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능의 예술. 바츨라프 하벨
실천 도덕으로서의 정치
#내셔널 프레스 클럽 연설_1995년 3월 29일, 호주 캔버라
모든 것이 변한 세상. 수천 년 동안 인간은 지구 행성의 다양한 지역에서 자율적인 독립체로 살면서 진화. 문명과 문화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졌습니다. 이 문화들은 근대 이전까지 서로 고립. 서로를 알았다손 치더라도 그들의 접촉은 최소한도. 그 당시 특정 세계에서 사건이 일어나도라도 세계 전체에 즉각적인 영향을 미치진 않았습니다.
오늘날 사정은 달라졌습니다. 상당히 짦은 시간 동안, 인류 전체의 역사로 보면 극히 찰나에 불과하지만, 하나의 지구적 문명이 나타났습니다.
수천 년의 역사를 통해 형성된 문화적 독립체들은 수년 내에 문화적 중립 상태에서 함께 사라질 수도 있다는 공포 때문에 통합에 저항하고 있습니다. 모든 색을 섞는다면 회색이 될 것입니다. 상이한 색의 문화들은 단일한 문명이라는 거대한 팔레트에서 회색이 될 위험에 맞서 결연히 씨름하고 있습니다.
확실히 그 해법은 본질적으로 무신론적인 오늘날의 기술 문명에 맹목적으로 우리의 믿음을 맡겨두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를 억압하는 것은 인류 그 자체에 대해 전쟁을 선포한다는 의미. 다른 한편으로 현재의 문명을 거부하고 이것이 가져다주는 좋은 혜택을 포기함으로써 옛날의 부족적 삶으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것 역시 해법은 아닙니다.
지혜로운 길은 가장 힘든 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다문화적 문명으로 우리 문명을 체계젹으로 전환시키는 것에서 출발해야만 합니다.
만일 세계가 존속하려면 인류는 이 과거의 유산을 존중해야만 합니다.
문명이 만들어낸 위험에서 인류를 구하기 위한 탐색을 지금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류를 초월하는 것, 인류를 둘러싼 세계뿐만 아니라 인간의 삶 자체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야 합니다.
도스토옙스키는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됐을 것이라고 썼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정신에 대한 각성을 잃어버린 현재 문명은 무엇이든 해도 된다고 믿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가 인정하는 유일한 정신은 자기 자신입니다.
상이한 문명들이 아무리 다른 길을 따른다고 해도, 종교와 문화의 핵심에서 동일하면서도 기본적인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메시지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넘어선 초월적 존재로서 신을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서로를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동료 인간에게 해를 끼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메시지를 성찰하는 것이야말로 오늘날 세계가 처해 있는 위기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입니다.
저는 오늘날 문명을 위한 유일한 기회가 다문화적 특성에 대한 분명한 인식, 내적 정신을 근본적으로 향상시키기 위한 정신적 뿌리를 찾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빅토리아대학교 연설_1995년 3월 31일, 뉴질랜드 웰링턴
얼마 전에 한 지혜로운 노인이 저를 만나기 위해 프라하에 왔습니다. 그 노인의 이름은 칼 포퍼Karl Popper. 철학자 포퍼는 인류에 불어닥친 가장 큰 전쟁, 나치 이데올로기의 부족적 분노로 촉발된 전쟁을 목격했던 세계 여행가였습니다…그가 심혈을 기울여서 비판했던 것이 ‘전체론적 사회공학’이라고 명명했던 현상이었습니다. 그는 이 용어를 이데올로기에 끼워 맞춰 세계를 완전하게 총체적으로 바꾸려는 인간의 시도를 지칭하기 위해 사용했습니다.
향상과 변화는 이 세계에 대한 모든 것을 이해했고 세계를 개선하는 방법을이미 알고 있다는 오만한 추정 없이, 좋은 것, 타당한 것, 바람직한 것, 그리고 의미 있는 것으로 입증된 것에 한해 실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전체론적 사회공학에 반대합니다. 그러나…세계는 본질상 전체론적 실체라는 생각.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상호 연결되어 있고, 우리가 그 전체를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우리가 한 장소에서 어떤 것을 하든 그것은 모든 장소에 불가해한 영향을 미친다는 이야기였습니다…일부분 포퍼의 견해와 다를지도 모르지만, 저는 사람들이 그렇게 노력함으로써 지구적 상호 관계를 염두에 두게 되고 지식 너머에 무한히 넓은 상호 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상호 연결이라는 진리를 우리만 인식하고 있다는 오만한 유토피아적 신념으로 이런 각성이 변질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인식은 알 수 없는 상호 연결의 질서에 대한 겸손한 존중에서 나와야 합니다.
저에게 지식인이란 이 세계의 사건과 사물의 맥락을 생각하는 일에 자신의 삶을 바치는 사람입니다…지식인은 전문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지식인들은 어쨌든 세계에 대한 해법을 제시해야 한다는 유혹을 받습니다. 지적인 조급증 때문에 지식인들은 전체론적 이데올로기를 고안해서 사회공학에 매료되는 것입니다. 나치 이데올로기의 선구자들, 마르크스주의의 창설자들, 그리고 첫 공산주의 지도자들은 탁월한 지식인들이었습니다. 다수의 독재자들과 테러리스틀, 독일 붉은 여단의 지도자들로부터 폴 포트에 이르기까지 이들 모두는 지식인이었습니다…이 상황을 지칭하기 위해 ‘지식인의 배반’이라는 표현이 만들어졌습니다.
지식인들에게 정치는 무엇일까요? 제 의견은 단순합니다. 유토피아적 지식인과 만났을 때 우리는 그들의 사이렌 같은 매혹적인 목소리에 홀리지 않아야 합니다…다른 유형의 지식인, 겸손하게 강한 책임감으로 세계에 개입하는 지식인, 선을 위해 싸우는 지식인들이라면, 그들이 정치를 비추는 비판의 거울을 세워서 독립적인 비평가로 활동하든 아니면 직접 정치에 뛰어들든, 정치에 항상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저는 오히려 이런 사람들이 현실 정치에 직접적으로 참여할수록 세상일이 더 잘될 것이라고 깊게 확신합니다. 그 본성상 정치는 그 곳에서 활동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지금부터 백 년 후에 일어날 일 대신에 다음 선거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단기적 이슈들에 관심을 갖도록 유도합니다. 이런 왜곡은 그들이 전체로 존재하는 인간 공동체의 이해관계보다 정치집단의 이해관계를 추구하도록 강요합니다. 모든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것을 말하고 기뻐하지 않을 것은 말하지 않도록 강요합니다. 진리에 대한 발언도 자제합니다.
이곳에서 수만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체코공화국에서 한 사람이 한 철학자의 책을 읽고 세계의 문제에 대해 고민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한때 그가 책을 집필했던 이곳 뉴질랜드의 열성적인 청중들과 그의 책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은 더 멋진 일입니다.
#카탈루냐 국제상 수상 연설_1995년 5월 11일, 바르셀로나
제 조국의 파란만장한 근대 역사. 그때나 지금이나 일관된 역사의 주제가 있다는 깨달음. 그 주제란 도덕과 정치의 관계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대표자들이 공통된 딜레마에 빠졌던 결정적인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명령에 따름으로써 민족에 해를 끼칠 것인지, 아니면 따르지 않고 개인적 불이익을 받을 것인지 고민해야 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들은 항상 전자를 선택했고, 저는 그런 선택이 치명적인 오류라고 생각했습니다…저는 지금 공무 수행중..그렇기에 공직을 짊어진 사람이 의사 결정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자신의 동료 시민들과 자손들의 운명에 직접적 영향을 미칠 책임을 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게 됐습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대통령이었던 에드바르트 베네시Edvard Benes가 뮌헨의 배신에서 직면했던 것이 이런 불길한 딜레마의 시초였습니다. 한 미치광이가 조국을 침략할지 모른다는 사실…수천 명이 죽을 것이고 국가 기간 시설을 대대적으로 파괴될 것…적이 워낙 강력했기 때문. 그래서 그는 싸우지 않고 항복하기로 결정. 그렇게 하는 것이 더 실리적으로 보였기 때문.
문제의 딜레마. 결정자들은 참조할 선례가 없었습니다. 오직 자신만의 판단을 믿어야. 그들은 책임감을 가지고 차악을 선택하려고 했습니다.
딜레마에 빠졌던 사람들은 도덕적으로 옳긴 하지만 막대한 손실과 고통의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결정과 더 현실적이고 손실을 적게 입을 수 있는 결정 사이에서 선택해야 했습니다. 도덕적 일관성에 대한 책임을 질 것인지, 인간의 삶에 대한 책임을 다할 것인지. 끔직한 딜레마입니다.
역사는 물리학자들이 단 한 번의 특이점이라고 부르는 것에 의해 특징지어집니다. 어떠한 그럴듯한 ‘만약’도 ‘그리고’나 ‘그러나’도 없습니다.
역사적 순간에 이루어진 각각의 결정들은 한 사회의 정신적 외상과 타락이라는 결과는 낳았습니다…저는 1938년 뮌헨의 배신 이후 수십 년 동안 제 조국이 특정한 유형의 도덕적 좌절에 시달렸다고 생각합니다.
이 연설은 정치와 도덕을 서로 대조하는 것이 얼마나 문제가 많은지 밝히려는 것입니다.
앞서 살펴봤듯이 ‘덜 도덕적인’ 결정들이 정치적 의미에서 철저하게 부정적인 효과를 미치지 않았습니까? 덜 가시적이지만 더 깊고 더 영구적인 것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공동체의 도덕적 일관성에 손상이 가면서 발생한 손실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정치적 결정이 도덕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것처럼, 도덕과 부도덕 모두 직접적인 정치적 결과를 초래합니다. 바로 이 점이 정치를 도덕과 분리하는 것, 그 둘이 전혀 관계없다고 말하는 것이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유입니다.
도덕이 어디에나 있는 것처럼 정치도 어디에나 있습니다. 도덕과 분리된 정치는 나쁜 정치입니다.
딜레마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결과를 모른다? 저 자신에게 다른 질문을 하는 것이 더 중요하게 보입니다… 모든 것을 다 한 후에도 여전히 제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다면 아마도 하나의 권위를 호출할 것입니다…저에게는 수차례에 걸쳐 가장 신뢰할 만한 원천으로 증명됐습니다. 바로 양심이 그것입니다. 양심은 도덕적 본능입니다. 개인의 한계를 초월하는 제 자신의 일부입니다.
저는 이런 생각들이 정치인들의 환영을 받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습니다.
우리의 가슴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야말로 단연 최상의 정치라는 저의 소신은 바뀌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