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여는 18가지 대안적 실험. 장병윤. p216
대안은 제대로 된 현실 인식 위에서 가능하다. 우리가 현실의 문제를 직시할 때 비로소 그를 극복하고 개선할 힘을 얻을 수 있다. 오늘 우리의 삶과 우리가 뿌리 내린 세계를 정확하게 진단하는 일이 중요한 것은 그 때문이다.
제한적인 자원과 무한성장 욕구 사이의 괴리가 현실화되면서 인류 사회는 막다른 벼랑으로 내몰리고 있다. 산업화 이후 불과 2세기 남짓한 짧은 기간 동안 이룬 눈부신 물질문명의 성과는 이제 축복이 아니라 재앙의 전주가 되고 말았다. 사람보다 돈이 우선하는 거대한 자본주의 문명의 체계는 그것을 만들어내 인간을 한낱 부속품으로 전락시키며 파편화시키고 있다.
지난 세기 전 지구적으로 자행된 무모한 개발과 과도한 소비는 지구생태계에 치명상을 입혔다. 인간의 탐욕이 스스로의 삶터를 결딴낸 셈이다.
자연생태의 붕괴만큼이나 심각한 것은 뒤틀린 인간의 욕망이 부른 성장에 대한 헛된 믿음이다. 무한성장의 빗나간 욕망은 스스로를 경쟁체제 속으로 내몰며 인간의 존엄과 공동선을 내팽개쳤다. 자신의 삶을 위해 이웃을 짓밟아야 하는 극단적 경쟁구조는 인류사회를 갈등과 분열의 질곡으로 빠뜨리고 있다. 한쪽의 풍요와 행복이 다른 쪽의 가난과 불행이 되는 이 추악한 구조는 저주받아 마땅하다. 기득권에 부화뇌동한 채 공익적 기능을 망각하고 불평등과 탐욕을 조장하는 국가체계는 더욱 절망적이다.
물신이 만든 무한성장의 우상을 깨뜨리지 못하고는 결코 희망을 발견할 수도 행복해질 수도 없다.
지금 우리에게 대안은 과도한 욕망을 내려놓는 일에서 시작돼야 한다.
공동체의 평화를 깨뜨리고 개인의 주체성을 억누르는 ‘자본주의 문명의 폭주’로부터 내려설 때 우리는 위기를 넘는 대안을 모색할 수 있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회복해 조화를 이루는 일은 우리가 욕망을 온전히 비워낼 때 가능하다.
그동안 다양한 대안의 현장을 찾아 새로운 가능성을 엿보았다. 생태적 삶의 가치와 공생공락을 꿈꾸는 이들이 존재하는 한 우리에게 희망은 남아 있다. 물론 그 희망의 씨앗이 세상에 뿌리를 내리는 일은 녹록하지 않다. 여전히 세상은 애써 위기를 외면한 채 ‘새로운 꿈’을 홀대하고 배척한다. 하지만 우리는 쉽게 내일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스스로의 삶을 되돌아보는 근원적 성찰을 통해 결정적 회심을 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유일한 대안이자 희망이다.
#근원적 삶의 혁신 이끄는 ‘귀농 전도사’_이병철
서재 벽엔 그가 스승으로 모셨던 무위당 장일순 선생이 쓴 ‘오불여노농(吾不如老農)’이란 글이 걸려, 고졸한 분위기를 풍기며 대화를 더욱 훈훈하게 했다.
귀농운동 일선에서 물러나셨다고 들었습니다
지금은 사회적 변화를 추구하는 일보다는 제 스스로의 성찰, 내면적 변화에 관심이 머물러 있습니다.
개인의 존재에 대한 자각 없이는 사회를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과 세상은 분리돼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은 내가 투영된 결과입니다. 따라서 내가 먼저 바뀌지 않고는 세상을 바꿀 수 없습니다. 운동하는 사람들이 갈수록 피폐해지는 것은 세상에 요구만 하고 비판만 하지 정작 자신의 변화는 외면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건강해야 세상이 건강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신부터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생태적 농업의 회복을 위해서는 공동체적 작업이 매우 중요하리라 생각됩니다.
여러 곳에서 꾸준한 움직임이 있습니다. 하지만 생태공동체에 대한 역사적 경험이 짧은 데다 농업생산의 자립적 기반을 방해하는 신자유주의체제 아래 놓여 있다는 게 한계입니다.
#’음식문맹’ 벗어나기, 슬로푸드 운동_김종덕 교수
밥을 에너지로만 생각하는 현대인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다. 밥이 바로 우리의 몸이자 정신이라는 것을. 밥은 우리 몸속으로 들어와 살이 되고 피가 되고, 그가 이룬 거푸집에서 생각과 감성이 나온다. 따라서 밥은 우리의 육신이자 사상이기도 하다.
조상들은 밥을 우주라고 했다. 밥 한 그릇 안에 온 우주가 들어 있다는 말이다. 햇볕과 비, 바람이 스며들고 농부가 흘린 땀이 배어 있다는 것이다. 밥을 알면 세상의 이치를 안다고 했던 조상들에게는 아침저녁으로 마주하는 밥상이 예사롭지 않았다.
현재 우리의 상황은 한마디로 ‘먹을거리 비상사태’입니다. 양적이나 질적인 측면에서 다 그렇습니다.
먼저 국가가 먹을거리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합니다…미국과의 쇠고기 수입협상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 정부의 먹을거리에 대한 인식은 매우 낮은 수준입니다. 먹을거리는 늘 정책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나 있습니다. 모든 정책에 경제적 잣대만 들이대는데 식량 문제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국민의 생종과 건강 문제가 직결돼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위스 같은 나라는 농업 문제를 경제정책이 아니라 사회정책의 범주로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 국민들도 먹을거리 문제에 대해 무관심한 편입니다…신자유주의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음식을 먹는 모습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이게 제대로 된 식생활입니까. 음식을 먹을 시간조차 없어 길거리에서 한 끼를 허겁지겁 때우는 일이 허다하고, 인스턴트식품이 판을 칩니다. 그러한 가운데 오랜 세월 축적해 온 요리 기술조차 잊어버리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한미 FTA
먹을거리 문제가 정치의 핵심사항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먹을거리 문제를 중시하지 않고 있습니다.
어떤 가치보다 돈이 우선시되는 시대적 풍토가 음식의 상품화를 부채질하고 음식 문화를 변질시키고 있습니다
음식은 상품 이상입니다. 하지만 음식이 상품화되면서 사람들이 음식에 대해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렸습니다. 식품산업은 소비자의 건강보다 이윤을 먼저 생각합니다.
이런 가운데 ‘음식문맹자’에서 ‘음식시민’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교수님의 지론이 더욱 절실한 것 같군요.
사실 현대인들 대부분이 음식이 중요하다는 것을 망각하고 있고, 음식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점에서 음식문맹자라 할 수 있습니다. 음식문맹자에서 먹을거리 문제를 주체억으로 인식하는 음식시민으로 거듭날 때 먹을거리 문제를 본질적으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음식에 대한 제대로 된, 올바른 인식이 먹을거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첫걸음입니다.
슬로푸드 운동은 1986년 이탈리에서 출발…질 좋은 삶을 망치는 미국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이었다고 볼 수있겠죠.
슬로푸드 운동은 자본주의에서 강조하는 효율성을 위한 속도 증대에 반대합니다…인간이 속도에 매몰되어 자연의 법칙을 어겼고, 그 결과 먹을거리가 문제가 된 겁니다. 음식의 상품화가 불러온 극단적인 폐해입니다. 슬로푸드 선언은 효율성 만능주의에 대한 성찰로부터 나왔습니다.
슬로푸드 운동은 단순히 음식운동이 아니라 정치의식, 주민자치 운동까지 포괄합니다. 슬로푸드 운동이 추구하는 바는 좋은 음식을 먹자는 것이라기보다는 좋은 음식의 기반을 보호하고 육성하자는 데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압축적 경제성장 과정, 음식문화의 왜곡도 심하게 있어났습니다. 원래 우리나라 음식은 슬로푸드 그 자체였습니다. 우리만큼 발효식품을 잘 발전시킨 나라도 없습니다. 하지만 산업화 과정에서 많은 슬로푸드가 자취를 감추고, 패스트푸드가 우리의 식단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계 최고의 라면 소비국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훌륭한 전통음식을 복원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라도 슬로푸드 운동이 필요합니다.
우리나라 식품가공법은 전통음식에 대한 규제 수준이 매우 높습니다.
일정 규모 이상의 시설을 갖춰야 상품화해서 유통할 수 있게끔 되어 있습니다. 자본의 논리가 개입된 것이죠…실제 가공식품들이 전통음식보다 훨씬 불안합니다. 화학첨가물의 폐해가 얼마나 큽니까. 그런 것은 허용하고 지혜가 스며든 전통음식의 안전성을 시비하는 것 자체가 난센스죠.
소비자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봅니다. 소비자들의 농업과 먹을거리에 대한 생각이 제대로 되면 농업 문제, 먹을거리 문제의 해결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정체불명의 글로벌푸드가 식품안전성이나 환경 등에 문제가 되고, 또 가족농에게 어려움을 가져다주자 로컬푸드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습니다…지역식량 체계의 특징은 생산자와 소비자의 연결입니다. 사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생산자와 소비자는 먹을거리 공동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소비자가 공동생산자가 되어 생산자의 식량생산 과정에 참여하고, 생산자의 사정을 이해하고 배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생산자인 농민은 생산 과정에서 소비자들의 건강과 안전을 우선 생각해야 합니다. 이처럼 농민과 소비자가 서로 배려하고 신뢰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생산자 푸드 달러(Food Dollar), 소비자가 지출한 음식비에서 생산자에게 돌아가는 몫
세계식량 체계에서는 식량체계의 주역이 거대자본이고, 생산자와 소비자는 거대자본의 지배 대상입니다…생산자는 자율성을 잃을 뿐만 아니라 푸드달러 중 생산자 몫이 줄어들기 때문에 점점 더 어려운 지경에 빠지게 됩니다…거대자본은 정부를 움직입니다. 예컨데 미국 정부는 유전자 조작 농산물에 대한 규제를 거의 하지 않습니다. 소비자들이 의무표기를 주장해도 이를 무시합니다(회전문 인사!)
생산자와 떨어져 있는 소비자는 식량 생산 과정을 알기 어렵습니다. 수많은 단계를 거치면서 식탁에 오른 음식에 대해 알 수가 없습니다. 농업과 먹을거리 문제의 해결에서 소비자는 매우 중요합니다. 생산자가 아무리 좋은 먹을거리를 생산한다고 하더라도 소비자가 외면하면 생산을 지속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소비자가 음식에 대해, 농업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느냐가 중요합니다…생산자와 소비자의 연결이 필요합니다.
지속 가능한 세상. 세계식량 체계처럼 규모를 예찬하고 속도를 예찬하는 것은 우리를 죽음의 밥상으로 내모는 일입니다. 농업이나 음식은 자연의 순리가 기본이 되어야 합니다. 인간의 개입이 적정수준을 넘어서면 안 됩니다. 그런데 지금 세계식량 체계는 자연 순환의 임계점을 넘어섰고 그것이 부메랑으로 인간에게 돌아오고 있습니다…공존공생하지 못하면 농업도 음식도 궁극적으로 인간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제 인간은 자연에 대해서 겸손해야 합니다.
먹을거리는 국민의 생명과 관련된 문제이며, 안전한 먹을거리 공급 여건의 확보는 국가의 의무입니다.
#생태담론의 전진기지, 녹색평론_김종철 발행인
파국을 향해 달리는 문명
설령 위기의 정체를 알아챘다고 해도 맞서지 않고 지레 포기합니다. 무엇인가가 이 난국을 해결해 주지 않겠나 하는 막연한 기대 속에…지난 십 수년간 우리의 삶은 물질적으로는 더 나아진 듯하지만, 실은 우리의 미래를 갉아먹어 온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편리와 풍요라는 이름 아래 우리 스스로의 삶, 삶터를 망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세계화, 신자유주의가 문제.
가진 자들 중심으로, 그들의 잣대로 세계경재를 재편하는 것이 바로 세계화의 정체입니다.
이명박정부 들어 돈이면 다 된다는 경제제일주의가 극성을 부리고 있습니다.
국가의 공익적 기능을 외면한 채 모든 것은 기업, 이윤의 측면에서만 생각하고 있습니다…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만 봐도 그렇잖아요. 미국과 국내 대기업의 이익을 위해 검역주권이나 국민의 건강권을 소홀히 한 것 아닙니까.
농촌이 무너지는 것은 우리 삶의 토대가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권력자들은 농업 인구는 10만 명이면 족하다고 하고, 해외에대 식량기지를 건설하면 해결된다고 하니 한심한 노릇이 아닐 수 없습니다…결국 농촌을 쌀 공장, 식품을 만드는 공장 정도로 바라본 천박한 자본의 논리, 경쟁의 논리가 불러온 결과지요. 농촌은 오랜 세월 우리의 호혜적 삶을 지켜온 공동체이자, 앞으로도 지속 가능한 삶을 약속해 줄 가장 확실한 토대입니다.
『녹색평론』은 ‘공생공락의 가난’을 줄기차게 표방하고 있습니다. 장일순 권정생 두 분 선생님의 나눔과 가난이 그런 정신이겠지요.
‘위학일익 위도일손’. 도덕경의 한 구절입니다. 학문을 하면 지식이 늘어나고 도를 행하면 욕심이 준다,…내가 세속의 학교에서 지식을 배웠다면, 두 분에게는 줄이고 나누는 삶의 방법을 배웠지요. 『녹색평론』 행간에 두 선생의 사상과 삶의 흔적을 반영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재정 문제. 어렵습니다. 그러나 5000여 명의 정기독자가 큰 버팀목이 되어줍니다. 늘 재정적인 압박을 받으면서도 가까스로 명맥을 유지해 온 것은 그들이 있기 때문이지요.
자연과 사람, 사람과 사람의 조화, ‘고르게 가난한 사회’를 지향하며 공생적 문화의 회복을 화두 삼아 온 『녹색평론』은 이 시대 녹색담론의 전진기지이다.
#생태적 자립으로 가는 길, 흙처럼아쉬람_고제순 흙집지기
칼 포퍼를 전공한 철학자가 흙집을 짓는 사람으로?
정신없이 책에만 매달려 살았던 셈이지요.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제 삶을 돌이켜보게 되었습니다. 스스로에게 행복한가 물었고, 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었죠…오로지 정신노동만 해온 기형적인 삶으로 일관해 온 것이지요. 머리만 복잡한 사람은 아는 것은 많은데 행동하지 않습니다. 제 삶이 그랬죠. 지행합일이 안 되는 삶에 스스로 실망하면서 마음이 불편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급기야 자기 모순적, 자기 분열적 나날이 고통스러워졌습니다. 그게 새로운 삶을 모색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자립을 위해서 자기 혁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 먼저 정신노동을 줄이고 육체를 부리고 영성생활을 하는 삶을 추구했습니다. 하루 24시간 중 잠자는 6시간, 식사하는 3시간을 뺀 15시간을 육체노동, 정신노동, 영성생활에 5시간씩 나눠 조화로운 삶을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식주의 자립을 위해 대학 강의를 그만두고 농사를 배웠습니다. 집 짓기도 배웠고 자연의학도 공부했습니다.
#주거문화의 온고지신, 청도한옥학교_변숙현 교장
‘현대인에게 집은 대합실’이라는 건축가 정기용의 풀이는 우리 시대의 집에 대한 오해와 왜곡을 돌이켜보게 한다. 옛사람에게 집이란 태어나고 자라고 죽음까지도 포용하는 생명의 공간이었다…그런데 지금은 많은 이들이 집을 재산 증식의 수단, 더 좋은 집으로 가기 위해 잠시 대기하는 장소로 생각한다.
집은 사람과 우주를 맺어주는 장소라고들 하지요.
집은 단순한 구조물이 아니라 그 속에서 사람이 태어나고 자라고 배우고 죽고 대를 잇는, 정신과 생명이 스며든 유기체입니다. 사람의 몸이 소우주이고, 자연이 대우주라면 집은 중우주입니다. 한옥은 자연과 삶이 온전히 밴 공간이죠.
집에 담긴 시대정신이랄까요. 한옥에도 한 시대의 가치와 미학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지금의 한옥이 과거와 같은 형태의 한옥이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전통을 답습하기보다는 재창조할 필요가 있는 것이죠.
유익한 불편? 그 불편한 외풍이 우리 건강에는 유익합니다. 한옥에 살면 감기 걸릴 일이 거의 없습니다. 따뜻한 아파트 생활을 하면서 감기를 달고 사는 경우와 비교가 되지요.
현대인은 온통 시멘트로 만들어진 닫힌 공간에서 살아갑니다. 죽음의 공간이라고도 할 수 있겠죠.
한옥을 숨 쉬는 집이라고 합니다. 주요 부재인 흙과 나무는 습도를 조절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마루, 마당 등 모든 게 조상들이 오랜 경험 속에서 확인해 온 과학적 생각의 결과물입니다.
#전인·자유교육의 실천장, 금산간디학교_양희규 교장
인생에 정답이 없듯이 교육에도 정답이 없습니다. 하지만 잘못된 교육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육은 아이, 부모, 사회를 모두 불행하게 하는 ‘나쁜 교육’이 분명합니다. 나쁜 교육은 어린이들에게 마음껏 뛰어놀아야 할 아이다움을 빼앗습니다.
원인을 알아야 처방전을 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잘못된 교육을 정부나 교육청, 입시제도의 책임만으로 돌릴 수 없습니다. 총체적인 사회 인식이 교육을 잘못 가게 하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 교육의 문제를 잘못된 정책의 문제와 함께 부모들의 비합리적 이기심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내 아이만은 좋은 대학에 보내겠다는 과도한 욕심이 문제지요.
#아이와 농촌, 생명을 살리는 생태유아교육_임재택 교수
우리는 유아교육을 ‘양계장 닭’ 키우듯 한다고 하셨는데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생태유아교육은 잘못된 교육현실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합니다. 생태유아교육의 목적은 산업문명의 최대 피해자인 우리 아이들의 병든 몸과 마음, 영혼을 살리자는 데 있습니다.
잘못된 식문화, 주거문화 등으로, 아이들이 자연으로부터 단절되면서 많은 문제점을 노출시키고 있다고..
자연 속에서 놀이 중심으로 교육을 하면 감성뿐만 아니라 신체적 발달도 도모할 수 있겠지요.
#’실사구시 장인’ 길러내는 녹색대학_허병섭 대표선생
녹색대학 재생 프로젝트. 누군가 맡아 해야 할 일 아닌가요.
어떤 교과과정보다 개인의 영성적 삶, 영성적 깨우침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은데요.
근원으로 돌아가자는 이야기입니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현대문명 속에서 인간, 자연, 삶…., 그 본질이 무엇인지 돌이켜보자는 거지요.
우리가 회복해야 할 영성적 삶은 조상들의 자연친화적 삶, 인디언의 영성적 삶이 될 수도, 무위자연이 되기도 합니다. 결국 공생으로 가는 길, 나와 남이 평등한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정신적 토대입니다.
무척 어렵지만, 생태적 삶이란 것이 굳이 많은 돈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민중의술로 의료주권을’ 전통의술합법화운동_황종국 변호사
이 시대의 화타라 불리는 장병두 할아버지의 불법의료 행위에 대한 변론을 맡으면서 대법원에 위헌법률제청 신성을 했습니다. 올해 100 살이 넘은 장 할아버지는 그동안 병원에서 포기한 숱한 불치병 환자를 고쳤습니다…우리의 의료법은 의사와 한의사만이 진료를 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건강권, 의료선택권이 의료법에 의해 제한받고 있는 겁니다.
문제는 법이 의사를 제외한 능력 있는 이로부터 치료받을 수 있는 기회를 막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의사밖에 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침구 교육을 받은 이들이 있지만 아예 제도적으로 진료를 할 수 없게 막아 놨습니다.
우리나라 침구사제도는 1962년 군사정권에 의해 의료법이 제정되면서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쿠데타 주역들이 침구사 등 민중의술을 제도적으로 봉쇄한 것입니다. 구당 선생처럼 일제 때 자격을 받은 이들은 예외적으로 진료를 허용한 것이지요.
서양지상주의랄까요, 해방 정국을 주도한 식자깨나 있는 지식인들이 서구화를 근대화로 착각한 겁니다. 우리 전래의 것은 미개하고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한 것이지요. 이승만 정권 때부터 침구 등 민족의술을 미신으로 몰아붙여 제도가 번연히 있음에도 자격시험을 실시하지 않았어요.
‘반쪽 한의대’? 교육 과정이나 진단 방법 등을 보면 오히려 서양의술을 모방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한의대가 출범하면서 전통의술의 시술권을 한의사가 독점. 숱한 한방요법 중에서도 유독 탕제약 제조를 유독 선호합니다. 전통의술 중 으뜸이고, 가장 저변이 넓은 침구는 아예 서자 취급당한 것이지요. 침을 못 놓는 사람이 한의사가 된다는 사실 자체가 희극 아닙니까.
양의사들은 서구 의료제국주의의 지배전략에 자기도 모르게 세뇌되어 우리 민족의학을 압살하는 데 앞장섰고, 한의사들은 시술독점권이라는 달콤한 미끼에 젖어 부당한 제도에 저항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들이 합작해서 우리 민족의학을 내팽개쳤습니다.
예전엔 마을마다 침놓는 분들이 한 분씩을 꼭 계셨어요. 어지간한 병은 다 치료했습니다.
민주주의 종주국이라는 영국에서는 치료 자격에 아무런 규제가 없어요. 단지 의사라는 칭호만 안 쓰면 됩니다.
영국, 독일, 러시아 등의 나라에서는 의사가 대체요법을 권장합니다…이제는 ‘대체의학’이란 용어 대신 ‘통합의학’이란 말을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물 안 개구기가 돼 오히려 전통의술을 업신여깁니다.
빠른 시일 안에 제도적 변화가 오지 않으면 전통의술의 맥이 끊어질 것이 자명합니다. 서양은 동양의학 등을 흡수해 통합의학으로 가고 있는데 우리는 무엇입니까. 침구를 하기 위해 중국이나 일본, 호주 등으로 가서 침구사 자격을 따서 옵니다. 침구가 우리 고유의 의술 아닙니까. 그런데 그것을 남의 나라에 가서 자격증을 받아오고, 한의사들이 해외연수를 나가 배우는 이런 아이러니가 어디 있습니까. 스스로 제 무덤을 판 결과라고 봅니다.
구당 선생의 경우 지난 1980년대 화상을 흉터 없이 아물게 하는 화상침술로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습니다. 얼마나 큰 자산입니까. 이것을 왜 계승하고 발전시키지 못합니까.
우리 전통의술은 참으로 실용적입니다. 서양의술은 진단이나 수술을 위해 엄청난 장비를 갖춰야하고 인력도 많이 필요합니다. 어쩌면 그런 구조가 과잉진료를 부르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 민중의술을 보세요. 침통 하나, 뜸통 하나, 부황기 하나면 충분하질 않습니까. 거기에 무슨 시설이 필요하고 보조인력이 필요합니까. 산이든 바다든 비행기 안이든, 언제 어디서나 할 수 있는 세계유일의 의술입니다.
국가가 추구하는 목표는 경제가 아니라 생명이어야 합니다. 경제만 잘되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는 허황된 꿈에서 벗어나냐 합니다. 모든 것이 돈으로 귀결되는 이 사회의 천박함이 우리의 몸과 마음을 황폐화시킵니다. 공동체적 가치고 붕괴시킵니다. 이제 생명에 눈을 돌려야 합니다. 자신과 타인, 그리고 뭇 생명붙이에 대한 따뜻한 관심이 필요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제대로 먹고 마음을 제대로 쓰면서 바른 삶의 자세로 자연치유력을 높일 수 있습니다. 천박한 가치관으로 우리의 삶을 건강하게, 행복하게 할 수 없습니다.
#석유문명의 한계를 넘어, 민들레공동체 대안기술센터_이동근 소장
불필요한 부분을 없애야. 전혀 냉장이 필요없는 식품까지 꽉꽉 채워서 많은 전력을 소모. 일반 가정에 왜 그렇게 큰 냉장고가, 그것도 두 대 세 대 씩이나 필요합니까.
신선한 음식을 섭취하는 것도 방해하는 게 냉장고입니다.
#신자유주의에 맞선 ‘공생정신’, 원주협동조합운동협의회_
#공동체경제 일구는 ‘따뜻한 돈’, 지역통화 ‘한밭레츠’_박용남 소장
흔히들 지역통화를 인간의 얼굴을 한 돈이라고 합니다.
LETS. 1980년 캐나다 코목스 밸리 섬마을, 불황으로 실업자 무더기, 그들은 일할 능력과 의지를 갖고 있음에도 단지 현금을 소유하지 못한 이유로 경제활동에서 배제된 것이지요. 그때 컴퓨터 프로그래머 마이클 린턴이 고안해 낸 것이 레츠입니다 (time banking)
세계를 한 묶음으로 묶어 국제금융 자본의 지배력을 높이자는 세계화에 대항하는 대안으로서의 지역통화 운동.
호혜적인 선물 교환을 바탕으로 한 공동체가 비호혜적인 금전적 교환으로 바뀌면서 공동체가 붕괴된다는 것이 일반적 이론입니다. 그것은 국가화폐와 같이 경쟁을 유발하는 화폐가 개입될 때 필연적으로 나타납니다.
품앗이. 지역통화는 공평한 거래를 전제합니다. 나아가 공동체 안에서 서로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선물, 사랑의 이름을 한 경제의 한 형태이기도 합니다. 한 사람이 많이 가져가고 독점할 수 있는 재화가 아니라는 것이죠. 그런 점에서 지역통화는 자본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고 공동체를 회복하는 해법을 제공합니다.
공동체를 회복하는 대안경제로거 지역통화 운동의 가능성은 무한하다고 생각합니다
#’착한기업’의 길라잡이, 사회적기업연구원_조영복 원장
빵을 팔기 위해 고용하는 것이 아니라 고용하기 위해 빵을 파는 기업, 시장과 가치라는 두 날개로 자본주의의 한계를 넘어서는 ‘착한 기업’
사회적기업은 늘어나는 복지비용의 문제와 실업이라는 경제적인 문제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그릇이기도 합니다.
실패한 시장은 사회적기업에 의해 공급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시장의 실패와 정부의 실패를 시정하고 보완하기 위한 것.
사회적기업은 경제적 목적과 사회적 목적, 그리고 환경적 목적을 동시에 추구하는 기업입니다
‘빅이슈’가 좋은 사례
협동조합은 유럽의 경우에서 보듯이 사회적기업의 원조이기도 합니다
정부가 할 수 없고, 민간이 하지 않는 분야에서 사회적기업은 눈부신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사회적기업의 경영자인 사회적기업가는 창조적 자본주의 정신을 갖추어야 하며, 높은 윤리의식이 사회적기업의 가장 큰 덕목이 되어야 합니다.
#환경과 생명 살리는 우리의 ‘오래된 미래’_홍성 환경농업마을
30년 오리농법과 자립영농의 성과
100년 뒤를 내다보는 농촌마을. 문당리는 100년 미래의 계획을 갖고 있다
‘위대한 평민’을 길러내는 풀무학교
#인종과 종교를 뛰어넘어 황무지에 일군 이상향_인도 오르빌
“오르빌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전체 인류의 것이다…”
교육은 영정 진화를 향해 가는 과정이다. 따라서 오르빌의 교육은 끝없는 배움이다. 교육을 통해 지속적으로 진보하며 결코 늙지 않는 젊음의 장을 도모한다.
“교사는 제안할 뿐 강요해서는 안 된다. 부모나 교사가 원하는 틀 속에 아이를 두드려 넣는다는 생각은 야만적 폭력이라는 오로빈도의 생각이 교육의 지표가 되고 있다”
“태양, 바람 등 자연에너지를 생각해 보세요. 자연에너지는 어느 한쪽에만 있는 불평등한 에너지가 아닙니다. 대안에너지는 가까운 곳에서 가져올 수 있고, 누구나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민주적입니다. 환경 훼손을 막고 전쟁과 같은 갈등을 없앱니다…”
#작아서 더 행복한 ‘열린 배움터’_영국 하트랜드 작은학교
어쩌면 우리의 농촌 과소학교 통폐합과 꼭 같을까. 지난 1961년 영국 교육당국은 단지 경제적 이유만으로 소규모학교 통폐합 정책을 시행한다.
학교가 없어진다는 사실을 주민들은 납득할 수 없었다. 학교가 없어 먼 거리를 통학한다는 것은 아이들에게 힘든 일일 뿐만 아니라 지역에 대한 소속감과 자부심을 잃게 하는 것이기도 했다. 당시 이곳에 막 정착했던 생태운동가 사티쉬 쿠마르는 작은학교 설립운동을 펼친다. 그는 열정적인 노력으로 경매에 나온 낡은 교회건물을 5000년 동안 임대할 수 있었고,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슈마허의 원칙에 따라 작은학교를 설립했다.
작은학교가 가장 중시하는 교육은 음식 만들기와 공동취사를 통한 공동체 훈련. 또 농작물을 직접 키우고 수확하고, 요리를 함으로써 음식이 인간에게 얼마나 귀중한 것인가를 자연스럽게 가르칠 수 있었다. 이곳의 식단은 완전 채식이다. 비록 소수이지만 채식주의자들인 동료들을 위한 형제애를 불러일으키고 가장 낮은 것을 취함으로써 생태적 삶의 가치를 은연중에 터득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교사와 학생들이 자연농법으로 각종 야채를 재배한다
재정 운영. 교육당국으로부터는 한 푼의 재정적 도움을 받은 적이 없다고.
지역사회와 학교의 긴밀한 밀착. 마을 전체가 학교가 되어야 한다는 사티쉬 쿠마르의 설립 이념이 바로 이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교사가 아이들에게 가르치려고만 든다면 아이들은 아무것도 배울 수가 없을 것이다”
아이들과 교사가 서로 가르치며 배운다는 사실에 대한 자각, 아이들을 통해 교사가 스스로 발견하고 그 결과를 함께 나눈다는 것이 작은학교가 오랜 시간을 통해 체득한 귀중한 경험이다.
“아이들은 작은 도토리 열매와 같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지만 도토리 안에는 수백 년 동안 울창하게 자라날 참나무에 대한 정보를 저장하고 있다”는 사티쉬 쿠마르의 역설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본다. 한 사람의 인격체로서 아이들도 어른의 스승이 될 수 있음을 우리는 간과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교과서도 시험도 없이 온전한 자아의 실현_독일 자유발도로프학교
리듬을 중시하는 발도로프 학교의 교육 방법
“교과서는 획일적 교육을 유발시키는 부작용과 더불어 교사를 게으르게 할 수 있다”, “우리 학교는 교사가 몸으로 때워야 한다”
한 교사가 1학년에서 8학년까지 같은 아이들의 담임을 맡는다
자연은 가장 훌륭한 스승이라는 노교사 가이너는 “아이들이 몸소 농사짓기를 하면서 생태순환의 이치와 자연과 인간의 공생 관계임을 깨닫는 기회를 갖는다”며 노동을 체험하는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발도로프에는 교과서와 시험이 없듯이 교장선생도 없다. 학교의 모든 의사결정은 일주일에 4~5시간씩 주어진 전체교사회의에서 이뤄진다.
발도로프학교는 정보화와 세계화라는 허울 아애 개개인의 경쟁력 키우기에만 급급한 채 인성교육을 포기한 신자유주의적 교육에 맞서 인간의 영성을 일깨우는 살아 숨 쉬는 교육을 실천하고 있다.
#패전의 상처 위에 싹 틔운 생태순환의 삶터_독일 생태주거단지 보봉
‘자동차 없는 주거, 에너지 절약 주택’
주 에너지원을 태양열로 채택, 자동차로 인한 대기오염 배출을 줄이고, 쓰레기 발생량과 물 소비량을 최소화하고, 생태순환의 고리를 끊는 콘크리트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웠다.
개인의 소요공간을 줄이는 대신 공공공간을 최대한 넓히기로 했다.
좁은 개인공간을 감수하면서 열린 삶을 지향하는 이들의 친환경적인 인식
최근 들어 전원주택이니 친환경적인 아파트니 하지만 실제 그 이면을 한 꺼풀만 들춰보면 빗나간 주거 욕구가 도사리고 있음을 어렵잖게 확인할 수 있다. ‘친환경’이라는 미명 아래 자연을 훼손하는 어처구니 없는 주거에 대한 욕구는 민통선 안의 생태계를 파괴하면서까지 전원주택을 짓는 일부 부유층의 과시욕과 지표면만 조경한 채 지하는 거대한 시멘트 구조물인 주차장을 그대로 둔 눈가림식 녹색아파트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아이들이 맘껏 뛰어놀 수 있는 한 뼘의 공간조차 확보하지 못한 채 개개인의 폐쇄적 공간을 넓히는 데만 급급한 우리의 주거에 대한 빗나간 욕망은 언제쯤 고쳐질 수 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