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기술 사전. 안드레이스 브레너·외르크 치르파스. p565
삶을 예술로 만드는 교양과 지식에 관한 60가지 이야기
그저 앞만 보고 달리기보다는 여유롭게 인생의 요모조모를 비틀어 볼 때 인생 예술의 경지가 열린다. 이런 의미에서, 아이러니를 통해 인생을 비틀어보는 사람은 말을 잘할 뿐만 아니라 침묵할 줄도 아는 사람이다. 삶의 기술이란 바로 이런 인생 예술의 경지를 말하는 것이리라.
#감각은 악마의 간계일까
19세기 철도의 등장에 따른 교통 기술의 혁신은 문화적 지각 모델의 분명한 단절을 불러왔다. 시벨부슈는 이를 두고 시간과 공간지각의 전면적 파괴라고 불렀을 정도다. 기차를 타고 여행하는 사람은 눈앞으로 풍경이 휙휙 스쳐지나가는 통에, 어디에 눈을 맞춰야 좋을지 몰라 어리둥절하기만 하다. 전봇대가 죽 늘어선 철로를 따라, 일렬로 늘어선 문장처럼 창밖을 스쳐지나가는 자연은 어딘가 모르게 일그러져 낯설기만하다.
속도 때문에 전망을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게다가 몇 시간씩 걸리는 기차 여행으로 감각은 녹초가 되고 만다.
#감정표현을 허하라
감정은 감정으로만 풀어낼 수 있다? “왜 도덕적으로 살아야 하는 거야?” 우리가 공동체를 이루며 더불어 사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이 물음은 아무리 철학을 들이대봐야 풀리지 않는다.
이런 물음은 감정만이 대답해줄 수 있다.
공감하고 느껴야만 인간은 자신이 왜 도덕적으로 행동해야 하는지 수긍한다.
우리에게 어떻게 하라고 말해주는 감정은 복잡다단한 상황을 통해 형성된 자동반사로부터 생겨난다. 부지불식간에 굳어진 조건반사라고 할까.
‘요약이나 하는 철학’은 감정의 무조건반사와 같은 직관을 만들어줄 수 없다. 철학은 오로지 행위의 예측 가능성과 ‘도덕적 동질감이라는 감정’을 높여주는 데 이바지할 따름이다.
도덕의 발달은 지식의 축적이라기보다는 감정의 연마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현실은 다른 말을 한다.
경제를 들먹여가며 열대림을 벌채하는 철저한 계산속, 자동차의 편리함만 좇느라 망가질 대로 망가진 오존층, 대량살상무기의 계속되는 위협 등은 이래서는 안 된다는 근본적인 감정을 거스름에도 효용을 앞세운 실익의 논리로 떠받들어지고 있지 않은가? 여기서 감정은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한다.
순수하기는 하되 아무런 힘을 쓸 수 없는 감정…생각할 수 있는 한 최악의 비참함이다. 신문에서 매일 만나는 이야기들은 이런 비참함이 조금고 의심할 수 없는 사실임을 확인해주고 있다.
“그저 어떻게든 더 가지려고만 안달을 하고 기술과 지식의 연마에만 힘을 써온 탓에 우리의 영혼이 황폐해졌구려.”
#고독은 반사회적인가
고독의 도덕은 물론 외로운 도덕이다. 외로운 대신 고독은 내면으로 들어가는 길을 열어주며 우주라는 전체를 품게 만든다. 여기에서 빌소 우리는 우주를 포용하는 너그러움을 얻는다. 고독 속의 인생을 사랑할 줄 알 때, 진정한 지구적 형제애의 자세를 갖추는 것이랄까.
#고통은 공감을 이끄는 끈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인간은 건강하고 행복할지는 모르나, 부도덕하며 비도덕적인 사람이다. 남의 고통을 나몰라라 하니 말이다.
#교육의 딜레마
‘좋은 사람’이 되는 법을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훌륭한 시민’으로 성장하는 것도 늘 염두에 두어야만 한다.
#권리를 주장하는 일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은 법원의 판결문을 바라는 게 아니라, 더불어 사는 이웃들이 자신의 사정을 헤아려주기를 기대한다. 법보다는 신뢰와 배려라는 인간관계의 기본을 지켜주는 예의를 더욱 갈망하는 것이다. 정당함의 공감을 기대한다.
이런 정당함의 공감은 그 어떤 법전에도 담겨 있지 않다.
#기다림의 끝
시간이 부족한 현대인들? 어딜가든 시간이 부족하다는 한숨과 푸념, 심지어 짜증이 난무한다.현대인은 명백하게도 더이상 시간이 없다. 그것도 평생에 걸쳐! 한가하게 구석에 틀어박혀 자신이 왜 이런 행동을 해야 하는지 그 도덕적 근거를 낱낱이 훑으며 정당화의 궁극적인 다짐을 놓을 시간은 더더구나 없다.
이렇게 볼 때 시간 부족은 악이 생겨나게 만드는 뿌리다.
시간이 부족하다는 핑계를 들이대며 도덕을 생각할 짬이 없었노라고 둘러댈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체함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시간이다. 현대 자본주의에서 소비욕망은 걷잡을 수 없는 지경으로 치닫기만 한다. 이래도 괜챦은지 불안해하고 초초해하면서 고삐가 풀리버린 욕망의 뒤를 허덕이며 좇을 뿐이다. 소비는 갈수록 “더 많이!”를 외친다…낙원에 살던 선한 인간은 욕구라는 것을 몰랐다. 그러니 시간을 알아야 할 이유도 없었다. 남들과 경쟁할 필요가 없었으며, 충동에 휘둘리지도 않았다.
도적적 인간은 시간에 얽매이지 않으며, 기다리느라 초조해하지도 않는다. 신이 허락한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이를 다른 사람과 기꺼이 나누어 쓸 줄 알기에 여유롭고 차분한 인생, 곧 도덕적인 삶을 산다. 경계를 알기에 여유를 가지고 모든 향유할 수 있는 것을 즐기고 누린다. 낙원의 인간은 기다릴 필요가 없는 인간이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
“노년은 나이게 걸맞게 살아오지 못한 사람에게만 능력의 상실이자 쇠퇴일 따름이다”
모든 게 저마다 고유한 의미를 회복하기 때문에 어느 하나 소중하지 않을 게 없다. 노인 개인이 축적해온 지식도 없어서는 안 될 귀한 것이다. 그 외의 다른 누구도 알지 못하며 이야기해 줄 수 없는 지식은 얼마나 소중한가.
노인이 살아가는 공간은 과거다. 다시 말해서 노인은 추억 속에서 살아간다. 추억 안에서 자신과 세계를 다시금 발견한다…추억이 노인을 살아가게 만든다. 이 말은 노인이 죽더라도 그 효력을 잃지 않는다.
#낭비, 돈과 시간을 놓아버려라
돈도 시간도 헛되이 낭비해서는 안 된다? 낭비하지 말라고만 말하지 말고, 어떻게 하는 게 낭비인지 분명하게 설명을 해줘야만 한다….무의미하게 쓰는 일, 아무것도 얻을 게 없는 일에 돈을 쓰는 것을 낭비로 여겨져왔다.
돈이 본래 가진 성격 때문? 돈은 그 자체로만 보자면 ‘공허한 것’이다. 사실 돈은 그 공허함 때문에 낭비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자체가 낭비되는 게 아니라, 돈을 거침없이 쓸 때 우리의 인생 속도에 가속도가 붙는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돈과 함께 시간, 인생이라는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다. 돈은 “처분할 때에만 쓸 수 있는 물건”(칸트)이기에, 돈 뿐 아니라 시간까지 뭉텅 잃어버리게 만든다. 돈을 좇는 인생은 언제나 시간 부족에 허덕인다.
속도 낮춤. 시간의 흐름을 늦추는 방법. 시간 관리? 아주 간편하며 따뜻한 방법이 있다?
그것은 곧 “가까운 사람과 더불어 사는 시간의 다변화”이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보다 오래 살아왔으며, 또 오래 살게 될 사람들과 함께 산다. 우리의 시간을 그들의 시간과 함께 나눈다면, 각자의 인생이 누리는 시간은 엄청나게 늘어난다. 손자가 할머니의 품에 안겨 재롱을 떨 때, 할머니가 살아온 풍부한 인생이 손자에게 녹아들며, 손자가 앞두고 있는 망망한 미래의 전망은 할머니의 가슴을 푸르게 빛나게 한다. 이처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을 지금껏 낭비로만 여긴 것은 아니었을까? 이는 오히려 더없는 소중함을 누리는 축복이 아닐까?
#노동, 나와 남을 이롭게 하다
부당 착취. 이윤이란 결국 노동자의 정당한 임금을 깎아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어떻게든 값싼 인력을 쓰려 광분하다보니 남의 것을 착취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제 살 깍아먹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사람들은 모른다.
너나 나나 밥벌이를 할 수밖에 없다는 대중 현상은 갈수록 인간을 개인이라는 사적 영역 안으로 몰아넣는다. 공감대가 없이 말초적 자극에만 목을 매는 대중문화는 문화를 잠식한다.(아렌트) 이로 말미암아 서글프게도 우리는 즐거움을 잃게 된다. 한때 지상의 소금이었던 즐거움은 이제 자취도 없이 사라져버렸다…’최대 다수의 행복’? 행복을 다수의 것으로 일반화하려는 데 숨어 있는 모순은 김빠진 즐거움이라는 무미건조함만을 낳는다.
“욕구를 해결하기 위한 개인의 노동은 자신의 욕구를 만족시킬 뿐만 아니라 동시에 남의 욕구도 충족시킨다. 그리고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은 타인의 노동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분업을 통한 가치 창조 같은 것을 이야기 하는 게 아니다. 서로 상대방을 인정해주는 게 노동의 본질이라는 점이다.
나는 나의 일을 통해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며, 상대 또한 그의 일을 통해 나를 인정한다. 이게 노동의 진정한 의미다.
…이로써 노동의 참의미를 깨우쳤을 때, 나는 마지못해 힘들어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유쾌한 놀이’로 노동을 즐긴다.
놀이와 노동은 나와 상대방이 서로를 인정한다는 공통점을 갖는다…인정을 갈망하는 나 자신과 상대방의 욕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정신적 태도가 더욱 절실하다.
놀이는 시간을 필요로 한다…놀이도 연습과 훈련을 필요로 한다. 그동안 노동의 미덕과 그 엄수에만 매달려왔기에 우리는 다시 놀이를 즐길 여유를 배우고 익혀야만 한다…늘 똑같이 반복되는 일은 사람을 지치게 만들지만, 여유를 갖고 즐기는 일은 언제나 신선하다. 어쨌거나 시시포스는 신이 나서 즐거워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행복한 미소를 짓기까지 했다.(까뮈)
#대화가 필요해
자기 말만 할 뿐, 남의 말은 들어주지 않으니 가슴을 연 대화는 희귀한 현상일 수밖에 없다. 함께 말을 나누는 대화라는 조화로움은, 걸핏하면 한쪽만 말하고 다른 한쪽은 듣기만 하는 것으로 갈라지기 일쑤다.
그저 유일하게 ‘함께하고’ 있는 것이라고는 지금 같이 있는 공간뿐이다. 이른바 일방적인 일장연설이란, 말하는 쪽과 듣는 똑의 시선이 서로엇갈리며 저마다 엉뚱한 곳을 보고 있다는 데서 잘 알아볼 수 있다.
진지한 대화가 이뤄질 때에는 어느 하나 놓칠 말이 없다.
#일상은 경이로운 철학의 시작이다
도덕?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행동의 규범
우리의 생각 이상으로 일상은 도덕적이며, 도덕은 일상적이다.
공감은 탐욕스러운 손길에는 거의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사회가 잠식당하고 무너져내리지 않도록 일상의 도덕이 지탱해준다.
경우에 따라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는지는 몸이 ‘알아야 한다’
그러나 일상의 양면성은 바로 그 ‘도덕성을 별로 중시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이제 일상을 다스리는 도덕적 기준은 시간이다.
도덕이 의문스럽다면, 이는 곧 자신과 세상 사이의 관계가 비틀어지고 깨진 것으로 인식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때로는 존재하며, 시시때때로 생각 속에서 살아간다”
일상적인 것, 익숙한 것을 문제로 여길 때 경이로운 철학이 시작된다. 무엇이 세계를 그 가장 깊숙히 내면에서부터 지탱하는가를 밝혀주는 것은 생각함으로서의 철학이기 때문이다. 생각의 결과물인 ‘이론’은 이렇게 볼 때 일종의 정신적 활동의 산물이라기보다는 특별한 방식의 정신적 존재가 빚어낸 것이라 하겠다. 활동을 멈추고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것, 이게 바로 생각이기 때문이다.
#잇속은 존중에서 비롯된다
상대의 욕구를 인간적인 것으로 인정해줄 때, 내 것도 인간적인 대접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철학 없는 사회_역자후기
오늘, 한국 사회는 정처 없이 표류하는 난파선을 연상케 한다…어쩌다 사람의 상식이 이렇게까지 망가지고 말았을까? 무엇 때문에 인간의 기본적 예의마저 이토록 철저히 무시할까? 황망한 물음의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바르게 살고자 노력하는 본보기를 보아오지 못했던 게 그 이유다. 원칙과 약속과 믿음을 중시하고 살다가는 손해만 볼 뿐이라는 경험을 해오다보니 결국 가치관의 왜곡이 빚어졌다고 하면, 지나친 해석일까?
한국사회는 태어나면서부터 무한 경쟁에 뛰어들 것을 강요한다. 그저 달리라고 하니, 눈가리개를 한 경주마처럼 어디로 달려야 하는지도 모르는 체 무작정 내달리는 게 우리네 자화상이다. 차분히 앉아서 왜, 어디로, 어떻게 달려야 하는지 생각해볼 여유는 허락되지 않는다.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무작정 남보다 앞서 뛰어야만 한다.
방향을 알지 못하는 무한질주라니, 참으로 기괴한 노릇이다.
이처럼 악다구니로 내몰리기만 하다보니 마음의 여유라곤 찾을 길이 없다. 재미가 없으면 잠시도 견디지 못하는 시대다. 텔레비전 채널은 1초가 길다 하고 돌아간다. 갈수록 강한 자극을 찾는 요구에 막말과 막장이 넘쳐난다.처참한 뉴스를 볼 때만 잠깐 진저리를 칠 뿐, 이내 다른 채널을 찾아 아무렇지 않다는 듯 킬킬댄다.
철학은 재미있는 게 아니다. 철학은 쉽지 않다. 어려운 세상을 살아가며 흔들리지 않고 꼿꼿이 서게 해줄 정신적 좌표를 찾고 방향감각을 갖추는 일이 쉬울 리는 없다. 그러나 재미없고 쉽지 않다고 외면한다면, 우리는 인생으로부터 외면당한다. 스스로 애써 좌표를 찾고 방향감각을 갖추지 않으면 사기꾼의 농간에 놀아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