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름에 대한 찬양. 버트런드 러셀.p270
경제 효율성 시대의 역설? 행복한 사회주의!
불관용과 편협함, 그리고 방향이 잘못되었다고 하더라도 정력적인 행동은 그것 자체가 존경할만한 것이라는 믿음으로 세계가 고통받고 있다는 것이 이 책에 실린 글들을 하나로 묶어 주는 일반 논제다.
복잡하기 그지없는 현대 사회에 필요한 것은 도그마엔 언제든 의문을 제기하는 마음 자세와 모든 다양한 관점들에 공정할 수 있는 자유로운 정신을 가지고 차분하게 숙고하는 일이다.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조직화된 구조 속에 살고 있는 현대의 우리는 흔히 자신의 무능력과 게으름에서 불행의 원인을 찾기 쉽다. 때문에 ‘행복해지려면 게을러지라‘라는 러셀의 처방은 우리를 잠시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러셀이 말하는 게으름은 실용주의와 목적 달성주의에 떠밀려 이익만을 추구하고 살아가는 대다수 사람들의 진정한 인간성 회복에 꼭 필요한 여유인 것이다!
#게으름에 대한 찬양
우리 세대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듯 나도 이런 말을 들으며 자라났다.
“사탄은 늘 게으른 손이 저지를 해악을 찾아낸다.”(게으름은 죄악이다?)
근로가 미덕이라는 믿음에 의해 엄청난 해악이 발생한다? 따라서 행복과 번영에 이르는 길은 조직적으로 일을 줄여가는 일이다!
일이란? 1)지표면 혹은 지표면 가까이 놓인 물질을 다른 물질과 자리를 바꿔놓는 일. 2)타인들에게 그런 일을 하도록 시키는 일
근로의 도덕은 노예의 도덕이며 현대 세계는 노예 제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의무란 개념은 역사적으로 볼 때 권력을 가진 자들이 그렇지 못한 자들에게 자기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주인의 이익을 위해 살도록 유도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어져 왔다. 물론 권력을 가진 자들은 자신들의 이익과 인류 전체의 이익은 동일하다고 어거지로 믿음로써 스스로에게도 이 사실을 은폐한다.
생산을 과학적으로 조직하면 현대 세계는 노동력 중의 작은 일부만으로도 사람들을 아주 편안하게 지내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전쟁은 결정적으로 보여 주었다…노동 시간을 4시간으로 줄이고도 모두들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 것이다.(니어링 부부의 조화로운 삶의 규칙,4-4-4 규칙)
생산효율성 2배? 4시간 노동으로도 충분, 그러나 현실은?!
만일 사회를 현명하게 조직해서 아주 적정한 양만 생산하고 보통 근로자가 하루 4시간씩만 일한다면 모두에게 충분한 일자리가 생겨날 것이고 실업이란 것도 없을 것이다(의자놀이)
여가의 현명한 이용은 문명과 교육에 의해 가능하다. 평생 동안 장시간 일해 온 사람이 갑자기 일을 하지 않게 된다면 따분해질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상당한 양의 여가 없이는 최상의 많은 것들로부터 차단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같은 박탈을 겪어야 할 이유는 이제 더 이상 없다. 다만 우매한 금욕주의-그나마 자기는 지키지 않으면서 남에게나 강요하는-가 우리로 하여금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과도한 노동을 주장케 할 뿐이다!
우리는 경제적 정의를 이룩할 생각이 전혀 없기 때문에 전체 생산물의 많은 부분이 일하지 않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돌아가게 된다. 생산을 통제하는 중앙 기관이 없으므로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들이 대량생산된다. 우리는 많은 노동 인구들을 놀게 만든다. 그들의 무노동은 다른 노동자들의 과도한 노동으로 보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방법들이 부적합하다고 판명될 경우에는 전쟁을 일으킨다!(이윤추구과 경제효율성 추구의 모순? 낭비와 비효율성!)
이익을 가져오는 것만이 바람직한 행위라는 관념이 모든 것을 뒤바꿔 버렸다(경제학의 효율성?)
우리 사회에서 개인은 이윤을 위해 일한다. 그런데 그가 하는 일의 사회적 목적은 생산한 것을 소비하는 데 있다!
수동적 여가? 도시 사람들의 즐거움은 대체로 수동적인 것으로 되어 버렸다. 이렇게 된 것은 그들의 적극적인 에너지들이 모조리 일에 흡수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여가가 더 있다면, 그들은 과거 적극적인 부분을 담당하며 낫보았던 즐거움을 다시 누리게 될 것이다.
***모든 도덕적 자질 가운데서도 선한 본성은 세상이 가장 필요로 하는 자질이며 이는 힘들게 분류하며 살아가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편안함과 안전에서 나오는 것이다.
현대의 생산 방식은 우리 모두가 편안하고 안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그런데도 우리는 한쪽 사람들에겐 과로를, 다른 편 사람들에겐 굶주림을 주는 방식을 선택해 왔다. 지금까지도 우리는 기계가 없던 예전과 마찬가지로 계속 정력적으로 일하고 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어리석었다. 그러나 이러한 어리석음을 영원히 이어나갈 이유는 전혀 없다.
#무용한 지식과 유용한 지식_’Useless’ Knowledge
르네상스의 주요 동기는 무지와 미신이 지성의 눈을 가린 사이에 놓쳐 버렸던 예술과 사색에 깃든 풍요와 자유의 회복에서 오는 정신적 기쁨이었다.
실용주의? 앞선 시대들과 비교해 우리 세계의 특징이 어떤 것이든 간에, 그 특징의 근원은 ‘유용한’ 지식에 있다
아이들에게만 놀이가 필요한 게 아니다. 어른에게도 현재의 즐거움 이외에 아무 목적도 없는 행위에 빠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놀이가 제 구실을 다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일과 관계없는 부분에서도 기쁨과 흥미를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멍때리기!)
현대의 도시인들은 점점 더 수동적이고 집단적인 여흥, 즉 다른 사람들의 능란한 활동을 피동적으로 구경하는 쪽으로 기울어가고 있다
‘무용한’ 지식의 가장 중요한 이점은 아마도 숙고하는 습관을 조성해 준다는 점일 것이다!
개인적인 것에만 한정된 생활은 언젠가는 견디기 어려울 만큼 고통스러운 것이 될 것이다. 보다 큰 우주를 향하여 마음의 창을 활짝 열어야 인생의 비극적인 단면을 이겨 나갈 수 있다(명상)
학문(scholarship?)의 어원? 여가!(일상 잡무에서 벗어나 여가를 가지고 어떤 주제를 심사숙고 하는..)
현재의 세계는 성난 자기 중심적 집단들로 꽉 차 있다. 이들은 인간의 삶을 전체적으로 보지 못할 뿐 아니라 한 발 양보하느니 차라리 문명을 파괴시키고 말겠다는 태세들이다. 이같은 편협증에는 아무리 많은 과학 기술적 지식으로도 해독제를 만들어 내지 못할 것이다.
필요한 것은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는 특정한 정보가 아니라 전체의 시각에서 본 인생의 목적에 관한 지식이다.
쓸모없는 지식? 비개인적인 감정과 결합된 폭넓은 인식으로부터 지혜가 솟아나오는 것이다.
#건축에 관한 몇 가지 생각
어린 아이의 행동을 끊임없이 금지하는 것은 아이가 훗날 불만 많고 소심한 어른으로 자라게 되는 원인이다
산업주의 경향은 애초부터 생산만 지나치게 강조하고 소비와 일상 생활에는 별로 역점을 두지 않았다. 이것은 생산에 관계된 이윤을 강조한 결과다. 그리하여 공장에서는 과학화와 최대한 노동분업이 이루어지는 반면 가정은 여전히 비과학적인 채로 남겨져 다양하게 이를 데 없는 과중한 노동이 어머니에게 떠맡겨졌다.
사실 실업 문제는 사회주의를 상당 정도 받아들이지 않고선 해결되기 힘든 문제이다.
어쨋거나 내가 주장해 온 것과 유사한 ‘협동조합‘의 건설은 크게 볼 때 대규모 사회주의 운동의 일환으로서만 가능하다. 이윤 동기만 가지고는 결코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근심 및 가난과 마찬가지로 추악함도 우리가 사적 이윤이란 동기의 노예가 되어 있음으로 해서 치러야 하는 대가인 것이다.
#현대판 마이더스
상품 교환? 거의 모든 거래에서 판매자가 구매자보다 즐거워한다! 사는 것보다 파는 데 더 열을 올리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 생산자의 심리이며 팔려고만 하고 사려고 하지 않는 우스꽝스러운 세상을 만들어 내는 데 각국의 정부들이 열중하게 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무역수지, 흑자)
영국만 아니라 세계 어디를 보더라도 최근 몇 년간 금융의 이익은 일반 대중의 이익과 상충되어 왔다. 이러한 상황이 저절로 변화될 가능성은 없다. 금융 업무가 오직 금융업자들이 이익만을 목표로 할 뿐 대중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지 않는 한, 현대 사회가 풍요해지기란 요원한 일이다.
따라서 정부가 금융에 관여해야 할 필요성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
금융과 산업을 따로 떼어 놓으면 금융이 산업보다 막강하다. 그러나 금융의 이익보다 산업의 이익이 공동체의 이익에 좀더 가깝다. 과대해진 금융 세력으로 인해 세계가 위기에 처하게 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일반 대중의 어리석은 면은 금융업자가 민주주의에 구속되지 않고 활동하는 대 꼭 필요한 조건이다
현대 세계의 복잡성은 우리 시대 민주주의의 성공을 가로막는 장애물 가운데 하나로써, 정치적 문제들에 대해 보통 남녀들이 현명한 여론을 형성하거나 나아가 어떤 전문가의 의견이 가장 고려할만한 것인가를 판단하는 일을 점점 더 어렵게 만드는 주범이다. 이 문제를 치유하려면 먼저 교육을 개선해야 한다. 그리고 사회 구조를 설명함에 있어 지금처럼 애매한 방식에서 벗어나 보다 이해하기 쉬운 방식을 찾아내야 한다.
#우리 시대 청소년들의 냉소주의
진보? 이것은 눈이 높은 젊은이가 보기엔 너무도 많은 속물적인 사람들이 얘기해 온 19세기의 이상에 불과하다. 진보는 필연적으로 생산된 자동차 대수나 소진된 땅콩 개수 같은 중요하지 않은 것들도 측정하게 된다. 정말로 중요한 것들은 측정할 수가 없다. 게다가 현대의 많은 발명품들은 사람들을 멍청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스마트기기? 스마트하지 않은 사람들이 스마트하게 쓸 수 있는 기기)
진리의 적? 실용주의! 단순히 인간 중심적이고 상대적인 진리를 구입하기를 어려운 일이다!
대량생산과 초등 교육으로 인해 어리석음이 문명의 발흥 이후 그 어느 때보다도 견고해졌다
#현대 사회의 획일성
어떻게 보면 현대 세계의 획일화를 조장하는 가장 요소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만국 공통어? 헐리우드 언어?!)
획일화는 모든 기준을 낮추는 방법을 통해 가장 손쉽게 얻어진다(하향 평준화)
획일화 경향과 민주주의에 대한 그릇된 관념? 모든 사람이 똑같다! (모든 사람은 제각각이고 다르다)
#인간 대 곤충의 싸움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
서구 문명은 어느 곳에서나 교육기관은 두 가지 윤리관에 의해 지배된다? 기독교의 윤리관과 국가주의 윤리관이다!
바람직한 관심이란 아무 목적 없이 아이들과 같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즐거움을 느끼는 데서 나오는 것이다
규율이란 제 아무리 현명한 것이라 해도 애정과 접촉을 대신할 수는 없는 법이다
#이성의 몰락, 니체와 히틀러
우리 사회가 가장 필요로 하는 두 가지는 사회주의와 평화이지만 우리 시대 가장 힘 있는 사람들의 이익에 정면 대치되는 것도 바로 이 두 가지다.
#내가 공산주의와 파시즘을 반대하는 이유
#사회주의를 위한 변명
나 자신, 사회주의자임을 여느 열렬한 맑시스트 못지 않게 확신하고 있긴 하지만 사회주의가 무산 계급의 복수를 위한 복음이라곤 생각지 않는다. 또한 근본적으로 경제 정의를 보증하는 수단이라고도 결코 보지 않는다. 나는 사회주의를 일차적으로 기계 생산 체제에 대한 대응책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상식 수준에서 요구되는 적응책이며 무산 계급의 행복뿐 아니라 미미한 소수를 제외한 모든 인류의 행복을 증대시키는 데 적합한 적응책이다.
사회주의의 정의? (경제)기본 경제권을 국가가 소유하고, (정치)기본 정치 권력이 민주적이어야 한다!
민주주의는 반드시 사회주의 체제의 한 요소로 받아들여져야만 한다
사회주의에서는 사고 싶어도 주식이란 게 없다
사유 재산을 굳이 법으로 금지할 필요는 없다. 다만 사적인 투자만 금지하면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자를 받는 사람이 없어질 것이므로 사유 재산은 점차 사라지게 될 것이다.
내가 사회주의에 찬성하는 논거 아홉 가지
1)이윤 동기의 몰락-대량생산과 희소가치 창출의 실패, 경제 제국주의의 등장 배경? 이윤 획득의 유일한 가능성이 대형 시장의 배타적 장악에 달려 있기 때문!
이 모든 소동과 혼란들은 현대의 대규모 산업이 사적 이윤이란 동기에 의해 움직이도록 방치해 둔 결과다.
2)여가의 가능성-기계의 생산력 덕분에 훨씬 적게 일하고 상당 수준의 풍요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비능률 및 불필요한 생산, 경쟁을 위한 낭비(광고 마케팅)
3)경제적 불안정-현재의 세계에선 대다수의 사람들이 궁핍할 뿐 아니라 궁핍하지 않은 사람들도 대부분 언제 그렇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한 우려는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다.
부에 대한 욕망은 대부분 안전에 대한 욕망에서 기인한다…그러나 이제 안정성이란 획득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4)일하지 않는 부자들
5)교육-엄청난 능력의 낭비? 아이들에게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획일화된 교육)
6)여성 해방과 아동 복지-사회주의의 확립을 통하지 않고 이 문제의 해결책을 찾아내긴 힘들다
7)예술-상업적 동기 때문에 문학이 얼마나 고통받고 있는가는 작가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8)무익한 공공 서비스-정부의 중요한 일? 전쟁!
9)전쟁-전쟁을 막는 ‘완결된’ 안전장치는 오직 국제 사회주의를 통해서만 주어질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주요 문명국가들에서 나타나는 국가 사회주의는 그 가능성을 엄청나게 감소시키고 있다.
전쟁의 원인? 현대 자본주의!
사회주의? 이윤 추구가 산업의 주요 동기로 가능하는 현상은 사라지고 대신 정부 주도의 계획이 들어서게 될 것이다.
사회주의에서 임금은 일하려는 ‘의지’에 대한 보상이기 때문이다
만일 모든 사람들이 하루 4시간씩 일한다면 5시간씩 일할 때보다 물질적 안락은 줄어들 것이다. 그러나 기술의 발전을 잘 활용하면 보다 큰 풍요와 보다 많은 여가를 동시에 추구할 수 있을 것이다!
모두에게 이해하기 쉬우며 보편적 이익을 주는 제도? 사회주의는 무산 계급만을 위한 신조가 아니다. 사회주의가 경제 불안을 방지하게 되면 극소수 최상층을 제외한 모둔 사람들의 행복이 증대될 것이다.
설득 작업은 점진적으로 해야 하지만 사회주의로의 최종적 이행 작업은 신속해여만 한다
##서구의 문명을 어떻게 볼 것인가_Western Civilization
자신이 속한 문명을 올바르게 바라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사실 과학의 진보 이전에는 동서양의 차이가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았다.
##금욕주의에 대하여
일단 금욕주의를 필요로 하는 문제들 중에서도 가장 어렵고도 본질적인 것? 바로 ‘죽음’! 죽음의 공포에 맞서기 위한 여러 다양한 방법들.
죽음의 공포는 인간을 외부적인 힘의 노예로 느끼게 만들고 노예 정신 상태에서는 아무런 좋은 결과도 나오지 않는다.
***영생의 축복? 이처럼 명백하게 모순된 얘기가 나올 수 있는 이유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종교적 믿음이란 것은 의식적 영역에서만 존재할 뿐 그 믿음이 무의식 기제까지 바꿔 놓진 못한다는 데 있다!
훈육은 내적 충동에서 솟아나올 때가 가장 좋다
##혜성의 비밀
혜성은 신이 화난 증거? 하지만 지금 시대에 혜성이 1662년 보스턴에서와 같은 유익한 도덕적 효과를 낳을 수 있을 거라곤 생각되지 않는다. 지금은 좀더 강한 약이 필요한 시대다.
##영혼이란 무엇인가
현대 과학의 진보로 파생되는 가장 고통스러운 사실 중 하나는 한 단계씩 진보가 이루어질 때마다 우리 인간들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적게 알고 있었음을 발견하게 되는 일이다(지식의 원과 무지)
결국 우리는 원 주위를 맴돌고 있는 것밖에 안 된다…현대 과학은 영혼 혹은 정신이 실체로서 존재하는지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없다. 사실, 정신을 믿지 않는 이유와 물질을 믿지 않는 이유는 본질상 거의 똑같다. 과거에 정신과 물질은 왕관을 차지하려고 싸우는 사자와 유니콘에 유사했다. 그 싸움은 어느 한쪽의 승리가 아닌, 둘 다 문장의 고안물(사자와 유니콘이 마주보는 모양의 영국 왕실의 문장)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으로 끝났다.
결국 정신과 물질 모두 사건들을 편성하는 편리한 방법에 불과하다
과학은 우리의 우주를 향한 야망을 축소시킨 반면 지구내에서의 안락은 엄청나게 증대시키고 있다.
#누구나 자유롭게 게으를 수 있는 세상을 위하여
‘무용한’ 지식은 살구의 역사(이름의 유래)처럼 사소해 보이는 부분에서까지 개인들에게 커다란 즐거움을 줄 수 있다. 그러한 지식의 추구를 가능케 해주는 것은 바로 ‘사색하는 습관’인대 여기에는 게으름이 요구된다!(‘여가’에서 파생된 학문scholarship의 어원)
게으름의 시간과 지식의 본질적 가치? 이런 류의 경험은 오늘날까지도 대다수 사람들에겐 그림의 떡이다. 그들에겐 ‘무용한’ 지식을 추구하며 빈둥댈 돈도 여가도 없다. 그들은 러셀이 말하는 ‘효율성 숭배’에 사로잡혀 있다!
러셀이 제안하는 해결책? 기술문명의 발달로 노동을 현명하게 재구성한다면 이제 일반 대중도 게으름을 누릴 수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대체로 노동을 구성하는 바쁘고도 도구적인 활동들보다 게으름이 더 높게 평가받을 수 있다면 게으름은 바람직할 뿐 아니라 대다수의 사람들도 누릴 수 있는 권리가 될 것이다!
현대의 기술은 임금의 저하나 실업을 동반하지 않고도 하루 4시간 노동을 가능하게 해준다. 그렇게 되면 남녀 누구나가 각자 자신이 선택한 활동을 자유롭게 추구할 수 있을 것이고 노동의 압제에서 해방될 것이라고 러셀은 말한다.
***러셀이 주장하는 핵심은 노동이 인생의 목표가 아니라는 것이다!!!
‘게으름 찬양’의 목적은 ‘즐겁고, 가치 있고, 재미있는’ 활동들을 누구나 자유롭게 추구하는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데 있다.
관용, 평화, 개인의 자유, 사회적 조화와 대비되는 것들? 광신적 비이성, 전쟁, 실용주의
사색하는 습관에 기초한, ‘무용해’ 보이는 지식에의 접근이여말로 지극히 ‘유용하다’는 것이다!
‘계급없는 사회’? 목적 자체엔 동조, 수단인 공산주의 혁명? 무력 혁명은 필시 평화가 아닌 독재를 낳을 것이기에 반대한다
사회주의를 위한 변명? 다수의 지원하에 평화적으로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방법
시민들의 비판적 사고 능력에 방해가 되는 교육제도? 성공적인 민주주의로 가는 데 장애물!
효율성의 유일한 기준? 생산성(전도된 가치, 다양한 기준 필요)
“이익을 낳는 것만이 바람직한 행위들이라는 시각이 모든 것을 전도시켜 버렸다.”
달리 말해, 우리에겐 이윤 동기 이외에, 노동을 비롯한 모든 인간 활동을 판단하는 기준이 될 새로운 가치들이 필요하다. 자유롭게 누릴 수 있는 게으름의 진가를 인정하지 못하는 사회는 휴머니티에 등을 돌려 버린 사회다!
화이트헤드는 현대의 기업들이 문명화된 사회의 특징인 두 가지 기본적인 활동을 부정함으로써 인간의 정신을 죽이고 있다고 본다. 그 두 가지 활동이라는 장인정신과 미적 감상력이다. 공장 생산으로 초래된 획일성으로 인해 생산자에게서도 소비자에게서도 표정을 찾아 볼 수 없다!(‘인간적 충동의 결핍, 기회 거부, 이익 행위만 추구’)
시대를 초월한 고전? 이 책의 수필들에 담긴 그의 생각들은 그 자신의 시대뿐 아니라 우리의 시대에도 탁월한 빛을 발하기 때문이다.

“게으름에 대한 찬양 | 사회주의 예찬”에 대한 4개의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