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렌트는 외로움의 문제를 무려 ‘비전체주의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 히틀러나 스탈린 같은 전체주의 지도자를 맞이할 자세를 갖추게 되는’ 계기로 풀이한 바 있다. 하지만 아렌트는 ‘혼자 있음solitude’과 ’외로움loneliness’을 섬세하게 구별한다. 혼자 있음 자체는 딱히 문제가 아니다. 혼자 있으면서 잠깐씩 외로울 수는 있다. 문제는 외로움이 ‘매일매일의 경험’이 되어버린 오늘날의 대중사회, 바로 그것이다.
사유하는 사람은 고독하지만 홀로 있지 않다.
현실을 직시하고자 노력했던 아렌트가 우리 시대를 본다면, 그 특징으로 외로움을 꼽을지 모른다…국내 정치와 국제 정치가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시대…자연스레 시민들의 활동이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바로 그 시민들이 외롭다.
아렌트는 더 나은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구성원들이 공익 대신 공공성을 갖춰야 한다고 설명한다. 공익은 이익에 관심이 크지만, 공공성은 이익에 관심이 없다.

아렌트에 따르면 수고로운 노동이 복되다. 수고스럽고 고통스러운 노동이 있으므로 인간의 삶은 복되다…아렌트는 수고로운 노동 사이사이에 반드시 알맞은 휴식이 주어져야 인간다운 삶이 영의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노동에서 해방된 삶이 아니라 노동할 수 있는 삶이 의미 있는 삶, 복된 삶이다.
왜냐고? 인간이 비단 사회적 동물이어서가 아니라, 정치적 동물이어서 그렇다.
가짜 뉴스의 진짜 문제점? 사실적 진리를 거짓말로 교체한 결과, 현실 세계에서 우리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는 감각이 파괴되어간다.
자유는 반가운 선물이자 예기치 못한 기적이다. 세상 모든 사람의 자유가 그러하다.
인간의 평등은 인간에게 달려있다…사회 현실을 미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에, 아렌트의 평등사상은 평등의 결정권자가 우리 자신임을 강조한다. 평등의 문제를 신에게 떠넘기지 말고 우리가 직접 처리하지는 것이다.
특정 단어만 넣어도 금서로 지정하고 반정부 발언을 하거나 들으면 체포해 고문과 처형을 일삼은 박정희 정권을 떠올려보라. 겁에 질린 사람들은 조심조심 살았고, 정부의 지시를 고분고분 따랐으며, 내심 반대 의견을 가졌을지라도 최소한 따르는 시늉은 했다.
폭민. 홀로 있을 때는 자존감을 느끼지 못하고 만족하지도 못하는 사람이 자기와 비슷한 이들과 모여 비슷한 관심을 공유할 때만 위로받고 만족하는 현상이 폭민 현상이다.
폭민은 서로 다른 의견을 동등하게 제출하고 토론하는 방식의 민주주의적 교양을 갖추는 데는 별 관심이 없다. 이들은 정치 자체에 냉담한데, 격렬한 적대감을 표명할 수 있는 대상이 나타나면 한껏 흥분할 준비가 되어 있을 뿐이다.
사람들이 모여 하나의 주제를 강력하게 떠드는 곳이라면 어디로든 무리 지어 달려가 목소리를 더할 채비를 갖춘 “다수의 성난 개인들”이다.
그는 ‘철학 따로 현실 따로’ 생각하지 않았다. ‘머리 좋고 공부 잘하니까 인간성은 좀 떨어져도 괜찮아’ 같은 태도는 야스퍼스에게 어불성설이었다. 오히려 철학, 즉 사유 좀 한다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사유의 내용과 과정과 결과에 책임져야 한다고 보았다….실존주의 철학자로서 야스퍼스는 실용적이라기보다는 실천적이었다.
정치의 역사를 만들어온 용서. 아렌트는 인간 사회에서 사과 없이 용서가 필요한 이유를 ‘돌이킬 수 없음’이라는 행위의 속성에서 찾는다. 인간의 행위가 돌이킬 수 없는 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인간은 용서해야 하고, 할 수밖에 없으며, 어떤 면에서는 부지불식간에 이미 서로를 용서하고 있다…정치적 삶으로서 행위를 시작한 사람은 용서 때문에 주저 없이 행위의 공간에 들어선다. 만약에 정치에서 용서가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면, 자칫 행위를 잘못할세라 다들 몸 사리고 앉아만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만이 지니는 고유한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아렌트는 그것을 ‘행위action’에서 찾는다. 행위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전통에서 나오는 용어 ’정치적 동물‘의 계보를 잇는 개념이다.
아렌트는 이 방화 사건 이후로 합법의 테두리 안에서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치안 활동, 다시 말해 ‘불법체포’와 ‘보호감호’가 빈번히 그리고 공공연히 일어났다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이런 판국에 단순히 방관자로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을 더 이상은 하지 않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권력이 약해지면 폭력은 강해진다…폭력은 고요함, 적막함을 목표로 한다. 사람들이 자유롭게 ‘놀리는’ 입을 틀어먹는 것이 폭력이다…반면에 권력은 사람들의 말소리와 움직임을 근절하려 하지 않는다…지지자가 없으면 권력도 없다. 지지가 줄어들면 그제야 권력자는 폭력을 강화한다.
나치에 부역한 공익 추구자들…공익은 공동체의 이익…그들이 추구한 공익은 나치 독일의 공약이었으며, 그 내용인즉 히틀러가 선포한 영토 확장이었다. 자, 이제 공익의 의미를 한마디로 요약해보자. 공익은 편파적인 것이다.
공공성. 자유롭게 생각하되 공개적으로 검토하라…공공성은 전체를 넓게 본다. 전체를 조망하면서 사익에는 냉담하고 공익에는 무관심한 지점을 표방하는 것이 공공성, 공정성이다…공익이든 사익이든 이익의 문제를 다루지 않기 때문이다. 이익의 문제에 무관심하고, 냉담하다…자기 생각을 자유롭게 그리고 공개적으로 검토받는 것이 공공성의 기초다. 밀실 정치, 파벌 정치, 야합 정치 등은 공공성을 저해한다.
칸트가 생각했던 세계시민은 ‘독서 대중’이었다. 그가 살았던 18세기 말 절대군주 치하의 국가에서는 독서와 글쓰기외에 진정한 공적 영역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잘 통할 듯해서 소통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잘 통하지 않을 듯해서 소통을 원한다…서로 다르니까 소통하려는 것이며, 달라서 소통이 되는 것이다. 서로 다른 경험을 했기 때문에 인간은 바로 그 다름을 소통한다.
자유는 새로운 사람이 나타나는 데 있고, 새로운 행위가 드러나는 곳에 있으며, 새로운 사건이 일어나는 자리에 있다. 자유가 있는 바로 그곳에서 인간은 인간답게 산다. 자유가 행위, 곧 정치를 자아낸다.
악의 평범성. 무사유. 타인의 처지에서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 곧 악이다.
나치는 정치를 해가면서 정권을 획득한 게 아니라, 정치를 없애가면서 정권을 획득, 확장해갔다.
정치를 거부하는 철학을 거부하다…아렌트에게는 철학자들이 문제였지 철학이 문제였던 것은 아니다.
모든 사유는 경험에서 발생한다. 모든 사유는 뒷궁리다…사유는 ‘홀로 있으면서 나 자신과 접촉하는‘ 것이다. 그것은 ’고독solitude’의 상태에서 진행된다. 그러나 사유하는 사람은 고독하지만 홀로 있지 않다.
오늘날 우리는 ‘하강’을 느낀다.
공동체와 각자의 삶이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다는,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분위기가 곳곳에서 풍긴다.
단절된 채 각자도생하는 사람들과 갈피 잃은 사회에 전체주의는 뿌리내린다.
한나 아렌트는 말한다.
사유와 소통, 행위와 정치가 사라진 ‘인간 실종 시대’에 인간다움은 위협받을 수밖에 없다고.

그 어느 때보다 정치가 필요한 시대, 정치란 무엇인지? 정치가 왜 필요한지? 정치가 사라진 시대에 필요한 정치 수업을 위한 아렌트의 훌륭한 정치 수업을 들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