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 공부. 엄기호. p288
#설령 천하를 얻었다 하더라도
공부가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문제를 악화시키는 원인이기도 했다? 공부가 현실과의 대면을 유예하는 알리바이 구실을 하고 있다. 내가 아직 공부가 부족해서 벌어진 일이라면서 ‘타석에 들어서지 않는 것’을 합리화하는 알리바이 말이다.
개념을 알기는 하지만 다룰 줄 모른다? 그래서 공부에는 반복이 필요하다고 말하면, 이때도 머리로는 수긍하는데 몸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한다. 쫓기듯 해치우는 공부를 하느라 다루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부분 ‘아는 건 많은데 다룰 줄 아는 것은 없는’ 상태로 후퇴하는 역설이 벌어지고 있다.
출세 성공? “온 천하를 얻으면 무엇하나, 자기 자신을 잃어가고 있는데.”
미국의 흑인 노예였던 프레더릭 더글라스. 노예의 두 가지 삶? 주인의 채찍 밑에서 목숨을 구걸하며 연명하는 ‘생존의 길’, 주인의 압제로부터 도망치다 총알을 맞아 죽는 길. 비굴한 삶이냐 죽음이냐의 선택?
그는 주인이 “생존의 길”이라고 불렀던 것이 사실은 죽음의 길이라고 말한다…
생존의 길과 죽음의 길이 있는 게 아니라 둘 다 죽음의 길에 불과하다. 그는 대신 자유의 길을 택한다.
공부는 언제나 자유와 삶을 선택하는 것이어야 하며 해방의 길이어야 한다.
훌륭함이 무엇인지 모르고, 훌륭해지기 위해 자기를 돌보지도 않은 자가 다른 사람이 훌륭해지도록 돕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아가 한 사람 한 사람이 훌륭해지는 정치공동체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정치공동체를 만드느라 바빠 자기를 돌보지 않은 자가 정치공동체를 돌보면, 그 정치공동체가 과연 훌륭해질 수 있겠는가.
결국 자기도 모르는 걸 남을 위해 한다고 말하는 자만큼 어리석고 몽매한 사람이 없다는 말이다.
공부의 본질은 지혜애 대한 ‘사랑’에 있다. 마찬가지로, 훌륭한 이만 다름 사람을 가르칠 수 있는 게 아니라 훌륭함을 ‘사랑’하는 이가 다른 사람을 가르치며 더불어 성장을 도모할 수 있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무식한 사람이 아니라 지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공부를 통해 양성해야 하는 것은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라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철학자 존 듀이는 배움의 근본적인 특징이 ‘의존성’이라고 말하며 섣부른 ‘독립’을 경계했다. 그의 철학에 따르면, 살아간다는 게 곧 배우는 것이기 때문에 살아 있는 사람은 이미 누군가에게 의존하고 의탁하며 배우고 있다. 따라서 홀로 배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기에 공부 工夫는 공부公扶가 된다. 더불어 돕는 게 공부다. 더불어 도우며 성장을 도모하기 때문에 공부는 ‘사랑’,즉 에로틱한 과정이다.
천하를 얻은들 기쁨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겠는가.
##공부할 이유가 사라지다
약속과 믿음. 한 사회가 제대로 굴러가려면, 그 사회가 사람들에게 약속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물론 사회는 약속만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그 약속을 사람들이 믿어야 한다.
90년대 초반까지 대학진학률 30%. 나머지 70%는 공부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진짜 현실은 정반대였다. 나머지 70퍼센트의 학생들도 공부를 했다. 대학에 갈 성적이 못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존 듀이의 경험론. 능동적인 경험과 수동적인 경험, 교훈은 수동적인 경험, ‘겪음’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생각이란 능동적인 ‘함’이 아니라 수동적인 ‘겪음’에서 촉발되기 때문이다. 바지런히 무엇인가를 하는 동안에 생각을 하지 않는다.
가르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몸을 억압하는 기술이 아니라 몸의 언어를 읽는 기술이다.
배우는 사람이 몸을 통해 무엇을 어떻게 표현하는지 읽고, 그 표현을 통해 배움의 순간을 포착하는 기술을 익혀야 한다.
일제식 수업. 당연히 이런 배움에 몸으로 깨닫는 과정은 없다. 배움의 흉내만 있을 뿐이다.
당연한 결과다. 경험의 능동-수동, 경험과 사유의 관계를 완전히 오해했기 때문이다.
체험 학습 후의 글쓰기는 겪음에 관해 사유하는 시간이 아니라 그 자체가 또 하나의 ‘함’, 즉 능동적인 것이다…이러니 학생들이 집중하는 ‘겪음’은 글쓰기에 관한 겪음이다. 겪은 것을 글로 쓰는 게 아니라 글을 쓰는 것을 겪는다. 학생들은 이 글쓰기를 매우 고통스러운 것을 겪음으로써 교훈을 얻는다. 글쓰기는 재미없고, 의미없고, 고통스럽기만 하다는 교훈 말이다.
시험 문제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변별력’. 변별력의 핵심은 떨어뜨리는 데 있다. 당연히 시험 문제는 갈수록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다…’왜?’라는 질문은 허용되지 않았다. 그런 질문 자체가 학교에 대한 반항으로 여겨져 가혹하게 탄압받았다.
영국의 노동계급의 자식들은 학교의 지식은 ‘탁상공론’이라 부른다. 그건 먹물의 헛소리고 ‘진짜 지식’은 노동현장에 있다는 것이다.
교육은 신분 상승의 도구가 아니라 삶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
소비자본주의의 세례와 ‘십대 문화’. 이것은 한국 사회에 ‘청소년’이라는 주체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였다. 그 이전까지 십대는 ‘학생’으로만 존재했다.
꿈이 억압이 되다.
한국 사회는 그것을 열여덟 살 이전에 끝내야 하고, 그 이후에는 수정도 하면 안 된다고 말한다. 나는 이것이 열여덟 살 이전에 득도하라고 강요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수정 불가능할 정도로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이 있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 그게 득도가 아니면 무엇이 득도이겠는가.
요즘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흔히 하는 말?
“네 꿈을 찾아라!”
득도하라는 얘기나 다름 없다?
엄마아빠들 스스로 자신의 꿈을 찾았는지 먼저 생각을 해보면 금방 답이 나온다.
중산층과 기획의 대상이 된 교육.
“아직은 네가 볼 책이 아니야” “그거보다는 이 책이 나아”라며 부모가 아이가 읽을 책을 고르고 정한다. 넓은 의미에서, 자녀의 자율성을 사라지고 육아와 교육이 부모의 ‘기획’ 대상이 되었다는 점에서 보수 진보를 가리지 않는다.
이 중에서 이들을 가장 주눅 들게 하는 것은 부모의 합리성이다.
이런 부모의 특징이 말로 문제를 드러내고 해결하는 것을 선호한다는 점이다…바로 이 점을 아이들은 기가 막히게 알고 있다.
자기는 말로 부모를 상대하지 못하고 말로써 부모에게 다가설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말을 하지 않는다.
소리를 지르거나 말문을 닫아버린다. 말을 잘못했다가 자기가 어떤 경멸과 모욕의 시선을 받을지 알기 때문이다. 이들은 부모의 말의 세계, 합리성의 세계에서 자기가 인정받을 여지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자기계발의 공부에서 자기 배려의 공부로
폐기나 보완이 아니라 전환이 필요한 이유.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가’를 발견하는 진로 교육보다 ‘내가 어떻게 살아야 내 삶을 돌볼 수 있을까’를 생각하고 발견할 수 있는 전환 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다. ‘자아 실현’에서 ‘자기에 대한 배려/돌봄’으로의 전환이라고 제안한다.
자신의 한계를 안다는 것.
한계, 극복에서 다룸으로. 해녀학교. “숨의 길이를 안다”라는 말은 비교와 극복에 중점을 두지 않는다. 내가 ‘모르던 나’를 ‘알았다’는 데 초점을 맞춘다.
내 한계인 ‘1분의 숨’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다룸의 대상이다.
충분한 시간, 한계에 도달해보는 유일한 길
그렇지 않다. 오히려 현명한 이들은 하고 싶은 것을 이루기 위해 미친 듯이 질주하는 삶을 노예의 삶이라고 불렀다. ‘하고 싶은 것’에 끌려다니는 삶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고대의 현자들은 욕망의 주인이 되라고 가르쳤다. 욕망의 주인이 되는 길은 내가 하고 싶은 것은 언제든 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언제든 그것을 그만 둘 수 있는 것이다.
주인의 힘은 ‘이루게 하는 힘’이 아니라 ‘그만 둘 수 있는 힘’이다.
재능의 훌륭함보다 재능을 잘 쓰고 있는가, 얼마나 잘 활용하고 있는가, 그 선용의 정도가 탁월함의 기준이 된다.
자기를 배려한다는 것. 배려는 목적으로 대하는 것이지만 활용은 수단으로 대하는 것이다.
‘나’는 나의 목적이지만, ‘나에게 속한 것’은 나를 돌본다는 목적을 위해 활용하는 수단이다. 수단인 ‘나에게 속한 것’이 목적이 될 때, 목적인 ‘나’는 수단의 노예살이를 하게 된다.
법정 스님의 예화. 귀한 난초 애지중지, 외출했을 때 비가 오자 난을 바깥에 내놓은 게 생각나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고. 결국 온통 난초 생각에 정신이 팔려 뭘 했는지도 모르게 허둥지둥 집으로 돌아왔다는 것. 이 사건을 통해 스님은 소유하는 것이 소유한 자를 지배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소유에 넋이 나가는 순간 내가 노예가 된다.
오직 물을 뿐, 자기를 안다는 것. ‘오직 모를 뿐’
##공부, 재미에서 기쁨으로
생각의 핵심은 연관 짓는 것에 있다.
공부, 자유와 창조의 기쁨
앎, 선용의 출발. 자연법칙은, 주어진 것을 활용하기 위해 인간이 먼저 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바로 ‘아는 것’이다. 자연법칙을 모르면서 그것을 활용할 수는 없다.
능수능란함, 자유의 다른 이름
앎은 활용의 전제다, 문제는 안다고 해서 우리가 그것을 곧바로 활용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이때 만나는 것은 ‘서투른 자기’다. 알기는 알 되 활용할 줄 모르는 상태. 바로 ‘부자유’다.
“생각하는 손”. 나는 배움의 목적에 관해 이보다 더 멋진 표현을 본 적이 없다.
도구를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생각하는 손’은 자유로운 손이다.
변용, 창조의 기쁨.
앎은 활용의 출발점이다.
안다는 것은 주어진 것과 주어지지 않는 것을 구분하고 주어진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다. 주어지지 않는 것은 그 어떤 경우에도 출발점이 될 수 없다. 출발점이 될 수 없는 것에서 시작한 일은 아무리 노력해도 사상누각이 될 뿐이다. 주어진 것과 주어지지 않은 것의 경계를 아는 것, 그게 바로 자기 한계를 아는 것이다. 한계를 아는 사람만이 무리수를 두지 않고 자기를 배려할 수 있다.
#설령 자기를 얻는다 하더라도_사회를 만드는 기예를 향하여
“건축가의 tekhne에 입각해 아름다운 사원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물론 필요불가결한 기술적 규칙에 따라야 합니다. 하지만 훌륭한 건축가는 사원에 아름다움 forma, 즉 아름다운 형식을 부여하기 위해 충분히 자신의 자유를 활용하는 사람입니다…”-미셸 푸코
푸코는 훌륭한 삶이란 주어진 규칙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형식을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즉, 훌륭한 삶이란 자유를 활용할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나는 여기에서 공부 혹은 교육의 목적이 무엇인기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공부는 자유롭기 위해 하는 것이다. 교육은 사람을 해방하는 과정이다.
무지를 아는 것이 지혜로움이다. 무지에 관한 무지가 모든 것을 망친다. 반대로 모르는 게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우리를 지혜로운 자에서 지혜를 사랑하는 자로 이끌어, 자기와 세상을 가까스로 구원한다.
공부는, 알고 다루고 읽고 향유하고 다시 경탄하는 순환의 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