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움받을 용기.기시미 이치로·고가 후미타케. p331
인생은 과가에서 현재를 지나 미래로 이어지는 ‘선’이 아니라 점과 같은 찰나가 쭉 이어질 뿐. 지금,현재의 순간에 내게 주어진 ‘인생의 과제’에 춤추듯 즐겁게 몰두해야 한다. 그래야 ‘내 인생’을 살 수 있다.
인간은 변할 수 있다, 세계는 단순하다, 누구나 행복해질 수 있다? 저로서는 어느 하나도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이었습니다.
종교도 힘을 잃고 신에 대한 믿음도 빈껍데기만 남았습니다. 의지할 존재가 없는 상태에서는 누구나 불안에 떨고 시기와 질투심만 가득하게 되죠. 하나같이 자기만 생각하면서 삽니다. 그것이 현대 사회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 의미를 부여한 주관 세계에 살고 있다. 객관적인 세계에 사는 것이 아니라네. 자네가 보는 세계와 내가 보는 세계는 달라.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세계일 테지.
우리는 ‘어떻게 보고 있는가’라는 주관에 지배 받고 있고, 자신의 주관에서 벗어날 수 없다네…문제는 세계가 어떠한가가 아니라, 자네가 어떠한가 하는 점이라네.
선글라스 너머의 세계? 세계를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 자네에게 그런 ‘용기’가 있을까? 그게 관건이지.
그래. 이것은 용기의 문제라네.
#트라우마를 부정하라
“자네가 불행한 것은 과거의 환경 탓이 아니네. 그렇다고 능력이 부족해서도 아니고, 자네에게는 그저 ‘용기’가 부족한 것뿐이야.”
알려지지 않은 ‘심리학 제3의 거장’? 프로이트와 융 그리고 아들러. ‘아들러 심리학’, ‘개인심리학’
아들러 심리학은 고루한 학문이 아니라 인간 이해의 진리이자 도달점이라 할 수 있지. 하지만 시대를 100년 앞섰다고 평가받은 아들러의 사상을 우리는 아직도 따라가지 못하고 있어. 그만큼 그의 사상이 선구적이라고 할 수 있지.
과거의 원인에 주목해서 상황을 설명하려 든다면, 모든 이야기는 저절로 ‘결정론’에 도달하게 되네. 우리의 현재, 그리고 미래는 전부 과거의 사건에 의해 결정되고 움직일 수 없는 것이라고 말이지. 아닌가?
‘원인론’과 ‘목적론’은 다르네. 자네는 모든 것을 원인론에 근거해서 말하고 있어. 원인론을 맹신하면서 사는 한, 우리는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갈 수 없다네.
트라우마란 존재하지 않는다? 쉽게 말해 트라우마 이론은 원인론의 전형일세.
“어떠한 경험도 그 자체는 성공의 원인도 실패의 원인도 아니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받은 충격-트라우마-으로 고통받는 것이 아니라, 경험 안에서 목적에 맞는 수단을 찾아낸다. 경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경험에 부여한 의미에 따라 자신을 결정한다”(사후합리화)
우리는 모두 어떠한 ‘목적’을 따라 살고 있네. 그것이 목적론이지.
모르겠나? 분노란 언제든 넣었다 빼서 쓸 수 있는 ‘도구’라네…그저 큰소리로 딸을 제압하기 위해, 그렇게 해서 자기의 주장을 밀어부이기 위해 분노라는 감정을 이용하는 걸세.
분노는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이다?
목적론이란 그런 걸세.
감정에 지배받지 않고, 과거에도 지배받지 않는다?
문제는 ‘무엇이 있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해석하느냐’라고요?
트라우마 이론으로 대표되는 프로이드의 원인론은 형태만 다른 결정론이자 허무주의의 입구일세.
물론일세. 우리의 자유의지를 부정하고 인간을 기계처럼 바라보는 것은 프로이트의 원인론임을 이해하기 바라네.
왜 그리 서두르나? 답이란 남에게서 얻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구하는 것이라네. 남이 던져준 답은 어치파 대증요업에 불과해. 아무런 가치도 없지.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직접 쓴 책은 한권도 남기지 않았지. 아테네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과 노상에서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고 논쟁을 벌였을 뿐. 그의 철학을 저작이라는 형태로 후세에 남긴 사람은 제자인 플라톤이었어. 마찬가지로 아들러도 저술활동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네.
소크라테스도 아들러도 대화를 통해 깨달음을 주었다는 말씀입니까?
…나는 대화를 통해 답은 찾는 그 귀중한 과정은 자네에게서 뺴앗고 싶지 않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교환이 아니라 고쳐나가는 것이야.(소유가 아니라 사용)
인간은 끊임없이 ‘변하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만약 생활양식이 선천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것이라고 한다면 다시 선택하는 것도 가능하지.
문제는 과거가 아닌 지금 ‘여기’에 있네.
조금 불편하고 부자유스럽긴 해도, 지금의 생활양식에 익숙해져서 이대로 변하지 않고 사는 것이 더 편하니까…하지만 새로운 생활양식을 선택하면 새로운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고, 눈앞의 일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도 몰라. 미래를 예측할 수 없어서 불안한 삶을 살게 되지. 더 힘들고, 더 불행한 삶이 기다리고 있을지 몰라. 즉 인간은 이런저런 불만이 있더라도 ‘이대로의 나’로 사는 편이 편하고, 안심되는 거지.
변하고는 싶지만 변하는 것이 두렵다?
생활양식을 바꿀고 할 때, 우리는 큰 ‘용기’가 있어야 하네. 변함으로써 생기는 ‘불안’을 선택할 것이냐, 변하지 않아서 따르는 ‘불만’을 선택할 것이냐. 분명 자네는 후자를 택할 테지.
아들러 심리학은 용기의 심리학일세.
자네가 불행한 것은 과거의 환경 탓이 아니네. 그렇다고 능력이 부족해서도 아니고. 자네에게는 그저 ‘용기’가 부족한 것뿐이야. 말하자면 ‘행복해질 용기’가 부족한 거지.
나의 인생은 ‘지금, 여기’에서 결정된다
“만약~였더라면”…사실은 응모하지 않음으로써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남겨두고 싶은 거라네…더욱이 졸작을 써서 냈다가 낙선하게 되는 현실에 마주치고 싶지 않은 거지…어쨌거나 시도를 해야 앞으로 나아갈 수가 있다네…시도하지 않으면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어.
아들러의 목적론은 “지금까지의 인생에 무슨 일이 있었든지 앞으로의 인생에는 아무런 영향도 없다”라고 말해주는 거지. 인생을 결정하는 것은 ‘지금, 여기’를 사는 자네라고 말일세.
그래, 과거는 존재하지 않으니까.
#모든 고민은 인간관계에서 비롯된다
열등감은 주관적인 감정이다.
열등감이란 단어를 현재 통용되는 맥락으로 처음 쓴 사람이 아들러라고 알려져 있네.
내가 내 키(155)에 대해 느낀 열등감은 어디까지나 타인과의 비교-다시 말해 인간관계-를 통해 만들어낸 주관적인 감정이었네…그것은 객관적인 ‘열등성’이 아니라 주관적인 ‘열등감’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키에 관한 문제조차 주관이 개입하지.
가치전환. 그 친구가 이렇게 말했네. “키는 커서 뭐 하려고? 너는 사람을 편하게 하는 재능이 있잖아.” 생각해보닌 그렇더군. 체격이 크고 우락부락한 남자는 그 자체로 상대방에게 위압감을 주지. 하지만 나처럼 체구가 작으면 상대방도 경계심을 풀지. 과연 체구가 작다는 것은 내게도 주변 사람에게도 괜찮은 일이구나, 하고 생각하게 됐지. 즉 가치전환을 하게 된 걸세. 이후로는 키에 대해서는 더는 고민하지 않았네.
요컨대, 우리를 괴롭히는 열등감은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주관적 해석’이라는 건가요?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내 마음대로 생각하는 거지. 그런데 주관적으로 생각하면 좋은 점이 하나 있네. 자신의 뜻대로 선택이 가능하다는 점. 내 키를 장점으로 볼 것인가, 단점으로 볼 것인가 하는 것은 모두 주관에 달린 문제라서 나는 어느 쪽이나 선택할 수 있지.
우리는 객관적 사실을 움직이지는 못해. 하지만 주관적 해석은 얼마든지 움직일 수 있지. 우리는 주관적인 세계에 살고 있네.
…이 세계에 나를 제외하고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래. 가치의 문제도 최종적으로는 인간관계로 환원되는 거지.
열등 콤플렉스는 자신의 열등감을 변명거리로 시작한 상태
‘무늬만 인과법칙’? 원래는 어떤 인과관계도 없는 것을, 마치 중대한 인과관계가 있는 것처럼 스스로에게 설명하고 납득한다
간단히 말해 한 발 앞으로 내미는 것이 무서운 거지. 현실적인 노력을 하고 싶지 않다…즉 생활양식을 바꿀 ‘용기’가 없는 거라네. 다소 불만스럽고 부자유스럽지만 지금 이대로가 더 편한 거지
자랑하는 사람은 열등감을 느끼는 사람? 우월컴플렉스. 자신이 우월한 것처럼 행동하며 ‘거짓 우월성’에 빠지는 걸세! 열등컴플렉스와 우월컴플렉스가 의미는 달라도 뿌리는 같다.
불행을 무기로 우월감에 빠지는 사람들? 불행한 것을 ‘특별’하다 여기고, 불행을 내세워 남보다 위에 서려고 하지…”네가 키 작은 사람의 고민에 대해 뭘 알아!”라고 받아친다면 이제 누구도 아무 말도 꺼내지 않을 걸세.
건전한 열등감은 타인과 비교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이상적인 나’와 비교해서 생기는 것
모든 인간은 ‘같지는 않지만 대등’하네.
어른으로도 아이로도 대하지 말고 ‘인간 대우’를 하라는 거지.
내가 나로서 살려고 할 때 경쟁은 필히 방해가 된다
경쟁 상대는 친구가 될 수 없다
내 얼굴을 주의 깊게 보는 사람은 나뿐이다
인간관계의 중심에 ‘경쟁’이 있으면 인간은 영영 인간관계에 대한 고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불행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 경쟁의 무서움이 그걸세. 설사 패자가 되지 않아도, 경쟁에서 계속 이긴다고 할지라도 경쟁 속에서 사는 사람은 마음이 편할 새가 없어. 끝없는 경쟁
중요한 건 지금부터. ‘사람들은 내 친구다’라고 느낄 수만 있다면 세계를 보는 눈이 완전히 달라질 걸세.
사적인 분노는 타인을 굴복시키려는 도구에 불과하네…만약 면전에서 욕을 먹었다면 그 사람이 숨겨놓은 ‘목적’이 뭔지 생각할 걸세. 면전에서 욕을 먹었을 뿐 아니라 상대의 언동으로 진짜 화가 났을 때는, 상대가 ‘권력투쟁’을 위해 싸움을 거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말싸움에서 이겨서 상대가 물러섰다. 하지만 권력투쟁은 거기서 끝나지 않아. 싸움에서 진 상대는 바로 다음 단계로 돌입할 걸세…일단은 물러나지만, 상대는 다른 장소에서 다른 형태로 뭔가 복수를 계획하고 복수에 나선다네…인간관계가 복수 단계에까지 이르게 되면 당사자끼리 해결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권력투쟁을 위해 싸움을 걸어왔을 때는 절대 응해서는 안 되네.
인간관계에서 ‘나는 옳다’고 확신하는 순간, 권력투쟁에 발을 들이게 되네.
애초에 주장의 타당성은 승패와 관계가 없어. 자네가 옳다고 믿는다면 다른 사람의 의견이 어떻든 간에 이야기는 거기서 마무리되어야 하네. 그런데 많은 사람이 권력투쟁에 돌입해서 다른 사람을 굴복시키려고 하지.
흐릿한 안경을 쓰면 눈앞의 승패밖에 보지 못하고 길을 잘못 들게 되지. 경쟁이나 승패의 안경을 벗어야 비로소 자신을 바로 보게 되고, 자신을 바꿀 수 있는 걸세.
행동의 목표? 1)자립할 것 2)사회와 조화를 이루며 살아갈 것
위의 행동을 뒷받침하는 심리적 목표? 1) 내게는 능력이 있다는 의식을 가질 것 2) 사람들은 내 친구라는 의식을 가질 것
타인과 협력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은 원칙적으로 있을 수 없어.
아들러 심리학은 타인을 바꾸기 위한 심리학이 아니라 자신을 바꾸기 위한 심리학일세
아들러는 상대를 구속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아. 상대가 행복하다면 그 모습을 순순히 축복해주는 것. 그게 사랑일세. 서로를 구속하는 관계는 결굴 깨지게 되어 있어.
구속이란 상대를 지배하려는 마음의 표정이며, 불신이 바닥에 깔린 생각이기도 하지.
‘인생의 거짓말’을 외면하지 말라? A의 결점을 용서 못해서 싫어하는 것이 아닐세. 자네에게는 ‘A를 싫어한다’는 목적이 앞서고, 그 목적에 맞는 결점을 찾아낸 거니까…A와의 관계를 피하기 위해서지.
‘이 관계를 끝내고 싶다’고 결심하고, 관계를 끝내기 위한 구실을 찾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걸세.
상대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네. 자네의 ‘목적’이 변했을 뿐이지…
사람은 그럴 마음만 있으면 상대의 결점이나 단점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는 이기적인 생물이네.
아들러는 여러 가지 구실을 만들어서 인생의 관계를 회피하려는 사태를 가리켜 ‘인생의 거짓말’이라고 했어.
화가 난다고 외며해서는 안 되네…아들러는 인생의 과제나 인생의 거짓말을 선악으로 구분해 말하지 않았네. 지금 우리가 말해야 할 것은 선악도 도덕도 아닌 ‘용기’의 문제일세.
‘소유의 심리학’에서 ‘사용의 심리학’으로. 프로이트의 원인론은 ‘소유의 심리학’이고 결국엔 결정론으로 귀결돼. 반면 아들러 심리학은 ‘사용의 심리학’이고 결정은 자네가 하는 걸세.
#타인의 과제를 버려라
“행복해지려면 ‘미움받을 용기’도 있어야 하네. 그런 용기가 생겼을 때, 자네의 인간관계는 한순간에 달라질 걸세.”
인정욕구를 부정하라
“화폐란 주조(鑄造)된 자유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에 나오는 문장. 화폐의 본질을 꿰뚫는 구절? 화폐가 가져다주는 것의 정체를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자유일지도 모르지..실제로 의식주는 전부 금전에 의해 거래되니까요.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타인에게 인정받기 원하는 마음을 부정한다네…타인에게 인정받을 필요가 없다는 말일세. 도리어 인정받기를 바라서는 안 되네.
인정욕구야말로 우리 인간에게 살아갈 힘을 주는 보편적인 욕구가 아닙니까!
‘그 사람’의 기대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살지 말라
인정욕구의 위험함은 거기에 있네. 대체 왜 인간은 타인의 인정을 바라는 걸까? 대개의 경우 그것은 상벌교육의 영향이라네
상벌교육의 결과로 생기는 것은 “칭찬하는 사람이 없으면 적절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벌주는 사람이 없으면 부적절한 행동을 한다”등과 같은 잘못된 생활양식일세.(인센티브의 역효과)
유대교 교리, “내가 나를 위해 내 인생을 살지 않으면, 대체 누가 나를 위해 살아준단 말인가?”
자네가 ‘타인의 기대를 만족시키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라고 한다며, 타인 역시 ‘자네의 기대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다’라는 걸세. 상대가 내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더라도 화를 내서는 안 돼. 그것이 당연하지.
과제를 분리하라
공부하지 않는 아이. 원래 이것은 ‘아이의 과제’이지 부모의 과제가 아닐세. ‘이것은 누구의 과제인가?’라는 관점에서 자신의 과제와 타인의 과제를 분리할 필요가 있네…
타인의 과제에 침범하지 않는다. 그것뿐일세.
모든 인간관계의 트러블은 대부분 타인의 과제에 함부로 침범하는 것-혹은 자신의 과제에 함부로 침범해 들어오는 것-에 의해 발생한다네. 관제를 분리할 수 있게 되면 인간관계가 급격히 달라질 걸세.
누구의 과제인지 구분하는 방법은 간단하네. ‘그 선택이 가져온 결과를 최종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누구인가?’를 생각하게.
세상의 부모들은 흔히 “너를 위해서야”라고 말하지.
하지만 부모들은 명백히 자신의 목적-세상의 이목이나 체면일지도 모르고, 지배욕일지도 모르지-을 만족시키기 위해 행동한다네. 즉 ‘너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이고, 그 기만을 알아차렸기에 아이가 반발하는 걸세.
물론 곁에서 최선을 다해 돕기는 하지. 하지만 끝까지 개입하지 않아…말을 물가에 데려갈 수는 있지만 물을 마시게 할 수는 없다…본인의 의향을 무시하고 ‘변하는 것’을 강요해봤자 나중에 반발심만 커질 뿐이지…자신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네.
아이와의 관계를 고민하는 부모는 대개’ 아이의 인생은 곧 내 인생’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
요컨데 아이의 과제까지도 자신의 과제라고 생각하고 떠안는 걸세. 그렇게 늘 아이만 생각하다가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인생에서 ‘나’는 사라지고 없지.
인간관계의 고민을 단숨에 해결하는 방법? 누구도 내 과제에 개입시키지 말고, 나도 타인의 과제에 개입하지 않는다!
왜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한 걸까? 자네는 아직 과제를 분리하지 못하고 있어. 본래는 타인의 과제여야 할 것까지 ‘내 과제’라고 생각하고 있지.
과제의 분리는 인간관계의 최종 목표가 아니야. 오히려 입구라고 할 수 있지.
타인의 과제에 개입하는 것이야말로 자기중심적인 발상이지. 부모가 자식에게 공부를 강요하고 진로와 배우자감까지 간섭한다, 이게 자기중심적인 게 아니면 뭔가?
인정욕구는 부자유를 강요한다
진정한 자유란 무엇인가? 단적으로 말해 “자유란 타인에게 미움을 받는 것”일세…그것은 자네가 자유롭게 살고 있다는 증거이자 스스로의 방침에 따라 살고 있다는 증표일세.
자유를 행사하려면 대가가 뒤따르네. 자유를 얻으려면 타인에게 미움을 살 수밖에 없어…남이 나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든 마음에 두지 않고, 남이 나를 싫어해도 두려워하지 않고, 인정받지 못한다는 대가를 치르지 않는 한 자신의 뜻대로 살 수 없어. 자유롭게 살 수 없지.
행복해지려면 ‘미움받을 용기’도 있어야 하네.
그런 용기가 생겼을 때, 자네의 인간관계는 한순간에 달라질 걸세.
인간관계의 카드는 ‘내’가 쥐고 있다…아버지와 사이가 나빴던 이유? 아버지에게 맞은 것이 시초였다? ‘그때 맞아서 사이가 틀어졌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프로이트의 원인론에 입각한 발상. 아들러가 주창한 목적론의 입장에서 보면 원인과 결과가 완전히 역전되네. 즉 나는 ‘아버지와 좋은 관계를 맺고 싶지 않아서 맞은 기억을 꺼내들었다’라고 생각하게 되는 거지.
아버지를 달라지게 하려고 변한 것이 아닐세. 그것은 타인을 조종하려는 잘못된 생각이야. 내가 변해도 달라지는 것은 나 자신밖에 없어. 그 결과, 상대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몰라. 내가 관여할 수 있는 것은 없어. 이것도 과제의 분리라네.
인정받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으면 인간관계의 카드는 언제나 남이 가질 수밖에 없어. 인생의 카드를 남에게 맡길 것인가, 내가 쥘 것인가의 문제라네.
#세계의 중심은 어디에 있는가
“자네도 세계의 중심이 아니야. 내 발로 인간관계의 관제에 다가가지 않으면 안 되네. ‘내가 이 사람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를 생각해야지.”
인간관계의 목표는 ‘공동체 감각’을 향한 것
만약 타인이 친구라고 한다면, 그리고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살고 있다면, 우리는 그곳에서 우리가 ‘있을 곳’을 찾게 돼…이렇게 타인을 친구로 여기고, 거기서 ‘내가 있을 곳은 여기’라고 느낄 수 있는 것이 ‘공동체 감각’일세.
사회적 관심? ‘나와 너’ 두 사람이 있으면 거기서 사회가 형성되고 공동체가 탄생하네…공동체 감각을 이해하려면 ‘나와 너’를 기준점으로 생각하는 것이 좋아…자기에 대한 집착(self interest)을 타인에 대한 관심(social interest)으로 바꾸는 것일세.
왜 ‘나’이외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가. 자기중심적 인물..‘과제의 분리’를 하지 못하고 인정욕구에 사로잡힌 인간…지금 나누는 대화를 통해서 확실히 알았을 걸세. ’남에게 어떻게 보이느냐’에만 집착하는 삶이야말로 ‘나’이외에는 관심이 없는 자기중심적인 생활양식이라는 것을.
나는 세계의 중심이 아니다…무언가를 주어야 내가 있을 곳을 얻을 수 있다? 그래 소속감이란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획득하는 것일세.
더 큰 공동체의 목소리를 들으라…아들러가 말하는 공동체란 가정이나 회사같이 눈에 보이는 것만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인연까지 포함한다네.(지구, 우주 공동체)
관계가 깨질까 봐 전전긍긍하며 사는 것은 타인을 위해 사는 부자연스러운 삶이야.
공동체 감각을 갖되 자유를 택하라? 눈앞의 작은 공동체에 집착하지 말게. 보다 다른 ‘나와 너’. 보다 다양한 ‘사람들’, 보다 큰 공동체는 반드시 존재하네.
칭찬도 하지 말고, 야단도 치지 말라.
‘과제의 분리’에서 ‘공동체 감각’으로 가는 과정…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수평관계’라는 개념일세…누군가의 칭찬을 받고 싶다고 바라는 것. 아니면 반대로 다른 사람을 칭찬하는 것. 이는 인간관계를 ‘수직관계’로 바라본다는 증거일세. 칭찬받기를 원하는 것은 수직관계에 익숙해졌기 때문일세.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온갖 ‘수직관계’를 반대하고 모든 인간관계를 ‘수평관계’로 만들자고 주장하네.(칭찬하지 말고 감사하라!)
회사원과 전업주부는 일하는 장소와 역할만 다를 뿐이지. 그야말로 ‘같지 않지만 대등’한 관계라네.
열등감이란 원래 수직관계에서 생기는 걸세. 모든 사람이 ‘같지 않지만 대등’한 수평관계에 있다면 열등 콤플렉스가 생길 여지가 없지.
왜 인간은 ‘개입’하는 걸까? 그 배경에는 사실상 수직관계가 있지. 인간관계를 수직으로 받아들이면 상대를 자신보다 아래라고 보고 개입을 하네. 상대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끈다, 내가 옳고 상대는 틀렸다고 믿고 있지.
물론 여기서 개입은 조종이나 다름없네. 어린아이에게 “공부해”라고 명령하는 부모가 그 전형이라고 할 수 있지.
반면에 지원이란 과제의 분리와 수평관계를 전제로 하지. 공부는 아이의 과제라는 것을 이해한 상태에서 부모가 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하는 거지…자신감을 불어넣어주고 스스로 과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곁에서 힘이 되어주는 거라네.
수평관계에 근거한 지원을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용기 부여’라고 하지.
어떤 사람이 과제를 앞에 두고 망설이는 것은 그 사람에게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야. 능력이 있든 없든 ‘과제에 맞설 용기를 잃은 것’이 문제라고 보는 것이 아들러 심리학의 견해지.
스스로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려면. 중요한 것은 타인을 ‘평가’하지 않는 것이라네. 평가는 수직관계에서 비롯된 말일세. 만약 수평관계를 맺고 있다면 감사나 존경, 기쁨의 인사 같은 더 순수한 말이 나오겠지.
칭찬받는다는 것은 타인으로부터 ‘좋다’는 평가를 받는 걸세…’고맙다’는 말은 평가가 아니라 순수한 감사의 인사라네. 인간은 감사의 말을 들었을 때 스스로 타인에게 공헌했음을 깨닫게 되지.
여기에 존재하는 것만으로 가치가 있다. 타인을 ‘행위’의 차원이 아닌 ‘존재’의 차원에서 살펴야지. 타인이 ‘무엇을 했는가’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존재하는 그 자체를 기뻐하고 감사해야 하는 걸세.
우리는 다른 사람을 볼 때 ‘자기만의 이상적인 모습’을 멋대로 지어내고, 그것을 기준으로 평가를 내린다네. 예를 들면 부모님 말에 일절 말대꾸하지 않고, 공부도 운동도 잘하고, 좋은 대학에 가서 큰 회사에 취직한다. 그런 이상적인 아이를 만들어놓고 자식과 비교하며 불평을 하고 불만을 갖지. 이상적인 모습을 100점으로 놓고 천천히 점수를 깍는다네. 이거야말로 ‘평가’라는 발상. 그러지 말고 아이를 누구와도 비교하지도 말고, 있는 그대로 보고, 그저 거기에 있어주는 것을 기뻐하고 감사하면 되네.
“누군가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이 협력하지 않더라도 그것은 당신과는 관계없습니다. 내 조언은 이래요. 당신부터 시작하세요. 다른 사람이 협력하든 안 하든 상관하지 말고.” 나의 조언도 전적으로 그러하네.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살아간다
그러면 우리의 대화는 어디에 다다르게 될까요?
아마도 ‘행복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에까지 이르겠지.
자기긍정이 아닌 자기수용을 하라.
긍정적 포기? ‘변할 수 있는 것’과 ‘변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해야 하네. ‘바꿀 수 없는 것’에 주목하지 말고, ‘바꿀 수 있는 것’에 주목하란 말이지. 내가 말하는 자기수용이란 이런 거네…교환이 불가능함을 받아들이는 것. 있는 그대로의 ‘이런 나’를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꾸는 ‘용기’를 낸다. 그것이 자기수용이야.
“신이여, 바라옵건데 제게 바꾸지 못하는 일을 받아들이는 차분함과 바꿀 수 있는 일을 바꾸는 용기와 그 차이를 구분하는 지혜를 주옵소서.”-니버의 기도
포기라는 말에는 원래 ‘명확하게 보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네. 만물의 진리를 단단히 확인하는 것. 그것이 ‘포기’라네. 비관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지.
‘자기에 대한 집착’을 ‘타인에 대한 관심’으로 돌릴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두 번째 키워드, 바로 ‘타자신뢰’라네.
신용과 신뢰의 차이? 다른 사람을 믿을 때 조건을 달지 않는 걸세. 담보가 있든 말든 개의치 않고 무조건 믿는다. 그것이 신뢰라네.
배신당한 상처의 기억? 그런데 신뢰하는 것을 두려워하면 결국은 누구와도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없다네.
자기수용에서,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고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할 수 있다면, 배신이 타인의 과제라는 것도 이해할 수 있고, 타인을 신뢰하는 길로 들어서는 것 또한 어렵지 않을 걸세.
일의 본질은 타인에게 공헌하는 것.
타자공헌이 의미하는 것은 자기 희생이 아니라에. 오히려 아들러는 타인을 위해 자기 인생을 희생하는 사람을 보고 ‘사회에 지나치게 적응한 사람’이라며 경종을 울리기도 했지…타자공헌이란 ‘나’를 버리고 누군가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의 가치를 실감하기 위한 행위인 셈이지…그래. 자기를 희생할 필요가 없네.
짜증보다 즐거운 설거지? 남이 내게 무엇을 해주느냐가 아니라, 내가 남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고 실천해보라는 걸세. 그렇게 공헌하고 있음을 느낀다면 눈앞의 현실은 완전히 다른 색채를 띠게 될 거야.
일이 전부라는 인생의 거짓말? 일을 구실로 다른 책임을 회피하려는 것에 불과하거든. 원래 집안일에도, 아이 양육에도, 혹은 친구와 교류하는 것이나 취미에도, 전부 관심을 가져야 하네. 어느 한 가지만 돌출되는 삶의 방식을 아들러는 인정하지 않네.
인간은 지금, 이 순간부터 행복해질 수 있다
인간에게 있어 최대의 불행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거라네. 이런 현실에 대해 아들러는 간단하게 대답했지. ‘나는 공동체에 유익하다’, ‘나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생각을 통해서만 자신이 가치 있음을 실감한다고.
이미 자네도 눈치 채지 않았나? 바로 “행복이란 공헌감이다.” 이게 행복의 정의라네.
인정욕구를 통해서 얻은 공헌감에는 자유가 없지. 우리는 자유를 선택하면서 더불어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라네.
행복은 자유를 전제로 한다
평범해질 용기. 자기수용은 그를 위한 중요한 첫걸음. 만약 자네가 ‘평범해질 용기’를 낼 수 있다면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도 달라질 거야.
인생이란 찰나의 연속이다
고매한 목표? 마치 정상을 향해 산을 오르는 거라고 보면 되겠나? …그런데 만일 인생이 정상에 도달하기 위한 등산이라고 한다면, 인생의 대부분을 ‘길 위’에서 보내게 되네. 즉 정상에 오르는 순간부터 ‘진짜 인생’이 시작되고, 거기에 이르기까지의 노정은 ‘가짜인 나’가 지나온 ‘가짜 인생’이 되는 거라네.
인생을 등산에 비유하는 사람은 자신의 삶을 ‘선(線)’으로 파악하지. 이 세상에 태어난 순간부터 시작된 선이 크고 작은 굴곡을 그리면서 정점에 다다르다 그대로 죽음이라는 종착역을 맞이한다고. 하지만 이렇게 하나의 이야기로 보는 것은 프로이트의 원인론에 입각한 발상이자 인생의 대부분을 ‘길 위’에서 보낸다는 사고방식일세...선으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점이 연속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네. 분필로 그어진 실선을 확대경으로 보면, 선이라고 여겨진 것이 실은 연속된 작은 점이라는 것을 알게 되지. 선처럼 보이는 삶은 점의 연속, 다시 말해 인생이란 찰나(순간)의 연속이라네.
’지금’이라는 찰나의 연속이지.
우리는 ‘지금, 여기’를 살아갈 수밖에 없어. 우리의 삶이란 찰나안에서만 존재한다. 이걸 알지 못하는 어른들은 청년들에게 ‘선’의 인생을 강요하지. 좋은 대학, 대기업, 안정된 가정 등 이런 선로를 따라가는 것이 행복한 인생이라면서. 그래도 인생은 선이 아니라네.
만약 인생이 선이라면 인생을 설계하는 것도 가능하겠지. 그런데 우리 인생은 점의 연속이라네. 계획적인 인생이란 그것이 필요한지 아닌지를 따지기 이전에 불가능한 일일세.
춤을 추듯 살라. 그 누구의 삶도 ‘길 위’에서 끝났다고 볼 수 없어. 춤을 추고 있는 ‘지금, 여기’에 충실하면 그걸로 충분하니까.
에네르게이아? ‘지금 하고 있는’ 것이 그대로 ‘이루어진’ 상태. ‘과정 자체를 결과로 보는 운동’이라고 할까. 춤을 추는 것이나 여행처럼.
여행을 하는 목적? 효율적으로, 되도록 빨리, 최단거리로? 그런 건 여행이라 부를 수 없지. 집에서 나온 순간, 그 자체가 이미 ‘여행’. 목적지를 향하는 과정을 포함하여 모든 순간이 ‘여행’이야.
‘지금, 여기’에 강력한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라. ‘지금, 여기’에 강력한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면 과거도 미래도 보이지 않게 되네…그래. 우리는 좀 더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살아야 하네. 과거가 보이는 것 같고, 미래가 옟ㄱ되는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은 자네가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살지 않고 희미한 빛 속에서 살고 있다는 증거일세. 인생은 찰나의 연속이며, 과거도 미래도 존재하지 않아. 자네는 과거와 미래를 봄으로써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려하고 있네.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든지 간에 자네의 ‘지금, 여기’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고, 미래가 어떻게 되든 간에, ‘지금, 여기’에서 생각할 문제는 아니지.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살고 있다면 그런 말은 나오지 않을 걸세.
인생 최대의 거짓말? ‘솔직히 이걸 하고 싶은데 아직 때가 아니니 그때가 되면 하자’라고 생각. 이런 건 인생을 뒤로 미루는 삶의 방식이네. 인생을 뒤로 미루는 한 우리는 어디에도 가지 못하고 단색으로 칠해진 따분한 나날만 보내게 될 걸세.
인생 최대의 거짓말, 그것은 ‘지금, 여기’를 살지 않는 것이라네.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는 것은, 이미 일어난 비극을 긍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지. 어떤 상황이든 우리는 무엇인가 행동을 취해야 하네.
“인생의 의미는 내가 나 자신에게 주는 것이다”
자유를 선택하려고 할 때 인간이 헤매는 것은 당연. 그래서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자유로운 인생을 살기 위한 지침으로 ‘길잡이 별’이라는 것을 제시했지….그 별은 어디에 있습니까? 타자공헌에 있네!
자네가 어떠한 찰나를 보내더라도, 설령 자네를 싫어하는 사람이 잇다고 하더라도 ‘타인에게 공헌한다’는 길잡이 별만 놓치지 않는다면 헤맬 일이 없고 뭘 해도 상관없어. 나를 싫어하는 사람에게 미움을 받으며 자유롭게 살면 되네.
나는 오랜 세월 아들러의 사상과 함께 지내오면서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네...한 사람의 힘은 크다. 아니, ‘내 힘은 헤아릴 수 없이 크다’라는 점일세…’내’가 바뀌면 ‘세계’가 바뀐다. 세계란 다른 누군가가 바꿔주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나’의 힘으로만 바뀔 수 있다는 뜻이지.
아들러 심리학을 배우고 나면 내 눈에 보이는 세계는 이제 과거의 세계가 아니라네…내가 바뀌면 세계가 바뀐다. 나 이외에 누구도 세계를 바꿀 수 없다…
한 번 더 아들러가 했던 말을 들려주겠네. “누군가가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이 협력하지 않더라도 그것은 당신과는 관계없습니다. 내 조언은 이래요. 당신부터 시작하세요. 다른 사람이 협력적인지 아닌지는 상관하지 말고.”(나부터 혁명!)
세계는 단순하다, 인생 또한 그러하다.
무심코 집어든 한 권의 책이 세상을 보는 눈을 바꿔주기도 합니다.
철학의 본래 의미는 ‘지(知)’가 아니라 ‘지를 사랑하는 것’에 있고, 모르는 것을 알려고 하는 것과 지에 이르는 과정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결국 지에 도달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문제되지 않습니다.
퍼가요 퍼온글에 님 출처 남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