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처럼. 신영복. p307
시대를 정직하게 품었던 스승, 신영복의 아름다운 사색
한 사람의 일생을 평가하는 데 여러 가지 기준이 있을 거예요. 그 사람이 세속적 가치에서 얼마나 뭘 이뤄냈느냐도 중요하지만, 그 사람의 인생에 시대가 얼마나 들어와 있는가도 참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 시대를 정직하게 호흡하고, 시대의 아픔과 함께하는 삶, 아픔을 외면하지 않는 삶이 가치 있는 삶이 아닐까…그런 생각이 드네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길게 보면서,
먼 길을 함께 걸었으면 합니다.
저도 그 길에 동행할 것을 약속드리지요.”
– 신영복의 마지막 인터뷰에서
언어의 관념성과 경직성이 그림으로 하여 조금은 구체화되고 정감적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더구나 절삭된 글 특유의 빈 곳을 그림이나 글씨가 조금이나마 채워 줌으로써 그 긴 여정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다시 발에 이르는 긴 여정의 새로운 시작이 되기를 바랍니다. ‘발’은 삶의 현장이면, 땅이며, 숲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지향해야 하는 여정이란 결국 개인으로서의 완성을 넘어 숲으로 가는 여정이기 때문입니다.
#꿈
우리는 새로운 꿈을 설계하기 전에 먼저 모든 종류의 꿈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꿈보다 깸이 먼저입니다.
꿈은 꾸어노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디서, 누구한테서 꾸어올 것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꿈과 동시에 갚을 준비를 시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깸은 여럿이 함께 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집단적 몽유는 집단적 각성에 의해서만 깨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수水
물은 낮은 곳으로 흘러서 바다가 됩니다
최고의 선은 물과 같습니다. 첫째, 만물을 이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모든 사람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자신을 두기 때문입니다. 셋째, 다투지 않기 때문입니다. 산이 가로막으면 돌아갑니다. 분지를 만나면 그 빈 곳을 가득 채운 다음 나아갑니다. 마음을 비우고 때가 무르익어야 움직입니다. 결코 무리하게 하는 법이 없기 때문에 허물이 없습니다.
#진선진미
목표의 올바름을 선이라고 하고 그 목표에 이르는 과정의 올바름을 미라 합니다. 목표와 과정이 올바른 때를 일컬어 진선진미(盡善盡美)라 합니다. 목표가 바르지 않고 그 과정이 바를 수가 없으며, 반대로 그 과정이 바르지 않고 그 목표가 바르지 못합니다. 목표와 과정은 하나입니다.
#목공귀재
어는 목공의 귀재가 나무로 새를 깍아 하늘에 날렸는데 사흘이 지나도 내려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뛰어난 솜씨가 생활에 보태는 도움이 있어서는 수레바퀴를 짜는 평범한 목수를 따르지 못합니다.
#샘터찬물
어지러운 꿈을 헹구어 새벽 밝은 정신을 깨우는 맑고 차가운 샘이 있어야 합니다. 가까운 곳에 두고 자주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를 잠재우는 수많은 최면의 문화가 곳곳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픔과 기쁨의 교직
우리는 아픔과 기쁨으로 뜨개질한 의복을 입고 저마다의 인생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환희와 비탄, 빛과 그림자 이 둘을 동시에 승인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정면에서 직시하는 용기이고 지혜입니다.
#높은 곳
높은 곳에서 일할 때의 어려움은 무엇보다도 글씨가 바른지 비뚤어졌는지 알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부지런히 물어보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저마다 진실
섬사람에게 해는 바다에서 떠서 바다로 지며, 산골사람에게 해는 산봉우리에서 떠서 산봉우리로 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섬사람과 산골사람이 서로를 설득할 수 없는 확고한 ‘사실’이 됩니다. 지구의 자전을 아는 사람은 이를 어리석다고 하지만 바다와 산에서 뜨지 않는 해는 없습니다. 있다면 그곳은 머릿속일 뿐입니다. 바다와 산이라는 현장은 존중되어야 합니다. 현장에 튼튼히 발 딛고 있는 그 생각의 확실함이 곧 저마다의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이유
자유는 자기의 이유로 걸어가는 것입니다.
#일몰
오늘 저녁의 일몰에서 내일 아침의 일출을 읽는 마음이 지성입니다.
#화이불유(和而不流)
화합하되 휩쓸리지는 않습니다.
#춘풍추상
“대인춘풍 지기추상” 남을 대하기는 춘풍처럼 관대하게 하고, 자기를 지키기는 추상처럼 엄정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늘 일을 돌이켜보면 이와는 정반대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무감어수, 경어인
거울에 비치는 겉모습에 현혹되지 말고, 모름지기 사람들 속에 자신을 세우고 사람을 거울로 삼아 자신을 비추어 보기를 가르치는 경구입니다.
#통즉구
“궁즉통 변즉통 통즉구” 주역 사상의 핵심입니다. 궁극에 이르면 변화하고, 변화하면 열리게 되며, 열려 있으면 오래 간다는 뜻입니다. 양적 축적은 결국 질적 변화를 가져오며, 질적 변화가 막힌 상황을 열어 줍니다. 그리고 열려 있을 때만이 그 생명이 지속됩니다. 부단한 혁신이 교훈입니다.
#지산겸
‘겸손’은 관계론의 최고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역의 지산겸 괘는 땅속에 산이 있는 형태입니다. 땅 속에 산이 있다니 자연현상과는 모순인 듯합니다….그러기에 겸손은 “군자의 완성”이다. 가히 최고의 헌사라 하겠습니다.
#성찰
각성, 그 자체로서 이미 빛나는 달성입니다.
#야심성유휘
“밤이 깊으면 별은 더욱 빛난다”
#바깥
만남은 바깥에서 이루어집니다. 각자의 성을 열고 바깥으로 걸어 나오지 않는 한 진정한 만남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갇혀 있는 성벽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인간적인 만남의 장은 언제난 바깥에 있기 때문입니다.
#함께 맞는 비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입니다. 함께 비를 맞지 않는 위로는 따뜻하지 않습니다. 위로는 위로를 받는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가 위로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공부하지 않는 생명은 없습니다#
#감옥 교실
징역살이는 사회와 역사를 배우는 훌륭한 교실이 됩니다. 바깥 사회와 달리 일체의 도덕적 포장이나 의상을 훨훨 벗어 버리고 이(利)·해·호(好)·오(惡)가 적나라하게 표출되는, 그야말로 인간학의 교실이 됩니다. 알몸은 가장 정직한 모습이며, 정직한 모습은 공부하기 가장 좋습니다.
#인디언의 기다림
아메리카 인디언은 말을 멈추고 달려온 길을 되돌아봅니다. 영혼이 따라오기를 기다립니다. 공부는 영혼과 함께 가는 것입니다.
#더불어숲
나무가 나무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더불어 숲이 되어 지키자.
#화이부동
차이를 존중하고 다양성을 포용하는 공존의 철학이 화입니다. 반대로 모든 것을 자기중심으로 동화하려는 패권의 논리가 동입니다. 화이부동은 공존과 평화의 원리입니다.
#여럿이 함께
‘여럿이 함께’라는 글 속에는 방법만 있고 목표가 없다는 지적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목표는 ‘함께’ 속에 있습니다. 우리들이 지향해야 할 목표는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속에 있습니다. ‘여럿이 함께’는 목표에 이르는 방법이면서 동시에 목표 그 자체입니다. 여럿이 함께 가면 길은 뒤에 생겨나는 법입니다.
#바다
바다는 모든 시내를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이름이 ‘바다’입니다. 바다는 세상에서 가장 낮은 물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큰 물입니다. 바다가 물을 모으는 비결은 자신을 가장 낮은 곳에 두는 데에 있습니다. 연대는 낮은 곳으로 향하는 물과 같아야 합니다. 낮은 곳, 약한 곳으로 향하는 하방연대가 진정한 연대입니다.
#공부
#서삼독
독서는 삼독입니다. 텍스트를 읽고 필자를 읽고 최종적으로는 독자 자신을 읽어야 합니다.
#천하무인
세상에는 남이란 없습니다. 네 이웃 보기를 네 몸 같이 하라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근대사는 타자화의 역사입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보지 못하고,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보지 못하고 인간을 타자화하고 자연을 대상화해 온 역사였습니다.
#정본
『논어』 「안인편」에 “정치란 바르게 하는 것”이란 구절이 있습니다. 무엇을 바르게 하는 것이 정치인가. 뿌리를 바르게 하는 것이 정치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다시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뿌리란 무엇인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이 뿌리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오히려 사람을 거름으로 삼아 다른 것을 키우고 있는 형국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을 키우는 일이야말로 정치가 해야 할 일의 전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