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현재 세 가지 해결해야 할 과제에 직면해 있다. 전쟁, 환경문제, 세계적인 경제적 격차. 이것들은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역사적 관계를 집약하는 사항들이다. 게다가 이것들은 시급한 과제들이다. 이전의 문학은 이런 과제를 상상력으로 떠맡았다. 그러나 오늘날의 문학이 이것을 떠맡지 않는다고 해도, 나는 불만을 드러낼 생각은 없다. 그러나 나 자신은 떠맡고 싶다. 그것이 문학적이든 비문학적이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
번안과 번역의 차이. 후타바테이의 축어적 번역의 이유?
“문학에 대한 존경심이 컸기 때문에, 예를 들어 투르게네프가 그 작품을 쓸 때의 마음가짐은 대단히 신성한 것이었기 때문에, 이것을 번역하는 데 있어서도 똑같이 신성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므로 한 글자 한 구절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투르게네프는 투르게네프, 고리키는 고리키, 각별히 그 시상을 터득해서, 엄밀히 말해 몸과 마음을 원작자와 똑같이 하여, 충실히 그 사상을 옮기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실은 번역의 근본적인 필요조건이다.”
오히려 문학이 매우 커다란 의미를 가졌던 시대가 예전에 있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다닐 필요가 있습니다.
들뢰즈는 사르트르의 다름과 같은 말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문학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영구혁명 안에 있는 사회의 주체성(주관성)이다.” 이것은 혁명정치가 보수화되고 있을 때, 문학이야말로 영구혁명을 담당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사르트르가 ‘철학’이 아닌 ‘문학’을 들고 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는 소설뿐만 아니라 온갖 것을 다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소설 또는 소설가의 시점입니다.
문학의 지위나 영향력이 낮아졌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마이너리티가 되어버린 문학. 그들은 문학적 활력을 갖고 있었습니다만, 이미 사회전체에 영향을 미치진 못했습니다.
포크너는 작가가 되고 싶다면 사창가를 경영해보라고 말한 적이 있지만, 그건 고사하고 현실적으로는 작가가 대학의 창작 코스에서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 아메리카에서 문학부는 전혀 인기가 없습니다. 영화를 함께 하지 않으면 꾸려갈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내가 근대문학의 종언을 정말 실감한 것은 한국에서 문학이 급격히 영향력을 잃어갔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충격이었습니다.
1990년대에 나는 한일작가회의에 참가하거나 한국의 문학자와 사귈 기회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일본은 이렇게 될지라도 한국만은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던 것입니다.
한국에서 학생운동이 활발했던 것은 그것이 노동운동이 불가능한 시대, 일반적으로 정치운동이 불가능한 시대의 대리적 표현이었기 때문입니다….실제 한국에서 문학은 학생운동과 같은 위치에 있었습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문학이 모든 것을 떠맡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1990년대 말경부터 문학의 쇠퇴가 급속하게 전개되었다고 합니다. 김종철이라는 고명한 문학비평가는 문학을 그만두고 생태운동을 시작하며, 『녹색평론』이라는 잡지를 내고 있습니다.
나는 왜 문학을 그만 두었는가를 물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문학을 했던 것은 문학이 정치적 문제에서 개인적 문제까지 온갖 것을 떠맡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인데, 언제부터인가 문학이 협소한 범위로 한정되어 버렸다, 그런 것이 문학이라면 내게는 필요가 없었다, 때문에 그만두었다는 것입니다.
(나는 순수라는 말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며 살아왔다. 순수 음악, 순수 미술, 순수 문학.,,,내가 자라온 세월은 순수라는 이름 아래 인간과 인류의 고통을 외면하는 음악, 미술, 문학, 시,…이런 것들이 잘 팔리는, 어두운 세월이었다.- 전성은, 『왜 학교는 불행한가』)
근대문학=소설이 왜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문학은 허구이지만 진실이라고 불리는 것보다도 더 진실을 보여준다는 것이었습니다.
근대소설은 말하자면 음성이나 삽화에서 독립한 것인데, 그것은 글쓴이에게도 독자에게도 커다란 상상력을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시청각적 미디어가 나오게 되자, 그런 필요가 없어지게 됩니다. 예를 들어 영화가 출현하기 전까지 소설가는 이를테면 영화 같은 소설을 쓰려고 정말 많은 궁리를 했습니다. 그러나 일단 영화라는 기술이 출현하자 그 같은 궁리는 무의미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사진이 나왔을 때 회화에서 일어난 것과 닮았습니다. 19세기 중반 프랑스에 사진이 출현했을 때, 그때까지 초상화로 밥벌이 하던 화가들이 살아갈 수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네셔널리즘의 기반일 수 있었던 문학. 그런데 스웨덴 회사가 아일랜드에 케이블 TV를 들여오자, 하룻밤에 모두가 아메리카화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1997년 처녀작으로 영국의 부커상을 받은 인도인 작가 아룬다티 로이. 그러나 그녀는 처녀작으로 상을 받은 후, 소설은 쓰지 않고 인도에서 댐건설 반대운동, 반전운동으로 분주합니다. 왜 소설을 쓰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로이는 자신은 소설가이기 때문에 소설을 쓰지 않는다, 쓸 것이 있을 때만 쓰며, 이런 위기의 시대에 무사태평하게 소설 따위를 쓰고 있을 수는 없다는 식으로 답하고 있습니다.(사회문제을 떠맡았던 소설에서 하찮는 소설로 전락?)
‘문학’이 윤리적·지적인 과제를 짊어지기 때문에 영향력을 갖는 시대는 기본적으로 끝났습니다. 그 잔영이 있을 뿐입니다.
입신출세주의는 근대일본의 정신적 원동력입니다.
봉건시대의 신분제를 부정하는 사상은 다양하게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평등하다고 해고 입에 발린 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현실적인 평등으로부터 상당히 멀었고, 메이지에서 뭔가가 변했다고 한다면, 메이지 이후 일본이 학력에 의해 새롭게 등급이 정해지는 시스템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일본인 다수가 아이니 부모니 할 것 없이 입신출세에 필사적으로 매달려 근면하게 일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수험경쟁으로 최근까지 쭉 이어져 왔습니다. 이것을 무시하면 일본의 근대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말하지만, 오늘날의 상황에서 문학(소설)이 일찍이 가졌던 것과 같은 역할을 다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근대문학이 끝났다고 해도 우리를 움직이고 있는 자본주의와 국가의 운동은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인간적 환경을 파괴하더라도 계속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 한복판에서 대항해 갈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점에 관해 나는 더 이상 문학에 아무것도 기대하고 있지 않습니다.
소비자에게 조국은 없다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에게 조국은 없다.”라고 『공산당선언』에 썼습니다. 그러나 생산과정의 노동자에게는 조국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소비자에게 조국은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교환에 관한 나의 관점은 폴라니를 이어받은 것인데,폴라니는 재분배라고 말하고 있을 뿐, 수탈-재분배라는 교환을 보지 않습니다. 바꿔 말하면, 그는 국가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국가는, 당신도 썼지만(「전체주의적 감축」,『현대사상』2002년12월수록), 수탈에 의해 성립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수탈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재분배를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즉 수탈하는 상대를 보호하고 육성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나는 국가의 기반에는 교환형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터넷의 가능성과 함정
직접 사람을 만나는 것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량은 매우 크지요. 만화가 야마후지 쇼지라는 사람이 있지요. 예전에 내 초상화를 그렸던 적이 있는데, 전혀 닮지 않았습니다. 나의 사진을 보고 그렸기 때문입니다. 한번이라도 살아있는 나와 만났다면 아무리 디로프메를 해도 특징을 잡아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옛날 다케다 다이준과 딱 한번 만났던 적이 있습니다. 서서 이야기를 나눈 것뿐이지만, 나의 다케다 다이준에 대한 관점은 그것 없이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나는 고바야시 히데오도 만나야겠다고 생각했지요.
만났냐 만나지 않았냐 하는 것은 하찮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을 큰 것입니다.
나카가미 겐지도 생전에 만난 사람은 알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지금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독특한 부자연스러움이나 독특한 귀여움을…
어느 쪽이 좋은가 하는 문제가 아니지요. 구체적으로 뭔가를 생산하는 장면에서는 물론 만나지 않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습니다. 메타레벨의 언어로는 전달할 수 없습니다.
대항운동으로서의 비폭력
비폭력이라는 것은 수동적인 것이 아닙니다. 오른쪽 뺨을 맞으면, 그것을 되돌려 때려주는 대신 왼쪽 뺨을대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간디의 비폭력주의도 그랬습니다.
사카이 사건? 프랑스 군인들이 난폭하게 굴어서 도사번 군인들이 그들을 습격 살상한 사건, 신정부는 프랑스와 마찰이 두려워 도사번 무사들에게 할복하라 지시. 도사번 무사들은 프랑스 측 앞에서 차례로 할복, 프랑스 측은 얼굴이 새파랗게 되어 “이제 그만해”라고 말했습니다.
하여튼 비폭력에 의해 상대를 질리게 하는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전면적인 무장해제입니다.
예를 들어 아랍 전체가 협의하여 무기를 버리면 됩니다. 그러면 선진국들은 무기를 팔 수 없게 됩니다.
그들은 전쟁을 하고 싶어 안달이 나 있지요. 그러나 무장을 하지 않은 나라에 군사적으로 개입할 수는 없습니다. 전 세계의 매스컴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테러리즘보다 효과가 있으며, 미래를 마음에 새기게 만드는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문학의 종언과 약간의 망설임_옮긴이 해제
어떻게 보면 ‘문예창작과’는 상당히 기괴한 존재다. 이것을 확실히 미국에서 건너온 학제라고 할 수 있다…일본에선 그곳을 졸업하고 작가로 이름을 얻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그러나 우리나라의 최근 활동 작가들에 대한 통계를 내본다면, 문예창작과 출신의 비중이 놀라운 속도록 증가하고 있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