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기, 근원으로 돌아가기. 이병철. p320
21세기의 새로운 문명을 찾아서
#귀농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_이현주
노자는 “돌아가는 것이 도의 움직임이다”라고 했다. 이른바 길이란 그것이 어떤 길이든 마침내는 본디자리로 돌아가는 길이라는 얘기다. 물론 종점까지 다 못 가고 중도에 인생을 마감하는 경우도 있다. 있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많이 있다. 그러나 그가 마지막 숨을 거둔 곳, 거기가 그의 종점일 수도 있다면, “만물이 저마다 각색이지만, 모두가 제 뿌리로 돌아간다”는 노자의 뒷말도 맞는 말이다.
돌아간다는 말은 성숙을 암시한다. 씨앗이 열매로 바뀌어 다시 씨앗으로 되는 것이 나무의 일생이다. 그러나 처음 씨앗과 나중 씨앗은 같은 씨앗이 아니다. 그 사이에 성숙이라는 거룩한 과정이 있다. 바로 이 과정을 모으면 그것이 우리가 사는 세계요, 역사다. 실로 인간이란, 돌아오(가)기 위하여 한평생을 사는 존재라 하겠다. 어찌 인간만 그러하겠는가만.
그런 뜻에서 진정한 귀농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고 거듭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떠났던 농촌에 대한 인식이 철저하게 바뀐 사람들, 거기가 마지못해 몸담고 소외된 자들의 낙후된 변방이 아니라 참된 평화와 풍요를 누릴 수 있는 곳이라는 사실을 온몸에 소름이 돋도록 절실하게 깨우친 자들만이 참된 귀농의 길에 설 수 있다.
거듭 말하거니와 몸으로만 농촌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직 아니다. 그보다 먼저 마음(의식)이 농촌에서 참된 이상을 보아야 한다. 도시생활의 정신을 그대로 가지고 농촌으로 돌아간다면 그것은 단순히 거주지를 농촌으로 옮긴 것이지, 앞으로 이 세상을 구원할 정신운동의 하나인 귀농과 상관이 없는 일이다.
#새 천년에도 아이들이 살아남을 수 있기를
지금 인류는 일찍이 경험한 적이 없는 엄청난 변화와 혼돈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그 변화를 예측하기는커녕 그 속도를 따라 가는 것마저 힘겹게 되어 버린 상황 속에서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는지, 어디로 가는지를 생각할 겨를조차 잃어버리고 있습니다…지금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위기는 지금까지의 경험을 넘어서는 전혀 새로운 차원의 위기임에는 틀림없는 것입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두 가지 길의 선택. 가던 길을 갈 때까지, 별다른 고민 없이 지금까지 살아온 대로,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쓰러지면 다시 일어설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다른 길은 이제 달리던 것에서 멈추어 다시 두 발로 땅을 딛고 걸어가는 것입니다. 이 길은 더 빨리, 더 많이, 더 편하기 위해, 타고 달리기에 길들여진 지금까지의 익숙했던 방식과는 다른 것입니다. 분명 속도도 느리고 불편하고 힘든 길일 수도 있습니다.
하늘을 거스르는 문명의 한계. 현재 산업문명은 역천(逆天)의 문명입니다.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는 문명 그것은 필연적으로 멸망할 수밖에 없는 운명입니다. 산업문명이란 그 본질이 약탈과 파괴에 토대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인류의 문명사는 결국 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배와 약탈의 역사인 동시에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와 약탈의 역사라 할 수 있는데 이제 이러한 문명양식이 그 한계에 다다른 것입니다.
더 이상 진보가 아니라 생존. 이제 더 이상 진보가 아니라 생존입니다…따라서 이제 분명한 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왔던 문명과 삶의 양식을 바꾸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새로운 길을 찾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지요. 그 새로운 길이란 모든 생명의 근원인 자연을 더 이상 거스르지 않는, 자연과 조화롭게 사는 길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새로운 삶의 방식이라고 생각하는 이 길은 새롭되 결코 낯선 길은 아닙니다. 그 길은 인류가 지금까지 이 지상에서 삶을 이어온 가장 보편적인 길이기 때문입니다(오래된 미래)..자연의 섭리와 그 법도에 따르는 길인 것입니다.
겨울은 땅으로 돌아가는 계절입니다…새봄을 준비하기 위해선 우리 또한 근원자리로, 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거기서 새봄을 움틔울 씨앗과 새싹을 갈무리해야 합니다.
근원으로 돌아가기. 농촌으로 돌아가기, 흙과 함께 하는 삶으로 돌아가기 위한 귀농은 닥쳐온 추위, 인류문명의 위기에서 살아남기 위한 것이고 새봄을 준비하는 일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환경 문제는 마음의 문제이자 삶의 방식의 문제
#새봄 맞이와 창자 비우기
먼저 비워야 채울 수 있다. 봄맞이 단식을 한다. 새로운 것을 맞이하기 위해선 낡은 것을 버려야 한다. 비워야 채울 수 있는 것이다…모든 생명의 탄생은 낡은 껍질을 깨는 것에서 시작된다. 껍질이 깨어지지 않는 탄생은 없다.
왜 과식하는가. 그것은 우리의 탐욕과 이기심, 그 인색함 때문이다. 영혼의 허기짐과 불안 때문이다. 나 혼자만 먹기 위해서, 남보다 더 많이 먹기 위해서, 그리고 불안하고 허전하고 허기져서 오늘도 우리는 과식하고 있다…현대 산업문명은 그 자체로서 과식문명이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대량폐기를 그 내용으로 하는 산업문명은 과식의 욕구에서 출발하며 과식을 통해서만 성립되고 유지될 수 있는 체계이다.
우루과이라운드의 논리는 과식의 논리이다.
과식의 본질은 밥을 함부로 대하고 함부로 먹는 것에 있다.
밥을 생명으로 자각하는 한 결코 과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밥 먹는 일이 생명이 생명을 모시는 거룩한 행위라면, 어찌 밥을 함부로 먹고 더구나 과식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밥을 생명이 아닌 한낱 상품으로 보는 산업사회의 공업적 사고에 의하면, 우루과이라운드의 논리, 밥을 사고 파는 데 국경이 없어야 한다는 논리는 지극히 타당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땅의 농업을 소생시킬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인가. 그것은 농업을 새롭게 보고 밥을 밥대로 이해하는 일이다.
농업을 새롭게 보지 않고서는, 밥을 올바로 이해하지 않고서는 아무런 대책도, 희망도 없기 때문이다.
생명산업으로서의 농업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밥에 대한 올바른 자각이 이루어지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농업의 중요성은 밥 한 그릇의 소중함으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밥의 소중함을 이해하는 것, 쌀알 한 톨의 무게가 태산보다 무겁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일은 먼저 창자를 비우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창자를 비워야 밥의 소중함을 깨달을 수 있다.(나락 한 알 속 우주)
밥의 소중함을 자각하는 곳에서 공생의 대동세상이 열린다.
#고향, 근원자리로 돌아가기
흰눈의 찬란함? 그러나 도시가 잠에서 깨어나 사람들과 차량들이 길거리로 쏟아져 나올 때부터 자연이 베푼 이 아름다운 은총은 순식간에 재난과 재앙으로 돌변한다. 시멘트, 아스팔트로 만든 인조 도시, 생명의 근원인 흙이 사라져 버린 저 죽음의 회색 도시에서 이 계절, 자연이 베푼 순백의 축복과 은총은 오히려 재앙이 될 뿐이다.
설 전에 눈이 한두 차례 이상 실하게 내려야 새해 농사가 풍년이라고 하지 않던가.
삶과 죽음은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이 모든 짓거리가 너와 나는, 사람과 자연은 결코 하나일 수 없으며 자신은 절대로 죽을 수 없다고 믿는 그 맹목적인 어리석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겠는가…삶과 죽음이 하나임을 생각할 때 우리의 삶은 더 겸손하고 넉넉해질 수 있고 깊이 생각하여 그 이치를 안다면 우주 만물이 모두 나와 한 뿌리이며 천지자연이 곧 나와 일체임을 깨달을 수 있다고 했다. 우리가 돌아가야 할 근원은 어디인가.
#한 인연을 정리하면서
농민운동, 농민 문제를 해결하는 데서도 그것이 농민들의 문제가 아닌 내 자신의 절실한 문제로 살지 않는 한 그것은 진실성과 생명력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다. 의무나 당위에서가 아니라 진정한 내 내면의 욕구로써 사는 삶의 소중함이 절실해져 온다. 세상이란 결국 내가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돌아감에 대하여
늘 새롭고 풍성한 자연의 비결. 생각해 보면 겨울은 다만 죽어 있는 계절이 아니다. 봄의 이 화려함, 새 생명으로 가득하는 이 싱그러움은 저 겨울의 쉼이 있었기 때문이다…이 돌아감, 이 비움, 그것이 자연이 늘 새로움으로 자신을 유지하면서 저토록 풍성할 수 있는 비결이 아닌가. 자연생태계의 기본원리인 순환과 재생이란 이처럼 돌아감과 비움에 바탕을 두고있다.
“우리가 죽음을 들여다 볼 때, 혹은 실제로 죽음이 하는 일을 받아들일 때, 그것은 우리의 삶을 섬세하게 하고, 살아 있는 시체처럼 그저 생존만 하는 하찮은 상태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준다고 생각한다…만물이 무상하다는 사실을 인식하면 우리는 덜 집착하게 된다.”
#얼굴이 있는 문화, 사람이 있는 농업
우리에겐 얼굴이 없다. 어느새 우리는 우리다움을, 우리의 고유성을 잊어버리고 있다. 사람도, 그 사람이 사는 곳도. 시골 소읍이나 서울 변두리나 외형상 무슨 차이가 있던가. 온통 시멘트로 범벅된 날림 건물에다가 어지러운 간판들, 다방·슈퍼마켓·비디오 가게·햄버거 집, 셔터와 시멘트 담장, 거리에 널린 쓰레기, 거기엔 국적도 없고 역사도 없다…서양문화의 껍데기들 이런 것들로 온통 채워지고 있다. 허장성세와 졸속함과 경박함이, 그래서 불안함이 우리의 도처에 깔려 있다.
외형과 규모가 아닌 섬세함과 조화
가장 중요한 것은 다름 아닌 농업·농민교육의 차이. 네덜란드 농업실습센터의 공통된 교육철학은 노작학습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문제의 핵심은 농지 규모 등 외형적 조건이 아니다. 농업은 규모의 문제가 아니라 섬세함과 조화의 문제이다.
지금 우리에게 핵심 관건은 사람들의 생각, 농민들의 의식을 변화시키는 일이다…따라서 농업교육을 바로 세우는 일이란 한국 농업의 새로운 모형과 철학을 정립하고 동시에 농업에 대한 행정의 지원체계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가능하다.
#생태마을과 삶과 몸을 찾아
여행, 우리가 어딘 가로 떠나는 것은 결국 자기로 돌아오기 위해서이다. 잊고 있었던 자신을, 우리를 새롭게 만나기 위한 교육이다…평화는 바로 자네 안에 있으니까…우주의 중심은 바로 이곳이다. 그러니 세계를 모두 돌기 위해서는 어느 곳도 갈 필요가 없다. 바로 이곳이 세계니까…
그 사회와 문화의 생태적인 정도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 똥이 어떻게 인식되고 취급되는가…
인도의 뒷간? 생태적 관점에서 보면 수세식 처리방식이야말로 가장 반생태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똥을 자연으로 순환시켜 또 다른 생명의 양식으로의 재생을 철저하게 차단할 뿐 아니라 똥을 폐기물로 버리는 그 교육에서 엄청난 자원의 낭비와 환경생태계의 오염을 낳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살아남기, 자연에 의지하기
거듭나기. 생태맹의 극복과 생태적 인간의 탄생이란 농심의 회복, 모성의 회복과 다른 말이 아니다.
#생태 위기의 대안으로서의 농
농사일이란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두레나 품앗이로 이웃과 함께, 땅과 함께 그리고 온 우주 삼라만상과 함께 짓는 일이다…농사란 무릇 하늘과 땅이 짓는 것이라고 했다…자연의 모든 것들을 의식 있는 신령한 존재로 여기며 섬김으로써 가능한 일들이다.
한 마을이 생태적인 마을로 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생태적 마을의 탄생은 생태적인 세계와 그 문명의 탄생을 의미한다.
#지금 왜 생태농활인가
농활의 단위는 작아야 한다. 셍태농활, 작지만 매우 중요한 출발이다.
학교는 지역과 마을의 심장이다. 지적 학습과 노작 학습이 함께 이루어지며 살아 있는 자연 속에서 풍요로운 감성을 길러 내며 전인적 교육을 목표로 삶에 필요한 실제적 지식을 배우고 일깨우는 대안교육과 그 학교는 기본적으로 농촌공동체를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생태공동체와 교육
배움 자체가 삶이요, 즐거움이요, 행복. 교육이란 또한 삶의 경험.
일본의 ‘농업초등학교’ 만들기 운동
#잡초와 함께 짓는 농사
생태농업에서 잡초 문제만 해결된다면 사실 그 나머지 농사는 그다지 어려울 게 없다…그러나 생각해 보면 잡초를 없앤다는 우리 생각은 처음부터 무망하고 어리석은 일임을 알 수 있다…결국 문제는 잡초라는 걸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와 그 잡초와의 공생이 가능한 것인가로 귀결될 수 있다.
사실 자연상테에서 잡초라는 것이 따로 있을 리가 만무하다.
잡초는 토양의 수호자. 우선 잡초와의 싸움을 멈추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그런 다음에 가장 효율적인 공생방안이 무엇인지를 찾아내는 일이다…이렇게 보면 결국 잡초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은 먼저 땅을 살려내는 길뿐임을 알 수가 있다.
#다시 밥을 생각하자
밥을 함부로 대한 죄
#밥과 생명 그리고 하늘
밥 그 자체로 살아 있는 생명. 우리가 밥으로 먹는 것 중에서 본시 생명이 아닌 것은 없다.
조 한 알 속의 우주. 해와 달과 별과 바람과 구름과 비와 안개와 나비와 풀벌레와 지렁이와 시냇물 소리, 흙과 그 속의 미생물,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들 이 모두가 조 한 알, 우리가 밥으로 삼은 그 모든 것에 가득하다.
병든 밥, 병든 생명, 병든 세상
#거룩한 밥, 거룩한 똥으로 살기
생명의 관계는 서로에게 밥이 되는 관계
생명현상이란 밥이 똥이 되고 똥이 밥이 되는 모습이다.
똥이 다시 밥이 되는 관계의 법칙이 곧 순환의 법칙이다.
모든 갈등과 모순은 밥과 똥의 분리에서 비롯된다.
존재한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 사랑한다는 것은 남을 위해 밥이 되는 것
#땅의 위기와 생명
땅은 그 자체로 살아 있다. 살아 숨쉬고 밥 먹고 일한다.
#귀농은 율려의 각비운동_노겸 김영일(김지하)
1860년에 시작된 수운 최제우 선생의 동학은 철저한 영성과 생명의 사상이다. 그리고 농민의 우주관이요, 농심의 철학이다. 바로 이 철저한 농민의 영성과 생명의 사상, 농심의 철학이 오늘 벽에 부딪힌 인간 내면의 영성적 황폐와 외면의 인류사회 및 지구와 우주 생명의 오염·파괴·질병·이변을 근원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대생명사상으로 높이 평가되기 시작한다.
각비는 결단인데, 그것은 결국 단순한 생업을 찾는 행위로서가 아니라 삶의 깊은 소망과 내면적 생성의 오묘한 뜻을 새롭게 찾는 행위로서의 ‘귀농’을 뜻하는 것이다.
반드시! 녹두꽃이 떨어져서 청포장수 울고 가는 일이 다시는 없어야겠기에 마지막으로 한마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