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우스트의 선택. 박병상. p235
#생명조작 기술과 지식인의 양심_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지금 인류사회는 전면적인 사회적 해체, 생태적 붕괴라는 전대미문의 위기에 봉착해 있다. 이러한 위기상황에서 우리는 대부분 실제 내용도 모르면서 첨단 과학기술이 이러한 위기를 해결해 줄 구세주가 되리라는 막연한 환상을 품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과학기술이 구세주이긴커녕 인간존재와 그 세계를 근원적으로 파괴하는 ‘악마의 기술’로 드러난다면 어떻게 될 것이가?
인간다운 삶을 유지하고 고양시킬 뿐만 아니라 그것을 다음 세대들에게도 이어주기 위해서 우리는 생명조작 기술에 관한 주류 언론과 권력의 일방적 선전만을 소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자세에서 하루빨리 벗어나지 않으면 안된다. 무엇보다 ‘사전예방 원칙’이라는 이성적인 원리에 입각하여, 우리의 존재와 삶에 가해지는 위협에 맞서 싸우는 용기와 지혜가 지금처럼 절실히 필요한 때가 없었다.
“더이상 늦출 수 없습니다!”
협박에 가까운 광고로 국민들을 현혹시키고 위기의식을 조장하던 시절. “이 지역이 아니라도 어딘가에 반드시 있어야 할 시설이 아닌가”, “내 지역이라서 반대한다면 나는 지역이기주의자가 되는데”, “핵폐기장이 없으면…전기가끊어지면 산업은 마비되고 우리나라는 후진국으로…핵발전에 대한 대안이라도 있다는 겐가”, “우린 자네를 믿지만 그렇다고 가난하게 살 수야 없는 노릇 아닌가”하고 이어지는 반응에 답답해 했다.
생명공학은 단편적인 현상만으로 문제를 제대로 읽을 수 없다. 생명공학이 광고하는 ‘혜택’들은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눈을 감아버릴 때에라야 비로소 가능한 것들이다.
유전자조작과 생명복제로 요약할 수 있는 생명공학.
과학기술이 먼저 문제를 일으키면 윤리가 뒷감당하는 현실
전문가에게 맡길 일이 아니다.
자본이 주도한 ‘녹색혁명’이 가난한 나라의 농민과 민중에게 축북이 될 것으로 믿었던 시절도 있었지만, 지금도 그런 논리가 옳다고 믿는 사람은 없다. 대부분의 시민들은 이제 녹색혁명의 폐해를 잘 안다. 자본과 권력, 전문가들이 스스로 폐해를 인정하고 알려주었기 때문인가? 아니다. 시민들이 각성하고 풀뿌리의 역량이 성장하면서 ‘신화’의 본질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식량증산? 과다한 에너지 투입의 결과!
자본이 창조한 유전자조작 농산물과 식품의 ‘신화’도 시민운동의 결과로 시장에서 ‘붕괴’되고 있다. 한층더 복잡한 생명복제의 문제도 생명윤리 차원의 시민운동으로 접근한다면 복지로 위장한 자본의 손개를 노출시킬 수 있을 것이다. 전문가주의의 두터운 장벽으로 가려진 생명공학도 시민운동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뜻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비방(秘方)은 따로 없다. 정답은 풀뿌리 시민들의 각성과 결단이다. 소로우의 ‘시민불복종’ 정신, 간디의 ‘비폭력’ 직접행동, 그리고 우리사회 ‘반독재 민주화운동’과 같은 면면히 내려오는 저항의 정신을 이어받아, 이제 우리와 후손의 생명을 위해, 생명공학과 자본과 과학기술 독재에 맞서는 저항운동이 일어나야 할 때이다.
생명공학의 정체
없던 유전자가 새로 생기거나 있던 것이 없어지는 현상을 돌연변이라 한다. 따라서 종의 경계를 넘어 유전자를 끼워넣는 생명공학은 마땅히 돌연변이 유포 기술이다.
생명공학의 허구
첫째, 유전자조작 식품은 식량문제를 오히려 악화시킨다…식량자원의 단순화 촉진, 농장은 갈수록 단작화. 반다나 시바는 단작은 식량과 식성의 단순화에 그치지 않고 정신과 문화의 단순화까지 몰고올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둘째, 의료의 불평등 구조를 심화시킬 것이다…불임부모, 장기이식, 엄청난 자금을 투여해야 연구개발이 가능한 생명공학의 성과. 그 혜택은 당연히 지불능력이 있는 계층부터,
셋째, 생명공학이 생태계를 풍요롭게 한다는 주장은 차라리 코미디다…생태계 교란. ‘슈퍼잡초’…눈에 보니는 결과만을 논하고자 떼를 쓴다.
시민의 힘으로 거부해야 할 생명공학.
근본적인 문제는 ‘인류의 수명연장’과 ‘불치병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의료복지의 허무맹랑한 그림을 앞세우는 생명복제 기술. 결코 보편적이지 못할 것이 분명한 기술을 마치 누구에게나 곧 혜택이 돌아갈 기술인 양..일방적으로 광고를 해대고 있다.
생명공학은 대안일 수 없다. 대안은 생태사회에 있다.
가진 자의 욕심을 한시적으로 채워줄 뿐인 생명공학은 후손은 물론, 일부 계층을 제외하고는, 늙은 뒤의 자신의 미래에도 결코 도움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사랑하는 자식의 건강을 위해, 따뜻한 이웃과 함께 살아가고 싶은 자신의 노후를 위해, 지금은 생명공학을 거부할 때이다. 인류와 생태계 모두는 21세기는 물로, 22세기 한참 이후에까지 건강해야 하기 때문이다.
환경문제는 단순히 인구증가와 관련된 것만은 아니다. 사실은 과소비가 더욱 근본적인 문제다.
미국식 상업주의 문화가 아무런 장애 없이 제3세계 구석구석까지 파고들고, 미국이 선도하고 우리가 화답하는 신자유주의 과소비 물결이 ‘WTO 시대’를 맞아 더욱 극성을 부리는데 우리는 우리 자신의 소비를 억제할 수 있을까.
나가는 글
생명공학은 수많은 실패를 감추고 있는 거품이다.
이미 수많은 지역에서 숱한 실패를 드러냈다. ‘인류복지’를 위한다는 고상한 가면을 쓰고 있지만 사실 그 안에는 거대기업의 이기적 경제논리가 도사리고 있다. 시민단체의 거듭된 지적에 대해 “안전하다”고 앵무새처럼 되뇌지만, 결코 시민들을 안심시킬 수는 없다.
우리가 돌연변이 만연으로 인한 후손의 생태계 파괴에 미리 대처할 수 있을까…
인구증가보다 더 무서운 것은 중앙공급식 소비문화에 획일적으로 매몰되는 인간들의 과소비 풍조다. 이제 우리는 삶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전환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자발적인 가난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독특한 지역문화에 대해 자긍심을 가진 자급자족 공동체의 회복 가능성을 진지하게 모색해야 한다. 그것이 근본적으로 생명공학에 대한 대안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최근 사람들은 막대한 자금을 동원하여 돌연변이 유전자를 양산하고 있다. 유전자를 조작하는 생명공학이 바로 그것인데, 지금까지 열거한 자연상태의 돌연변이 발생률을 훨씬 초월하는 막대한 양의 돌연변이를 한꺼번에 쏟아낸다…돌연변이로 인한 문제는 지금 세대가 아니라 다음 세대에 가서 나타나게 될텐데 말이다.
유전현상은 특정 유전자만의 작용으로 발현되기보다 연관된 많은 유전자들의 상호작용으로 발현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따라서 특정 유전자의 삽입이나 치환이 예상한 대로 발현되지 않고 오히려 저해인자로 작용될 가능성이 많다.
건강과 생명공학
심장병수술이 보편화되면 심장병환자는 오히려 늘어난다. 심장질환을 갖는 체질의 사람들이 계속 생존하여 후손을 낳기 때문이다…유전병도 마찬가지다.
소비자의 권리
“공연히 시비를 걸어 자칫 그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해서 다시는 우리한테 곡물을 팔지 않겠다고 하면 어쩌겠느냐…” 공무원들의 저자세…
후손에게 어떤 결과가 나타날지 지금의 과학기술로는 전혀 예측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과학기술의 가능성과 위험성..생명공학은 문제가 다르다. 현재 아무런 이상이 없어도 앞으로 어떤 문제를 야기할지 아무도 단정적으로 예견할 수 없는 실정이다. 그리고 그것이 초래할지도 모르는 피해로부터 아무도 예외일 수 없다. 웬만한 사고가 아니라면 핵은 인간을 멸종까지 몰아가지는 않겠지만 생명공학으로 인한 사고는 인간의 발자취를 생태계에서 영원히 지워버릴 수 있다. 자식을 키우는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역시 참여가 대안이다.
이 자리를 빌어 생명공학 정책에 대한 적극적인 시민참여를 강력히 촉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