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땅의 예찬. 한병철.
모니터보다 정원이 더 많은 세계를 담고 있다
타자의 시간. 정원에서 일하게 된 뒤로 나는 시간을 다르게 느낀다. 시간이 훨씬 더 느리게 흐른다.
정원의 시간은 타자의 시간이다. 정원은 내가 멋대로 할 수 없는 저만의 시간을 갖는다. 모든 식물은 저만의 시간을 갖는다.
이때껏 이런 행복감을 알지 못했다. 이는 또한 매우 육체적인 것이기도 하다. 나는 육체적으로 이토록 활동적이었던 적이 없다. 이렇듯 집중적으로 땅과 접촉한 적도 없다. 땅은 행복의 원천인 듯하다. 땅의 낯섦, 다름, 그 독자적 생명에 나는 자주 놀라곤 했다. 육체노동을 하면서 비로소 나는 땅을 내밀히 알게 되었다…정원에서 나는 삶의 고난에서 벗어나 원기를 얻는다.
행복에 대하여.
식물과 동물은 우리의 옛날 모습, 앞으로 되어야 할 모습이다. 우리는 그들처럼 자연이었으니, 우리의 문화가 우리를 이성과 자유의 길을 통해 자연으로 도로 데려가는 것이 옳다. 식물과 동물은 우리에게 영원히 가장 소중한 것으로 남아 있는, 우리 잃어버린 어린 시절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아름다운 이름들.
고유한 이름으로 부르기가 각각의 무화과 종류를 체험할 열쇠를 손에 쥐어 준다. 인식이 아니라 체험이 중요하다. 진짜 체험, 즉 불러내는 대상은 보편성이 아니라 독특성이다. 오로지 이것만이 만남을 가능하게 한다.
평범한 것에 높은 의미를, 일상의 것에 신비로운 겉모습을, 잘 아는 것에 모르는 것의 품위를, 유한한 것에 무한한 모습을 주어서 나는 그것을 낭만화한다.
세상의 디지털화란 완벽한 인간화 및 주체화라는 것과 같은 뜻으로 땅을 완전하게 사라지게 만든다.
‘디지털’은 프랑스 말로는 뉘메리크이다. 즉, 숫자로 된 것이란 뜻인데, 이것은 신비로움을 없애고, 시를 없애고, 세상을 낭만적이지 않게 만든다…모든 것을 알려진 것, 진부함 것, 친숙한 것, 내 마음에 드는 것, 동일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모든 것은 동일하게 비교할 수 있게 된다.
땅을 그냥 착취 대상의 자원으로만 대한다면 그것으로 이미 땅을 파괴한 것이다.
어쩌면 땅이란 오늘날 우리에게서 점점 멀어져가는 행복과 동의어인지도 모른다.
서울의 거룩한 산인 인왕산에 올랐다. 서울은 아직 겨울 날씨. 초록은 없고 온통 잿빛 콘크리트다…오늘날에는 거의 누구도 신경 쓰지 않지만, 신령들은 계시다. 이곳 사람들은 돈을 신으로 모신다. 땅, 아름다움, 선은 사라져 완전히 파묻혀버렸다.
옥잠화에 대한 나의 첫 판결을 부끄럽게 여긴다. 그것은 잘못된, 틀린 생각이었다. 내 무지 탓이었다.
나는 대도시 서울에서 자랐다. 어린 시절에는 자연이 아니라, 냄새 나는 하수구로 전락해버린 작은 냇물과 철로 사이에서 놀았다…주변에 아름다운 자연은 없었다.
정원의 시간은 타자의 시간이다.
정원은 내가 멋대로 할 수 없는 저만의 시간을 갖는다.
모든 식물은 저만의 시간을 갖는다.
정원에서는 수많은 저만의 시간들이 교차한다.
나는 예루살렘 사원 산에서 장사치들을 쫓아낸 예수가 이해가 된다. 돈이 정신을 망친다. 땅은 귀하고 돈으로 살 수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돈 때문에 땅을 망가뜨린다. 얼마나 수치스런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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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사가 된 철학자, 한병철의 정원일기. 정원에서 찾은 수많은 생명의 기쁨과 함께 발견한 타자의 시간들, 그 속에서 찾은 행복에 관한 이야기. 시간에 관한 철학자 한병철의 깊은 사색은 결국 우리에게 자연의 시간을 되찾아야 함을 일깨워주기 위한 것이 아니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