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대와 지성을 탐험하다. 김민웅.
자본의 위력이 거의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는 터에, 실용적 가치에 집중한 지식을 넘어선 ‘지성의 출현’이 시대적 충격을 던지는 사건은 경험하기 드물어졌다. 그렇다고 기대를 접어야 하는 것일까?
진정 세워야 할 집은 허물고, 허물어야 할 집을 열심히 건축하고 있는 게 아닐까? 존귀하게 여기는 것이 도리어 쓸모없는 것이며, 쓸모없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귀중한 것이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가치전도’라는 말은 진짜가 가짜로 판정받고, 가짜가 진짜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을 뜻한다. 문제는 그것을 알아보는 힘이다.
상상력이 고갈되고, 근원적 질문이 더 나오지 않으면 우리는 본질과 대면해야 할 길에서 헤매고 만다.

당장에는 써먹을 데가 없는 것처럼 보여도, 우리에게 본질에 대한 깨우침과 그에 따라 살 수 있는 의지를 만들어준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소중하다. 다산 정약용이 주도했던 실학은 오늘날 횡행하는 의미에서의 실용적 학문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무엇이 실 (實)히며 무엇이 허인가를 먼저 묻는 직업에서 출발하는 인간성찰과 역사의식이다. 현실에서 실이라고 주장하는 것의 허를 꿰뚫어 보고, 그 반대로 허라고 여기는 것의 실을 포착하는 시선이 여기에 있다.
책으로 세상을 세우려는 돈키호테_도정일
이 읽기 교재는 좀 두껍고, 좀 무겁고, 좀 널찍하다…그 두께는 피곤한 날 낮잠 베개로 안성맞춤이고 그 무게는 팔 근력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될 것이며, 그 넓이는 비 오는 날 우산 대용으로 제격이다.
아직 끝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두께가 여러분이 찾는 가치의 두께를, 그 무게는 여러분의 생각의 무게를, 그리고 그 넓이는 여러분의 안목의 넓이를 키우는데 기여하게 되기를 바라고, 바라고 또 바란다.
수도자가 애무를 하다니, 신성모독까지는 아니더라도, 이것을 불교적 구도의 핵심 자세라 한다면 너무 나가신 것은 아닐까? 그러나
도정일이 여기서 특별히 주목하는 것은 세 번째 등급, 곧 계산을 거부하는 종족이다.
그는 산치를 적극적으로 선택한 산치, 지상의 산법을 버리기로 작정한 퍽 ‘철학적’인 산치다. 그는 세상이 의존하는 기초 산법의 신빙성을 문제 삼기도 하고 그 자신만의 독특한 산법을 내놓기도 한다.
속도의 포로가 된 어른들, 폭력이 된 교육
그래서 그는 기다림, 느림의 윤리가 교육에 얼마나 소중한지를 역설한다.
인간의 성장 속도가 느린 것은 그 느린 과정에 의해서만 인간을 인간이 되게 하는 능력들이 자라기 때문이다. 사람을 사람으로 키우는 과정은 느려야 하고 숨통 조이지 않는 것이야 하며 여유로워야 한다.
계산에만 몰두하는 천재에게서 상상력은 나오지 않으며, 존재의 존엄성에 대한 깨달음도 태어나지 못한다.

도정일은 책으로 세상을 새롭게 세워나갈 수 있다고 여기는 이 시대의 바보, 다름 아닌 산치부족 족장이다.
어쩌면, 그런 일에는 전혀 관심도 없고 돈만 쫓는 시대의 바람과 마주해서 달려가는 돈키호테 같다…그는 책으로 세상을 새롭게 세워나갈 수 있다고 여기는 이 시대의 바보, 다름 아닌 산치부족 족장이다. 그러나 그는 엄연히 우리 사회의 소중한 공공지식인의 대표명사 가운데 빛나는 이름 하나다.
별에서 온 이의 중력 이탈
28 “판타지는 세계를 지배하는 모든 중요한 현실원칙들을 부정, 거부, 초월함으로써 그것들의 작동을 한순간 정지시킨다. 판타지의 세계에서 중력은 무시되고 시간과 공간의 법칙이 사라지고 일상의 규범들은 잊혀진다...이 마술적 세계로 날아오르는 순간 상상력은 모든 족쇄에서 해방”된다. 그 판타지의 세계가 가지고 있는 핵심은 바로 이 “현실원칙의 중력을 뚫고 솟아오르는 가벼운 세계”가 가진 비밀이다.

그러나 이 판타지가 갖는 해방의 힘을 믿지 않는 시대는 불행하다.
따지고 보면 라만차의 시골양반 돈키호테는 중력 이탈을 삶의 법칙으로 삼은 존재다. 그는 하도 책을 읽어 머리가 돌았다고들 여겼는데, 그건 미친 것이 아니라 세상의 대세와 거꾸로 갔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