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스크리트 원문에서 본 반야심경 역해. 김사철&황경환. 270쪽

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번역하기 위해서는 두 언어를 단순히 ‘안다’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결국 고전의 번역은 그 고전의 저자가 의도한 의미라기보다는 번역자가 그 고전에 부여한 자의적 해석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러분, 나의 언어에 주의를 기울여주시오. 그리고 언어가 내포하고 있는 의미에 주의를 기울여주시오. 그리고 이 의미를 도출한 심오한 인간적 경험에 주의를 기울여주시오!”-달라이 라마, 영국에서 청중에게 당부한 말
이제 우리 불자들도 <프라즈냐 파라미타 흐리드야 수트라>를 아름다운 우리 배달말로 직접 번역해서 독송해야 할 것이다.
“…우선 그 마을 사람들이 쓰는 그들의 사투리를 먼저 배워라. 그리고 그 마을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이 담마를 전하라!”
고타마는 자기가 발견한 담마, 즉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이론과 방법을, 실제 삶에서 고통받고 허덕이는 민중에게 접근하여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전했고, 또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해달라고 주문했다. 고통받는 민중에게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 <반야심경>이라면 그것은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그들의 언어로 쓰여야 한다.
<반야심경> 강의와 해설서….누군가가 만약 ‘그것을 듣고 보는 사람의 무지 때문이야’라고 말한다면, 그 말은 정당화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는 무명 중생들에게 가르쳐주신 깨어남의 길은, 요즘의 초등학교를 나오지 않은 사람들도 다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말씀이었기 때문이다.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대부분의 사람들, 특히 한글세대는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는 채 주문처럼 그냥 독송하기만 할 따름이다.
고대 인도 언어인 산스크리트로 쓰인 <프라즈냐 파라미타 흐미다야 수트라>를 7세기 중엽 중국의 현장 스님이 자국인을 위하여 한문으로 번역한 것을 다시 우리식로 발음한 결과가 위의 알 수 없는 주문인 것이다…오늘날 중국 사람은 물론 현장이 살았던 당나라 시대 사람들의 소리도 아닌 도무지 알 수 없는 이상한 ‘주문’이다. 그럴 바에야, ‘흐리다야 수트라’를 한글로 음역해서 읽는 것이 오히려 더 영험이 많지 않을까?…
왜 우리는 이 알지도 못하는 ‘주문’을 계속 독송하고 있는가?
“인간 세상의 과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마음의 힘은 따라잡을 수가 없다…DNA의 변화를 좌우하는 가장 큰 힘은 마음이다…그리고 지구상에 살고 있는 70억 명의 세포 속에 들어 있는 모든 유전자 정보를 다 모아도 쌀 한 톨의 무게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만 봐도 유전자의 세계가 얼마나 광활하면서도 미세한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일미진중함시방’, 참으로 “한 티끌 안에 온 우주가 다 들어있다”는 말을 다시 한번 되새겨볼 일이다.
비어 있음. 공.
“이 방에는 의자가 ‘비어 있다'”
고타마가 무엇 무엇이 ‘비어 있다’라고 말할 때, 그것을 “다른 것은 다 있지만, 그 무엇 무엇만은 없다”라고 이해해야 한다.
“내가 먹어본 사과 맛을 나에게 맛이 어떠냐고 네가 물으면 나는 기껏해야 ‘달다’ ‘시다’ 정도밖에 표현할 수가 없지 않겠느냐. 진짜 맛은 그대가 직접 먹어보아야 안다”(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다)
“엉 그래, 대중 앞에 나가서 부처님 말씀을 전한다는 것이 산에 들어가서 맨손으로 범을 잡는 것보다 더 어렵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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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도를 싣는 그릇에 불과하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이상한 ‘주문’이 되어버린 반야심경? 산스크리트 원문을 우리말로 직역(!)한 반야심경! 비록 불자는 아니지만, 지혜를 뜻하는 ‘반야’, 지혜를 구하는 마음으로 호기심과 함께 찬찬히 읽어보는 반야심경 번역해설서. 그리 길지 않은 법문을 우리말로 쉽게 번역을 했다지만, 반야심경에 담긴 깊은 깨달음을 느껴보기에는 만만치 않은 공부가 필요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