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평론선집1.김종철.p319
인간으로 태어난 우리 모두에게 지금 과해진 가장 큰 책임은 결국 비폭력적 삶의 방식을 회복하는 데 어떻게 이바지할 것인가를 심각하게 찾아보는 일일 것이다
활발해진 국내의 환경운동? 환경위기가 나날이 심화되어 왔다는 점이 가장 큰 요인일 것이다.
파국을 향하여 질주하고 있는 산업문명
물질적 성공과 서구적 생활방식 모방의 결과? 성공의 대가로 인간생존의 터전 자체의 붕괴를 경험
대다수가 문제의 본질을 보지 못하는 이유? 오랜 기간 의심할 나위없이 믿어왔던 삶의 목표와 우선순위에 대한 관점을 근본적으로 변경할 만한 심리적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똑바로 보지 않으면 안된다
영국의 작가 로렌스는 볼셰비키혁명 후 러시아의 민중이 빵을 고르게 먹는 것은 가능해졌으나 그 빵이 맛이 없어졌다고 말함으로써 인간 영혼의 근원적 요구를 외면하는 사상이나 사회운동에 대한 그 자신의 불신을 표명한 바 있지만,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사람답게 살 수 있게 하는…(사람답게 사는 세상)
사람의 명상할 수 있는 능력은 개인이 자기보다 더 큰 전체, 공동체나 자연이나 우주적 전체속의 작은 일부로서 스스로의 존재를 느끼고 사색할 줄 아는 습관속에서 길러지는 것일 것이다.
생태학적 위기의 극복에 필요한 것은? 결국 우리들 각자가 자기 개인보다 더 큰 존재를 습관적으로 의식할 수 있게 하는 문화를 회복하는 일일 것이다(공동체 회복)
현대 기술문명의 기저에는 정복적 인간의 교만심이 완강하게 버티고 있다고 할 수 있다(모든 것을 자기 자신의 통제와 조종속에 종속시키려고 하는 야만적 폭력이 창궐하고…나날이 지옥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사람다운 삶을 누리는 길?
협동적인 공동체를 만들고, 하늘과 땅의 이치에 따라는 농업중심의 경제생활을 창조적으로 복구하는 샹태학적으로 건강한 생활 조직하는 일밖에 다른 선택이 없다
자기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겸손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하고, 그런 겸손에서 기쁨을 느낄 수 있은 정신적 자질을 갖추지 않으면 안될 것으로 보인다.
#시애틀 추장 연설문-우리는 결국 모두 형제들이다
이러한 통합적 비전이야말로 진정하게 비폭력적인 삶의 기술을 보장하는 원천이 아닐까?
“…그대들은 어떻게 저 하늘이나 땅의 온기를 사고 팔 수 있는가? 우리로서는 이상한 생각이다. 공기의 신선함과 반짝이는 물을 우리가 소유하고 있지도 않은데 어떻게 그것들을 팔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에게는 이 땅의 모든 부분이 거룩하다….우리는 땅의 한 부분이고 땅은 우리의 한 부분이다…백인은 우리의 방식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백인에게는 땅의 한 부분이 다른 부분과 똑같다. 그는 한밤중에 와서는 필요한 것을 빼앗아가는 이방인이기 때문이다…짐승들이 없는 세상에서 인간이란 무엇인가? 모든 짐승이 사라져버린다면…짐승들에게 일어난 일은 인간들에게도 일어나게 마련이다. 만물은 서로 맺어져 있다…인간은 생명의 그물을 짜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 그물의 한 가닥에 불과하다. 그가 무슨 짓을 하든 그것은 곧 자신에게 하는 짓이다…부족이란 인간들로 이루어져 있을 뿐 그 이상은 아니다. 인간들은 바다의 파도처럼 왔다가는 것이다…한가지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 모두의 하느님은 하나라는 것을. 이 땅은 그에게 소중한 것이다. 백인들도 이 공통된 운명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결국 우리는 한 형제임을 알게 되리라.”
#간디의 오두막_이반 일리치
크게 감명적이었다. 하나는 그 정신적인 면이었고, 다른 하나는 쾌적함이었다…내게는 그 집의 단순성과 아름다움과 청결함이 참으로 좋았다. 간디의 오두막은 모든 사람과의 사랑과 평등의 원칙을 선언하고 있다.
집과 가옥에는 차이가 있다. 가옥은 사람들이 가구들과 소유물을 보관하는 곳이다. 그것은 사람들 자신보다는 가구의 안전과 편의를 위해 마련된 곳이다.
우리는 우리가 평생 동안 끊임없이 수집하는 가구나 기타 물품들이 우리에게 내면적 힘을 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물건들은 불구자의 목발 같은 것이다. 그러한 편의물들을 더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그 물건들에 대한 우리의 의존도는 더 커진다.
실제로는 병원의 수는 그만큼 사람들의 불건강을 나타내고, 학교의 수는 그만큼 사람들의 무지의 정도를 나타낸다. 그와 마찬가지로, 소유물의 증가는 창조성의 표현을 줄어들게 한다.
내가 설계자들에게 어째서 그들은 간디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 소박한 접근 방법을 이해하지 못하는가고 물었을 때, 그들은 간디의 방식은 너무 어렵고 사람들이 그걸 따를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한 단순한 원리가 이해되지 않고 있다니 어떻게 된 일일까? 실제에 있어서, 일반 민중은 그러한 단순성의 원리를 완전히 이해하고 있다. 이해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무엇인가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뿐이다.
간디의 오두막이 함축하는 것은 인도사회와의 완전한 조화를 이룸으로써 가능해지는 기쁨이다. 우리는 사람들이 소유하고 있는 불필요한 물건이나 상품들은 주위횐경으로부터 행복을 섭취할 수 있는 사람의 능력을 위축시킨다는 것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간디의 이 오두막은 평범한 사람의 존엄성이 어떻게 고양될 수 있는가를 세상에 알려주고 있다. 그것은 또한 우리가 단순성과 봉사와 진실성을 실천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행복의 상징이기도 하다.
##나쁜 요술-테크놀로지의 실패_제리 맨더와의 대담
[텔레비전을 없애야 하는 네가지 이유]
“이것은 뒤로 가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인간관계에 존재해 온 유구한 가치와 원칙에 우리가 새로운 관계를 맺기 위해 이어가기는 것이다.”
“걸프전쟁은 백년 전에 우리가 자동차를 선택한데서 나온 결과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것들을 누가 예견할 수 있었겠습니까?”
“…메사츄세츠 공대에서 연구를…기술의 영향의 대부분은 그것을 발명하고 유포시킨 사람이 실제로 이미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그것이 논리적으로도 당연한 일인 것이 그 사람들은 그 기술들의 가능한 모든 용도를 생각해내는 게 많은 돈을 투자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나서 그들은 기술의 긍정적인 면을 주목하는 평가에 기초하여 판매정책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그 기술로 인하여 가능할 수 있는 부정적인 영향도 생각해보고 그것을 될 수 있는 대로 감추려고 합니다…”(긍정의 배신)
“당신은 텔레비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컴퓨터의 경우에도 누가 이익을 보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누가 가장 많이 이익을 보느냐가 문제라고 하였습니다. 환경주의자들이 컴퓨터로 조금 이익을 보기는 하지만 기업들, 군대와 금융단체들이 막대한 이익을 본다는 것이지요…”
“저의 주장은 텔레비전이 없다면 삶이 더 나아질 것이고 권력체계는 더 평등해질 것이며, 정보의 흐름이 좀더 균등한 것이 되고, 대중전달매체는 더 민주적으로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지금처럼 소외되고 정신적인 마비상태에 빠져 있지는 않을 겁니다…”
“네, 우리가 누구인지 말하라고 하면 우리는 보통 우리가 하는 일을 말하지요.”
“그래요. 그런데 캐나다의 인디언집단에서 온 여성은 자기가 누구인지 말하는 데 45분이 걸렸습니다. 그 사람은 자기 증조부모로부터 시작해서 조상들이 어디에서 살았는지를 설명했어요…”
“정말 우리는 엄청난 소외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삶이 너무 겁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텔레비전을 보거나 비디오게임을 하면서 위안을 찾습니다. 어떤 기술들은 마약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어떻게 그런 것들을 없애고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있을까요?”(connected but alone)
“…새로운 비전을 창조해야 한다고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그들이 잃어버린 것을 다시 경험하게 해야 합니다.”
토착민들의 문화 몰락? “…정치적으로 그들은 압도되고 있습니다. 기술도 그들을 압도합니다…”
“굉장하구나, 정말 멋지다, 이걸 사용하자”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죠. 일단 그것을 사용하고서야 그 폐해를 알기 시작합니다. 우리 문화에서는 그 폐해를 아는 데 아주 오래 걸렸습니다.
기업은 이윤과 성장을 절대적으로 요구합니다
“허구적인 사람들”(법인)? 기업들은 인긴으로서의 권리를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 상응하는 책임은 하나도 지지 않습니다.(유조선 기름 유출 사건)
기업들은 사실이 아닌 것이면 무엇 이든 광고를 할 것입니다.
가트, 유럽공동체 같은 세계적인 경제통합기구, FTA? 그런 기구들은 모두 거대기업들의 이익을 극대화하기에 위해 조직된 것입니다
“인디언의 경제체제에 대해서도 주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서구사회는 서구식의 발전형태와 기술이 사람들을 고통과 노예상태로부터 구원한다는 수사를 늘어놓거든요. 토착민들의 전통경제를 조금만 조사해 보면 세계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온난한 지역은 물론이고 기후가 좋지 않은 지역에서도, 사람들이 별로 일하지 않고서 최대한의 즐거움을 누리면서 그리고 최소한의 기술을 가지고 살아나갈 수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루에 세시간에서 다섯시간밖에 일하지 않았지요.”
“평균해서 그렇지요. 그것도 일을 할 때에 그렇습니다. 전혀 일이 없는 달이 많았지요.”
“그렇게 많은 일이 없는 시간에는 무얼 했습니까?”
“빈둥거렸지요…즐겁게 지낸 것 같아요. 이야기도 했습니다. 공동체 생활이 많았습니다…”
**성문화하지 않은 구비전통
“그 과정을 생생하게 경험하기 때문이지요. 그들은 귀기울여 듣습니다. 구비전통에서는 귀기울여 듣는 것이 훈련됩니다…”
**영화 [늑대와 춤을]-시사회 이후 바뀌어버린 학살장면
“나는 영화에서 학살이 없어서 고맙게 생각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과거에 한 일을 우리는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그것은 옛날이야기도 아닌데요! 그런 일이 온 세계에 걸쳐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말입니다.”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는 데가장 저항을 많이 느낍니다…인디언들은 우리가 현재뿐만 아니라 과거에 대해서도 사과를 하고 우리가 그들에게서 훔친 많은 땅을 되돌려 주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문화가 존속하는 데 땅은 결정적입니다.
지금 우리는 그렇게 해야 될 때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인디언에게 덕이 되는 만큼 분명히 우리에게도 덕이 될 것입니다. 나는 심리적인 후련함-죄책감에서 벗어나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땅에 기초한 고대로부터의 지식, 즉 인간이 지구상에서 살아가는 적합한 방식에 대한 지식을 아직도 지니고 있는 토착민 문화를 유지함으로써 우리가 얻을 수 있는 혜택입니다.”
#위대한 작은 학교-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를 찾아서_전인순
누군가 교육을 콩 기르는 일에 비유해 설명한 적이 있다. 그 설명에 따르면 콩을 기르는 데는 두가지 방법이 있는데, 하나는 콩나물 기르기이고 다른 하나는 콩나물 키우기이다. 콩나물은 햇볕이 안드는 응달에서 물만 주면서 키운다. 이때 콩은 콩속의 생명력이 죽어가면서 콩나물로 자란다. 그러나 콩나무를 키우는 것은 이것과는 정반대이다. 콩을 땅에 심어 가꿀 때 콩은 스스로 땅 속의 자양분을 흡수하며 자라서 수십배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콩나무는 약간의 보살핌만 있으면 스스로 창조적인 삶을 꾸려나가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의 교육은 과연 어떤 모습잉까? 콩나무를 키우는 교육이기보다 콩나물을 기르는 교육에 가까운 것은 아닐까? 닫혀진 교육제도와 파행적인 입시제도속에서 온갖 굴레로 아이들의 살아있는 생명력을 얽어매고 있는 것은 아닐까?
풀무학원이 문을 여는 날 이찬갑선생은 18명의 신입생 앞에서 다음과 같은 얘기를 하였다.
“현재까지는 현대문명의 총아인 도시를 중심으로 한 도시교육, 선발교육, 물질교육, 간판교육, 츌세교육으로서 이 인간이 멸망하고 이 민족이 썩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부터의 새교육은 새로운 시대의 총아인 농촌을 중심으로 한 농촌교육으로, 민중교육으로, 정신교육으로, 실력교육으로, 인격교육으로 이 민족을 소생시키고 이 인간을 새로나게 해야 할 것입니다.”
풀무의 교육목표는 “위대한 평민”이다.
“지금은 교육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어야 합니다. 교육이란 것이 예술적 재능이라든가 체력의 건강, 사람들과 사이좋게 지낸다든지 깊은 정서, 학문적 자세 등등 폭넓은 것인데 암기식의 지식교육만이 교육이라고 잘못 알고 있는 분들이 많거든요?…아이들은 학교에서 일하고 뛰어놀고 스스로 조사 연구해야 할텐데 그러지를 못하고 있거든요. 이것은 교육미신이에요. 그걸 위정자들은 부채질하고, 학부모들은 깨닫지 못하고, 교사들은 그 틈바구니에서 본의 아닌 역할만 하고, 아이들은 그 속에서 죽을 고생만 하고 있죠. 학교가 커서 좋다거나 일류학교에 너무 집착하는 것도 20세기의 미신입니다. 부모가 손해봐도 좋다고 해야 학교가 살아요. 학교는 공장이 아닙니다. 학교가 크다는 것은 이율배반입니다. 인격을 다른지도 하면서 커지면 실제로 불가능할 수밖에 없어요…(죽도 못 쓰는 암기식 중간시험)…물론 암기하고 될 부분도 있어요. 그런데 전부 암기하려고 그렇게 하는 것은 문제지요. 그것은 교육을 망치는 것이고 청춘을 시들게 합니다.”-홍순명 교장 선생님
#풍요의 비용-일본의 여가산업과 환경파괴_게이번 매코맥
일본인에게는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시간이 없다
일본의 기업이 유례없는 번영에 도달한 반면에 사회적 빈곤은 실질적으로 광범위하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 역설적인 것은 물리적인 오락시설이 엄청나게 증가하면서도 사람들이 그러한 시설을 즐길 수 있는 시간은 전혀 증가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리조트산업의 붐과 환경파괴
장기적으로 볼 때, 가장 심각한 문제는 현재의 골프붐이 환경에 미칠 영향이다
리조트법의 통과? 토지 혹은 준공용지들을 리조트용으로 전환하는 것을 용이하게
산악 및 해안 리조트들의 “녹색” 분위기가 증진된다고 하는 것은 속임수다. 골프장의 경우마다 그러한 “녹색”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해마다 발암물질이거나 여러가지 건강문제를 일으키는 화학물질을 포함해서 3톤내지 4톤 정도의 제초제, 살균제, 살충제, 발색제, 유기 염소와 기타 비료들을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토지시장의 폭등
리조트와 여가 전략? 국민들에게 휴식이나 녹색생활의 향유가 하고 주어진 약속은 공허한 것이었음이 드러난 것이다!
#파국을 향해 가는 자동차-세계 자동차 위기와 인간의 책임_볼프강 주커만
*소음지옥
소음은 스트레스를 일으킨다…오늘날 도시나 농촌 혹은 야생지역에서도 내연기관 소리에 방해받지 않고 침묵이 15분 동안 연속적으로 유지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자동차엔진이 자연세계에 가하는 것은 폭력이다. 엔진은 끊임없이 폭발과정에 의해 추진되고, 이 폭발은 세계 전역에서 들린다.
우리는 도시에서 15분간의 침묵을 누릴 수 없다.
우리는 인간정신에 참으로 중대한 의미를 갖는 정적의 경험을 잃어버렸다. 우리에게 현대세계는 진실로 견딜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사라지는 땅? 자동차는 또 하나의 오염에 책임이 있다. 이것은 대규모의 토지를 소비하려는 자동차와 그 하부구조의 경향이다!(포장도로, 경작지 소비)
#시민과 농민이 두레로 짓는 공동체 농장:농민만으로 우리 농업 못살린다_천규식
[우리 농업 어디로 가야 하나], 녹색평론 3호
[미래의 농장]
그냥 지나치기엔 우리의 농상물시장과 밥상에 한창 유행중인 얼굴없는 유기농산물들이 무슨 원칙에 따라 생산•소비되는지 너무 혼돈스럽다.
가까이 있는 이웃의 진실보다도 편집자의 편견으로 걸러내는 신문, TV 등의 상업매체를 통하거나 외국의 수입품이라야 그 권위를 인정해주는 비주체적 풍토라면,…
새로운 농민 탄생을 위한 규칙
1)너무 많은 시간 동안 육체적 노동에 혹사당하지 말라? 자연을 관찰하고 반성하고 음미•이해할 수 있눈 시간을 잃게 된다
2)농장을 위해 외부로부터 구입하는 물품을 최대한으로 줄여라? 기계나 기구를 적게 구입할수록 재정적으로 더욱 자유스럽고 독립적일 수 있다
3)농장에서 (농업을) 돈이 아닌 정신적인 면을 더 중시하는 독창적이고 진취적인 생각을 가져라
화학농업의 창시자, 리비히(독일1803-1873)
화학공업에 대한 반성은 농업학자가 아닌 철학자 루돌프 슈타이너(오스트리아1861-1926)에 의해서 비로소 이루어진다.
모든 사람이 농민이었으며, 모든 산업이 농업중심이었음에도 종의 번식을 거듭해왔던 그 기나긴 인류사는 그 후예인 별종들의 공업만능주의로부터 원시적 가난, 저개발이란 이름으로 일거에 부인당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 땅의 농업도 농민은 없고, 기계와 화학물질과 노동자가 대신 짓는 대규모의 농업, 땅으로서의 농장이 아닌 시설공간에서 식료품을 생산하는, 농업 아닌 “식품공업”만이 우리에게 허용된 유일한 예측이고 전망임을 강요하고 있다…이 땅엔 항의전화 살림이었던 진정한 농부도 사라지고 없다.
***비농민들이 참가한 영농법인
새농업의 부활은 새농민의 귀농없이 전망할 수 없다
농삿일과 전인교육의 기회를 철저히 차단당한 진학경재교육 때문에 과거에는 누구나 할 수 있던 농삿일까지 세상에서 가장 힘든 전문직(?)이 되어 버렸다.
결국 내 밥상 살리는 일도, 더불어 살지 않고 차릴 수 없는 건강한 밥상공동체의 부활도, 이를 위한 법제도 모두 “우주적인 생각”의 여유를 통해 깨달음읔 얻은 사람 각자의 “지역적” 연대과제와 책무로 되돌아 왔다.
“녹색평론선집1 | 우리는 결국 모두 형제들이다”에 대한 2개의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