 기업가들은 모두 악덕상인이다. 이 사회에서 용인해서는 아니 되는 악덕상인으로 규탄해야 한다.
컴퓨터게임은 혼자의 의지로 끊지를 못한다.
스스로의 의지가 정립되면 절대 타인에게 그 의지를 표명하지 말라! 스스로에게만 다짐하라! 그리고 전화번호를 바꾸고 팀들이 연락할 길을 차단시켜라!
나는 스티브 잡스를 존경하지 않는다. 그는 희대의 사기꾼이다.
그는 시대를 거스른 인물이 아니라 시대의 흐름에 누구보다 효율적으로 영합한 인물이다…그는 돈을 벌었을 뿐, 돈을 뛰어넘는 가치를 창조하지 않았다. 그는 자본의 우상일 뿐이다. 그가 혁명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오직 효율적 도안만 수행했을 뿐이다.
한국의 젊은이들이 스티브 잡스를 배워서는 아니 된다. 한국의 젊은이들은 그처럼 무無로부터 성공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그의 성공신화는 알고보면 결국 돈을 잘 번다는 것일 뿐이다.
교수 임용 조건 각서. 매우 소박한 최소한의 언어. “교수로서 사회적 발언을 자제하고, 학업에만 전념하겠습니다.”
그런데 박석무는 즉각적으로 담대하게 이야기했다. “총장님! 교수가 된다는 것, 다시 말해서 학문을 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사회적 발언을 하기 위한 것입니다. 사회적 발언이 없이 어떻게 학생을 참되게 지도할 수 있겠습니까? 조금만 제가 사회적 발언을 해도 더 부드럽게 보이는 각서의 언어를 빌미 삼아 저에게 올가미를 씌울 때 무슨 변명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서명할 수 없습니다.”
“그대가 각서를 거부한 순간이야말로 우리민족 지성사를 성스럽게 만든 한 순간으로 기억되어야 하오. 나는 당신이 자랑스럽소.”
박석무는 말한다: “내가 그렇게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은 어려서 한학의 대가였던 조부와 부친에게서 『맹자』를 배웠기 때문이오. 『맹자』의 대장부론이 박정희유신과 전두환의 흉계와 맞붙어 싸울 수 있는 정의감의 원천이 되었소.”
기억하자! 부귀불능음, 부귀도 나를 타락시키지 못한다. 빈천불능이, 빈천이 나의 지조를 바꾸지 못한다. 위무불능굴, 국가의 위세나 어떤 무력의 강함도 나를 굴복시킬 수 없다!
박석무는 말한다: “당신의 『맹자, 사람의 길』은 온국민이 읽어야 할 이 시대의 필독서지요.”
정치는 결단이다. 오직 자신의 판단의 힘으로. 정치를 한다고 또다시 세인의 판단에 자신의 판단력의 핵을 유실하면 아니 된다.
뉴스 미디어는 뉴스를 전하지 않는다. “뉴스news”란 새로운 것이며 가동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미디어는 뉴스를 전하지 않고 “편견으로 해석된 정보체계biased information”를 전한다. 이것은 우리시대의 양심이며 생성문법의 창시자. 노암 촘스키의 말이다.
언론의 또 하나의 원칙은 이것이다. “소유가 내용을 결정한다.” 언론이 자본의 횡포로부터 벗어날 길이 없는 것이다.
언론은 타인의 의식적 동의가 없이 타인의 의식과 사유를 지배하는 가장 효율적인 수단이다. “민주”, “자본주의”, “언론자유”, “평등” 이따위 단어들은 모두 언론의 프로파간다 산업이 조작한 의미부여에 의하여 성견화된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언론의 프로파간다의 베일을 넘어서 우리 자신의 진리를 발견하는 사유의 습관을 길러야 한다. 민주사회가 공산사회보다 훨씬 더 본질적으로 우리의 사유를 조작할 수도 있다.
언론은 대중의 암묵적 동의를 생산하는 공장이다. 그것을 대중을 조작하는 정부의 예술이다. 대중은 스스로 자신의 무지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신화에 사로잡혀 있다. 그리고 정부는 그러한 신화를 강화시킨다. 이상은 노암 촘스키의 말이다.
진리에로의 독려나 개념적 지식에 대한 각성을 촉구하는 나의 책은 세인들에게 끊임없이 버림을 받는다. 뜻있는 자들에게 힘을 줄지는 몰라도 뜻을 아직 세우지 못하는 자들에게 힘을 주지 못하는 것이다.
『노자』라는 텍스트 하나, 불과 5천 자밖에 안되는 텍스트이지만, 그에 대한 탐구 하나만으로도 나는 나의 생애의 모든 집념을 불사르고도 남는다.
미국의 더 이상 모든 국가의 미래가 아니다. 그 막강한 군사력 때문에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황혼의 제국일 뿐이다.
정부가 하는 모든 일은 거의 대부분이 거짓말로 포장된다. 거짓이 아닌 정부의 행위는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그것은 현재의 정치구조가 유지되는 한에 있어서는 필연적인 것이다. 미국이라는 제국이 거짓말덩어리이고, 그 미국에 의하여 사주된 이승만정권이 거짓말덩어리였고, 이승만정권의 기조를 영속시켜온 대한민국 정치의 역사는 거짓말을 아니 하고는 거의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그런 정체의 표상이었다. 한국에서 지식인으로 살아간다고 하는 그 사실 자체가 내포하는 사명감은 정부의 거짓을 폭로하고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 민주체제에 의하여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는데도 그 권리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죄악이다.
정부와 기업이 가치중립, 가치해방을 표방하는 것은 넌센스다. 그들의 가치해방은 곧 “부귀자를 위한 복지”일 뿐이다. 정부와 기업은 “도덕적”이어야만 한다. 다시 말해서 정부와 기업은 인仁해야만 한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의 정치란 곧 여민동락의 정치를 말하는 것이다.
빈천자를 위한 복지가 없이 대동大同사회는 도래하지 않는다.
자유시장경제는 사기일 뿐이다. 미국의 경제는 부정조작된다. 그것은 사기꾼들의 장난이다. 이것은 내 말이 아니라 촘스키 말이다.
미국에는 자유시장체계가 없다. 미국경제의 실제적 축을 이루는 방위산업등의 경제활동은 거의 모두 정부보조금으로 운용되는 것이다. 펜타곤이 돈을 어떻게 쓰는지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미국세제의 오묘한 구멍을 통하여 새어나가는 막대한 돈들은 미국을 지배하는 소수들의 성역 속에 감추어져 있다. 미국의 경제는 기본적으로 부자들의 독락을 위한 것이다. “독락”이란 맹자가 당대 군주들의 폭정을 비판하여 쓴 말이다. 이것은 “여민동락”과 대비된다. 미국의 자유시장체제라는 것은 미국의 해외 투자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만들어내는 신화에 불과하며, 그 신화는 무자비한 미국의 무력에 의하여 유지되어 왔다. 이것은 내 말이 아니라 인류의 양심 촘스키의 말이다.
엄마의 사랑. 그 절대적인 사랑의 느낌은 하나님의 사랑보다 더 절대적이고 구체적인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변덕스러우며 구체적이질 않다. 그런데 사람들은 엄마의 사랑만 생각하는데, 어린아이들의 엄마에 대한 사랑처럼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것이 없다…어린아이들이야말로 항상 그들의 부모를 기쁘게 해드리려고 노력하며 그에 대한 아무런 보상을 바라지 않는다. 이러한 아이들을 학대하는 인간의 잔인함을 보라!
공자…부자이면서 교만하지 않기는 쉽다. 그런데 가난하면서 원망이 없기는 어렵다는 것이다…수신의 궁극적 경지는 “불원천不怨天”이다. 하늘을 원망치 않는 것이다.
공자는 말한다. 나라에 원망이 없게 하고, 집안에 원망이 없게 하라. 이 원망을 없게 하는 방법이 공자의 황금률이다. 내가 원치 아니 하는 것을 남에게 베풀지 말라.
아침에 일어나면서 갑자기 이렇게 외쳤다. “지금 경제민주화 운운하고 있는 꼬락서니들은 모두 넌센스다!”
“경제”란 결국 아주 천박하게 이야기하자면 돈을 잘 번다는 것이다. 나는 배가 좀 고파도 경제발전을 안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노자식 반문화주의는 대중의 환영을 받을 수 없다. 대중은 잘 사는 것을 좋아한다.
등록금 1,000만원, 하숙비 한 달 40만원, 잡비, 책값, 교통비 2,500만원 이하로는 생활이 안 된다. 넉넉하게 계산하면 3,000만원이 든다고 한다. 1년에 1억의 수입이 있는 사람은 상층으로 보아야 한다. 그런데도 자식들을 대학 보내기가 만만치 않을 것이다. 분명 구조적으로 잘못된 사회임이 틀림없다.
있는 시스템을 놓고 아무리 민주화 개혁을 운운해도 별다른 성과가 나올 수 없다. 여태까지 잘못 형성된 타성을 구조적으로 뜯어고친다는 것은 불가능하거나 실효를 거둘 수 없다. 특히 경제는 어떠한 연역적 전제로써 메스를 가해고 부작용이 크게 생긴다.
생각해보라! 그토록 많은 교육제도개혁이 감행되어 왔다. 그런데 과연 뚜렷한 실효를 거둔 사례가 있는가? 그 이후에 어떤 근원적 가치론적 변화가 있었는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서울대학교라는 가치지향성의 핵을 건드리지 않고서는 어떠한 개혁을 해도 그것은 코스메틱에 불과하다. 그런데 하물며 경제는 어떠하겠는가?
“경제민주화”는 근원적으로 헛소리에 속한다. 그것은 구호에 불과할 뿐 실효를 거둘 수 없다. 혼란만 가중시킨다. 재벌횡포에 대한 법제적 제약은 당연히 필요한 것. 그러나 그것으로 한국경제의 문제가 바로잡히지는 않는다.
한국경제의 문제는 큰 틀을 새로 짜야 하고, 큰 판을 새롭게 벌여야 한다. 그 유일한 출구가 남북의 경협이다…개성공단 하나만 활성화시켜도 남한의 중소기업 숨통이 터진다.
한국경제는 남북문제의 적극적 해결 없이 출로가 없다.
암탉의 모성애. 한 우리, 한 밥통에서 새끼들이 같이 먹고 있는데 엄마는 그토록 잔인하게 자시 새끼 이외의 개체들을 쪼아버린다. 엄마는 자기 새끼만을 사랑하는 것이다.
인간의 “선善”이란 오직 “여민동락”하는 데서 발현되고 구현되는 것이다. 맹자의 성선은 존재론적 규정이 아니다. “선” 그 자체로서 고정적인 개념이 아니라 실천적 행위를 통해서만 발현되는 과정일 뿐이다.
동방인은 천지를 하나의 생명적 생태계로 파악했다. 그런데 천지의 주체는 동물 같지만 실상은 식물이다…식물을 우습게 알지만, 식물은 자기 생존의 에너지를 스스로 생산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인간이나 동물보다 훨씬 더 주체적이며 독립적이다.
내가 너무도 사랑하는 노자의 명제 중에 이런 말이 있다. “낳으면서 낳은 결과를 소유하지 않는다.生而不有.” 이 “생이불유”라는 한마디가 나는 우주의 비밀을 다 말해준다고 20세 약관의 전후에 느꼈다…역시 식물적이다. 나무는 끊임없이 새싹을 낸다. 그런데 헌 싹이 새싹이 자라나도록 도와주면서도 헌 싹이 새싹을 소유하지 않는다. 생하되 소유하지 않는 것, 이것이 나는 바른 정치의 궁극적 모델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대선이라는 정치적 과정에 나와 같은 사상가가 관여할 수 있는 여백은 거의 없다. 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은 사상가가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착각에 불과하다. 정치인들은 정치적 판도의 역학에 따라 판단을 내릴 뿐이며 나와 같은 사람의 말을 듣지 않는다. 오른쪽 귀에서 왼쪽 귀로 흘러나가 버린다.
제 환공과 최초의 테러리스트 조말, 그리고 명제상 관중
“테러리즘에도 도덕성이 있다.” 인류의 예언자이며 시대를 앞선 희대의 사가 사마천의 명언이다.
테러리즘은 근절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미국은 보복해서는 아니 된다.
인류사에서 테러리즘이 없어 본 적은 없다. 테러는 오늘 내일의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 사마천은 이 테러리즘을 선과 악의 이원록적 가치관을 가지고 접근하지 않는다. 사마천이 말하는 테러리즘에는 약자의 명분과 강자의 아량이 동시에 요구되고 있다.
과연 테러리즘에 도덕성이 전무하다고 단언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김구와 같은 테러리스트를 애국자로 존경할 수 있으며,…안중근이나 윤봉길을 의사로 추앙할 수 있겠는가?
결국 어떠한 존재가 테러리즘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그 존재가 강대하다는 단순한 사실에서 유래되는 것이다. 약소한 존재는 근본적으로 테러리즘의 대상이 되질 않는다. 그러므로 강대한 자는 강대한 자의 도道를 터득치 않으면 안 된다. 노자는 말한다.
대국은 아랫물이다. 그래서 천하의 모든 윗물이 흘러들어 오는 곳이며 천하의 모든 수컷이 꼬여드는 암컷이다.
대국은 반드시 소국 앞에 자기를 낮추어야만 그 소국을 취할 수 있다.
이것은 자연의 법칙이요, 역사의 철칙이요, 도덕의 준칙이다. 이것을 어기면 대국은 대국됨의 도를 저버리는 것이다.
성공하는 모든 테러는 조직을 최소화시키며, 동원되는 수단을 최소화시킨다는 것이다. 그리고 반드시 자기 얼굴을 반드시 없애버린다는 것이다…이번 테러리즘이 방대한 조직의 일사불란한 명령체계에 의해 감행된 사태라고 판단키가 어렵다. 실패와 누설의 가능성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우리의 급선무는 앞으로 다가올 테러리즘을 막는 일이다…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가장 명료한 일차적 판단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미국은 보복해서는 아니 된다.”
나는 테러리즘이 근절되어야 한다는 제1의 명제와 함께 미국은 보복해서는 아니 된다는 제2의 명제를 말했다. 내가 말하고 싶은 제3의 명제는 이것이다. “인생이란 참으로 허무한 것이다.”
인류애의 보편주의를 떠난 모든 애국주의는 저급한 테러리즘의 변형일 뿐이다.
미국사회의 철학의 빈곤성. 미국에는 현재 철학이 없고 예술만 있다…그러나 예술가들이란 근원적으로 인간의 현실적 삶을 엔터테인하는 사람들이요, 이벤트성의 유통구조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며, 인류역사에 대한 근원적인 책임감을 소유한 사람들이 아니다.
미국에는 사상은 있으되 사상가가 없다. 가家라는 구현체를 얻지 못한 추상적 논리체계는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서양철학은 어떤 추상적 논리의 감옥에 갇혀버린 시체와도 같은 것이다.
희랍철학은 근원적으로 전쟁철학이다. 희랍철학으로부터 출발한 서양철학이 근원적으로 오늘과 같은 사태에 대해 심도 있는 발언을 못하는 현상은 결국 실체적 사유의 구극적 한계와도 상통하는 것이다. 서양철학은 평화의 전통을 근원적으로 결여하고 있는 것이다.
불교는 기나긴 인류의 역사를 통해 대규모 전쟁의 주체가 되어 본 적이 없다. 불교는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 이슬람도 유대교전통의 변형이다. 그리고 기독교도 유대교의 지류적인 변형이다. 우리 인류는 이 헤브라이즘 전통의 실체주의·초월주의가 저질러 온 죄악을 보다 깊게 통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책은 미국문명에 대한 우리 인식의 회전을 철저하게 요구한다. 그러나 이 책은 결코 반미적인 책은 아니다.
나는 미국과의 우호가 우리 민족의 미래를 위하여 너무도 중요한 과업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호와 그 우호를 위한 우리의 세계인식의 변화는 근원적으로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