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올 김용옥.
“오늘 왜 우리 조선의 역사가 요 모양 요 꼴이 된 줄 아시오? 일제식민지의 비극일 것 같소? 몰지각한 좌•우이념의 투쟁일 것 같소? 정신못차리는 정객들의 부패와 우롱때문일 것 같소? 안일한 학자들의…”
한참 동안 열변을 토하시던 끝에 단도직입적으로 내뱉은 한마디! 내 평생 두고두고 생각해봐도 일리가 있는 명언이었다.
“테레비때문이오! 테레비! 테레비만 안 생겨났더라도 우리 민족이 이토록 타락하지만 않았을 게요. 인류는 앞으로 이 테레비 때문에 패망할 것이오!” #한창기
더 중요한 문제는 이 매스컴의 창조적 계기를 만들어갈 수 있는 도덕적 구심체가 부재하다는 사실이다.
나는 사회 전반적으로 테레비 시청률이 내려가는 편이 좋은 사회일 것이라고 생각한다…국가의 개입방식이 테레비를 “시청률경쟁”에서 해방시켜주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다시 말해서 테레비 프로그램의 질을 높이고 상대적으로 테레비 시청률을 낮추어가는 방향으로 대세를 잡아야만 그 사회가 건강해질 수 있다.
21세기 인류의 3대 과제?
그 첫째가 인간과 자연환경의 화해요, 그 둘째가 종교와 종교간의 화해요, 그 셋째가 지식과 삶의 화해다. 이것이야말로 곧 우리가
20세기 과학문명의 시대?
20세기 인류사를 특징지우는 희대의 사건은 20세기를 통하여 기술과 과학이 본격적인 랑데뷰를 시도했다는 사실이다.
기술이란 본시 삶의 예술의 모든 것을 지칭한다. 살아가는 방편으로서 필요한 모든 예술 즉 기예(테크네)를 말하는 것이다. 까치가 휘엉청거리는 나뭇가지 끝에 태풍에도 견디는 견고한 집을 짓는 것은 분명 까치의 “기술”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까치의 “과학”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과학이란 본시 기술과는 무관한 인간의 사변이성의 산물인 것이다.
우리가 소위 개화를 통하여 경험해야만 했던 서양 콤플렉스는 바로, 과학과 기술이 본격적인 랑데뷰를 시작하여 구성한 새로운 문명에 대한 콤플렉스였던 것이다.
과학과 기술의 랑데뷰! 이것은 순식간에 우리가 살고 있는 문명의 모습을 뻥 튀겨놓았다…공상이 마구 현실로…꿈이 현실이 된다는 것은 매우 즐거운 일..그러나 인류는 이 기쁨에 도취하여 매우 중요한 사실을 망각했다. 그들은 꿈 그 자체를 하나 둘 잃어가고 있었던 것이다…꿈의 상실은 인간 그 자체의 도덕적 파멸인 것이다.
4,000년 동안 인간이 건드릴 수 없었던 성역이 40년 동안에 무너졌다면 이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단군이래 4,000년 동안의 연속성을 우리 한민족이 불과 40년 동안에 불연속성으로 바꾸어놓았다면 21세기 우리문명의 과제는 너무도 명약관화하다.
공부는 재미있어서 하는 것이다. 재미가 없다면 내가 공부를 할 리가 없다…그리고 무엇보다도 공부하는 재미는 지속적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해도 지루하지 않고, 아무리 해도 지칠 줄 모르는 것이 공부인 것이다.
인문과학•사회과학•자연과학•예술과학…과학 아닌 지식이 없다. 그러나 19세기 말까지만 해도 우리의 지식이라고 하는 것, 즉 독서를 한다고 하는 것은 모두 오늘의 개념으로 말한다면 “고전학”에 불과했다…그리고 그러한 지식의 체계만으로도 우리는 우리의 문명을 충분히 운용할 수 있었다.
도가도비상도 #명가명비상명
언어의 한계를 자각하지 못하는 자는 언어를 참으로 명료하게 인식할 수 없다.
불상현
불상현, 사민부쟁
불귀난득지화, 사민불위도
불견가욕, 사민심불란
…
상사민무지무욕
사부지자불감위야
위무위, 즉무불치
훌륭한 사람들을 숭상하지 말라!
백성들로 하여금 다투지 않게 할지니.
얻기 어려운 재화를 귀하게 하지 말라!
백성들로 하여금 도둑이 되지않게 할지니.
욕심낼 것을 보이지 말라!
백성들의 마음으로 하여금 어지럽지 않게 할지니.
….
항상 백성으로 하여금
앎이 없게 하고
욕심이 없게 한다.
…
함이 없음을 실천하면
다스려지지 않음이 없을 것이니.
불귀난득지화
냉혹하게 분석하자면, 우리가 살았던 20세기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대립했던 적은 없다. 자본주의만 있었고, 자본주의의 존재양식의 다양한 한 방편의 형태로서 공산주의라는 경제체제가 존재했을 뿐인 것이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본연이다….2500년전의 노자도 우리와 똑같이 자본주의를 분석하고 자본주의에 대한 정의를 내리며, 자본주의를 어떻게 제어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이다…노자는 자본주의를 “인간의 욕망을 자극시키는 재화의 유통”이라고 규정한다…그런데 이 화의 세계는 “쟁”이라는 근원적인 모랄의 구조속에서 틀지워져있다고 갈파한다. 난득지화를 끊임없이 귀하게 만들어 인간을 경쟁구조속으로 집어넣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끊임없이 상품의 생산을 재촉한다….그래서 결국 전 국민을 도둑놈으로 만든다고 한다.
현인을 숭상치 않으면 백성이 다투지 아니하고, 얻기 어려운 재화를 귀하게 만들지 않으면 백성이 도둑놈이 되지 아니하고, 욕심낼 만한 것을 보여주지 않으면 백성의 마음이 어지럽지 않게 된다라는 이 세 마디의 언급속에서 노자는 인간의 사회제도의 가장 본질적인 측면인 자본주의의 모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노자가 말하려는 것은 본연에 대한 당연이다. 공산주의라는 것도 20세기에 인류가 자본주의라는 본연에 대하여 시도한 하나의 당연이다.
유의가 저지르는 문제를 우리는 유위적 방법에 의하여 다 해결할 수는 없다. 그것은 유위의 악순환이다. 다시 말해서 자본주의라는 유위를 해결하는 방법이 공산주의라는 또 하나의 유위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유위의 본질적인 부정 즉 무위론이 없었다. 이것이 맑스와 노자가 크게 다른 점이다.
우리 몸의 뜻이란 간사한 것이다. 이랬다 저랬다 마음먹기에 따라 제멋대로 왔다갔다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뼈는 우리의 사유가 쉽사리 먹히지 않는다…인간의 뜻이란 쓸데없는 일을 벌리기 좋아한다. 욕망의 지향성에 따라 많은 유위의 세계를 지어낸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뼈를 갉아먹기만 하는 피곤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인간은 마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배로 산다! 이것은 우리의 통념을 깨는 노자의 지혜다. 그리고 이것은 뇌중심의 서양인체해부학에 대하여 오장육부 복부중심의 한의학적 인간학의 지혜로운 가치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요청하는 것이다.
상사민무지무욕
상사민무지무욕! 항상 백성으로 하여금 무지•무욕하게 하라! …이 한마디 때문에 유가사상가들은
여기 내가 대학교 때
노자가 말하는 것이 과연 무지일까? 노자가 말하는 것은 무지(ignorance)가 아니다. 무식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노자의 무지는, 인간이 무관심할 수 있는 상황에서 무관심할 수 있는 여유, 불필요한 지식에 오염되지 않은 영혼의 순결함, 인격의 소박함, 생활의 단순함이다. 순결, 소박, 단순! 이런 것들을 노자는 “무지무욕”이라 부르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20세기가 무지로부터 유지에로의 탈출이었다고 한다면, 노자는 말한다. 우리의 21세기는 유지로부터 무지에로의 탈출이 되어야 한다고. 노자는 과연 우민사상가일까?
위무위
위무위! 노자가 말하는 무위는 적극적 위의 대상이다. 노자는 은자의 도가 아닌 현자의 도를 말하며, 피세의 진리가 아닌 적극적 개세의 진리를 말하는 것이다. 노자는 현실의 혐오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사랑을 말하는 것이다.
자연이란 무엇인가? 물론 이 자연이라는 말은 노자라는 사상가가 최초로 썼던 말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자연의 개념을 가지고 노자의 자연을 이야기하면 오류에 빠지는 것이다…우리가 말하는 자연은 서양언어의 nature나 natur에 해당되는 명사다…그러나 노자는 자연을 명사로 말한 적이 없다…그것은 명사가 아니라 상사인 것이다.
동양에서 천과 지라는 것은 실체적인 대상을 가리킨 적이 없다. 땅이나 하늘이나 동양적 세계관에 있어서는 모두 기다…땅은 기의 유형이요, 하늘은 기의 무형일 뿐이다…옛사람들은 나의 몸의 하늘을 혼이라 했고, 나의 몸의 땅을 백이라 했다. 그리고 또 나의 몸의 하늘을 신이라 했고, 나의 몸의 땅을 정이라 했던 것이다…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뜻도 모르고 정신을 마치 신에 해당되는 spiritual한 부분의 뜻으로만 새기고 있는데, 정신은 정신이 아니요,..내 몸의 하늘과 땅을 같이 이름이다. 오늘날의 정신분석학이나 서양의학의 모든 오류가 이 “정신” 두 글자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다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천지불인! 성인불인!
인자하게 되면 반드시 조작하고 편들어 세우고 베풀고 변화시키고 하는 따위의 장난이 개입된다.
천장지구
하늘은 너르고
땅은 오래간다.
하늘과 땅이 너르고
또 오래갈 수 있는 것은,
자기를 고집하여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래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그 몸을 뒤로 하기에
몸이 앞서고,
그 몸을 밖으로 던지기에
몸이 안으로 보존된다.
이것은 사사로움이 없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오히려
그 사사로움을 이루게 되는 것이니.
천지가 장구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사유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유(소유)한 인간들이여! 어찌 천지처럼 장구하기를 바랄손가!
모든 종교는 희생정신이 없이는, 그 종교의 고등성을 확보할 길이 없다.
우리가 새삼 다시 인식하여라 사실은
1961년 5월 16일, 국사시간! 나에게는 참으로 인상깊은 한시간이었다.
“여러분! 오늘 우리역사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어떠한 역사가 새롭게 전개될지라도 지금 제가 하는 말을 꼭 가슴깊이 명심하여 두십시오. 쿠테타는 결코 바람직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질서라는 명목아래 혼돈을 말살해서는 아니됩니다…그것은 우리역사가 단군이래 처음 맞이한 민주의 가능성이었습니다. 혼돈의 과정이 없이 민주의 성립은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이 시점에서 말살되기보다는 조금 더 지속되었어야 할 혼돈이었습니다. 참으로 애석하게 생각합니다…”
나에게
‘천재소년’ 왕필의 기발한 주석!
나는 이러한 옛사람들의 언어를 들여다 보고 있으면 좀 소름이 끼친다. 너무도 현대철학의 다양한 주제들이 이미 이 간략한 옛사람들의 언어속에 아주 명료하게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색영인목맹
오음영인이농,
오미영인구상.
말초감각을 자극하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병폐에 대하여 이처럼 통렬한 비판의 소리는 듣기 어려울 것이다.
큰 도가 없어지니
인의가 있게 되었다.
큰 지혜가 생겨나니
큰 위선이 있게 되었다.
육친이 불화하니
효도다 자애다 하는 것이 있게 되었다.
국가가 혼란하니
출신이라는 것이 있게 되었다.
“나는 내 스승에게 일찍이 들었소. 인간의 삶에 기계가 도입되게 되면 기계로 인한 일들이 반드시 생겨나게 되오. 그리고 기계로 인한 일들이 생겨나면 반드시 기계로 인한 나태한 마음이 생겨나게 마련이오. 그리고 이러한 기계로 인한 마음이 가슴에 들어박히게 되면 순결하고 물들지 않은 인간의 본성을 해치게 마련이라오…우리 존재는 영영 도에서 멀어져 갈 뿐이라오.”
우리가 위대한 과학의 발전이라고 외치는 많은 문명의 양태들이 그 근본을 뒤집고 보면 아주 하찮은 인간의 나태의 산물일 수도 있다. 나태하고자 하는 마음, 조금 더 편하고자하는 마음 때문에 문명은 발전할지 모르지만 우리의 몸과 마음이 썩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다시 한번 21세기로 넘어가는 길목에서 반성해봐야 할 것이다.
제도의 개혁만이 시대의 진정한 개혁이라는 생각은 망상이다. 제도적 개혁 그 자체가 언어공동체적인 자각의 기반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나는 그러한 자각을 불러일으키는데 나의 신념을 실천에 옮겼을 뿐이다…황소궁둥이에는 쇠파리가 들끓는다. 그러나 그것은 황소의 생명력이다…쇠파리들 황소의 앞길을 막는다고 앵앵대는 것은 참으로 부질없는 짓이다…쇠파리 때문에 앞길을 그르치는 법은 없다. 오늘도 황소는 묵묵히 자기 갈 길을 갈 뿐이다.
모든 철학적 문제들은 언어가 휴가갔을 때만 생겨난다. #비트겐슈타인
천하신기, 불가위야
천하란 신령스러운 기물이다.
도무지 거기다 뭘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도상무상
욕심은 관성과 타성이 있다. 그것은 자신을 파멸시킬 때까지 무한정 확대해나가는 속성이 있다. 기•명•욕(심)은 노자에게 있어서는 다름아닌 문명의 별명인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노자는 인간세의 문명이 있어서 가장 중요한 덕성은 바로 그침이라고 말한다.
지인자지자지자명
지혜란 본시 장황한 논리적 전개가 아니다. 모든 지혜의 평범한 삶의 문지에 대한 단순한 통찰 몇마디에서 완성되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항상 잊지말아야 한다.
도상무위이무불위
불욕이정, 천하장자정.
도는 늘상 함이 없으면서도
이루지 못하는 것이 없다.
욕심내지 아니하고 고요하면,
천하가 스스로 제자리를 찾아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