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동문학은 교육의 다른 모습(이름)이나 다름없다!
삶을 위한 문학. 사람다움, 사람답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가르쳐주고 이끌어가는 참교육의 장이다.
이오덕 씨는 우리 나라 아동문학에 있어서 가히 황무지라 할 수 있는 비평 분야에서 가장 주목할 활동을 해 오는 분이다…씨가 글에서 항상 견지하고 있는 것은 문학의 서민성 옹호 정신이며, 인생을 위한 문학에의 열의이다. -1977년 4월,이원수
지극히 당연한 말이지만 동시(동요·소년시도 포함해서)는 아동을 위해서 쓴 시다. 아동을 위해서, 혹은 아동에게 읽히기 위해서 쓴 시란, 시인 자신이 반드시 어떤 성장 과정에 있는 아이의 심리 상태가 되어 쓴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어린애의 마음이 된다는 것은 엄밀히 따지자면 있을 수 없고, 그것은 아무런 뜻이 없으며 속임수가 되기 쉽다.
동시는 어른인 시인 자신의 세계를 온몸으로(물론 아동에게 주는 시란 것을 의식할 수도 있고 전혀 의식하지 않을 수도 있다) 쓴 것이 그대로 아동에게 이해되고 받아들여지는 시로 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이러한 시가 되자면 아동의 세계(관념적인 동심이 아니라 살아가고 있는 아동의 현실 세계)에 대한 시인의 깊은 관심과 이해가 있어야 할 것은 물론이지만, 무엇보다도 시인으로서의 자각과 특질, 곧 높은 지성을 밑받침으로 한 ‘시정신‘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우리 한국의 동시는 거의 대부분이 이러한 참된 ‘시정신’의 산물이 아닌 것 같다. 유아들의 의식 상태를 재미있는 말재주를 부려 흉내낸 것을 동시라 하여 온 것 같다.(유희정신의 산물들)
누나 일 가는 광산 길에 피었다오.
찔레꽃 이파리는 맛도 있지.
배고픈 날 가만히 먹어 봤다오.-이원수·1930·신소년
윤석중…박목월…결국 감각적인 것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만 김영일의 단시가 그러하다. 그리고 이런 동심의 망령은 오늘날 대부분의 아동 작가들의 작품 세계를 완고하게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쓰게 되는 곳에 아이들의 세계를 치졸한 공상으로 만들어 내는 동심주의가 있는 것이다. 이 어린아이인 척하는 동심주의는 시의 감동을 지적 밑받침이 있는 상상에서 창조하지 않고, 환상과 공상에만 기대는 동화적인 세계에서 찾으려고 한다.
혹 어떤 이는 말한다. 아이들의 놀이는 엄연한 아이들의 생활 현실이라고, 그렇다. 놀이도 아이들의 중요한 생활이다. 그러나 젖먹이 아이라면 몰라도 문학 작품의 본격적인 독자로 되어 있는 아동들이나 소년소녀들에게 있어서는, 놀이가 결코 생활의 전부일 수 없고, 더구나 농촌 아이들에게는 그러하다.
그리고 우리 동요 시인드의 유희 세계란 것은 아이들이 놀이를 그들의 살아 있는 현실의 한 토막에서 싱싱한 모습 그대로 잡을 줄을 모르고, 잡은 것이 아니다. 정말 아이들의 놀이 생활조차 붙잡은 것이 없다.
아이들의 놀이가 아니고 시인 자신의 공상적 유희 상태를 그려 낸 것이다.
그들은 완전히 아이들과 유리된 딴 세상에서 살고 있다…어른 중심의 개인주의적이고 향락주의적인 유희정신으로 작품을 매만지고 있는 것이다.
아동을 외면한 이런 동요·동시들이 어떠한 사회적 구실을 할 것인가는 추측하기 어렵지 않다. 그것은 안일한 생활에 젖어 있는 사람들을 위한 한갓 오락물 노릇을 하는 것이다. 동시가 아동의 정신을 키워 가기 위한 양식이 되어야 하는 원래의 기능을 나타내지 못하고 해로운 독소를 숨긴 저질의 과자 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은, 이런 상품이 행세하는 사회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현상은 아동 작가들이 얼마나 지적인 허약 상태에 있는가, 철학이 빈곤한가를 잘 말해 주는 것이다.
방정환, 이원수
이러한 비뚤어진 문화의 흐름, 비문학적·비시적인 동시의 범람 속에서 치열한 시정신을 잃지 앟고 빛나는 동시를 써서 우리 민족 전체의 어린이들에게 따스한 피의 영양소를 공급해 준 시인이 있었으니, 방정환(1899~1931) 그리고 이원수의 두 이름을 우리는 자랑스럽게 들지 않을 수 없다.
방정환. 어린이를 인형으로 대한 것이 아니라 수난당한 민족의 주인공으로서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이원수. 그것은 서민적인 어린이들에 대한 깊은 이해와 사랑을 바탕으로 한 서정의 세계이다.
그는 아동이란 존재를 단순한 작품 창작의 소재나 대상으로 보지 않고, 또한 한층 내려선 자리에 있는 주체로서 파악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과 같은 자리에 있는, 아니 바로 자기 옆에 있어 함께 울고 웃으며 살아가는 동반자로서 느끼고 생각하는 것이다. 여기에 그의 문학 정신이 자리잡고 있으며, 이러한 정신이 원천이 되어 그의 동시는 아이들뿐 아니라 모든 어른등애게까지 높은 감도의 시로 읽혀지는 것이다.
만약 그의 이런 훌륭한 시로서의 가사가 없었던들 우리 아동들은 모두 어설픈 엄마 아빠 짝짜꿍의 동요 곡만 억지로 부르다가 유행가로 넘어갈 뻔하였던 것 아닐까?
우리 동시가 가지는 고질적인 유아적 유희
우리 동시가 살아날 수 있는 길은 시인의 아동 생활에 대한 넓은 이해와 접근, 유희적 제재에서의 탈피, 동심이란 고정관념의 타파, 그리고 무엇보다도 높은 시정신의 획득에서만 기대할 수 있다.
감동이 없는 동시를 생각할 수 없다. 그런데도 지금까지의 많은 동요·동시들이 감동 대신에 가벼운 웃음과 손재주를 팔아 왔다.
다음에 아동을 알지 못하고 있는 사실이다. 작품을 읽어 줄 아이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면서 살고 있는가를 알지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불성실한 태도다. 그래서 스스로의 안일한 마음속에 갇혀 장난을 일삼고 잔꾀만 부리는 것이다. 이런 창작 행위는 곧 사치 생활을 누리는 도시 일부 아이들에게 한갓 오락물을 제공하는 반면 우리 민족의 전체 아이들을 배반하는 결과가 되고 있다.
아이들은 원칙적으로 동화나 소설이나 동시를 쓸 수 없다.
개성을 펴 나갈 수 있도록 참된 생활 글짓기 교육, 아동 자신의 시(문학 작품이 아닌)를 쓸 수 있는 교육을 해야 되겠다는 것을 30년 교육의 과거가 뼈아프게 가르쳐 주고 있다.
시가 모든 문학의 핵이요 시인의 문화 창조의 가장 전위적인 위치에서 있는 영광스러운 존재라면, 동시를 쓰는 시인이야말로 위대한 예술가인 동시에 가장 참된 의미의 위대한 민족의 교사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창작과비평·1974년 겨울
그런데 그의 동시는 감각에만 머물고 있다. 감각이란 것이 세계를 인식하고 정서를 낳는 수단이 되어야 할 것인데, 이 지극히 단순한 심리 상태에 시인의 정신이 교착되어 있다는 것은 웬일인가? 그에게 정서라고 할 만한 것이 너무나 단편적이다.
그의 시에는 세계가 없다.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닫혀져서 보이지 않고, 혹은 극히 좁거나 흐릿한 안개와 꿈속의 것이어서 잡을 수도 없는 상태의 막연한 것이다.
정다운 웃음.
웃음이 피는 골목 끝에서
한 아름
밝은 해가
떠오릅니다.
이렇게 만사를 즐겁고 재미있고 반가운 것으로만 노래하고 있다. 정말이지 이것은 노래지 시는 될 수 없다. 아이들의 생활을 그 내면에서 깊이 파악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고 지극히 피상적으로 보기 좋게만 스쳐 가고 있는 이런 안이한 작시 태도는 그의 모든 작품에 나타나고 있다.
아이들이 이미 현실에서 너무나 잘 알고 체험하고 있는 사실을 모른 척하거나 덮어 버리려고 하는 것이 문학이 되고 시가 되어야 하는가? 진실을 보여 주어야 하는 아동문학의 기능이 여기서는 그 진실을 은폐하는 역기능으로 작용할 우려가 있다고 해야겠다.
아동을 떠난 동시들
이쯤 되면 동시가 아동으로부터는 말할 것도 없고 어른들로부터도 떠나 다만 언어 조립의 취미를 즐기는 동시인의 전용물로 되어 버렸다고 할밖에 없다.
허상의 동시는 시인의 언어 기교의 사치한 취미로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값싼 서정이나 토행적 심리의 표현에서도 만들어진다. 그리고, 지금의 우리 동시가 어쩌면 그 대부분이 이러한 허상으로 이뤄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거의 모두가 농촌을 소재로 하여 쓰고 있는 동시인들이 농촌의 생활과 농촌 아동의 감정은 전혀 무시하고 자신의 기분이나 손재주에만 기대고 취하자니 그럴 수밖에 없다. 그들이 얼마나 농촌 사회와 자연을 모르고, 알려고도 하지 않고, 다만 코뚜레 없는 소를 타고 피리 부는 허상에만 취하고 있는가를 좀 자세히 살펴보자.
아동이 좋아하는 작품.
소재가 친숙한 것일수록 좋다. 주제가 뚜렷해야 한다. 실컷 웃겨 줌으로써 그들에게 해방감을 맛보게 하는 작품을 좋아한다.
아동문학과 서민성
서민이란 말은 우리 말 사전에 나온 대로 “자기의 손발로 벌어서 가족의 생활을 이끌어 가는” “뭇 백성”이다.
서민문학? 근세 후기의 평민 계급의 사회적 진출과 함께 일어나 실학사상을 기반으로 한 문학…근대 문학의 출발 자체가 서민 속에 있었던 까닭. 서민을 벗어나서 근대 문학이 성립될 수 없다.
문학이라면 그것이 어떤 장르의 것이든 서민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고 서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데 어째서 새삼 서민성을 논의해야 하는가? 여기 우리 아동문학이 지금까지 그 속에 갇혀 벗어나지 못한 전근대적인 풍토가 있는 것이다.
동심주의 동요가 가져온 해독은 아이들이 참된 시의 세계로 찾아가는 것을 완고하게 방해하고 있는 일뿐만이 아니다. 그것은 또 아이들의 정신 성장을 방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의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촌-김종철(경북 안동 대곡 분교 2학년)
우리는 촌에서 마로 사노?
도시에 가서 살지.
라디오에서 노래하는 것 들으면 참 슬프다.
그런 사람들은 도시에 가서
돈도 많이 벌일 게다.
우리는 이런 데 마로 사노?(1969.10.6)
아무리 세계적인 명작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아무 비판도 없이 무조건 받아들인다는 것은 깊이 반성해야 할 일이다. 비판이란 다름 아니고 그것이 때와 곳을 달리한 전혀 다른 사회의 산물이라는 점을 이해하는 일이다.
가령 영국의 아동문학일 경우 그 자유분방한 판타지의 세계란 것은 식민지 쟁탈에 앞장섰던 시대의 영국민들이 무기와 상품을 실은 함대 위에서 꿈꾼 세계 경륜의 기상에서 비로소 그 창조가 가능했으리라는 것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고가와의 휴머니즘을 기조로 한 동화도 그가 마르크시즘과 아나키즘을 지나 침략 전쟁에 협력한 경로 등을 생각하면 결국 국가주의를 벗어나지 못한 일본 자본 사회의 반영이란 점에서만이 그의 작품의 전체 면모는 이해될 것이다.
모든 것은 상품이 되어 황금만능주의가 인간 정신을 지배하는 부박한 공기 속에서 아이들은 병들어 가고 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권총 놀이와 유행가와 욕설과 독소가 든 과자와 해골바가지 만화와 벌거벗은 어른의 나체 영화 속에서 세상을 배우고 골몰대장에게 동전을 바치는 삶의 수단을 익혀, 살아가려면 위로는 굽히고 아랫것은 짓밟고 올라서야 한다는 철학을 체득하는 것이 이 땅의 아이들이다.
이런 아이들에게 우리는 문학을 주려고 하는 것이다. ‘마음이 거칠은 아이일수록 아름다운 꿈을 보여 주어야 한다’고 하면 그럴듯한 말로 들린다…그러나 생각해 보라. 내일 당장 학교 선생님께 갖다 드려야 할 그 무엇이 없어서 걱정에 잠겨 있는 아이가 숲 속의 요정들이 춤추고 있는 세계를 꿈꾸며 좋아할 수 있겠는가…
우리 자신을 찾아 가지는 일이야말로 민족의 역사적 과제요 아동문학의 나아갈 길이다.
온갖 정화되지 못한 환경 속에서 비뚤어지면서 자라나고 있는 아이들의 앞날을 근심하는 동시인과 동시가 거의 없다는 것은 웬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