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사회. 울리히 벡. p359
울리히 벡의 『위험사회』는 20세기 말에 유럽인이 쓴 사회분석서들 중에서 이미 가장 영향력있는 저서에 속한다…이 책은 제도 내의 사회과학에 유성의 충돌과 같은 충격을 주었다.
성찰적 근대화. 새로운 근대(성)을 향하여
과학이나 산업의 발전은 한 묶음으로 엮인 위험들과 위해들(hazard)이며, 우리는 이전에 단 한번도 이와 같은 것에 직면해 본 적이 없다.
이러한 위난들(dangers)은 예를 들어 더 이상 시간적인 제한을 갖지 않는다. 즉 그 영향은 후세에게도 미친다. 그 공간적 결과도 마찬가지로 제한되지 않는다. 즉 국경을 넘어선다. 그리고 초기의 근대성과는 달리 아무도 ‘위험사회’의 위해들에 대해 책임질 수 없다. 나아가 이러한 위해들로 말미암아 생명이나 신체상의 해를 입은 사람들에 대한 보상은 바로 그 계산 가능성이 문제가 되면서 불가능해지고 있다.(과학기술 문명의 계산불가능한 위험들)
산업사회의 기축적인 원리는 재화의 분배이지만, 위험사회의 원리는 해악 또는 위난의 분배이다. 나아가 산업사회는 사회계급들로 구성되는 반면에 위험사회는 개인화한다. 하지만 위험사회는 아직, 그리고 동시에 산업사회라고 벡은 계속 주장하고 있다.
그 이유는 위험사회의 위험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 과학과 함께 주로 산업이기 때문이다.
#부의 분배논리와 위험의 분배논리
선진화된 근대성에서는 부의 사회적 생산에 위험의 사회적 생산이 체계적으로 수반된다…근대화 과정에서 외연적으로 성장하는 생산력을 통해 위해들(hazards)과 잠재적 위협들이 유례없을 정도로 발생하게 되었다…
체계적으로 말하자면 시간 차는 있을지라도 근대화가 지속되는 중에 ‘부를 분배하는’ 사회의 사회적 지위와 갈등은 ‘위험을 분배하는’ 사회의 그것들과 결합되기 시작한다. 서독에서는 늦어도 1970년대 초부터 이러한 이행이 시작되었다. 이것이 나의 테제이다.
19세기 초에 템즈강에 빠진 선원들은 익사하는 것이 아니라 런던 하수구의 악취와 독가스를 마시며 질식사 했다고 한다.
오늘날의 위해들은 산업적 과잉생산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의 위험과 위해는 (사람 및 동식물에게 가해지는) 위협의 지구적 본성과 근대적 원인의 면에서 겉보기에 유사한 중세시대의 그것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것들은 근대화가 낳은 위험이다.
이것들은 산업화가 낳은 대량생산물이며 산업화가 지구적으로 전개되면서 체계적으로 강화된다.
이 위험은 체계적이고 종종 되돌릴 수 없는 해를 끼치지만 일반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으며, 인과적 해석에 기초를 두기 때문에 처음에는 그에 대한 (과학적 또는 반과학적) 지식의 견지에서만 존재한다.
널리 인정되는 근대화의 원리와 관련하여 보자면 위험은 생태계를 평가절하하는 것이며 사적인 생산에서 발생하는 부수효과를 공적으로 수용하는 것이다.(비용의 사회화?)
승자의 관점에서 보자면 근대화의 위험은 거대한 사업거리이다. 위험은 경제학자들이 오랫동안 찾아 온 탐욕스러운 수요이다.
평균적인 노출은 모든 사람들이 실질적으로 노출되어 있음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사실을 알고 있는가? 사람들이 ‘평균적인 것’을 어떻게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가를 보면 참으로 놀랍다. 평균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은 이미 사회적으로 불평등한 다수의 위험지위들을 배제하고 있다.(평균의 함정?)
근대화 위험의 지식 의존성. 건강을 해치거나 자연을 파괴하는 것은 우리의 감각기관으로 인지할 수 없으며, 겉보기에 쉽게 구분되는 곳에서조차 문제를 ‘객관적으로’ 결정하기 위해서는 자격있는 전문가의 판정이 필요하다. 새로운 위험의 대다수(핵 또는 화학오염, 음식물에 포함된 오염인자, 문명의 질병)는 인간의 직접적인 지각능력을 완전히 벗어난다. 희생자들이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는 위해들에 대해 더욱더 큰 주의가 기울여지고 있다.
분리된 것들을 합해서 생각하기: 인과성의 가정들. 최근에는 DDT가 과다 누적된 펭귄이 남극에서 발견된 경우조차 있었다.
사람들은 위험 자체를 경험할 수는 없다.
과학적 합리성과 사회적 합리성. 여기에 본질적이고 중요한 결론이 있다. 즉 위험의 정의에서 합리성에 대한 과학의 독점이 분쇄된다.
경제적 이익을 만족시키기 위해 생태적 파국의 가능성을 받아 들여야만 하는가? 필연성이란 무엇인가? 가정된 것인가, 그리고 변해야만 하는 것인가?
위험연구에서 은폐되어 있는 이 같은 외적 결정의 부분은 그 규모가 아무리 작을지라도 과학자들이 여전히 합리성을 독점하고 있다고 주장할 때에는 문제가 된다. 핵발전소의 안전에 관한 연구들은 발생가능한 사고에 기초하여 특정한 수량화할 수 있는 위험들의 평가로 제한되고 있다. 위해의 차원들은 처음부터 기술적 관리가능성으로 한정된다.
계산불가능한 위협들이 모든 곳의 모든 사람들에게 공업상의 기본재산이 되는 알려지지 않은 잔여적 위험이 된다.
사회적 합리성 없는 과학적 합리성은 공허하며, 과학적 합리성 없는 사회적 합리성은 맹목적이다.
정의(定義)의 다중성: 더욱더 많은 위험
위험의 내용: 행위자극으로서의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건. 이미 어떤 효과가 나타났고 피해를 입었다고 해도 위험 자체는 사라지지 않는다.
문명의 위험의 지구화. 하나의 공식으로 요약하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 빈곤은 위계적이지만 스모그는 민주적이다…위험은 지구화 경향을 내장하고 있다.
세계화라는 유토피아. 위험은 더 이상 기회의 어두운 면이 아니며 오히려 시장기회이다.
#위험사회와 지식의 정치
문명의 빈곤화? 19세기나 오늘이나 많은 사람들이 파괴로 경험하고 있는 여러 가지 결과들은 산업화와 근대화의 사회적 과정과 결합되어 있다.
위험의 문제
그 뒤에 오늘날에도 여전히 관찰할 수 있는 것처럼 여러 가지 문제들이 점차 발생하게 되었다…
해롭지 않은 것들, 포도주, 차, 파스타 등이 해로운 것으로 드러난다. 비료는 세계적인 규모로 영향을 미치는 유독물질이 된다. 한때 부의 원천으로 상찬되었던 것들(원자력, 화학, 유전자 기술 등)이 예측할 수 없는 위난의 원천으로 변형된다. 관습적인 과소평가 및 은폐 방식은 위난이 그 모습을 분명하게 드러내기 때문에 더욱더 많은 장애에 부딪히게 된다.
이전에 다 본 것들이고 새로운 것은 전혀 없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체계적 차이들도 그만큼 두드러진다. 개인적 및 사회적으로 경험된 빈곤화의 절박감은 오늘날 문명의 위협의 비실체감과 대비된다. 이 비실체감은 과학적 사고를 통해서만 의식되며 일차적 경험에 직접 연결될 수 없다…이 때문에 우리의 언어와 상상력이 부족하게 되며 윤리적 또는 의학적 범주가 모자라게 된다.
우리는 절대적이고 제한되지 않는 부정어(NOT)에 유의하게 되며, 여기서 일반적으로-없는 것, 즉 상상할 수 없는 것, 생각할 수 없는 것 등의-없는 것이 우리를 위협한다.(판타지가 필요하다!)
계급지위에서는 존재가 의식을 규정하지만, 위험지위에서는 반대로 의식(지식)이 존재를 규정한다.
DDT, 새로 산 케익에 포름알데히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들은 아주 다른 상황에 놓이게 된다…이 물질들이 장단기적으로 해로운 영향을 미치는가의 문제와 함께 어떤 면에서 미치는가의 문제만큼이나 우리 자신의 지식범위를 벗어난다. 그러나 이 같은 문제들이 결정되는 방식은 이런저런 경로로 사람들의 고통을 결정한다. 사람들이 위태로운가의 여부, 그 정도와 징후는 근본적으로 외적인 지식에 의존한다…그들은 자신의 인지적 주권의 본질적 부분을 잃어 버린다. 해롭고 위협적이며 적의를 품고 있는 것들이 모든 곳에 숨어서 기다린다….지금의 위해가 비가시적이지만 너무도 현재적인 형태로..
잘못, 기만, 실수와 진실: 합리성들의 경쟁에 관하여. 위험의 과학적 정의를 수용하지 않는다고 해서 사람들을 ‘비합리적’이라고 비난할 수는 없다. 그와 정반대로 이것은 위험에 관한 과학적 및 기술적 진술들에 포함된 수용성에 관한 문화적 전제들이 틀렸다는 것을 보여준다…특히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어 보이는 것에 관한 그들의 가정에서 잘못을 저지른다.
위험에 대한 경제적 맹목성. 기술이라는 위험요소에 대해 저지른 본원적인 잘못은 핵 위험을 말할 수 없이 오해하고 하찮게 여겼다는 것이다.
엉터리 속임수: 허용수준. ‘나도 모른다’는 말을 대신하여 사용되는 중심적인 용어가 ‘허용수준’이다.
그러나 동시에 허용치는 자연과 인간에게 미량일지라도 해를 끼칠 수 있는 ‘백지 수표’이기도 하다.
그 물질들이 순환되어야만 우리는 그 효과를 알 수 있다.
파열되는 과학적 합리성. 이면의 유독한 현실을 탐구하지 않은 채 사물을 단순하게 이용하고 겉모습대로 받아들이며 단지 먹고 마실 뿐인 사람들은 순진할 뿐만 아니라 자신들을 위협하는 위해들을 오해하고 따라서 자신들을 아무런 보호없이 그 같은 위해에 노출시킨다.
하지만 오늘날 확실히 다른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다. 플라톤의 ‘동굴의 우화’에서 보이는 세계는 본래 우리의 지식능력을 벗어나는 실재의 반영이며 단순한 그림자일 뿐이다.
‘희생양 사회’. 위해의 증가와 함께 위험사회에서는 민주주의에 대해 완전히 새로운 유형의 도적이 제기된다.
#사회적 불평등의 개인주의화: 생활형태들과 전통의 사망
#지위와 계급을 넘어서?
선진사회는 계급사회인가? 모순적 사실들에 즉각 부딪히게 된다. 사회적-역사적 전망에서 이 상황을 검토할 때 우리는 발전된 나라들의 사회 불평등 구조가 놀랄 만한 안정성을 보여 준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맑스는 개인주의화 과정 속에서 포착되는 이 같은 계급사회의 변형을 결코 끝까지 탐구하지 않았다.
계급사회의 종말은 혁명적인 대폭발과 같은 것은 아니다. 그것은 탈전통사회에서 가차없이 진행되고 집합적으로 경험되는 개인주의화 및 원자화 과정으로 구성된다. 역설적이지만 탈전통사회는 사람들의 자급자족 능력이 점점 줄어드는 사회이다. 동시에 사회의 모든 부문에서 위험과 위험지각과 위험관리는 갈등과 사회형성의 새로운 원천이 된다.
#’나는 나’: 가족 내부 및 외부의 성별화된 공간과 갈등
전통이 점점 더 약해지면서 관계들은 더 많은 약속을 하게 된다. 사라진 모든 것들을 갑자기 다른 곳에서 찾기 시작한다.
#개인주의화, 제도화 그리고 표준화: 생활상황과 생애의 유형
#노동의 탈표준화
서로 모르는 두 사람이 만나서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라고 묻는 상황처럼 산업세계에서 사람들의 삶에 대해 임노동이 지니는 의미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은 없을 것이다.
표준화된 완전고용체계에서 유연하고 다원화된 저고용체계로
#성찰적 근대화: 과학과 정치의 일반화에 관해
#진리와 계몽을 넘어선 과학?
기술-과학적 문명은 온통 변경할 수 없는 금기들로 가득 차 있다…발전된 문명에서 과학적인 인지적 실천은 잠재적으로 정치적인 변수들을 암묵적이고 객관화된 방식으로 조작하는 것이며, 정당화될 필요가 없는 선택적 결정이라는 허식 뒤에 은폐되어 있다…위험의 이중화된, 구성된 실재는 그 원인의 객관적 분석을 정치화한다.
#정치적인 것의 개막
위험은 결정에 달여 있다. (선택의 결과다!)
정치체계의 기능상실. 그 하나는 의회와 행정부의 의사결정 범위가 기술관료적으로 폐쇄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조합주의적으로 조직된 권력집단 및 영향집단의 부상이다.
기술정책의 난관. 투자결정, 그 결정들은 돈을 벌어야만 하는 것이다. 근본적인 반대는 자본(과 물론 일자리)을 위태롭게 할 것이다. 이제 부수효과를 지적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기업의 미래와 이 계획에 포함된 피고용인들의 미래를 투자한 기업에 해가 되며, 따라서 궁극적으로 정부의 경제정책조차 위태롭게 한다.
가능한 미래상. 진보라는 근대적 종교는, 그것이 아무리 모순적일지언정, 한 시대를 풍미했으며 그 약속들의 실현을 막는 조건들이 발생하는 곳에서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변명의 시대는 끝난다…나의 해답은, 하위정치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가능성을 확장하고 법적으로 보호함으로써 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본질적인 배경조건에는 강하고 독립적인 법정뿐만 아니라 강하고 독립적인 언론매체가 다른 단체들과 함께 확실히 포함된다. 이 두 가지는 하위정치 통제체계의 주요 기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의학이 의학을 반대하고, 핵물리학자들이 핵물리학을 반대하고, 인간 유전공학이 인간 유전공학에 반대하고, 정보기술이 정보기술에 반대할 때에만, 외부 세계가 시험관 속에서 양조되고 있는 미래를 알 수 있고 평가할 수 있다. 형태가 어떻든지 간에 자기비판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어떤 종류의 위난이 아니라, 조만간 이 세계를 파괴할 지도 모르는 잘못을 미리 찾아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일 것이다.
울리히 벡의 ‘위험사회’? 위험이 가득한 사회라는 뜻이 아니라, ‘무모한’ 시도들이 난무한다는 뜻이다. 쉽게 말하면 ‘하면 된다’는 시대가 아니라, ‘하면 더 망치는 시대’라는 말이다.-조한혜정, 『다시 마을이다-위험사회에서 살아남기』
정말 좋은 정보입니다. 거짓 정보들이 난무하고 후쿠시마 물고기를 먹어도 된다는 공식 기사들까지 나오는 마당에.. 제 생각이랑 일치하는 포스트를 봅니다. 세상은 너무나 어둡습니다.
어두운 세상일수록 희망의 불빛이 더욱 밝게 빛나는 법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