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사회. 울리히 벡. p359
이 위험 가득한 풍요의 시대에!
세계보건기구가 홍역의 완전박멸을 선언하는 그 순간, 에즈볼라니 광우병이니 O-157이니 하는 신종 병역들이 화려한게 등단하여 그 같은 선언을 무색하게 만든다. 근대화의 길을 숨가쁘게 달려와 이제 ‘풍요사회’를 이루었다고 자축하는 순간, 마른 목을 축일 한 바가지의 맑은 물조차 남아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경악하게 된다. 전기문명에 도취하고 화려한 소비문화에 빠져드는 순간, 이 같은 토취와 탐닉을 위해 자칫 인류를 종말로 몰아갈 수도 있는 핵발전소들이 도처에 건설된다.
녹색혁명? 인류는 녹색혁명을 통해 엄청난 식량증산을 이룩한 반면, 수십억 년의 장구한 세월을 통해 이루어진 생물종의 다양성을 순식간에 붕괴시키고 말았다. 그 결과 다름 아닌 바로 인류의 생존 자체가 생태위기라는 새로운 ‘인위적’ 장벽에 부딛히게 되었다.
#문명의 화산 위에서 살아가기
두려움을 갖게 되는 파괴력
배설물이 쌓인 중세의 파리 거리? 당시의 위해들은 코나 눈을 공격하기 때문에 분명히 감지될 수 있었다. 반면에 오늘날의 문명이 낳은 위험들은 분명히 인지되지 않으며 (식료품에 포함된 유독물질이나 핵 위협 같이) 물리-화학적 공식의 영역에 자리 잡고 있다.(보이지 않는 위험)
산림파괴에 관한 논의에서 분명하게 나타나듯이 사회적으로 인정된 위험은 특이한 정치적 폭발력을 지니고 있다. 이제까지 비정치적인 것으로 여겨지던 것이 정치적으로 된다. (위험은 사회-경제-정치적 결과들)
평균의 함정? 평균적으로 위험하지 않다? 두 사람이 2개의 사과를 가지고 있다. 한 사람이 2개를 다 먹는다. 따라서 두 사람은 평균 1개의 사과를 먹은 셈이다. 지구적 차원에서 음식물의 분배로 옮겨보자면 ‘평균상으로는‘ 세계 모든 사람이 식량을 충분히 섭취하고 있다!
평균적인 노출은 모든 사람들이 실질적으로 노출되어 있음을 뜻한다
과학적 안전성? 핵발전소의 안전에 관한 연구들은 발생가능한 사고에 기초하여 특정한 수량화할 수 있는 위험들의 평가로 제한되고 있다. 위해의 차원들은 처음부터 기술적 관리가능성으로 한정된다(측정될 수 없는 위험, 위험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건)
빈곤은 위계적이지만 스모그는 민주적이다! 위험은 지구화 경향을 내장하고 있다.
새로운 국제적 불평등? 선진국의 위험물질 회피, 화학공장들의 제3세계 해외 이전
부인된 위험은 특히 빨리 그리고 잘 자란다..위험사회의 사회적 비가시성은 위험사회의 비실제성을 증명하지 않는다.
#위험사회의 지식의 정치
사람들에 대한 실험이 행해지지만 막상 마치 행해지지 않는 것처럼 진행된다. 더 정확히 말해서 그 실험은 연구용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소량씩 물질을 사람들에게 공급함으로써 행해진다. 사람들의 반응이 체계적으로 조사되거나 기록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라면 실험은 행해지지 않는다.
20세기 말의 자연과 사회
논의를 요약하자면, 자연과 사회의 대립은 끝났다! 이 말은 자연은 더 이상 사회의 외부로, 또는 사회가 자연의 외부로 이해될 수 없다는 것이다.
사회적-역사적 전망에서 검토할 때 우리는 발전된 나라들의 사회 불평등 구조가 놀랄 만한 안정성을 보여준다는 것을 알게 된다…지위에 기반한 계급구분이 그 정통적 지지력을 상실했고, 생활양식과 생활방식의 ‘다양화’와 개인주의화 과정이 작동하게 되었다…사회계층연구가 거의 깨닫지 못한 사링이지만 지난 30년 사이에 불평등의 의미는 변했다.
임노동과 직업은 산업시대에 생계의 축이 되었다.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 직업으로서의 신분? 직업은 서로의 신분을 확인할 수 있는 장치로 사용되며, 이를 통해 우리는 각자가 경제적 및 사회적 위치와 함께 욕구와 능력을 평가할 수 있다. 기이하게도 그 또는 그녀가 가진 직업과 그 사람을 동일시하는 것이다. 삶이 직업의 줄에 따라 흔들리는 사회
사회보호체제를 확장하지 않는다면, 빈곤이 미래를 위협할 우려가 있다. 모든 사람에게 최소수입을 법적으로 보장해 준다면, 그 발전을 통해 약간의 자유를 힘들게나마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위험의 이중화된, 구성된 실재는 그 원인의 객관적 분석을 정치화한다
이차적 조건들을 평가할수 있는 가능성은 성찰적 근대화와 함께 계산가능성-계산불가능성의 개념 자체가 변한다는 것을 알때에 비로소 시야에 들어온다.
#정치적인 것의 개막
이전의 모든 시기와는 대조적으로 위험사회의 특징은 본질적으로 결핍에 있다. 즉 위해의 원인을 외부로 돌리기가 불가능하다. 달리 말하자면 위험은 결정에 달여 있다. 즉 위험은 산업적으로 생산되며 이런 의미에서 정치적으로 성찰적이다.(위험은 필연이 아닌 선택!)
진보라는 근대적 종교는, 그것이 아무리 모순적일지언정, 한 시대를 풍미했으며 그 약속들의 실현을 막는 조건들이 발생하는 곳에서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그 조건들이란 정치적 논쟁을 규정하는 생생한 물질적 빈곤, 저발전된 생산력, 계급에 기반한 불평등 등이다.
비판은 분명 진보를 의미한다? 의학이 의학을 반대하고, 핵물리학자들이 핵물리학을 반대하고, 인간 유전공학이 인간 유전공학에 반대하고, 정보기술이 정보기술에 반대할 때에만, 외부 세계가 시험관 속에서 양조되고 있는 미래를 알 수 있고 평가할 수 있다. 형태가 어떻든지 간에 자기비판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어떤 종류의 위난이 아니라, 조만간 이 세계를 파괴할지도 모르는 잘못을 미리 찾아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일 것이다…만일 사람들이 자신들이 힘을 다하는 것들에 대한 전문의견의 노예로 만드는 규제들이 줄어든다면, 많은 것을 획득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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