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수영 전집2-산문. 636쪽
문체는 곧 사람이다. 문장은 그의 삶이다.
Style is the man hiself. – Buffon(조르쥬 뷔퐁)
글은 사람이다. 문체란 그 사람의 사고방식 그 자체이다.
‘자유’ 시인 김수영을 오롯이 만나볼 수 있는 글들.
일상과 생각, 삶이 그대로 담긴 글, 자서전보다 더 진한 삶의 향기를 담은 시인의 글.

김수영의 시적 주제는 자유이다. 그것은 그의 초기 시편에서부터 그가 죽기 직전에 발표된 시들에 이르기까지 그의 끈질긴 탐구 대상을 이룬다…그의 시가 노래한다고 쓰는 것은 옳지 않다. 그는 절규한다! – 김현/문학평론가
여하튼 시작 15년간에, 그것도 두 달 사이에 세 편의 시를 퇴짜를 맞아본 일은 이번이 처음이다…아무튼 정치 하는 놈들이 살인귀나 강도 같이 보이는 나의 편심증은 아직 손톱눈만큼도 치유될 기세가 없으니 초조하기만 하다. 1960.8.22
5만 환 내외의 공사에 허가비용이 2만 5천 환!참 좋은 세상이다. 할 대로 해보라지. 1961.4.3

장난감.
타고르의 이런 시를 읽으면 한참 동안 눈이 시리고 마음이 따뜻해진다. 이런 쉬운 말로 이런 고운 시를 쓸 수 있으니, 이런 쉬운 말로 이런 심오한 경고를 할 수 있으니, 사회비평이나 문명비평도 좀더 이렇게 따뜻하게 하고 싶다.
모기와 개미.
지식인이라는 것은 인류의 문제를 자기의 문제처럼 생각하고, 인류의 고민을 자기의 고민처럼 고민하는 사람이다…우리나라에 지식인이 없지는 않은데 그 존재가 지극히 미미하다. 지식인의 존재가 미미하다는 것은 그들의 발언이 민중의 귀에 닿지 않는 다는 말이다. 닿는다 해도 기껏 모기소리 정도로 들릴까 말까 하다는 것이다.
생활의 극복-담뱃갑의 메모.
대체로 시의 경험이 낮은 시기에는 , 우리들은 시를 <찾으려고> 몸부림을 치는 수가 많으나, 시의 어느 정도의 훈련과 지혜를 갖게 되면, 시를 <기다리는> 자세로 성숙해 간다는 나의 체험이…
마리서사.
아주 새로운 것이 아주 낡은 것과 통하는 것일까. 적어도 복쌍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는 내가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문제의 해답을 낼 수 있을 만큼 낡아진 것 같다….우리는 아직도 문학 이전에 있다.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 열 개.
<언어는 최고의 상상이다>결국 이렇게 따지고 보면 순수한 우리말은 소생하는 말보다는 없어져 가는 말이 더 많다.그러면 진정한 아름다운 우리말의 낱말은? 진정한 시의 테두리 속에서 살아 있는 낱말들이다…언어에 있어서 더 큰 주는 시다. 언어는 원래가 최고의 상상력이지만 언어가 이 주권을 잃을 때는 시가 나서서 그 시대의 언어의 주권을 회수해 주어야 한다.
시여 침을 뱉어라.
시작(시를 쓴다)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제 정신을 갖고 사는 사람은 없는가?
나는 이 제목을, 제 시를 쓸 수 있는 사람은 없는가로 바꾸어 생각해 보아도 좋을 것 깉다…간단히 말해서 정의와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고 인류의 운명에 적극 관심을 가진, 이 시대의 지성을 갖춘 시정신의 새로운 육성을 발할 수 있는 사람을 오늘날 우리 사회가 요청하는 <시인다운 시인>이라고 생각하면서, 한번 생각해 볼 때 내가 본 전망은 매우 희망적이다.
로터리 꽃의 노이로제.
나는 그들의 시에 대한 불만의 비상구를 생각해 보았다….시의 임무를 다하지 못한 죄, 6•8사태에 성명서 하나 못 내놓고 있는 죄,…누구나 다 아는 일이지만, 오늘날의 텔레비젼의 프로의 해독이 너무 지독하다…야간통행금지 시간을 철폐하겠다는 포부 정도라도 똑똑히 말할 수 있는 입후보자가, 그렇게 공허한 무수한 낱말을 대량 소모하고 떠들어댄 두 차례의 선거에서 단 한 명이라도 있었는지 모르겠다…나비와 벌이 오지 않는 꽃은 죽은 꽃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을 말살하는 정치 기구가 아무리 방대하고 근대화하고 세련된들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이런 식의 <근대화>는 그 완성이 즉 자멸이다.
지식인의 사회참여.
외국에 다녀온 친구들이 항용 하는 말이 우리나라에는 논설이나 회화에 있어서 <주장>만 있지 <설득>이 없는 것이 탈이라는 것이다…이런 현상은 으레 문화의 기반이 약하고, 정치적으로는 노상 독재의 위협에 떨고 있는 사회에 수반되는 현상이다.
실험적인 문학과 정치적 자유.
프랑스의 앙티로망의 작가인 뷔토르도 말했듯이, 모든 실험적인 문학은 필연적으로는 왼전한 세계의 구현을 목표로 하는 진보의 편에 서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모든 전위문학은 불온하다. 그리고 모든 살아 있늗 문화는 본질적으로 불온한 것이다.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문화의 본질이 꿈을 추구하는 것이고 불가능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대교체의 연수표.
스타일도 현대적이고 말솜씨도 그럴듯한데 가장 중요한 생명이 없다.
생활현실과 시.
요컨대 그의 매력은 계산을 무시한 매력이었다.
불온성에 관한 비과학적인 억측.
베토벤이 그랬고, 소크라테스가 그랬고, 세잔이 그랬고, 고흐가 그랬고, 키에르케고르가 그랬고, 마르크스가 그랬고,…이러한 불온성은 예술과 문화의 원동력이 되는 것이고 인류의 문화사와 예술사가 바로 이 불온의 수난의 역사가 되는 것이다. 이런 간단한 문화의 이치를 이어령 씨 같은 평론가가 모를 리 없다고 생각된다.
시인의 정신은 미지(未知).
어제의 시나 오늘의 시는 그에게 문제가 안 된다. 그의 모든 관심은 내일의 시에 있다. 그런데 이 내일의 시는 미지다.
신비주의와 민족주의의 시인 예이츠.
흔히 예이츠를 가리켜 20세기 전반의 <가장 위대한 시인>이라 하고, T.S 엘리엇을 <가장 중요한 시인>이라고 한다…한 시인의 최후의 작품이 최우수작품이었다는 예는 문학사에서 예이츠 이외에는 찾아보기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