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을 원하면 크게 그르친다
‘부처를 쏴라!’ 참으로 어이없는 말처럼 들린다. 제목처럼 선문답을 통해 깨우침을 전하는 숭산 대선사의 말씀을 담고 있다. 모든 것은 ‘생각’에서 비롯된 ‘집착’인 것이다. 머리로 이해하는 지식은 다른 사람의 생각일 뿐이지 내 것이 아닌 것이다. 이름과 모양을 만드는 순간 이미 본질에서 벗어나게 된다. 생각의 굴레를 씌워버리기 때문이다. 모든 생각을 끊으면 어떤 말이나 글도 없는 ‘무심(無心)’의 상태가 된다. 텅빈 마음, 모든 것이 하나되는 ‘원점’이다.
일체는 변하고,변하고,변한다. 모양이 있는 것은 항상 변한다. 그러므로 일체는 아무것도 아니고 내 삶 역시 아무것도 아니다. 있는 그대로가 진리이다
오직 모를 뿐! 여여(如如),있는 그대로
이름과 모양을 만들고 거기에 집착하여 진리를 보지 못한다. 물,얼음,수증기 모두의 본질은 H2O이다. 그러나 물에 집착하면 물이 얼음으로 바뀔 때 물이 없어졌다고 생각한다. 삶과 죽음이 그러하다. 그러면 ‘죽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본질을 보게 되면 올바른 쓰임새를 깨닫게 되고 지혜를 얻게 된다. 물,얼음,수증기의 올바른 쓰임을 알아 ‘실용’을 얻게 된다.
언제 어디서든 이 모른다는 마음을 지녀라. 그러면 곧 답을 알게 된다.
‘나는 누구인가?’
“‘모른다’ 이게 당신의 참나입니다. 무념, 생각 이전의 상태는 당신의 본체이고, 나의 본체이고, 우주의 본체입니다. 본체는 전부 같습니다.” 란 말씀은 ‘모른다’는 무지가 아니라 원점이고, 입을 열면 무엇이든 그르치게 된단 얘기다. 아무리 훌륭한 행동도 ‘내’가 했다는 아상(我相)이 있으면 지옥행이다. 지식의 독화살을 피하기 위한 방패 또한 ‘나는 누구인가?’하는 물음이다. 생각이 참나를 죽인다. 생각을 버리고 나를 죽이면 참나가 살게 된다. 내가 곧 우주가 되는 것이다.
서양철학에선 중도를 가르치지 않아. 선이냐 악이냐? 그러니 늘 싸우지.
오직 할 뿐! 즉여(卽如),찰나 찰나 대자비심
행동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왜’가 중요하다. 마음의 방향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오직 할 뿐’이란 무념의 행동은 거울처럼 있는 그대로 비추는 행동이다. 파란 하늘이 밤이 되면 까맣듯이. 찰나 찰나 맑은 마음을 지니면 올바른 행동만이 나타나서 천당과 지옥에 걸리지 않게 된다. 선악이 없는 것이다. 바로 생사를 초월한 중생만을 위하는 보살도인 것이다. 마음속에 부처가 나타나더라도 쏴야한다는 말씀은 생각을 버리란 여여(如如)의 진리에 대한 가르침이자 ‘오직 할 뿐’인 즉여(卽如)의 진리를 얻기 위한 가르침이다. 이미 이렇게 말하는 자체가 그릇된 것이니 어떠한 말이나 글로도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우주삼라만상의 숭고한 진리이다.
아무것도 원하지 말라
아무것도 만들지 말라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
아무것도 집착하지 말라
생각하는 순간 진실은 사라지고
깨닫기를 원하면 크게 그르친다
내가 무엇인가
오직 모를 뿐!
오직 할 뿐!
“부처를 쏴라 | 죽어야 산다”에 대한 2개의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