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가꾸는 글쓰기 교육. 이오덕. p
말과 삶을 가꾸는 길
어린이의 글은 어린이의 환경과 생활의 산물이다.
우리나라 아이들의 글을 신문, 잡지에서 보면 하나같이 개성이 없고 생활이 없다. 아이들의 글이 어른들의 천박한 문장관에 의해 모저리 난도질당하고 뜯어고쳐져서 죽은 글이 되어 있다.
“글을 왜 쓰나?”
“선생님이 써내라 하기 때문”
지시와 명령에 의해 할 수 없이, 지정된 제목으로, 쓰라는 내용을 억지로 꾸며 만든다.
쓰고 싶은 것을 쓰게 해야 한다. 쓰고 싶은 마음을 일으키도록 해야 한다. 글을 쓰는 데 기쁨을 느끼는 아이만이 글을 쓰는 데서 성장한다.
사심이 없는 것이 어린이 마음
저는 어린이 세계, 곧 동심에서 살고 싶은 것이 소원입니다.
동심은 허욕을 모릅니다. 물질에 대한 소유욕은 근본적으로 어른의 것입니다.
동심은 정직합니다. 거짓을 꾸미지 않는 것이 어린이입니다.
동심은 인간스런 감정이 풍부합니다. 동정심이 많고, 정의감을 가집니다.
이런 동심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사심이 없는 상태라 하겠습니다.
저는 어린이 세계, 곧 동심에서 살고 싶은 것이 소원입니다.
동심은 허욕을 모릅니다. 동심은 정직합니다. 동심은 인간스런 감정이 풍부합니다. 이런 동심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사심이 없는 상태라 하겠습니다.
동심은 결코 남을 해치지 않으며, 그것 자체가 선이요, 진이요, 미입니다.
저희들 글쓰기 교육의 모토가 ‘이름 없이 정직하고 가난하게’ 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거야말로 어린이의 마음 되기를 염원하는 우리들의 생각이라 깨달아집니다. 명예욕, 거짓 꾸밈, 헛된 욕망, 이런 어른 세계의 추악함이 글쓰기 교육의 적입니다.
어떤 일에 사로잡혀 있다면 누구든지 그런 일을 본 대로 남들에게 말하고 싶어 할 것이고 자기가 받은 생생한 느낌을 전하고 싶어 할 것이다….시원스럽게 남에게 털어놓고 싶어 할 것이다. 글은 이렇게 해서 씌어진다. 그래서 글을 쓰고 싶어 하는 마음은 사람마다 그 알갱이가 다르고 그 절실함의 정도가 다르다.
아이들에게 글을 쓰게 하는 교사는 아이들이 이러한 ‘쓰고 싶은 마음’, ‘쓰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붙잡아 쓸 수 있게 도와주어야 한다. 이것이 글쓰기 지도의 첫 단계이자 가장 중요한 단계인 것이다.
(어른) 작가는 생각으로 진실을 만들지만, 아이들은 체험하고 살아가는 것을 그대로 보여 주면 그것이 바로 진실이 되는 것이다.
책이득 사람이든 그것이 아무리 권위 있는 옷을 입었다 하더라도 아이들에게 ‘쓰고 싶은 마음’을 주어 ‘쓰고 싶은 것’을 쓰게 하는 데서 출발하지 않고 어른들의 생각을 머리로 짜서 만들도록 하는 것이라면 그런 가르침을 우리는 단호하게 거부해야 할 것이다.
문형 학습이라든가, 짧은 글 쓰기 같은 것도, 그것이 아이들의 살아 있는 생활과 말로써 하지 않고 추상적인 글 모양 만들기 연습으로만 하게 된다면 글쓰기 교육에 도움을 주지 못할 것이다.
어른의 글과 어린이의 글의 가장 뚜렷한 차이점?
(어른들은 상상의 글도 쓰지만) 어린이의 글에서는 산문이고 시고 실지의 느낌과 생각과 체험만을 쓴다.
어른의 글은 실용문과 비실용문으로 나뉘지만, 어린이의 글은 이것을 나눌 수 없다. 비실용문을 문학 작품이라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교사들이, 어린이가 어른의 흉내를 내도록 하는 잘못된 글짓기 지도, 작문 지도를 하는가 하면, 아동 문학을 하는 이들 중에는 어린애들 흉내를 내는 어른들도 있다.
이것은 우리의 교육과 문학이 제 구실을 못하고 있는 하나의 증거이다.
자기를 구원한다는 것은 자기 속에 갇힌다는 것이 아니다. 자기 속에 갇히는 것은 자기를 소외시키는 비인간적 태도다. 외부와(남들과)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자기만 결백하려 하고 자기만 행복하려 하는 사람은 본인이야 의식하든 한 하든 결과적으로 남을 해치는 사람이다.
자기 구원은 남과의 관계에서 이뤄지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이름 없이 정직하고 가난하게 이뤄가는 교육은 불행한 어린이를 위한 교육이다. 불행한 어린이를 위한 교육은 불행하지 않은 어린이를 위한 교육이 되지만, 행복한 어린이를 위한 교육은 불행한 어린이는 물론이고 행복한 어린이마저 불행하게 만드는 교육이 되는 것이다.
농사짓기와 글짓기
농사짓기와 글짓기는 그 원리가 사랑이라는 점에서도 같다. 농사일은 땅과 곡식에 대한 사랑이 없이는 잘 될 수 없다. 이해타산으로 금비와 농약을 함부로 뿌려 땅을 혹사하고 오염시키고 땅에서 빼앗기만 할 때 농토는 척박해져서 곡식은 병들고 결국 농사는 파멸의 날을 맞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어린이들의 삶을 가꾸지 않고 글재주의 기술이나 가르쳐서 작품 만들어 내기에 정신이 팔릴 때 말장난의 글짓기 풍조가 휩쓸어 어린이들의 생명은 시들어 버리고 짓밟혀 버릴 것이다. 교육은 이렇게 하여 파멸이 된다.
어떻게 시작할까
먼저, 쓰고 싶은 마음이 되도록
어린이의 글은 진정으로 쓰고 싶어야 써진다.
어떻게 하면 쓰고 싶어질까?
그것을 어린이들에게 좋은 글을 보여(읽어) 주는 것이다. 그리고는 “이 글을 흉내 내지 말고 제각기 쓰고 싶은 것을 찾아 써 보아라.” 하고 말해 주면 된다. 그러면 어린이들은 “나도 그런 글쯤이야 쓸 수 있다.” 든지, “나도 내가 한 것을 한번 써 보고 싶구나.”라는 생각이 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글쓰기 지도는 반 이상 성공한 것이다.
좋은 글과 좋지 않은 글
어떤 글이든 쉬운 말, 자기의 말로 쓰고 싶은 것을 써야 한다.
남에게 자랑하고 싶어서, 유식함을 보이기 위해서, 근사한 남들의 말을 흉내 내어 쓴다면 아무리 재주를 부린다 해도, 아니 재주를 부리면 부릴수록 추하고 거짓스럽게 느껴지는 것이다.
(좋은) 작품을 보이고 간단히 이렇게 말해 준다.
“지금 읽은 시를 흉내 내려고 하지 마세요. 제각기 이 자리에서 무엇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문득 머리를 스쳐 가는 것, 참! 하고 느껴지는 것을 붙잡으세요. 아니면 평소 가슴에 새겨져 있어 지울 수 없는 생각이라든지, 오늘 아침이나 어제 저녁에 어디서 보소 듣고 느낀 감동을, 지금 막 그것을 겪는 것같이 되살려서 써도 좋아요.”
글쓰기 교육의 뜻
글은 삶의 표현이며 창조다. 어린이의 글이든 어른의 글이든 다 그러하다. 글이 정직한 삶의 표현이 되고 삶의 창조가 되자면, 그 글을 쓰는 사람의 마음이 자유로워야 한다. 강요받아서 쓴 글은 거짓글이며, 남의 것을 흉내 내어 쓴 글은 개성이 없는 죽은 글이다.
아이들에게 글을 쓰게 하는 까닭은 그들의 삶을 풍부하게 해 주기 위해서다. 삶을 가꾸는 일이 없이는 어떤 교육도 이뤄질 수 없다.
사물을 바르게 인식하고 보다 풍성한 삶을 영위하는 진실한 인간이 되도록 하기 위해, 모든 교과에서 배운 지식과 현실에서 얻은 체험과 생각들을 종합해서 주체적으로 판단하여 자신의 삶을 개척하고 창조해 나가도록 도와주는 일, 이것이 글쓰기 교육이다.
글쓰기 지도의 목표? 이상의 일곱 가지를 짧게 요약하면 어린이의 마음과 삶을 키워 가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풍부한 인간적 감정을 가지고 바르게 생각하고 판단하면서 행동하는 민주적 인간을 기르는 것이다.
글을 만드는 재주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는 것이 저절로 글이 될 수 있도록, 삶이 그대로 글이 되고 글이 곧 삶이 되도록 하는 것이 글쓰기 교육이다.
말하기와 글쓰기는 표현을 함에 있어서 서로 보완하는 관계가 있지만, 한편 말한 것을 그대로 쓰면 글이 된다는 생각, ‘말 곧 글’이란 생각은 특히 저학년 아이들이 갖도록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한 생각은 아이들이 글쓰기를 쉽게 여기고, 그러면서 글과 생활을 밀접한 것으로 보도록 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말은 우리 민족의 피요, 생명이다. 우리의 민족정신을 기르는 교육은 이러한 순수하고 아름다운 우리 말을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것 이외에 더 효과적인 방법이 없다. 아이들이 언제나 귀를 기울여 재미있게 들을 수 있도록 말을 해 주고 얘기를 들려주는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선생님들이야말로 우리 민족의 혼을 키워 가는 교사라 할 수 있다.
말을 순화한다는 것은 겉도는 말이 아닌 살아 있는 말을 쓴다는 것이다.
살아 있은 말은 살아 있는 사람의 창조적인 삶의 자세에서 쓰여지는 것이며, 따라서 그것은 순수한 우리 자신의 마음을 찾아 가지는 것이 된다. 글쓰기의 생활 태도가 여기서 이뤄진다.
문장관의 확립. 지금 우리나라 아이들은 대부분이 글을 바로 볼 줄 모른다. 글을 자기의 생활과 관련이 없는 것으로 여기고 그래서 손재주를 부려 글을 만들어 내고 있다.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잘못된 교육 때문이다.
글감 지도의 중요성. 모든 글은 그 내용에 따라 형식이 거기에 알맞게 이뤄지는 것이지, 형식이 먼저 있고 내용이 그 형식 안에서 만들어지고 맞춰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만약 그런 글이 있다면 제대로 씌어진 글일 수 없다.
백일장의 폐단? 백일장의 조건(원칙)? 일정한 제목으로,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종이에, 극소수 당선작 외에는 모두 버림, 출제자나 심사자는 글을 쓴 아이들을 지도한 사람이 아니다(아이들의 개성과 생활과 글의 특성을 잘 모르는 사람에 의해 글감이 지정되고, 작품이 평가된다)
주장하는 글 쓰기
생각과 주장이 없는 아이들. 우리의 아이들은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거리에서나 항상 어른들의 시킴을 받고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로 되어 있다. 학교 교육에서만은 그렇지 않아야 되겠는데, 오히려 더 철저하게 아이들을 기계화하고 있는 것이 학교의 교육이다.
글을 못 쓰는 것은 말을 못하는 것이다.
논리적인 글을 못 쓰는 것은 논리적인 말을 못한다는 것이고, 논리적인 말을 못하는 것은 자기의 생각과 견해가 없기 때문이다. 생각과 주장이 없는 것은 어른들, 특히 교육자들이 아이들을 그런 허수아비로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교실의 수업은 시험 점수 올리기가 지상의 목표로 되어서 생경한 지식을 주입시키고 교과서를 암기시키는 것이 위주로 되어 있다. 아이들에게 자연과 인간의 일들을 여유 있게 살펴서 생각하게 하고, 그리하여 자기의 의견을 표명하고 서로의 생각을 나눠 가지도록 하는 산 교육은 철처하게 버림받고 있다.
교육 과정에 특별 활동이 있고 학급마다 자치 활동을 하도록 되어 있지만, 이것이 제대로 되고 있는 학교가 얼마나 될까? 어린이회가 있어도 이름뿐이다. 아이들은 생각이 없고 주장을 할 줄 모르니 의논이고 토론이고 회의고 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실정이다.
잔인한 아이들의 글? 아이들이 왜 자꾸 나빠져 가는 것일까?
그 첫째 이유가 사람들이 점점 돈만 알고 돈만 가지고 살아가려고 하기 때문이다.
개구리를 예사로 죽이는 것도 개구리가 돈으로 팔리기 때문이다.
참다운 인간 교육을 하려면,
먼저 눈을 열고, 가슴과 입을 열고, 머리와 행동을 열어 주는 인간성 해방 운동부터 시작해야 한다. 똑바로 보고, 똑바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똑바로 말하며 행동하는, 진실되고 정의롭고 슬기로운 어린이로 키워 나가기 위해서는 오직 현실 생활의 체험을 진솔하고 사실적, 비판적으로 기록, 표현하는 과정을 통해서 자기 스스로의 세계와 자기 스스로의 길을 개척 창조해 나가도록 유도해 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