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다고지. 파울루 프레이리. p239
Pedagogy of the Oppressed(피억압자의 교육학)
억압받는 사람들과 그들의 편에서 힘겹게 싸우는 이들에게
#30주년 기념판 발간에 부쳐
이 나라(미국)에서 현재 파울루 프레이리의 저작에 관한 관심이 점점 커지고 있지만, 지금까지는 주로 제3세계 문맹자들을 교육하기 위한 책으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프레이리의 책을 꼼꼼히 읽어보면 그의 방법론과 교육철학이 라틴아메리카의 소외된 사람들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대단히 소중하다는 점을 알 수 있을 것이다…그런 이유 때문에 나는 『페다고지』의 영어판 발간을 일대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이 이야기는 사뭇 예언적이다. 과연 그 뒤 프레이이의 책들은 기술적으로 발달한 우리 사회의 교육 정책에도 상당한 연관성을 보였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는 개인들, 특히 불리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엄격한 획일성에 짜맞추려는 교육 정책으로 인해 새로운 하층민이 양산되었다. 따라서 그런 상황에 대해 신중하고도 적극적으로 대응할 책무를 모두 짊어지고 있다. 바로 이것이 『페다고지』에 내재된 메시지다.
시대가 변하면서 사람들의 태도와 믿음도 달라졌다. 이 책의 번역 또한 해방과 남녀포괄 용어 등의 변화된 현실을 반영하는 방식으로 수정되었고, 책의 조판도 새로워졌다.
#파울루 프레이리와 페다고지_도나우두 마세두
『페다고지』를 처음 접한 순간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당시 나는 베르데 곶(아프리카 서쪽 끝에 위치한 곶,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다) 출신의 식민지 젊은이로서 문화적 정체성이라는 중대한 문제와 씨름하면서 포르투갈 식민지의 멍에를 벗어던지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페다고지』를 읽고서 나는 차용되고 식민화된 문화적 삶의 요체를 이루는 긴장, 모순, 두려움, 의심, 희망, ‘유예된’ 꿈을 비판적으로 이해하는 언어를 갖추게 되었다. 또한 『페다고지』를 읽고서는 나는 문화적 분열증, 즉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고 보이지만 존재하지 않는 식민지적 삶을 초월하기 위한 내적인 추진력을 갖추게 되었다. 두 세계, 두 문화, 두 언어의 비대칭성 속에서 늘 힘의 균형을 유지하려 애쓰던 고통스러운 경험, 바로 이것이 내가 미국에서 경험한 삶이다. 『페다고지』를 읽고서 나는 식민자와 피식민자 사이의 내밀하면서도 취약한 관계의 외부에 놓여 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성찰하고 이해하기 위한 비판적 도구를 갖추게 되었다.
파울루 프레이리는 현행 교육의 은행 저금식 모델을 적극적으로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민주적인 문제제기식 교육을 제안한다. “모든 사람은 각자 자신이 처한 세계에서 존재하는 방식을 비판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힘을 계발해야 한다. 즉 세계를 정태적 현실로서가 아니라 변화 과정의 현실로서 파악해야 하는 것이다.” 이 말은 내게-그리고 강요된 동화 정책에 따른 복종을 경험한 모든 사람들에게-문화적 발언권을 되찾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는 길을 제시해 주었다. 그것은 언제나 고통과 희망을 수반하는 과정이지만, 강요된 문화적 이중인격자인 우리는 그 과정을 통해 우리를 소외시키는 사회 내에서 우리의 객관적 위치를 초월해 주체적 위치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페다고지』는 파울루 프레이리의 생생한 체험에 뿌리를 두고 있다.
세상을 떠날 때까지도 그는 역사의 종말이나 계급의 종말 같은 허구적 관념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적 입장을 단호하게 비판했다. 프레이리는 언제는 역사를 가능성으로 보았으며, “역사란 항상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가능성으로 가득하며, 미래는 숙명적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변화의 여지가 충분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그는 자신이 초기에 했던 계급 분석을 꾸준히 수정하면서도 억압의 상태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한 연구에서 중요한 이론적 범주인 계급을 포기하지도, 저평가하지도 않았다.
불행히도 미국에서 프레이리의 교육학적 입장에 동조한다고 자처하는 교육자들은 프레이리의 대화 개념을 하나의 방법으로 격하시킴으로써, 대화식 교육의 근본적 목적이 배움과 앎의 과정을 창조하는 데 있으며, 여기에는 대화를 통해 공유한 경험을 이론화하는 작업이 반드시 포함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다…프레이리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점을 상기시켜 준다. “이 교육자들이 대화라고 말하는 과정은 배움과 앎의 과정이라는 대화의 진정한 본질을 숨기고 있다…대화를 배움과 앎의 과정으로 이해하면, 대화의 참된 요소들에 관한 인식론적 호기심을 반드시 포함해야 한다는 종전의 요건을 확인할 수 있다.” 말하자면 대화는 반드시 앎의 대상에 관한 호기심을 필요로 한다는 이야기다. 그러므로 대화는 결코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라 앎의 대상을 더 잘 알기 위한 수단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대화는 각자의 체험을 우선시하는 좌담처럼 변질될 수 있다.
앎의 대상에 대한 호기심, 그리고 이론적 독서와 토론에 참여할 수 있는 의지와 개방성을 반드시 필요하다.
“나는 농민들 속에 들어가서 그들의 굶주림이 사회적으로 형성된 것이라는 점을 가르쳐야 하며, 내 견해에 따르면 인간성에 대한 범죄에 해당하는 그 굶주림의 사회적 형성에 책임이 있는 자들은 농민들이 인식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교육학적으로만이 아니라 윤리적으로도 중립을 지킬 것이 아니라 개입해야만 한다.
하지만 개입하기 전에 먼저 교육자는 정치적으로 명료해야 한다.
그들은 언어가 사회적 불평등을 보이지 않게 숨기는 데 사용되고 있다는 점에 관해서는 무시해버린다. 또한 그들은 억압 이데올로기를 분석 해체하는 유일한 방법을 그들이 명료한 언어라고 규정한 것을 포함하는 담론을 통해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고 가정한다.
프레이리의 언어는 억압에 관한 복잡하고 다양한 개념들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
“만약 프레이리가 『피억압자의 교육학』(페다고지의 원제목)이 아니 『참정권이 없는 자의 교육학』을 썼다고 상상해보라.” 앞의 제목은 억압자를 지목하고 있는 반면 뒤 제목은 그렇지 못하다. ‘참정권이 없는 자’의 상대방은 누구인가? 행위자는 사라지고 그 행위에 대해 책임을 지는 자들이 모호해지게 된다…이러한 언어 구사는 현실을 왜곡시킨다!
‘인종 청소’라는 용어를 말 그대로 분석해 보면, 그것이 실은 보스니아의 무슬림에게 세르비아가 자행하는 끔찍한 폭력과 범죄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럴 경우 부녀자, 어린이, 노인들을 대략 살육하고 심지어 다섯 살 소녀까지 강간하는 만행은 ‘청소’라는 긍정적인 속성을 얻게 되며, 우리로 하여금 보스니아 무슬림, 나아가 전세계 무슬림들은 어딘가 ‘불결’하며, 따라서 ‘정화’되어야 할 대상이라는 관념을 갖게 하는 것이다.
나는 어떤 담론이 명료하지 못하다는 핑계로 복잡하다며 불평하는 학자들을 볼 때 놀라지 않을 수 없다…그러나 명료함의 문제를 면밀히 조사해 보면, 그것은 바로 계급의 문제이며, 따라서 의미 형성 과정에서 그 계급에 속한 사람들의 입장을 반영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쉽게 깨달을 수 있다.
”저는 단지 제가 겪은 일을 표현할 언어를 갖지 못했을 뿐입니다. 오늘 저는 그런 언어를 비로소 갖게 되었어요. 감사합니다. 교수님.”
“네. 읽었을 뿐만 아니라 제 열여섯 살짜리 아들에게도 읽으라고 권했죠. 아이는 하룻밤에 한 장을 다 읽고는 아침에 이렇게 말하는 거였어요. ‘이 글을 쓴 분을 만나보고 싶어요. 마치 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요.’” 거룩스와 프레이리의 담론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투덜대는 그 ‘유식한’ 학자들에게 내가 묻고 싶은 게 바로 이것이다. 열여섯 살짜리 소년과 가난하고 ‘무식한’ 여성이 쉽게 이해하고 공감하는 프레이리와 거룩스의 언어와 사상을 왜 그토록 아는 것이 많은 학자들이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는 걸까?
나는 그 답이 언어와 무관하고 이데올로기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즉 사람들은 자신에게 익숙하거나 자신이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표상에 일체감을 느끼는 것이다.
언어의 명료함에 대한 요구는 언어적 문제가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문제다.
내가 보기에 ‘단순 명료한’ 언어를 바라는 통속적인 요구는 복잡한 이론적 문제를 회피하려는 또 다른 기계론으로 생각된다. 특히 그 이론적 구성물이 기존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에 의문을 표시할 때에는 더욱 그렇다. 바로 그러한 이유로 가야트리 스피바크Gayatri Spivak는 “평범한 산문은 사기를 친다”고 올바르게 지적했던 것이다. 나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평범한 산문은 사기를 칠 뿐만 아니라 현실을 표백하기도 한다”고 말하고 싶다.
‘관점이 없는’ 중립성을 취하면 사실상 아무런 견해가 없는 것이므로 갈등(또는 그와 연관된 어떤 것이든)을 가르칠 수 없다.
우리는 금세기 말에 전개되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숙명론, 즉 다수의 삶을 희생시키면서 소수가 대부분의 이득을 취하는 시장 윤리에 대해 결단코 반대해야만 한다. 이것은 바꿔 말해서 경쟁할 수 없는 자는 죽는다는 윤리다. 그것을 잘못된 윤리이며, 사실상 윤리가 부재한 윤리다. 나는 계속 인간으로서 살아갈 것을 주장한다…그렇다면 나는 반대를 말할 수 있는 이 세상 최후의 교육자로 남고자 할 것이다.
크나큰 슬픔, 즉 마고아(magoa)와, 역시 크나큰 애정과 희망으로써 나는 다시 한 번 파울루에게 감사를 보낸다. 이 세상에 그가 살았다는 것에 대해, 우리에게 『페다고지』를 준 데 대해, 세상을 읽는 법을 가르쳐준 데 대해, 그리고 우리에게 세상을 인간적으로 만들도록 자극한 데 대해.
#머리말_리처드 숄
실제로 글을 배우고 익히는 과정에서 대중은 새로이 자각하며, 자신들이 처한 사회적 상황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면서 그동안 참여의 기회를 거부해 왔던 사회를 변화시키는 데 앞장서기 시작한다.
교육은 이제 전복적인 힘이 된다.
파울루 프레이리의 사상은 주변의 피억업자들이 겪고 있는 커다란 재난과 고통에 대한 창조적 정신과 섬세한 양심의 대응을 나타낸다.
가난한 자의 아픔을 일찍부터 겪음으로써 그는 그 자신이 빼앗긴 자의 ‘침묵의 문화’라고 부른 것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그는 점차 빈민의 무지와 무기력이 경제적·사회적·정치적 지배 상황과 가부장제의 직접적인 산물이며 빈민은 그 희생자라는 사실을 자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도 빈민은 구체적인 현실을 알고 거기에 대응하도록 자극과 교육을 받는 게 아니라, 비판적 인식과 대응이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에 빠져 있었다.
그가 보기에 교육 제도 전체는 그 침묵의 문화를 유지하기 위한 주요 도구에 불과했다.
지극히 실존적인 방식으로 그 문제에 직면한 프레이리는 교육 분야에 관심을 돌리고 천착하기 시작했다. 이후 오랫동안 그는 연구와 성찰의 과정을 거쳐 완전히 새롭고 창조적인 교육철학을 개발해냈다. 인간을 해방시키고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기 위한 투쟁에 직접 참여하면서 그는 처한 상황과 철학적 입장이 다른 여러 사람들의 사상과 경험을 접할 수 있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는 “샤르트르와 무니에, 에리히 프롬과 루이 알튀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와 마오쩌둥, 마틴 루터 킹과 체 게바라, 우나무노와 마르쿠제” 등 수많은 사상가들을 접했다고 한다. 그는 이들의 통찰력을 활용하여 라틴아메리카의 구체적 현실에 적용하기 위한 자신만의 독창적인 교육 이론을 정립할 수 있었다.
그가 개발한 방법론은 브라질 북동부 전역에서 카톨릭교도를 비롯한 사람들이 전개한 문맹퇴치 사업에서 폭넓게 활용되었다. 그러나 그의 교육 방법론은 기존 질서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되어 프레이리는 1964년 군부쿠데타 직후 투옥되고 말았다.
그와 더불어 프레이리는, 모든 인간은 ‘무지’하든, ‘침묵의 문화’에 젖어 있든 간에 상관없이 대화를 통해 타인들과 접촉하는 과정에서 비판적으로 세계를 바라볼 수 있게 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그러는 가운데 말은 새로운 힘을 얻는다. 이제 말은 더 이상 추상이거나 마술이 아니라 사람들의 주변의 것들에 이름을 붙이면서 자기 자신과 자신의 잠재력을 발견하는 수단이 된다.
프레이리가 말했듯이 각 개인은 자신의 언어를 말하고 세계를 이름짓는 권리를 되찾는 것이다.
젊은 세대는 자신의 언어로 말할 수 있는 권리를 빼앗겼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으며, 그것을 되찾는 노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또한 그들은 유치원에서 대학까지 이르는 오늘날의 교육 체계가 그들에게는 오히려 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다.
교육 과정에서 중립적인 것이란 없다.
교육은 젊은 세대를 기존 체계의 논리에 통합시키고 따르도록 만드는 도구로 기능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자유의 실천’으로서 현실에 대해 비판적이고 창조적으로 대응하고 세계의 변혁에 참여하는 방법을 발견하기 위한 수단으로 기능할 뿐이다. 후자의 과정을 촉진시키는 교육 방법론의 개발은 불가피하게 우리 사회 내에 긴장과 갈등을 유발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새로운 인간 형성에 기여할 것이며, 서구 역사에 새 시대를 열어줄 것이다.
#저자 서문
지금까지 나는 의식화의 역할을 분석하는 훈련 과정과 진정한 해방 교육, 즉 이 책의 제1장에서 논의된 ‘자유의 공포’를 실제로 실험하는 과정에 모두 참여해 왔다…하지만 그들이 의심하는 것처럼 의식화는 민중을 ‘파괴적 성향’으로 몰고 가지 않는다. 그 반대로 의식화는 민중이 역사 과정에 책임 있는 주체로 들어갈 수 있게 함으로써 파괴를 피하고 자기 긍정을 모색할 수 있도록 해준다.
『페다고지』는 단지 생각과 공부만으로 쓰여진 책이 아니다.
이 책은 구체적인 상황에 뿌리박고 있으며, 교육 활동을 하는 기간 중에 내가 직·간접적으로 관찰한 노동자와 중산층 민중의 반응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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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론적 관점에서 볼 때 인간화의 문제는 늘 인류의 핵심적인 문제였지만, 지금 그것은 벗어날 수 없는 관심의 대상이 되어 있다. 인간화에 대한 관심은 동시에, 존재론적 가능성만이 아니라 역사적 현실이기도 한 비인간화에 대한 인식으로 이어진다. 비인간화의 정도를 알게 될 때 우리는 인간화가 과연 가능성으로서 존립할 수 있는지 의문을 가지게 된다.
비인간화는 인간성을 빼앗긴 사람들만이 아니라 인간성을 빼앗은 사람들과도 관련되며, 더 완전한 인간성을 찾으려는 소명의 왜곡이다.
예를 들어 감독자는 자신의 일자리를 확고히 하기 위해 지주보다 더 거칠게 행동할 수밖에 없다.
완전한 인간성을 찾으려는 노력은 그 상황을 변혁하려는 진짜 노력 속에서 이미 시작되었다.
핵심 문제는 이것이다. 분열되고 불확실한 존재인 피억압자는 어떻게 자신의 해방을 위한 교육학 개발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인가?
그 답은 하나뿐이다. 피억압자는 자신을 억압자의 ‘숙주’로 인식해야만 해방적인 교육학을 낳는 데 기여할 수 있다.
억압 관계가 정착되면 이미 폭력은 시작된 것이다. 역사상 어느 시대에도 피억압자가 먼저 폭력을 시작한 적은 없었다. 그들 자신이 폭력의 결과물인데 어떻게 폭력을 시작할 수 있겠는가?
민중 편으로 전향한 사람은 근본적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그들은 자신의 억압자에 관해 구체적으로 ‘깨닫고’ 자신의 의식으로 되돌아 올 때까지 거의 언제나 자신의 상황에 관해 숙명론적인 태도를 취하게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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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식 교육의 뚜렷한 특징은 변화시키는 힘이 아니라 말의 반향이다.
해방교육의 존재근거는 양측의 화해를 도모하는 데 있다. 교육은 교사-학생 모순을 해결하는 데서 시작되며, 이 모순의 양측을 화해시킴으로써 동시에 교사와 학생이 더불어 존재하게 된다. 은행 저금식 교육관에서는 그러한 해결이 없고, 있을 수도 없다.
실제로 억압자에게 이익을 가져다주는 것은 “피억압자를 억압하는 상황 자체가 아니라 피억압자의 의식을 변화시키는 데” 있다. 피억압자를 억압적 상황에 적응하게 만들수록 더욱 더 그들은 유순해지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은 의사소통을 통해서만 의미를 지닌다…참된 사고란 현실에 관심을 가지는 사고다. 따라서 그것은 고립된 상아탑 속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상호간의 의사소통 속에서만 생겨난다.
해방교육은 정보의 전달이 아니라 인식 행위로 구성된다.
문제제기식 교육방법은 교사-학생의 행동을 이분화하지 않는다.
은행 저금식 교육은 창조성을 마비시키고 금지하지만, 문제제기식 교육은 현실을 드러내고자 한다. 전자는 의식의 침잠을 유지하려 하지만, 후자는 의식의 출현과 비판적 현실 개입을 위해 노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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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을 변화시킬 수 없는 거짓된 말은 말의 구성요소들이 이분화되어 있을 때 생겨난다. 말에서 행동의 차원이 제거되면 성찰도 사라지고 말은 한가한 수다, 탁상공론, 소외적인 ‘허튼소리’가 되어버린다. 이런 공허한 말로는 세계를 비판할 수 없다. 변화에 헌신하지 않으면 비판이 불가능하며, 행동 없이는 변화가 없기 때문이다.
참된 말을 하는 것-그것이 일이며 프락시스다-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지만, 그 말을 하는 것은 일부 사람들의 특권이 아니라 모두의 권리다.
한편 대화는 겸손한 태도가 아니면 성립하지 않는다. 나아가 대화는 인류에 대한 깊은 신념을 필요로 한다. 사랑과 겸손, 신념에 뿌리를 둔 대화가 만들어내는 수평적 관계에서는 대화자들 간의 상호 신뢰가 싹트는 것이 논리적 필연성이다. 또한 희망이 없으면 대화도 있을 수 없다. 마지막으로 대화자가 비판적 사고를 하지 않으며 진정한 대화는 성립하지 않는다.
진정한 휴머니스트 교육자와 참된 혁명가에게 행동 대상은 사람들이 아니라 그 사람들과 함께 변화시켜야 할 현실이다.
해방교육의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민중이 자기 사고의 주인으로 느끼도록 하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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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은 노동하지 않으며, 자신의 환경을 초월할 수 없다. 그러므로 동물의 모든 종은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간다. 인간에게는 환경이 열려 있으나, 동물은 환경 속에서 자기들끼기 의사소통을 하지 못한다.
그러나 인간 행위는 행동과 성찰로 이루어진다. 그것은 곧 프락시스이며, 세계의 변혁이다. 인간 행위는 곧 프락시스이기 때문에 이론을 필요로 한다. 인간 행위는 이론과 실천이며, 성찰과 행동이다.
“혁명 이론이 없으면 혁명 운동도 있을 수 없다.”-레닌
민중과의 대화는 모든 참된 혁명에 필수적이다. 이것이야말로 혁명을 군사 쿠데타가 아닌 진짜 혁명으로 만드는 요소다. 쿠데타에는 책략이나 무력만이 있을 뿐 대화를 기대할 수는 없다.
민중과의 대화는 양보도 아니고, 선물도 아니며, 지배를 위해 사용하는 책략은 더더욱 아니다. 대화는 세계를 ‘이름짓기’ 위한 사람들 간의 만남이며, 참된 인간화를 위한 근본적인 조건이다.
자유로운 행동이란 오직 인간이 자신의 세계와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는 행동만을 가리킨다.-가조 페트로비치
사회가 발전하고 있는 여부를 판단하려면 ‘1인당’ 소득(이러한 통계 수치는 현실을 오도한다) 등의 지표를 기반으로 하거나, 총 소득 연구를 중심으로 하는 기준 같은 것은 포기해야 한다.
피지배 의식은 이중적이고, 모호하며, 두려움과 불신에 차 있다…체 게바라…농민이 두려움을 품고 무능한 이유는 그들의 피지배 의식이 억압자를 내면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 지금 페다고지를 다시 읽어야 하는가?_심성보
사회정의와 변혁을 위한 민중들의 의식화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쳤던 책이기에, 우리나라에서는 70년대 후반부터 87년 6월항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지하운동을 하던 노동자들의 노동운동과 교사들의 교육운동, 대학생들의 학생운동 등에서 의식화 교재로 많이 읽혀졌다. 억압을 깨기 위한 의식고양 교재로서 『페다고지』가 널리 읽혔던 것은 그만큼 우리의 노동현실과 교육현실이 억압적이었음을 보여준다 하겠다. 『페다고지』를 소지한 것만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감옥에 가야 했고, 이 책 덕택으로 많은 사람들이 정든 직장을 떠나야 했지만, 그 희생으로 우리는 군사정부의 억압에서 벗어나 문민정부와 국민정부를 탄생시킬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진정 억압에서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전의 군사정부 때보다 물리적 억압이 상당히 사라지고 절차적 자유를 다소 누리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진정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사실 우리는 초보적 자유를 누리고 있는지는 몰라고 정치·경제적 자유, 그리고 내적인 자유 등 보다 높은 차원의 진보적 자유는 아직 누리지 못하고 있다. 바로 이 진보적 자유를 인식하기 위해 우리는 지금 다시 『페다고지』를 읽어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