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역사. 전우용. 427쪽
보통사람의 삶은 전적으로 평범성이 점유한다.
하지만 인류 역사의 본류는 사람의 시선을 끌지 않는 평범성이다…평범성이 비범성을 규정하는 것이지 그 역은 아니다. 인류 역사의 위대한 성취들은 평범성에 깃든다. 그럼으로써 평범성의 내용 자체가 바뀐다. 고대 노에사회의 보통사람과 현대 민주주의 사회의 보통사람은 전혀 다른 존재일 수밖에 없다.
보통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이야말로, 수백만 년에 걸친 인류 진화의 결과물이다.
인간의 철학, 사상, 가치관 뿐 아니라 개별 인간의 몸도, 역사가 만들어 낸 구조물이다.
내가 사회경제사, 도시사, 의료사 등 각 분야를 섭렵하다가, 역사가 보통사람의 몸과 마음에 새겨진다는 사실을 문득 꺠달은 것은 2000년대 중반이었다.
#개인
안중근은 옥중에서 ‘일일부독서 구중생형극’,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는 유묵을 남겼지만, 현대의 한국인들중에는 ‘일일불운동 복중생지방’, 즉 ‘하루라도 운동을 하지 않으면 배에 지방이 쌓인다’고 믿는 사람이 많다.
#유리거울, 외모 지상주의 시대의 서막을 열다
천연두? 딱지가 떨어진 자리에는 깊은 흉터가 남아 평생 지워지지 않는다. 딱지가 콩알처럼 생겼다 하여 일본인들이 ‘천연두’로 이름 붙인 두창의 증상
우두 접종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새로운 것’이라면 무턱대고 좋아하는 것은 현대에 새로 생긴 인간의 습성이다. 자본주의 시대 이전에는, ‘새로운 것’은 일단 경계해야 하는 것이었다. 옛사람들은 새로운 것을 위험한 것으로 인식했다. 그래서 새 집을 지으면 굿을 했고, 새 가구를 들여도 고사를 지냈다.
두창이 소멸하고 성형수술이 발달한 덕에 이제 ‘거울 보기 괴로운’ 사람은 거의 없다. 증자는 ‘일일삼성’이라 하여 수시로 자기 내면을 살펴보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요즘 사람들은 하루 세 번 이상 거울 앞에서 자기 외모를 살핀다. 이런 생활문화에서 외모 지상주의가 기승을 부리지 않으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일 터이다.
#한국 남성의 새로운 통과의례, 포경수술
6.25 휴전 협상. 전투 소강상태. 일선 지휘관들은 단 1~2주 동안이라도 장병들의 성 접촉을 차단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 바로 포경수술. 의료진에게는 풍부한 수술 기회 제공.
종이 쪼가리보다는 사람을 믿던 시대에서, 사람보다는 도장 찍힌 문서를 믿는 시대로 변하는 것이 근대화다. 인격체의 신용이 떨어지면, 해당 인격체에 부착된 신물의 신용도 떨어지기 마련. 그런데 사람은 위조할 수 없지만, 신물은 위조하기 쉽다.
사랑은 본능이 아니라 이성의 소산이다… ‘사랑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오랜 세월에 걸쳐, 특히 근대 이후에, 수많은 사람이 논문으로, 수필로, 소설로, 시로, 대중가요 가사로, 각자 나름대로 답을 제시했으나, 모든 사람이 동의할 정도로 만족스러운 답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한자어 ‘상량’이 변한 말? ‘헤아리다’? 배우고 익힌 다음에야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이다.
사랑이 본능이라면 모든 사람에 사랑에 능할 테지만, 사실은 사랑에 서툰 사람이 훨씬 많다.
연애는 과정, 결혼은 종착점, ‘결혼은 연애의 완성’ vs ‘결혼은 연애의 무덤’
결혼하기 위해 사랑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더 사랑하기 위해 결혼하는 이야기들이 필요할 때다.
#현모양처론, 메이지 시대의 이데올로기
현모양처론은 중세 유교의 덕목이 아니라 메이지 시대 일본에서 창안되어 20세기 초 한국에 유입된 천황제 국민국가의 여성관이다.
신사임당? 주로 친정에 살며 시집 일은 거의 돌보지 않았다…오히려 ‘자기 자신’을 위해 그림 그리는 데 열중했다.
현모양처의 대표는 사실 신사임당이 아니라 천황제 국민국가의 이데올로기에서 헤어나지 못한 현대의 표준적인 한국 주부들이다.
남성들만의 시장? 여성은 외출금지…시장은 아예 ‘여성들만의 공간’으로 바뀌었다. 시장에서 다시 남자들을 흔히 볼 수 있게 된 것은 대형 할인점이 생긴 뒤다. 대량 구매와 자동차 운전은 장보기에서 ‘양성평등’ 시대를 여는 데 큰 구실을 했다.
고정된 ‘성 역할’이란 많은 경우 시대가 만드는 허상일 뿐이다.
집집마다 TV를 갖추자, 오랜 세월 ‘밤마실’이라 불려온 이웃 간의 저녁 시간 왕래는 끊어져 버렸다. TV는 가뜩이나 위태롭던 도시 공동체를 완전히 소멸시키고 명실상부한 ‘가족만의 시대’를 열었다.
하지만 이렇게 ‘결속’된 가족 공동체는 서로에게 시선을 주고 서로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온전한 공동체가 아니었다. TV는 가족 구성원 각자에게 향하던 시선을 독점했고, ‘소통의 의제’를 제약했다.
일제 미작개량사업? ‘조선 쌀’은 한국인이 아니라 일본인 소비자를 위해 필요했다…한국인은 어쩔 수 없이 자기 입맛을 일본 품종의 쌀에 맞춰야 했다…지금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쌀 품종은 아키바레나 고시히카리 등 일본 이름을 가진 것들이다.
혼식장려…불과 얼마 전까지 ‘쌀밥은 몸에 해롭다’에 초첨을 맞추던 사회적 계몽이, ‘신토불이’니 ‘한국인에게는 한국 쌀’이니 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전쟁 부추기는 극우? 만약 전쟁이 장기화되면 어떻게 할까? 한국전쟁 중에는 우물이라도 있었으나, 지금의 서울은 땅을 파도 물이 나오지 않는 도시다. 땅 속에서 사방팔방으로 뻗은 지하철로 인해 지하 수맥이 고갈되었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런데도, ‘전쟁불사’를 외치는 정치인과 언론인이 적지 않았다. 현대의 서울이 얼마나 전쟁에 무방비 상태인지 몰라서 그랬을 것이다.
세종로 입구, 누구나 세종대왕 동상 자리라고 생각했던 곳에 뜬금없이 충무공 동상이 섰다!
서울에 오래 산 사람들은 세종로가 왜 세종로이며, 충무로가 왜 충무로인지 다들 알았다. 하지만 아무도 “뜬금없다”고 비판할 수 없던 시절이었다. 나라의 중심이 멸사봉공, 위국충정의 정신으로 무장한 군인이 서 있어야 한다는 박정희의 생각은 ‘공식 시대정신’이었다. 박정희는 국민들이 자신을 충무공과 같은 존재로 인식하기 바랐다.
세종대왕도 충무공도, 영정 하나 남아 있지 않아 실물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동상을 이용한 ‘공간정치’와 ‘국민교육’이 언제까지 지속되어야 할지도, 여론이 정할 문제다(동상은 우상이다?)
#해방 직후 대입시험의 ‘국어 소동’
해방뒤 첫 입시시험. 입시과목에 ‘국어’포함. 교수들의 집단 반발사태!
미국인 총장 아스테드는 교수들의 사표를 수리하지 않고 “자국어 시험을 치르지 않고 학생을 뽑는 대학이 세상에 어디에 있느냐”고 훈계했다.
교수들이 국어 과목의 중요성을 모르지는 않았다. 국내에 하나뿐인 대학의 입시 과목을 출제 유형이 증등교육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점도 잘 알았다. 그러나 국어 시험을 치르자니 국어를 제대로 배운 응시생이 없었다. 그 전해까지 국어는 일본어였고, 경성대학은 개교 이래 입시시험 과목에 조선에를 넣은 것이 없었다…현재의 역사교과서들은 조선어 교육 폐지를 ‘악랄한 민족 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기술하지만, 당시 대학 진학을 꿈꾸던 최상위권 학생과 그 부모들은 이 조치를 오히려 반겼다. 경성제국대학이나 일본 내 대학에 진학하는 데에는 조선어가 아무 쓸모없는 과목이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학문 언어’와 ‘고급 언어’는 여전히 한국어가 아니다. 자기 나라 어법과 문법에 아무리 서툴러도 영어만 잘 하면 지식인 행세할 수 있는 나라가 그리 많지는 않다.
#식민지 백성의 덕목, 온순과 착실·박력과 추진력
일제강점기에 이런 가치관들을 내면화한 사람들은 해방 후에도 오랫동안 자기 후배와 후손들에게 이런 태도를 심어 주려 애썼다. 1970년대까지도 ‘모범생’의 핵심 덕목은 온순 착실이었다. 마음이 물러서 남이 시키는 대로 순순히 따르는 게 온순, 천하의 대세나 인간의 도리 같은 ‘허황된’ 생각은 하지 않고 실용과 실리에만 집착하는 게 착실이다. 그때까지도 많은 교사가 기개를 반항기와, 지조를 고집과 동일시 했다.
일본이 군국주의로 치닫던 1930년대 초반, 충량이나 온순삭실과 배치되는 듯하나 그를 보완하는 덕목으로 ‘박력’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하더니 곧 일본인과 한국인에게 두루 통용되는 남성적 가치로 자리 잡았다. 추진력도 쓰이기 시작. 밀어붙이는 힘이라는 뜻으로 두 단어는 명령에 따라 물불 안 가리고 진격해야하는 졸병에게나 어울리는 단어였다.
“군대 갔다 와야 사람 된다”? 사병에게, 명령은 자신이 개입할 수 없는 ‘주어진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사람 된다’는 것은 하달된 명령만을 성실히 이행하는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일제강점기의 모범 남성관, 나아가 모범 국민관은 이렇게 재생산되어 사회생활의 일반적 규범으로 통용되었다.
#빼앗긴 문화재, 갖다 바친 문화재
한일합병. 서울 전역의 가산을 처분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양반들? 골동품상의 맨 처음! 일본인들은 자기 나라에서는 구경도 못한 각종 도자기 연적 문갑 서화…우아한 골동품에 침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은 수백만원을 주고도 사기 힘든 귀중품들이 무지 탓으로 헐값에 팔려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