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예수입니다. 도올 김용옥.
교회. 부활. 만들어진 신? 기적이 아니라 이적. 믿음의 결과인 이적만 있었다!
여러분들께서 아셔야 할 것은 신약성경에 써있는 말들이 대부분 나의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전혀 나와 무관한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필사즉생 필생즉사! 예수와 수운 최제우(동경대전)는 신념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온전히 바침으로써 죽음이 아닌 생명을 얻은 종교를 탄생시켰다.
나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것으로 기술되었을까요? 이제 여러분들은 그 이유를 쉽게 간파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나를 그리스도라고 믿는 사람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를 그리스도로 만들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나는 반드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야만 합니다.
“복음서”의 등장이야말로 바울의 이방선교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기독교운동의 출발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우선 마가공동체를 알아내기 전에 마가복음서가 최초의 복음서라는 사실에 대한 의미를 좀 확연히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단순히 여러 개 중에서 제일 먼저 쓰여진 복음서라는 의미로서 이해하면 곤란합니다. 마가복음서로 인하여 우리가 복음서라고 부르는 고전문헌양식이 인류역사상 최초로 출현했다고 하는 사실의 의미를 좀 깊게 새겨볼 필요가 있습니다…그것은 술이 아닌 작이었습니다…그 한줄 한줄이 모두 온전한 창조였습니다.(만들어진 신? 예수는 어떻게 신이 되었나?)
나는 살아있을 동안에 교회를 만든 적이 없습니다. 교회라는 조직은 전혀 나의 사전에 한 줄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나는 갈릴리의 민중과 더불어 살았을 뿐이며, 나를 믿으라고 하는 신앙공동체를 만든 적이 없습니다. 나는 더불어 살았을 뿐이며, 더불어 행동했을 뿐이며, 더불어 구원의 실천을 모색했을 뿐입니다.
나는 종교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나는 어떠한 종교의 교주가 아닙니다…나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을 빙자하여 나를 믿으라고 개인을 설득하거나 조직을 만든 적이 없습니다.
복음서를 읽는 사람은 나와 세례 요한의 관계를 정반대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내가 복음서의 주인공이고 세례 요한은 괜스레 끼어든 잡역인 것처럼 이해하죠. 그러나 내가 살던 시대의 상황은 정반대였습니다.
나의 진정한 아이덴티티를 알아본 것은, 나의 제자도, 가족도, 군중도, 재판관도 아니었습니다. 더러운 귀신과 낯선 이방인 백부장이었습니다. 그렇게 나는 고독한 운명의 사나이였습니다.
그러나 그만큼 나는 인간적으로 피곤했습니다…나의 가장 큰 고민은 내가 행하는 것의 궁극적 의미는 천국의 선포인데 사람들은 목전의 신체적 고통이 해결된다는 치유적 효과에만 집착했습니다. 그들은 나를 천국운동가로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힐러, 그러니까 고통해결사로서만 이해하는 것이지요.
이적은 이적이 아니라 믿음입니다. 믿음은 프뉴마(기)의 교감입니다. 내가 원하기만 한다면 자기 병을 고쳐줄 수 있으리라는 강력한 믿음, 그 믿음의 선행조건 위에서 나의 힐링행위는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
율법은 본시 이웃에 대한 사랑을 위한 것인데 그것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여, 오히려 어려움에 처한 자들을 정죄하고 그들을 격리시키는 데 사용합니다. 그럼으로써 이권을 챙기고 있는 당시의 사회와 종교를 향한 분노가 창자로부터 들끓어 오르는 것입니다.…이것은 나의 천국운동이 율법을 뜯어먹고 사는 당대의 종교 계층에 던진 최초의 직접적 도전이었습니다.
결국 식민통치의 궁극적 “목적”은 세금의 갈취입니다. 그래서 “세금”이라는 말이 “목적”이라는 의미를 가지는 “텔로스”와 같은 어원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로마제국의 세금이란 지역민들에게 무서운 수탈의 상징이었습니다.나는 나의 구원을 요청하지 않을 수 없는 약자, 병자, 죄인의 친구일 뿐입니다. 나에게는 과도한 전도주의가 없었습니다.
종교는 항상 약자, 병든 자, 죄에 시달리는 자들의 편에 서야 합니다. 건강한 사람은 의사가 없이도 잘살 수 있습니다. 건강한 사람에게 다가가 너는 반드시 의사가 필요하다고 외치고 강요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그것은 또 하나의 율법적 형식주의이며 종교적 오만이 될 수 있습니다. 신앙인들은 항상 겸손해야 합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은 아니다.”
12사도? 실제로 내가 가까이 둔 제자는 칠십여명 되었고 나는 이들에게 특별한 차별의식을 부여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갈릴리 사람이고 유대인 아이덴티티가 없었습니다. 나는 그냥 예수입니다. 나에게 인간은 모두 인간일 뿐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나는 교회를 만들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교회가 건물을 갖는 그런 유형의 조직형태라는 것은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습니다…교회 반석 따위는 생각해본 적도 없습니다.
오병이어의 설화는 결코 “이적”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나 항아리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도 아니고, 홍해가 쩍 갈라진 것도 아닙니다. 없던 것이 생겨난 것이 아니라, 민중 속에 있던 것이 나누어진 것입니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나는 결코 배타적인 야훼식 유일론자가 아닙니다.
부활의 최종적 의미는 현세적인 삶의 연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살아있는 하나님과 융합되는 것입니다…이 나의 소박한 부활론을 초대교회가 자신들의 종말론적 긴박감 때문에 너무 희화시키고 극화시키고 그 바른 의미를 왜곡시켰습니다.
“계명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 많은 계명 중에서 첫째가는 계명을 꼽으라고 한다면 무엇을 꼽으시겠습니까?”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천국운동의 핵심은 “이웃사랑”입니다. 그러나 이웃사랑이말로 곧 하나님사랑입니다…내가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때 하나님 나라는 곧 나에게 내 이웃에게 임재하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위대한 계명은 없습니다.
“서기관들을 조심하여라!…”
나는 종교를 통해 먹고사는 자들의 형식주의, 위선, 권위주의를 싫어합니다. 내면의 진실이 없는 서기관들은 종교의 권위를 빌어 심리적으로 허약하고 경제적으로 빈궁한 이들을 제도권의 종교적 컬트에 참여시킴으로써 온갖 착취와 사기질을 일삼습니다.
여러분들께서 아셔야 할 것은 신약성경에 써있는 말들이 대부분 나의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전혀 나와 무관한 것들이 대부분입니다…나에 관한 것이 많다고는 하나, 나에 “관한” 타인의 생각이 곧 나는 아닙니다.
나의 천국은 공동식사였습니다.
나는 오직 절망 속에서, 모든 신적인 권능이 단절된 상황 속에서 죽어가고 있다는 이 사실이 나에게는 최종적 기적입니다.
만약 이 기적을 내가 거부했다면 나는 인간이 되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이야말로 인간예수의 기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