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평론 2016년 9-10월 150호.
#디지털 시대의 지혜_콜린 맥그래인
어쩌면 별로 해로울 것도 없는 퍼즐게임의 변화. 하지만 우리는 계속 진화하는 현대기술에 우리 자신을 맞춰가면서, 그런 식의 변화를 수없이 허용해오고 있다. 우리는 보통 이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것은 우리 삶에 분명히 영향을 미친다.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는 않겠지만, 이런 변화들이 모여서 우리는 때때로 산만해지고, 압박감과 늘 발동이 걸려 있는 느낌을 받게 된다. 우리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로부터 단절된 느낌, 그저 단순히 존재하는 것을 할 수 없다는 기분이 든다.
나는 현대의 기기들을 사용하는 것이, 베네딕도 수도자로서 우리 생활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최소한 세 가지 영역에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 하느님 현존에 마음 모으기, 다른 이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환대하기 그리고 공동체이다. 이글에서 나는 먼저 그런 영향에 대해 살펴본 후, 하느님께 마음을 모으고 다른 이들을 그리스도처럼 맞이하고 공동체를 사는 것이, 우리 자신뿐 아니라 우리 문화가 이런 기기들을 어떻게 더 균형 있게 사용하게 만들 수 있는지를 고찰해보려고 한다.
니콜라스 카는 자신의 책에 이렇게 썼다.
‘구글’의 이윤은 사람들이 정보를 흡입하는 속도와 직결된다. 우리가 인터넷 바다 위에서 더 빨리 서핑하면 할수록-더 자주 클릭하고 더 많이 들어가 볼수록-‘구글’은 우리에 대한 정보를 더 많이 수집하면서 광고쓰레기를 우리에게 먹일 기회를 더 많이 갖게 된다…인터넷을 클릭할 때마다 우리 집중력과 주의력은 파괴된다. ‘구글’이 벌어들이는 경제적 이익은 우리가 얼마나 자주 클릭하느냐에 달려 있다. 구글은, 말 그대로, 완전히 우리 혼을 빼놓는 사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뇌의 가소성이라는 특성을 생각할 때, 우리의 인터넷 습관은 그것을 하고 있지 않을 때에도 신경 세포에 계속 영향을 준다. 이 영향 때문에 대충 훑어보거나 한꺼번에 여러가지 일을 하게 하는 신경 회로들은 더욱 확장되고 강해지는 반면, 집중한 상태에서 글을 읽고 깊이 생각하는 데 필요한 신경 회로들은 점점 약해지면서 서서히 파괴된다고 볼 수 있다.
인터넷 활동은 집중하고 사색할 수 있는 나의 능력을 조금씩 파괴하고 있는 것 같다. 온라인에 접속하고 있든 있지 않든, 이제 내 정신은 인터넷이 배포하는 방식으로 습득하고자 한다. 즉 신속하게 흐르는 흐름 속에 있는 정보의 파편들 말이다. 한때는 언어의 바다 속에서 스쿠버다이빙을 했지만, 지금 나는 제트스키를 탄 것처럼 표면만 훑고 날아간다.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우리는 모두 인터넷의 이런 영향에 감염되어 있다. 깊이, 천천히, 신앙심 깊게 ‘거룩한 독서’를 하는 것은, 우리에게 가장 어려운 도전이고 반문화적인 일이 될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을 하지 않는다면, 개인은 물론이고 집단 전체로서 그런 능력을 잃어버릴 각오를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접속한다…이 접속은 결코 잠들지 않는다…어디에서건 접속이 되어야 한다.” 여기 사용된 부사들(끊임없이, 결코, 어디에서건)은 규칙서 7장 10~12절의 그것들과 놀라울 만큼 비슷하다.
우리는 모두 스마트폰보다 하느님께 훨씬 더 가치를 둔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행동은 우리의 말을 종종 배신한다. 우리는 첫 번째 종소리를 듣고 성무일도를 하러 가기 위해 하던 일을 멈추는 것보다, 스마트폰에 답하려고 훨씬 재빠르게 하던 일을 그만둔다, 대개 벨소리가 안 나도록 하지만 미사와 성무일도 때 휴대폰을 가지고 들어가기도 하고, 성당에서 나오기도 전에 전화가 왔는지 확인하려고 휴대폰을 먼저 꺼내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중대한 전화를 놓치지 않으려면 성당에서도 휴대폰을 진동 상태로 켜두어야 한다고, 급히 연락이 올지 모르니 ‘거룩한 독서’나 개인기도 중에도 휴대폰을 들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하루를 보내면서 짧은 기도를 하거나 ‘거룩한 독서’의 되새김 단어를 마음에 떠올리는 것보다 훨씬 더 자주 휴대폰을 확인하곤 한다.
지나친 미디어 사용. 반대로 정서적 건강의 표시는 다른 이와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할 수 있는 능력이다.
MIT 교수 셰리 터클은 “우리는 말보다 문자를 더 선호한다. 우리는 너무 바쁘게 소통하기 때문에 문제를 놓고 다른 이와 함께 생각하거나 관계할 수 없다”고 말한다…그러나 어려운 소임에 관해 아빠스나 원장 수녀와 마주 앉아 마음을 터놓고 의논하는 것과 그 문제에 관해 메일이나 문자를 주고받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예수께서 오늘 같은 디지털 시대에 당신 가르침을 업데이트하셔야 한다면 이렇게 수정하셨을지도 모르겠다. 네 형제가 너를 거슬러 죄를 짓거든 그것에 대해 그에게 이메일이나 문자를 보내지 말라. 대신 직접 그에게 가라.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 안에서 그리스도의 현존을 대하는 것은 얼굴을 마주보는 대화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공동체, 우정, 결혼생활의 결속을 튼튼하게 하는 것 또한 얼굴을 마주하는 직접적인 대화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10대들은 자신들이 놀이터에 데려다 주면서도 휴대폰으로 통화하고 메시지를 확인하는 부모에게서 성장한다. 부모들은 학교로 운정 중이거나 아이들과 디즈니 영화를 보는 중에도 계속 휴대폰에 열중하고, 10대들은 그런 부모들과 어린 시절을 보낸다. 주말에 교외에 나가서도 인터넷이 되지 않으면 서둘러 돌아온다. 10대들은 아주 일찍부터 분열된 관심 속에서 디지털 기기들과 연결된다. 그들은 부모의 관심을 두고 이런 기기들과 경쟁해야만 하고, 자신들이 충분한 관심을 받을 수 있는 세상을 꿈꾼다.
“공동체에 대한 더 포괄적인 정의가 필요하다. 진짜와 온라인 관계들 사이에 전통적인 구별들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반면 셰리 터클은 이렇게 말한다.
공동체에 대한 정의는 더 포괄적이 아니라 더 제한적이어야 할 것이다…이제 우리는 ‘페이스북’이나 가상현실은 공동체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거의 이단인 듯 비난받는 지점에 와 있다. 그러나 공동체는 실제로 가까이 있고 관심을 공유하며 실제의 결실들을 같이 나누고 공동으로 책임을 지면서 형성되는 것이다.
6세기에 쓰인 베네딕도 규칙을 지키는 공동체는 상당부분 함께 지내는 것을 기초로 한다. 그러나 세상이 확장되면서 공동체의 개념도 확대되었다. 물리적 차원은 아직 중요하다. 그러나 다른 식으로 중요하다. 이제 공동체는 종종 가상적 형태로 존재하지만, 성당에서 평생 같은 사람 옆에 않는 것만큼이나 많은 차원에서 진짜인 것이다.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같은 정신을 공유하는 것이 한때 공동 일과를 따르고, 같은 숙소에서 지내며 공동의 일을 같이 하던 것만큼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쿠바-삶과 죽음에 대해서_폴 스트리트(김종철)
쿠바에서 기른 식품의 대다수는 화학물질 없이 생산된다…오늘날 쿠바의 농업협동조합들은 쿠바의 농산물 80%를 공급하고 있고, 쿠바의 도시농업 시스템은 세계적인 모범이다. 농업협동조합들의 성공을 기반으로 쿠바는 더 많은 협동조합, 즉 정의롭고 민중 중심적인 경제를 건설하기 위한 새로운 걸음을 용감하게 내딛고 있다.
이 주목할 만한 성취는, 화석연료에 중독되어 있는 자본주의체제가 생태적 붕괴라는 임박한 위기 상황에 처해 있는 시대에, 결코 의미가 작지 않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한 우연적 산물이 아니다. 그것은 연료와 통화의 부족 문제를 떠나서, 쿠바가 대안적인 연료, 기술과 관행들을 이용하고 발전시키는 데 매우 창조적인 생태-사회주의적인 혁신을 이룩했다는 것을 가리킨다…리치는 지난 20년간 쿠바는 보다 참여적인 시스템을 향하여 움직였고, 그 시스템은 또한 환경적으로 지속가능하고 건강한, 생태순환적인 경제학의 우수한 모델이 되었다고 썼다.
사회주의, 지속가능성의 토대.
두 번째 중요한 점은, 쿠바의 성공이 단지 사적 이윤보다 공적 복지를 중시하는 데서 연유했을 뿐만 아니라 이미 반세기 전에 자본주의, 즉 이윤지상주의 시스템을 버렸기 때문이라는 매우 기본적인 사실이다. 쿠바의 유기농 전문가 로베르토 페레스는 “쿠바혁명이 이 나라의 자원, 특히 토지와 광물에 대한 주권을 획득했을 때” 이미 환경적으로 지속가능한 사회의 토대가 형성되었다고 개리 리치에게 말했다. 페레스의 설명에 의하면,
“만약에 우리의 자원들이 외국이나 사적 소유자들의 손아귀에 장악돼 있다면 우리의 지속가능성이라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습니다. 미처 알지도 못한 채 우리는 지속가능성의 토대를 만들어냈던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포인트이다. 작년에 뉴욕시에 기반을 두고 활동하고 있는 맑스주의 작가 루이스 프로옉트가 지적한 바와 같다. ”인간과 자연이 살아남으려면 자본주의와 자본주의 정치가 극복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가 이윤동기를 일단 제가할 수 있다면, 그때 인간역사에서 최초로 자연자원들을 합리적으로 사용하는 길을 열릴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그러한 자원들을 이용할 것인지는 분기별 이익에 대한 고려가 아니라 합리적인 사고에 의해서 자연히 정해질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절멸’까지는 아니더라도 야만주의로 떨어져버릴 것이다.”
상위 1%가 하위 90%보다 많은 재산을 소유하고 있는 나라…텔레비전으로 대학 농구 시합의 마지막 3분을 보는 데도 10분에 걸쳐 쏟아지는 상업광고의 폭격을 받아야만 하는 나라.
이런 미국이, 쿠바인 혹은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민주주의와 자유와 품위 있는 사회를 어떻게 경험하고 유지할지에 대해서 알려주겠다고? 농담이겠지.
오바마. 쿠바인들이 미국식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경제 속에서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서 그는 ‘과거의 이념투쟁’을 버리고 갈 생각이 없는 것이다. 그는 단지 전력을 바꿨을 뿐이다.
우리는 잘못 생각해서는 안된다…내가 며칠 전 ‘페이스북’에 썼듯이, “만약 오바마의 뜻이 관철된다면, 쿠바는 20년 내에 상업화된 소외 현상과 생태적 파괴로 썩어가는 구덩이로 변할 것이다. “ 쿠바의 물, 땅, 공기, 식품이 유독성 화학물질로 오염되는 것과 함께, 비만, 당뇨병, 우울증이 창궐하고 불평등한 현상, 대량 감금, 기업에 의한 의료시스템의 장악, 그리고 끊임없는 상품광고가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점령해버릴 것이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자.
1년 전 방문했던 쿠바. 가장 전강하고. 행복하고, 활기차고, 사람들이 가장 소외감을 덜 느끼고, 사교적으로 살고 있는 나라였다. 쿠바는 다양한 수준에서 ‘생명이 넘쳐흐르는’ 곳이다. 미국으로 돌아오자 나는 적대감과 소외감으로 가득한 차가운 물을 뒤집어쓴 기분이었다. 미국은 일부를 위한 물질적 풍요와 다수를 위한 물질적 궁핍이 나란히 존재하는 극단적인 격차사회이다. 게다가 부자와 가난한 사람을 가리지 않고 정신적으로 황폐화되어 있는 사회이다. 쿠바와 대조적으로, 미국은 내게 ‘죽음이 넘쳐흐르는’ 곳으로 보였다. 이것은 지나친 말일지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우리 미국인들과 월스트리트에 충직한 대통령에게는, 쿠바인들더러 어떻게 살고 어떻게 사회를 조직해야 할지 충고해줄 게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미국은 미래가 아니다)
#’이공계 뇌’가 세상을 살린다?_천규석
진정한 유기농은 비료와 농약에 이어 유전자조작기술까지 독점한 다국적 초거대자본의 농업 독덤에 저항하는 소농들의 자급·자주 농업이다. 농촌에서 농사만으로도 인간답게 사는 소농 두레(연합)를 통해 자본으로부터 정치·경제·문화적으로 독립하고자 하는 자급자치 해방선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