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지금 한나 아렌트를 읽어야 하는가? 나카마사 마사키. 259쪽.

행위=자유…사이…인간의 조건…후마니타스…인문학적 소양..인격을 갖추어야…자연인은 동물과 다를바 없다…다원성…정치…공공선을 토론하는 공간…정치참여야말로 자유로운 인간의 조건
정치인들의 이해관계에 의해 조작되는 ‘악의 구도’, 마치 연극 무대처럼 ‘쇼와 스펙터클 보여주기’만을 일삼는 정치, 이해득실만 따지는 정쟁만 있을 뿐 인간의 조건에 대한 본질적이고 대승적인 성찰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이익 투쟁의 정글, 소통할 동기도 의욕도 찾지 못하는 보통 사람들, 차라리 눈을 감고 귀를 닫고 사는 게 낫겠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소외감을 묘사한다.
어디서 많이 듣고 보던 모습 아닌가?…정치의 역할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하고, 매스미디어는 정치를 희화화하고 쇼로 만들고, 서로가 서로를 악의 근원으로 규정하지 못해 안달하는 정황이 작금의 상황이다.
해법은 무엇일까? 저자는 한나 아렌트가 단순한 해법을 제시하지 않았다는 점이 그의 철학적 매력이라고 갈파한다.
‘무엇을 해야 할까’에 대해서는 가르쳐주지 않는다. 참 답답한 노릇이다. 그러나 실은 이 ‘답답함’이야말로 한나 아렌트의 매력이다.
‘정치’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상가는 종종 속전속결로 독자나 청중의 공감을 얻기 위해 귓전에 맴도는 말을 사용하여 ‘알기 쉬운’ 결론으로 확 잡아당기려 하기 마련이다. 이럴 때 ‘알기 쉬움’이란 단순하게 ‘명확한 답’만 주어지면 만족하여, 더 이상 스스로 생각할 필요도 없을 뿐 아니라 생각할 마음조차 일어나지 않게 하는 상태를 가리킨다. 다시 말해 정치사상가가 독자나 청중을 ‘대신하여’ 생각해주는 것을 말한다.
특히 ‘정치’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스스로 의식이 높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이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스테레오타입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겐페이 전투에 열을 올린다고 감히 생각도 못한다…한나 아렌트가 자신의 저작을 통해 반복적으로 문제 삼는 것은 그런 식으로 이루어지는 ‘정치사상’의 스테레오타입화 또는 균질화일 것이다…현대 ‘정치’는 사람들의 이해, 관심, 의견을 집약하기 위해 각종 미디어를 이용하여 정보를 조작하고 가공한다. 한마디로 ‘알기 쉽게’ 만들어버리는 것이다…그러나 ‘정치’를 둘러싼 ‘알기 쉬움’에 지나치게 익숙해지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사고가 점차 단순해져 복잡한 사태를 복잡한 상태로 파악할 수 없게 된다….한마디로 사고정지 상태가 되는 것이다.
‘나’에게 이익을 가져다주는 것은 ‘좋은 정치’…’당파 사이의 거래=정치’라는 이해가 상식이 되어버리면 각자의 이해관계를 뛰어넘은 ‘선’이나 ‘정의’룰 추구하는 ‘토의’ 따위는 무의미해진다….결국 한나 아렌트의 말로 짚어보자면, 이해관계 때문에 ‘선’의 탐구를 내버리면 안 되고, 특정한 ‘선’의 관념에 지나치게 갇혀도 안 된다…마음을 열고 계속 토의하는 것이 중요하다…다양한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물질적 이해관계를 떠나 공공의 장에서 서로 언어를 통해 설득하려는 것이 한나 아렌트가 생각하는 본래의 ‘정치’다. 폭력이나 감정으로 상대를 지배하려 하지 않는 이러한 ‘정치’를 통해 ‘인간’다운 관계성을 길러낼 수 있다는 것이 한나 아렌트의 독특한 ‘인간’관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한나 아렌트라면 이런 문제에 이런 식으로 말할 것 같다는 내 나름의 상상에 입각하여 한나 아렌트의 대변자로서 발언할 것이다…한나 아렌트와 닮은 방식으로 ‘비뚤어진 사고’에 의해 실천해보고 싶어졌다…’명석한 답’을 기대하고 한나 아렌트를 읽으면 혼돈에 빠질 뿐이다…한나 아렌트로부터 자극을 받고 ‘내 나름대로 비뚤어지기’를 시도할 생각이다.
에리히 프롬의 아무런 제약 없는 자유로운 상태를 견딜 수 없어 하는 사람들이 전체주의적 권위에 몸을 기대고자 하는 문제를 지적했다.
한나 아렌트는 대안적 사고를 내걸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녀는 ‘인간’이란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자신의 세계관•가치관을 강하게 밀어붙이지 않는 것 같다. 스스로의 세계관•가치관을 전면에 내놓지 않는 모습은 이후 그녀의 저작에서 나타나는 기본자세다…자신의 생각을 ‘유일하게 올바른 대안’이라고 독자에게 강요하면 안 된다는 자세를 줄곧 유지하는 것이 그녀의 고유한 세계관•가치관이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확실히 알지도 못하면서 알고 있는 것처럼 여기는 사람이 바로 ‘대중’적인 인간이다.
‘대중사회’의 ‘대중mass’에는 ‘매스미디어’의 매스가 그러하듯 소비자라는 뉘앙스가 내포되어 있다…수동적으로 소비할 뿐…정치에서 말하는 ‘대중’이란 스스로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여 자신의 이상을 추구하는 것이 아이라 정치가나 정당이 약속하는 이익과 거래를 선거 등을 통해 지지하며 꽁무니만 따라다니는 수동적 존재다…’시민사회’…수동적 시민은 정치의 소비자로 변했다. 이것이 ‘대중’에 깃들어 있는 일반적 이미지다.
전체주의는 현실 세계의 불안이나 긴장감을 견딜 수 없게 된 대중이 도망갈 수 있는, 그야말로 ‘총체적’ 공상세계를 구축한다. 총체적인 공상적 세계 안에서 대중은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
‘인간다움=후마니타스’. 그러면 고대의 ‘후마니타스’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자유인’으로서 ‘폴리스’의 ‘정치’에 관여하는 시민이 몸에 익혀야 할 기본적인 교양 같은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문법, 논리학, 수사학, 산술, 기하학, 천문학, 음악 등이 속한다…하나의 인격으로서 자율적이고 이성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인간’을 전제한다.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면 거기까지 이르는 토론 과정에서 어떠한 논리, 어떠한 레토릭이나 몸짓을 이용하여 상대의 사고에 효과적으로 영향을 주었는지는 나중에 따질 문제다…오로지 공통의 이익을 추구하는 시민들의 행동은 불가피하게 균일화된다…’경제’적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획일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시민들은 사고정지 상태에 빠져 자신에게 이익을 약속해줄 것처럼 보이는 국가의 행정기구나 세계관정당 같은 것을 기계적으로 추종하기에 이른다…대중사회는 사람들이 동물의 무리처럼 ‘일체’가 되어 움직이는 전체주의 체제를 낳을 가능성을 숨기고 있다.
대중사회 속에서 생활에 얽힌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인간’다운 개성, 다각적인 사고법을 잃어가는 현상을 가리켜 마르크스 주의 계열의 사회이론은 ‘소외’라고 부른다.
한나 아렌트는 그러한 냉엄한 현실을 충분히 숙지하면서 ‘인간성의 훌륭함’ 또는 ‘휴머니즘’을 순진하게 믿고, 그 믿음에 근거하여 언젠가 유토피아를 실현할 수 있으리라고 보는 ‘양심적’인 지식인들에게 경고를 보내고 있다. ‘인간성’에 대한 순진한 이상에 들어맞지 않는 자를 배제하는 전체주의로 이어질 수도 있다고 말이다.
단지 사람으로 태어났다고 해서 ‘인간’의 특징인 다각적 사고를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자유’는 바로 ‘행위’를 통해 산출되는 사람과 사람 ‘사이’라는 공간 속에 존재한다…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정치’에 참여하는 각 시민의 책무를 중시하고, 정치적 참여와 ‘자유’를 표리일체로 보는 사고방식을 가리켜 ‘공화주의’라고 정의한다.
그녀에 따르면 ‘해방’이 ‘자유’ 자체는 아니다. 한나 아렌트에게 ‘자유’는 고대 폴리스의 시민들처럼 어떠한 물리적 제약에도 억눌리지 않고 공적 영역에서 ‘행위’하는 상태를 가리킨다. 물질적 결핍 상태 또는 폭력에 의한 억압 상태에서 ‘해방’된 사람이 거기에 만족한 나머지 자신이 속한 정치적 공동체의 ‘공동선’에 대한 탐구를 멈추어버린다면, 그 사람은 ‘자유롭다’고 말할 수 없다. ‘공동선’을 둘러싼 끊임없는 토론을 통해 ‘인간’의 본래적인 ‘자유’가 나타나는 것이다. (자유=행위=정치참여!)
사람들의 동물적 욕구를 ‘훌륭한 인간성’이라고 착각하여 ‘정치’의 앞무대로 끌어올려 ‘해방’ 시켜버리면 사회에는 동물적인 폭력만 흘러넘치게 된다. 프랑스혁명은 실제로 인간의 동물적인 파악함으로써 풀어놓았다.
마르크스주의와 한나 아렌트는 모두 개인이 ‘내면’에 틀어박히는 경향에 내재한 근대 ‘철학’의 경직성을 타파하고 ‘인간’을 재발견하고자 하는 비판적 자세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중요한 핵심인 ‘인간’상이 정반대이기 때문에 지향하는 바가 완전히 거꾸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