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능의 예술. 바츨라프 하벨.
#체코슬로바키아 홀로코스트 희생자 추모 콘서트_1991년 10월 19일, 프라하
우리는 충격을 본능적으로 피합니다. 그러나 위험을 감지하려면 충격의 기억을 반복적으로 반추해야 합니다. 충격의 기억은 우리에게 책임이라는 보편적 본성을 환기시킵니다.
#캘리포니아대학교 로스앤젤레스 캠퍼스 연설_1991년 10월 25일, 로스앤젤레스
땅은 침식되고 토양은 분해됐을 뿐만 아니라 화학비료로 피폐해졌습니다. 화학비료는 지하수마저 서서히 오염시키고 있습니다. 보금자리를 빼앗긴 새들도 서식지에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환경이 속절없이 파괴당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농업학자들은 화학물질을 사용해서 해충과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이런 사태를 초래하는 근본 원인이 기술적이라거나 경제적이라기보다 철학적이라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르크스의 이데올로기와 공산주의의 지배 형태에서 제가 보았던 것은 극단적이고 경계해야 마땅할 근대 인간의 오만함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오만함은 인간을 자연과 세계의 주인으로 간주하면서 인간만이 세계를 이해하고, 만물은 인간을 위해 봉사하도록 창조됐기에 우리의 행성 자체가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는 믿음에서 기인합니다.
저는 시민운동이 현수막에 새겨진 ‘환경’이라는 용어조차도 자기 멋대로 사물을 잘못 이해한 것이라고 점차 생각하게 됐습니다. 지구를 파괴해온 바로 그 인간중심주의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환경’이라는 단어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인간 이외의 것, 그래서 열등한 것으로서 인간의 이익에 부합하는 한에서 보살필 필요가 있는 것을 전제합니다. 저는 이런 전제가 틀렸다고 믿습니다. 세계는 우월한 것과 열등한 것이라는 두 가지 존재의 유형으로 나뉘어 있지 않습니다.
존재, 자연, 우주는 복잡하고 신비로운 메타 유기체입니다. 인간을 유일무이한 존재라고 부를 수는 있지만 우리 역시 이런 메타 유기체의 일부일 뿐입니다.
#뉴욕대학교 연설_1991년 10월 27일, 뉴욕
저는 그동안 현실 정치를 기술에 불과한 실용적 활동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실용적 활동으로서 정치의 목적은 양심에 따라 사심 없이 책임감 있게 공적인 기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권력을 유지하고 더 많은 권력을 확보하려는 기술만을 터득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권력을 위해 사람의 환심을 사려는 기술이 바로 실용적 활동의 정치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독립적인 지식인을 자처하며 원칙적인 입장에서 평생 지배 정치권에 저항해온 사람입니다…정치는 양심과 진리를 토대로 삼아야 하고 인간을 위한 이타적 봉사로서 실천 도덕이어야 한다는 것이 제 정치관입니다. 저는 이런 정치를 ‘비정치의 정치’라고 불렀습니다. 글도 썼습니다…제가 침묵한다면 작가로서 임무를 방기하는 꼴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작가로서 정치를 더 이상 묻지 않고 현실 정치에 참여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정치인은 시간, 환경, 분위기, 걱정의 본질, 마음 상태 등등을 알아내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도덕 실천으로서의 정치는가능합니다…굴곡은 있지만, 여전히 정치란 부도덕한 것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프랑스 한림원 연설_1992년 10월 27일, 파리
역사는 고유의 시간을 가집니다. 물론 우리는 창조라는 방식을 통해 그 시간에 개입할 수 있지만 누구도 그 시간을 온전히 손에 넣을 수 없습니다. 세계와 존재는 기술 전문가나 기술 관료들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누구의 명령대로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세계와 존재는 시간 감각에 대한 해석에 저항하듯이 기술 전문가나 기술 관료의 시간 감각에 저항합니다. 지속적으로 근대 계몽의 합리성에 의표를 찌르는 고유의 비밀과 신비로움을 갖고 있듯이, 자신만의 종잡을 수 없는 코스를 밟아나갑니다. 우리가 거대한 댐을 쌓아서 이렇게 굽이치는 세계와 존재의 강을 직선으로 만들어버린다면, 지하수가 소실되는 것을 물론 생명 자체에 파국을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기다림의 예술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참을성 있게 씨를 뿌리고 물을 주면서 초목이 자라는 데 필요한 시간을 정확하게 지켜야 합니다. 초목을 속일 수 없는 것처럼 우리도 역사를 속일 수 없습니다. 참을성 있게 매일같이 역사에게도 물을 주어야만 합니다. 이해와 겸손만이 아니라 사랑으로 인내하면서 그렇게 해야 합니다.
정치가와 시민들이 인내의 기다림을 배운다면, 사물의 내적 질서를 존중하는 방식으로 세계를 이해한다면, 세계 자체가 고유한 시간을 가지고 있고 내적인 열망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인류도 세계에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보로츠와프대학교 연설_1992년 12월 21일, 폴란드 보로츠와프
이런 진정한 정치의 출발점은 권력의지도 이데올로기적 전망도 아닙니다. 도덕적 입장입니다.
#조지워싱턴대학교 연설_1993년 4월 22일, 워싱턴
역사적 현상을 성가신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생태학자의 경고, 유권자의 변덕, 공적 도덕성마자도 성가신 것이라고 여길 것입니다…세계나 역사가 성가시다는 이유로 회피하면 모든 것을 운명이라고 체념하게 됩니다. 이런 체념은 포기로 이어지고 마침내 부역자로 전락하게 만듭니다. 결국 자멸만이 남습니다.
새로운 정치적 자기 이해는 역사와 외국 문화, 이민족, 그리고 미래에 관한 모든 경고들을 시끄러운 소음으로 이해하지 않아야 가능합니다. 이런 문제들을 우리의 평온함을 깨는 성가신 것들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산의 정상에서 누리는 평화로운 삶이란 언제 깨질지 모르는 환상일 것입니다. 거리에서 반체제 인사와 마주치는 것을 피하면 공산주의의 문제 자체를 피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이 바로 이런 종류의 환상입니다.
탈공산주의는 너무 늦기 전에 전 지구적 책임을 일깨우기 위해 전세계 인류에게 던져진 도전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과 인류를 위한 오나시스 상 수상 연설_1993년 5월 24일, 아테네
저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이런 문명의 진보가 초래하는 정치의 비인격화와 비인간화입니다. 어떤 문제에 개인적으로 책임을 느끼고 양심적으로 대응하곤 했던 인간존재는 정치의 영역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정치인들마저도 인간성을 망각한 극장에서 공연을 펼치는 꼭두각시 인형처럼 변해버렸습니다. 거대한 기계의 톱니바퀴가 된 것 같습니다. 통제할 수 없고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문명이라는 자동기계가 된 것 같습니다.
오늘날의 세계는 복합적인 위험에 직면해 있습니다. 어떤 각도에서 이런 위험을 바라보든, 저는 항상 구원이란 개인적이면서도 전 지구적인 책임감을 깊이 자각함으로써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근대는 정점에 도달했습니다. 근대의 문제로 인해 파멸하지 않으려면 시민권의 인간적 차원뿐만 아니라 정치의 인간적 차원을 신속하게 복원해야 합니다. 제 생각에 이것이야말로 우리 시대가 감당해야 할 도전, 세 번째 천 년을 위한 도전입니다.
#유럽평의회 정상회담_1993년 10월 8일, 빈
유럽 통합의 가능성과 현실이 이렇게 갈리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유럽의 양극주의가 소멸한 것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모두가 통합을 바라는 것처럼 보이는데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요?
여러 이유들이 있겠지만 모두를 포괄하는 하나를 지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유럽의 과제는 순전히 기술적이고 행정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기발한 제도나 법을 만들면 될 것이라는 잘못된 믿음이 그것입니다.
통합이 순전히 체계의 문제일 뿐이라는 생각이지요. 이런 관점에서 우리가 할 일은 기술적 문제를 철저히 따지는 것이라는 착각이 행동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습관이 편견을 전혀 바꾸려고 하지 않은 채 말입니다. 체제의 전환이 보여줬던 가치들은 이 논의 과정에서 서로 뒤얽혀서 방향을 잃어버렸습니다. 목적을 위한 수단이 논의의 중심에 와버린 것입니다. 동의하기 어려운 사안들이 난무하게 된 것입니다.
#신년사_1994년 1월 1일, 프라하
비영리단체의 활성화는 성숙한 시민사회를 위한 여러 핵심 요소 중 하나입니다. 아니 그 이상으로 사회의 성숙함을 드러내는 직접 지표입니다. 국가만이 사회의 수요를 파악해서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국가만이 세금을 사용해서 비정부기구를 지원할 수 있다는 관념에 안주하지 말아야 합니다. 중앙에서 이루어지는 자금 조달은 필연적으로 중앙의 통제로 이어집니다. 중앙 통제를 지양하고 시민들 자신이 책임을 질 수 있도록 믿고 장려해야 합니다.
#인디라 간디 상 수상 연설_1994년 2월 8일, 뉴델리
다양하고 자율적인 문화들이 현대 문명에서 비롯된 단일화의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릴수록 집단의 자율성과 타자성, 그리고 고유성을 방어할 필요는 격렬해질 것입니다…이런 악순환을 어떻게 빠져나갈까요? 오늘날의 세계가 갈수록 더 소름 끼티는 갈들에 휘말려 들지 않으려면 단 하나의 가능한 행동 방식만이 있을 뿐입니다.문명에 다문화적 공존의 정신을 서서히 불어넣어야만 합니다. 상이한 사람들, 종교, 문화가 서로에게 맞추거나 같을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서로를 정당하고 평등한 동반자로 받아들인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서로를 존중하고 그 차이를 예우한다면 서로를 이해할 필요조차 없을 것입니다. 만일 상호 이해가 어디선가 가능하다면 오직 상호 존중의 지형에서 발생할 수 있습니다.
#국제 연극의 날 기념 연설_1994년 3월 27일, 프라하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인간이 거주하는 모든 곳이 단일한 지구 문명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우리가 서로 좀 더 가까워지면 질수록 서로의 차이를 좀 더 의식하게 된다는 단순한 사실을 생각해본다면 이런 갈등들을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근대 세계는 경이로운 극장이기도 합니다. 다양한 극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타인과의 공존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생존을 위한 유일한 기회는 공존뿐입니다.
#필라델피아 자유 메달 수상 연설_1994년 7월 4일, 필라델피아
저에게 이런 포스트모더니즘은, 전통 예복에 청바지를 입고 트랜지스터라디오를 손에 들고 자신이 올라탄 낙타 등에 코카콜라 광고를 붙인 베두인족의 모습처럼 보입니다…다만 저는 이 상태를 다문화 시대의 전형적인 표현으로, 문화들이 융합이 일어나고 있다는 신호로 이해합니다. 저는 이런 상태야말로 무슨 일이든 허용되고 무엇을 만들든 상관없고 무엇을 하든 가능한 상태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의 시대가 다른 시대를 계승하고 있는 증거라고 이해합니다. 그렇습니다. 무엇이든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문명은 하나의 스타일, 하나의 정신, 하나의 미학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스탠퍼드대학 잭슨 랠스턴 상 수상 연설_1994년 9월 29일, 스탠퍼드
인류가 완고함을 버리지 못한다면 자신이 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망각한 채 근시안적인 판단에 머무를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인류는 더 많은 르완다와 체르노빌을 겪어야 할 것입니다.
#국제펜클럽 세계 대회_1994년 11월 7일, 프라하
민족적, 인종적, 종교적, 사회적, 그리고 정치적 불관용은 수천 년 동안 인류의 운명과 맥을 같이해왔습니다. 이 불관용은 불행하게도 인간의 정신에, 그리고 전체 인간 공동체의 정신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문제는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이 현상이 전에 비해 훨씬 더 위험해졌다는 것입니다. 단일한 지구 문명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제국들, 문화들, 그리고 다른 문명들의 갈등이 지엽적으로만 영향을 끼치던 시절은 지났습니다.
“양심은 인간존재에 잠들어 있는 신이다. 우리는 이 신을 믿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