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큰 집. 구본준. p278
다른 문화 장르에는 없고 건축에만 있는 것. 바로 ‘공공건축’. ‘우리 집’ 말도도 ‘우리 모두의 집’이 있습니다.
건축은 태생적으로 ‘공공적’인 분야입니다. 공공을 위한 건축만이 아니라 개인을 위한 건물들도 땅에 뿌리박아 풍경이 된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공공성을 지닙니다. 모든 건축은 소유자나 이용자만이 아니라 그 건물을 보게 되는 사람들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내 집이 아닌 집과도 교감을 하게 됩니다. 골목에 있는 예쁜 집 하나가 마음에 들어 다른 길을 제쳐두고 그 집이 있는 길로 다닐 수도 있고, 반대로 어떤 건물이 너무나 보기 싫어 그 길을 피해 다닐 수도 있습니다. 좋은 건물이든, 나쁜 건물이든 모든 건물은 한번 지으면 최소 수십 년, 길게는 수백 년을 존재합니다. 그래서 건축은 본질적으로 공공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핫셉수트 장제전.
고대 건축이 아니라 현대 건축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세련된 모습. 현대 건축가가 디자인한 모던한 미술관으로 보일 정도입니다. 극도로 단순하면서도 힘이 넘치고, 절제된 디자인이 뿜어내는 우아함이 우러나기에 이 건물의 디자인은 높이 평가받고 있습니다. 어떤 건축사학자도 하셉수트의 장제전을 뛰어넘은 건물 디자인은 여전히 없다고 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건물이란 얼마나 단순한가요?
자세히 볼 필요조차 없습니다. 이 건물은 그저 네모난 돌기둥을 줄줄이 세웠을 뿐. 아무런 장식도 없이 수직 기둥을 수평으로 늘어놓았습니다. 이런 줄기둥 디자인만으로 이뤄진 긴 건물을 한 층이 아니라 3층으로 쌓아 지은 것이 전부입니다.
이 건물이 지어진 것은 지금으로부터 무려 3,500년 전. 줄기둥을 세워 아주 길게 짓는 건물 디자인이 얼마나 오랜 역사를 지니는지 보여줍니다.
파르테논 신전, 서양 건축의 고전이 되다
서양 문화의 정수인 그리스 건축. 그 그리스 건축의 핵심인 도리아식 기둥은 놀라운 공간감을 만들어내며 방문객을 압도합니다.
46 기둥 네 개를 박고 벽을 치면 네모난 방 하나, 이게 한 칸.
가장 작은 집은 초가삼간. 방 한 칸, 마루 한 칸, 부엌 한 칸.
52 종묘는 디자인이 아주 단순합니다…그런데 오히려 이런 단순함이 지니는 힘 덕분에 종묘는 더 압도적입이다.
56 “정말 아름답지 않은가. 아름다운 것은 말로 설명할 수 없다. 마치 아름다운 여성이 왜 아름다운지 이유를 대기 어려운 것처럼. 이곳에 들어서는 순간 누구나 그것을 느낄 텐데.”
그는 종묘처럼 장엄한 공간은 어디서도 찾기 힘들다며 비슷한 느낌을 주는 건축은 아마도 파르테논 신전 정도뿐일 것이라 말했습니다.
그리고 종묘 정전 건축의 단순명쾌한 형태에 대해선 “재미있는 것은 이것은 미니멀리즘이 아니라는 것”이라고 평했습니다. 간결하고 강력하지만 미니멀리즘이 아니라고 그는 분석했습니다.
“간단한 것은 미니멀리즘이라고 많은 사람이 오해하는데. 미니멀리즘은 감정을 배제한 것이다. 하지만 종묘는 살아 있는 느낌이 든다. 당시 이것을 만든 사람들의 감성과 열정이 느껴지지 않는가.”-프랭크 게리
63 조선의 임금들의 이름. 정명사상. 실체에 맞는 이름을 붙이는 것. 이름은 그 본질과 맞아떨어져야 하며, 이름과 실체가 다른 것은 바로잡아야 한다고 공자는 역설했습니다. 그러니 이름을 짓는 행위는 한 인간을, 인간이라는 소우주를, 그 우주에 담긴 본질을 규정하고 규명하는 신성한 행위였던 것입니다.
66 보는 사람을 빨아들이듯 사로 잡는 종묘의 매력은 이렇게 다른 건물과는 달리 철저하게 치장을 배제한 단순함, 그리고 다른 건물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긴 길이에서 나옵니다.
79 종묘의 문화적 가치는 이런 특별함에 있습니다. 그 특별함은 독창적이면서 유일무이한 것입니다.
문화는 ‘No. 1’이 아니라 ‘Only 1’이 가치를 지닙니다. 그래서 문화에서 서로 다른 것들을 한 가지 기준으로 단순 비교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건축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라마다 건물을 짓는 방식이 다르고, 재료가 다르고, 더 근본적으로는 건축 철학이 다른데 어떤 건물이 더 크고 높은가를 따지는 것이야말로 비문화적이고 비건축적인 접근입니다.
곧 건물의 규모나 높이가 중요한 게 아니라 건축물에 담기는 생각이 특별할 때 의미가 생겨납니다. 위대한 건축은 규모로 따지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특별하고 독창적인 생각을 담고 있는 건물인 것입니다.
67 종묘에는 국가적인 상징으로 만들기 위해 길이를 강조한 동서양의 유명 건축물들과 비교되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뜻밖에도 원래부터 긴 건축물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종묘는 조금씩, 계속해서 길어진 건물입니다. 마치 생물처럼 건물이 자라나 계속 커졌습니다. 비유가 아니라 정말 건물이 성장했습니다.
96 일본의 독창적인 신성 건축, 이세 신궁
20년마다 새로 짓는 언제나 새 건물? 20년마다 새로 지으면 언제나 목수들이 방법을 확실히 전수할 수 있습니다. 후배 목수가 선배 목수와 함께 건물을 지으면서 따라 배우고, 다시 20년 뒤에는 후배가 선배가 되어 새로운 후배에게 방법을 전수합니다.
가장 신성한 건물의 영원해야 할 디자인이 변하지 않고 지속되는 방법을 찾아낸 것입니다.
영원성에 대한 놀라운 역발상.
103 “완고한 서양 건축가들은 그들의 삶이 비록 짧을지라도 돌로 완성한 작품은 영원하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일본의 목재 건축가들은 그런 논리에 속지 않았다. 오히려 이세 신궁에서 그들은, 예술의 생애는 짧더라도 예술 창조자는 영원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104 이세 신궁은 시간과 경쟁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시간에 항복함으로써 시간을 정복한 건물로 불립니다.
109 건축과 영화는 ‘남의 돈으로 하는 예술’. 결국 건축물의 완성도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조건은 ‘건축주’입니다. 건축가는 건축주가 원치 않는 디자인, 원치 않는 건물을 지을 수 없습니다.
117 프랑스의 자존심을 세운 대통령의 야심. ‘그랑 프로제’
루브르 박물관 앞 유리 피라미드, 파리의 신도시인 라데팡스의 상징 그랑드 아르슈,…미테랑 대통령의 그랑 프로제의 성공은 세계 주요 도시들에 건축 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 결과 부작용도 심각합니다.
이처럼 정치는 건축을 늘 대중의 관심을 사로잡는 무기로 써왔습니다. 이는 현대만의 일이 아닙니다. 지배자의 권력이 현대 정치인보다 훨씬 센 왕조시대에는 더욱 심했습니다.
131 거대 건축을 향한 욕망의 대가. 인류 역사를 보면 거대 건축이나 토목 공사에 집착한 왕조는 거의 예외없이 짧게 존재하다 사라지고 맙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한 결과입니다. 그래서 궁전 건축은 늘 소프트웨어나 내용이 없는 하드웨어의 허망함을 보여주는 교과서가 됩니다.
160 경복궁의 진면목? 이런 사실을 대중은 제대로 알지 못했고, 그래서 경복궁은 작은 궁궐로 오해를 받습니다. 직접 경복궁을 가본 사람들은 더욱 오해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일제가 훼손한 부분이 많았고, 이렇게 변형된 탓에 경복궁을 돌아보는 동선도 원래와 다르게 축소되었기 때문입니다.
260 가장 오래된 건물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 그 이유는 실은 아주 단순합니다. 봉정사와 난촨스 모두 건물이 뛰어나지 않아서였습니다. 정확히 말해서는 시골구석에 처박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262 건축적으로 대단하지 않은 평범한 건축이란 점이 오히려 생명력을 길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두 건물의 예상 못한 운명은 흥미롭습니다. 이렇게 살아남아 700년, 1,000년 세월이 담기면서 두 건물은 절로 아름다워졌습니다. 세월이 밴 건축처럼 그윽한 것은 없으니까요.(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
268 건축은 크기와 세월로만 따질 수 없습니다. 그 안에 담긴 문화적 가치, 곧 고유한 생각이 건물의 가치를 결정짓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지금 북한과 똑같은 짓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에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축이 들어서야 국력을 보여줄 수 있다고 주장하는 바보 같은 지방자치단체장이 수두룩합니다. 건축을 이용해 자기를 돋보이려는 헛소리인데, 사람들은 종종 현혹됩니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 우리를 속이는 건축의 힘에 우리는 빠져들기 쉽습니다.
267 ‘자금성보다 큰 기와지붕집’? 독립기념관.
반란을 일으켜 불법으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정권이 건축으로 정권 이미지를 높여보겠다고 추진한 독립기념관. 동양 최대에 환장하는 한국의 건축 문화를 가장 잘 드러낸 건물입니다.
건축이 주는 정치치적 목적만으로 크기에 집착해 의마와 가치를 추구해야 할 건축의 본질을 벗어난 건물이었기에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건물이 되어버렸습니다.
273 소년의 꿈이 담긴 느티나무. 독립기념 겨레의 집을 보면 한숨과 아쉬움, 그래서 바로 옆에 있는 나무 한 그루를 보러 가곤 합니다.
허황된 랜드마크를 짓기보다는 차라리 나무 한 그루를 심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언제쯤 문화를 이해하는 정치인을 볼 수 있을까. 이 나무를 볼때마다 그 착찹한 생각이 되풀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