싯다르타. 헤르만 헤세. p 240
싯다르타, 한 인도의 시!
진리는 가르쳐질 수 없다는 것. 이 깨달음을 나는 일생에 꼭 한번 문학적으로 형상화하고자 했다. 그 시도가 바로 싯다르타이다
하지만 오직 하나밖에 없는 유일자, 가장 중요한 것, 오로지 딱 한 가지 중요한 것을 모른다면, 다른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가치가 있을까?
근원적인 샘물? 그 밖의 다른 모든 것은 탐색하는 것이요, 우회하는 길이며, 길을 잃고 방황하는 데 불과하다.
싯타르타 앞에는 한 목표, 오직 하나뿐인 목표가 있었으니, 그것은 모든 것을 비우는 일이었다.
만약 일체의 자아가 극복되고 사멸되면, 궁극적인 것, 그 위대한 비밀이 눈뜨게 될 것이었다?
“고빈다, 곧 자네의 친구는 자네와 함께 그토록 오랫동안 걸어왔던 이 사문의 좁은 길을 떠날거야…우리가 ‘배움’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해…그래서 난 이렇게 믿기 시작하였네. 알려고 하는 의지와 배움보다 더 사악한 앎의 적은 없다고 말이야”
부처 고타마의 가르침 속 조그만 틈새?
“..그것은 바로 이 세상의 극복, 즉 해탈에 관한 당신의 가르침입니다. 하지만 이 조그만 틈새가 있음으로써, 이 조그만 균열이 있음으로써, 영원하고 단일한 세계 법칙의 전체 구조가 다시금 파괴되고 폐기되어 있는 셈입니다.”
“당신이 깨달은 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아무에게도 말이나 가르침으로 전달하여 주실 수도, 말하여 주실 수도 없습니다….세존께서 몸소 겪으셨던 것에 관한 비밀, 즉 수십만 명 가운데 혼자만 체험하셨던 그 비밀이 가르침 속에는 들어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 점이, 제가 가르침을 들었을 때 생각하고 깨달았던 점입니다.”
고타마의 제자가 된 고빈다!
“그 분은 나에게서 친구를 빼앗아갔다. 예전에는 나의 그림자였지만 지금은 고타마의 그림자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그 분은 나에게 싯타르타를, 나 자신을 선사해 주셨다.”
‘나는 얼마나 무감각하고 우둔하였던가!’
‘어떤 사람이 어떤 글을 읽고 그 뜻을 알고자 할 때, 그 사람은 기호들과 철자들을 무시하지 않으며 그것들을 착각이나 우연, 또는 무가치한 껍데기라고 부르지도 않는다. 그 사람은 철자 하나하나 빠뜨리지 않고 그 글을 읽으며, 그 글을 연구하고 그 글을 사랑한다. 그러나 나는, 이 세상이라는 책과 나 자신의 본질이라는 책을 읽고자 하였던가. 나는 내가 미리 추측한 뜻에 짜맞추는 일을 하기 위하여, 기호들과 철자들을 무시해 버렸으며, 이 현상계를 착각이라 일컬었으며, 나의 눈과 혀를 우연하고 무가치한 현상이라고 일컬었다. 아니, 이런 일은 지나가 버렸으며, 나는 미몽에서 깨어났다. 난 정말로 미몽에서 깨어났으며, 오늘에야 비로소 다시 태어난 것이다.’
본질적인 것이란 눈에 보이는 가식적 세계 너머 저편 피안(彼岸)에 있다고 생각한 싯타르타의 눈으로 볼 때에는 이 모든 것들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예전에는 이 모든 것들이 불신의 눈으로 관찰되었으며, 철저한 사유에 의해 무화()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깨달음을 얻어 자유로워진 그의 눈은 차안(此岸)의 세계에 머무르게 되었으니, 그는 가식적인 것을 보고 인식하였으며, 이 세상에서 고향을 찾았으며, 본질적인 것을 추구하지 않았으며, 피안의 세계를 목표로 삼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은 예전에도 항상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여태 그것을 보지 못하였으며, 그런 것에 끼여든 일도 없었다. 이제 그는 그런 것에 끼여들었으며, 그 일부를 이루고 있었다.
‘글을 쓰는 것은 좋은 일이고, 사색하는 것은 더 좋은 일이다. 지혜로운 것은 좋은 일이고, 참는 것은 더 좋은 일이다’
그는 사람들이, 자기 생각에는 그런 대가를 치를 만한 가치가 없는 것들, 그러니까 동이나 사소한 즐거움, 하찮은 체면을 얻기 위하여 애를 쓰고 괴로워하고 늙어가는 것을 보았다.
자기의 눈에 보인 모든 것을 다 사랑하는 것, 자기의 눈에 보인 모든 것을 다 기쁨이 넘치는 사랑의 검정으로 대하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잠을 자는 동안 옴의 작용을 통하여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났던 매혹적인 현상의 본질인 것이다.
너무 많은 지식이, 너무 많은 성스러운 구절이, 너무 많은 제사의 규칙들이, 너무 많은 단식이, 너무 많은 행위와 노력이 자기를 방해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가 실천으로 옮길 수 없는 그런 앎에 불과하였다.
고빈다
” 스님은 지나칠 정도로 구도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구도 행위에 너무 매달린 나머지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요?”
“누군가 구도를 할 경우에는 그 사람의 눈은 오로지 자기가 구하는 것만을 보게 되어 아무것도 찾아낼 수 없으며 자기 내면에 아무것도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결과가 생기기 쉽지요…하지만 찾아낸다는 것은 자유로운 상태, 열려 있는 상태, 아무 목표도 갖고 있지 않음을 뜻합니다. 스님, 당신은 어쩌면 실제로 구도자일 수도 있겠군요. 목표에 급급한 나머지 바로 당신의 눈앞에 있는 많은 것을 보지 못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농담을 하고 있는 게 아닐세. 나는 내가 깨달은 사실을 말하고 있는 걸세. 지식은 전달할 수 있지만, 그러나 지혜는 전달할 수가 없는 법이야. 우리는 지혜를 찾아내고 체험하고 지니고 다니며 행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가르칠 수는 없네.”
모든 진리는 그 반대도 마찬가지로 진리이다!
“진리란 오직 일면적일 때에만 말로 나타낼 수 있으며, 말이라는 겉껍질로 덮어씌울 수가 있다. 그런 것은 모두 다 반쪽에 불과하며, 모두 다 정체성이나 완전성, 단일성이 결연하고 있지… 달리 방법이 없지. 가르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그 방법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어. 그러나 이 세계 자체, 우리 주위에 있으며 우리 내면에도 현존하는 것 그 자체는 결코 일면적일 것이 아니네…그런데도 그렇게 보이는 까닭은 우리가 시간을 실제로 존재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네. 시간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네, 고빈다…”
“그런데 이걸 알아두게. 이 ‘언젠가’라는 것은 착각이고 다만 비유에 불과한 것임을 말이야!”
흐르는 강물속에 담긴 시간들?!
이 세계는 매순간순간 완성된 상태에 있으며,..
“이 세상을 더 이상 내가 소망하고 있는 그 어떤 세상, 내가 상상하고 있는 그 어떤 세상, 내가 머릿속으로 생각해 낸 일종의 완벽한 상태와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놔둔 채 그 세상 자체를 사랑하기 위하여 그리고 기꺼이 그 세상의 일원이 되기 위하여, 내가 죄악을 매우 필요로 하였다는 것을, 내가 관능적 쾌락, 재물에 대한 욕심, 허영심을 필요로 하였다는 것을, 그리고 가장 수치스러운 절망 상태도 필요로 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네. 고빈다, 이것은 나의 마음속에 떠올랐던 생각들 가운데 몇 가지를 이야기한 거야”
“말이란 신비로운 참뜻을 훼손해 버리는 법일세. 무슨 일이든지 일단 말로 표현하게 되면 그 즉시 본래의 참뜻이 언제나 약간 달라져 버리고, 약간 불순물이 섞여 변조되어 버리고, 약간 어리석게 되어버린다는 이야기야.” (오직 모를 뿐, 오직 할 뿐!)
“우리는 사물을 사랑할 수가 있지. 그렇지만 나는 말은 사랑할 수가 없지. 그 때문에 나에게는 가르침이라는 것은 아무 쓸모가 없는 거야…그 가르침이라는 것은 말 이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다는 이야기지…우리가 열반이라고 부르는 것,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아. 다만 열반이라는 단어만이 존재할 뿐이지”
사상과 말? 사물들을 더 중요하게 여기자
세대마다 역사를 새로 써야 한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 새로운 대화시도, 새 역사를 써내야 한다!
역사는 새로 쓰기를 통해서 진정 당대의 역사로 정립된다. 이것은 문학이나 예술사의 경우에도 동일하다. 번역 문학도 마찬가지! 두시언해! 모든 번역 문학은 사실상 우리 문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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