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한 사람들에게. 스테판 에셀·롤란트 메르크. p167
공감하라! 행동하라! 세상을 바꿔라!
#아직은 악(惡)과 고통의 시대, 공감과 참여로 세상을 바꾸십시오!
그러므로 빈곤과 정치적 불의가 증가하는 한, 분노하고 참여하는 것이 옳습니다.
우리들 모두는 우리의 지구가 오직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구를 가혹하게 착취하는 대신, 이 행성과 이곳의 주민들을 보살펴야 합니다. 더 이상 잃어버릴 시간이 없습니다. 하나되어 함께 글로벌 사회로 나아가야 합니다!
“무엇으로 시작할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만이 마지막을 두려워한다네!”
그렇습니다. 분노와 책임과 공감이 필요합니다.
#공감 가득한 반항아
한 시대의-그가 살아온 시기는 20세기를 포괄하다시피 한다- 반항아인 스테판 에셀은 말년에 우리의 손을 잡고 21세기로 가는 길을 가르쳐 주고 있다….신뢰, 힘, 용기, 사랑, 공감, 형제애, 단결이 공허한 단어들이 아니라 현시대의 다양한 위기 속에서 힘써 지켜가야 하는 삶의 소중한 가치들임을 자신의 역사적 경험을 통해 보여준다.
에셀에게 대화란 마틴 부버 혹은 에마뉘엘 레비나스와 마찬가지로 단지 내용을 설파하는 수단이 아니다. 상대방과의 대화는 에셀에게 아주 본질적인 일이며, 자기 자신을 뛰어넘어 모든 것 안에 깃든 대화 원칙을 실현하는 형식이다.
…에셀은 글뿐 아니라 살아 있는 말과 자유로운 사고의 교환으로 사람들을 만나는 우리 시대의 소크라테스다.
이 시대의 정점에서 의식 있게 살기! 그것이 스테판 에셀의 요구다.
문학은 철학의 반대가 아니라 철학이 깃들 수 있는 그릇이다.
#히페리온의 운명의 노래(1797)_프리드리히 횔덜린
…/그러나 우리네 인간에겐/ 안식을 누릴 곳, 그 어디에도 없고/ 다만 사라져 갈 뿐이거늘/ 고뇌하는 슬픈 인간들은/ 눈이 먼 채 시간의 나락으로/ 추락하고 있습니다./절벽에서 절벽으로/ 내동댕이쳐진 폭포수처럼/ 마냥 불확실한 곳으로 떨어질 뿐입니다.
#이 땅의 분노한 사람들에게 고함!_스테판 에셀의 취리히 연설 2011.10.27
1년하고 좀 더 되었을까요? 나는 프랑스 레지스탕스 친구들과 사보이에 모여 3천 명에 이르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보냈었지요. 조심하라! 레지스탕스 시대, 곧 저항의 시대에 프랑스인들이 요구했던 기본 가치가, 민주주의와 인권이라는 가치가, 금권에 대항하여 지켜 온 그 가치들이 위험에 처해 있다고…
이런 상황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다른 문화들을 알아 가고 친숙해지는 과정을 통해서만 이런 상황을 타개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계의 다양한 문화를 존중해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모든 이들에 대한 공감에 기초한 세계를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교육 개혁도 그에 속합니다. 오로지 자신이 더 잘살고 더 강해지기 위해 조장하는 교육은 지양되어야 합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이 지구상에 사는 모두와 공감해야 합니다!
이제 어떤 나라도 전체 글로벌 사회와 연결되지 않고 혼자서 해나갈 수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시대의 새로운 특징입니다.
우리는 일단 분노해야 합니다.
만족은 좋지 않습니다. 너무 만족스러우면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죠. 그럼 나약해집니다. 활력을 얻고 성장하고자 한다면 지금의 위험을 비폭력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어떤 투쟁이 필요한지 알아야 합니다. 내가 늘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사람들에게, 또한 동료들에게 주는 메시지가 바로 이것입니다.
용기를 내어라, 그러나 상황에 정통하라!
#지금은 깨어날 때_앙드레 마티&취리히 청중들과의 대담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생각? 약간 과도한 희망?
바로 거기에 우리의 과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작은 책 한 권이 의미가 있다면, 사람들을 움직이고 참여시키는 것 아닐까요? 바꿔야 할 것들을 생각하게 하고, 유토피아에 대한 관심을 키우고! 우리는 꿈꿀 수 있고 꿈꾸어야 합니다! 셰익스피어는 “우리가 실패한 것은 꿈꾸기를 시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했어요.
우리는 꿈꾸어야 하고, 또한 우리의 꿈이 우리가 바라는 만큼 실행되지 않았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스스로 행동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미 이룬 것으로 살아가고, 그로써 충분하다고 생각하죠. 그러므로 우리는 분노하고 참여하는 소수를 필요로 합니다. 역사의 시기 시기마다 그런 소수가 있었어요…가령 예수의 제자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적은 수로 전 세계를 새롭게 했어요. 시작은 보잘것없지만 아주 크게 될 수 있지요. 나는 늘 그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질문이군요. 감사합니다. 오늘날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은…..
한마디로 말해 ‘비켜 서 있지’ 말고, ‘정면 돌파’ 해야 합니다.
아랍의 봄…”우리에게도 헌법과 민주주의가 필요하다”…게다가 서구의 젊은 세대는 20세기의 경험들을 극복하고, 스스로 “이곳에서는 혁명은 더 이상 필요 없지만 헌법과 민주주의는 필요하다”고 말할 만큼 충분히 똑똑해요. 그런 모습은 내게 커다란 기쁨이 됩니다.
이스라엘에 우호적인 많은 친구들은 내가 유독 이스라엘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에 대해 불만스러워합니다
러셀 트리뷰널 온 팔레스타인에서도 늘 이런 이야기들이 거론되죠…거기서 우리는 공동으로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인들을 대하는 방식이 아주 비인간적임임 폭로하고, 전 세계가 그에 반대하여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촉구할 것입니다.
나는 오래전부터, 말도 중요하지만 행동은 더 중요하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나는 평생 동안 강영을 해왔고, 따라서 말은 이미 많이 했어요. 나는 모든 연설에서 우리는 이러저러한 것을 해야 한다, 이러 저러한 것을 이루어야 한다고 요구하지요. 그와 관련하여 늘 이런 질문이 뇌리를 스칩니다.
말을 어떻게 행동으로 옮길 것인가? 정녕 행동으로 뭔가를 이룰 수 있는가?
이스라엘인들이 텔아비브 로트쉴트 거리에 모여 정부 규탄 시위를 했습니다…이유는 단지 치즈값이 너무 올랐기 때문이었어요!
그러나 치즈값이 왜 그렇게 비싸졌는지를 생각하다가 이스라엘 정부가 많은 돈을 차할과 팔레스타인 점령에 지출하다가 보니 경제가 힘들다는 생각에 이르면, 서서히 이런 정부가 좋은 정부인가, 다른 정부가 들어서야 하지 않을까라고 자문하게 될 겁니다. 그렇게 진보하게 되는 것이죠!
현 상황은 아주 위험합니다.
우리는 현재 은행의 위기, 시장경제와 금융경제 위기 가운데 있어요. 위기는 아직 극복되지 않았습니다. 동시에 지금까지 민주적으로 통제되지 못한 금융권력의 부상과 더불어 다시금 내셔널리즘 그룹과 파시즘을 배경으로 하는 그룹들이 등장하고 있어요.
이 모든 것들은 아주 위험합니다. 그러나 아마도 우리가 아직 이해하지 못한 것을 이해하게 될 날이 곧 올 것입니다…우리는 이 일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그러면 우리는 깨어나게 될 겁니다! 이런 위험들에 더 이상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지 않기 위해, 우리는 반드시 잠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21세기는 종교의 세기가 되거나, 도무지 그렇게 되지 않거나 할 것이다”라고 했던 앙드레 말로의 말을 기억하고 싶습니다.
누구의 책임일까요? 최근 우리 사회의 경우 교육 제도가 문제인 것 같습니다. 남보다 나아지는 것, 남보다 강해지는 것, 다른 사람을 이기고 살아남는 것에 너무 많은 비중을 두었어요…경제계에서는 경쟁이 너무나 중요해졌죠. 젊은이들이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최상의 일자리를 얻으려고 안감힘을 써요. 그렇지 않으면 무능한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죠….우리는 다음 세대들이-나는 증손자가 다섯. 이제 세 살, 네 살, 다섯 살, 여섯 살, 일곱 살이죠-경쟁으로 점철되지 않은 훈훈한 마음을 갖도록 이들을 교육하고 사회를 그렇게 이끌어야 합니다.
청중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그것이 불가능할까요? 아니면 너무나 유토피아적인 망상일까요? 대답해 보십시오, 여러분!
프랑스의 문필가이자 철학자인 몽테스키외는 언젠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게는 좋지만 가족에게 나쁜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안 된다고 말한다. 가족에게는 좋지만 조국에게 나쁜 것을 알게 되었을 때도 안 된다고 말한다. 내 조국에게는 좋지만 이 세계에 나쁜 것을 알게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로 안 된다고 말한다.”
바로 이런 자세가 우리가 필요로 하는 올바른 세계시민의 자세라 할 수 있겠지요.
“저항, 그것은 창조이며 창조, 그것은 저항이다!”
이 문장은 무슨 뜻일까요? 창조는 언제나 저항에 부딪히고 저항은 뭔가를 창조할 때만 실현된다는 것을 생각하며, 마티 씨를 비롯한 귀한 청중들과 작별을 하고자 합니다.
자, 다시 일어나 저항하고 창조합시다!
#공감하라! 지속적으로 항의하라!_롤란트 메르크와의 대담
네, 이 시대의 상황들은 공통된 원인에서 비롯됩니다. 그 원인은 금융권력이 맹위를 떨치고 있다는 것이지요. 금융권력은 투명하지도 않고, 정책적으로 규제되지도 않습니다.
식수 부족, 에너지 공급 내지 핵에너지 문제…우리의 문제는 글로벌할 것들입니다. 그에 반해 분노는 지역적입니다. 하지만 분노의 총합은 뭔가 글로벌한 것을, 글로벌한 문제와 위험을 시사하지요.
“분노는 첫 단계다. 필요하긴 하지만 충분하진 않다. 다르게 되기 위해서는 새로운 생각, 새로운 관점, 새로운 의지가 필요하다!”
분노와 참여는 내게 아주 중요합니다. 인간은 분노할 줄 알아야 비로소 인간이 되기 때문입니다. 분노하지 않는 한 완전한 인간이 아니에요. 그러나 참여는 시작일 뿐입니다. 단지 시작일 따름이지요.
우리는 분명 용인할 수 없는 세계에 살고 있어요. 우리가 원하는 세계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에 대해 분노하는 것은 좋을 일이지요.
그러나 그것은 또한 새로운 세계를 함께 만들어 가는 게 기여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 다른 세계는 시대 경험에서 탄생하지요. 사람은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자식입니다. 그런 시각을 가지면 작은 것에 연연하기보다 커다란 전체를 염두에 두게 되죠.
위기는 심각합니다. 그걸 극복하는 건 우리의 인간성에 내가 ‘공감’이라 칭한 측면을 도입하고 강화할 때 비로소 가능해집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참여, 공감,감정이입, 이해심-한마디로 인류의 단합-입니다.
따라서 사고의 개혁, 즉 새로운 세계적 사고의 본질적인 요소는 당신이 ‘질투심’과 명백히 구분되는 공감이란 말씀이지요?
내게 있어 공감은 만족하지 않는 감정이에요. 공감은 반항하고, 돕고자 해요. 다른 사람들의 입장이 되어 보고 그들의 고통과 그들의 행복을 느끼는 것이고, 다른 사람들과 단합하는 것이죠.
라이트모티프처럼 서구적 사고를 가로지르는 ‘나’와 ‘나 아닌 것’, 인간과 자연이라는 이분법적 사고가 지금 같은 인류의 위기를 초래했어요. 모든 것이 대화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게다가 우리 서구는 기독교적 가치관을 기본으로 하고 있는데, 기독교는 인간에게 지구를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명령하고 있어요. 이런 식의 사고를 벗어나야 합니다. 이런 사고는 파괴와 착취로 직결되지 때문이지요.
공감에 우선권을 두는 이유? 타인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문화들에 대한 감정이입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칸트가 살았던 시대와 달리 우리는 글로벌 사회에 살고 있어요. 이런 상황에서는 공감만이, 반복하건대 단지 공감만이 국가들 간에 연대의식을 북돋울 수 있지오.
그냥 분노하라는 말로는 그것을 알리지 못해요. 존엄 없이도 화를 낼 수는 있지만, 존엄이 침해되는 것을 볼 때만 의분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개인이 모든 것들 위에 군림하게 된 후, 인권선언이 이렇듯 높아진 인간의 지위와 자연에 대한 인간의 통치권만 드러나고 있지는 않은지 묻게 됩니다. 그렇다면 인권선언을 새롭게 바꿔야 하지 않을까요? 기존의 것이 시대에 뒤떨어져서가 아니라, 자연권의 목록을 포함시켜야 하니까요.
“계몽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에서 칸트는 사고의 개혁을 강조했지요. 그는 사고의 혁명을 위해 노력하지 않았아요. 사고의 개혁을 위해 노력했지요. 저도 그렇습니다. 사고를 위한 새로 고안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삶과 경제의 개혁입니다. 기존의 업적을 바탕으로 변화를 추구해 가자는 것이지요.
지금처럼 낭비하는 인류 앞에서 행복이란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미 알고 있었던 바, 절제일 것입니다. 그런데 절제를 하려면 원료를 덜 소비하는 것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것도 중요해요…내 친구인 정신의학자 베러나르 코비에는 내게 다른 사람과 나눌 때, 다른 사람들과 공감할 때 우리의 행복이 증가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적은 것이 더 많은 것일 수 있지요.
아탁(ATAC)과 연계하여 활동하는 경제학자들은 긴축정책에 대해, 부의 재분배가 위에서 아래로 진행되지 않고 아래에서 위로 이루어질 뿐이라고 비판합니다. 나오미 클레인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은, 이런 긴축정책은 밀턴 프리드먼이 자연재해나 다른 위기 동안에 신자유주의 개혁을 관철시키기 위해 추진한 ‘충격요법’이라고 이야기하지요.
9.11과 조지 W. 부시
네, 미국인들이 유엔을 도구화했죠. 미국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런 메시지를 던졌습니다. 우리와 함께하지 않는 자는 우리에게 반대하는 자다!
그렇습니다. 그로써 중요한 것, 즉 정의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당신은 역사로부터 무엇을 배웠습니까? 역사를 어떻게 보아야 할지 충고해주시겠습니까?
긴 인생을 살면서 세계사의 변화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는 점이 눈에 띕니다….오늘날의 질문은 글로벌 착취로 얼룩지 세계를 어떻게 사회적으로 정의롭고 지속가능한 글로벌 공동체로 변화시킬 수 있는가 하는 점일 겁니다…재화 분배의 부당함과 자연을 다루는 방법의 부당함. 이 두 개의 기본문제는 줄곧 제기되어 왔지만, 이제는 정말로 깊이 연구해야 한 세계사의 결과물인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한편 생각은 자유로워요. 생각은 무한까지 떠돌아다니죠! 오늘날 인간성의 개혁과 세계의 개혁으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 모두는 스스로 창조자라는 생각을 해야 해요. 그리고 계속 창조하기 위해 저항해야 하고, 계속 저항하기 위해 창조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해요. 그것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세계지도에 유토피아라는 나라가 없다면, 세계지도를 들여다 볼 가치가 없다”-오스카 와일드
이 땅의 분노한 자들에게 주는 나의 메시지는 분노하는 것에 그치지 말고 책임 있는 자세로 참여하라는 것입니다. 세계를 변화시키고, 공감하십시오. 진정한 글로벌 사회의 시민이 되십시오.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을 바꾸어야 합니다! 무엇 때문에 분노합니까? 여러분이 지금까지 여러분의 삶을 바꾸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글을 읽기 전에 그의 삶을 읽어라!_거세된 분노를 일으켜 세루는 늙은 투사의 육성_홍세화(진보신당 대표)
우리는 분명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데 한국의 초·중·고 어떤 교육과정도 자본주의에 대해 가르치지 않는다. 오히려 자본주의에 대해 공부하겠다고 모이면 국가보안법에 의해 처벌당하기 일쑤다. 이러니 자본주의와 다른 사회나 체제를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은 길러질 리 만무하다.
우리에게 찾아온 자유의 성격과 한계를 가늠하기도 전에 우리는 이전보다 더 촘촘하고 냉혹한 자본의 질서와 이 자본의 보이지 않는 명령에 포섭되고 편입되어 버렸다는 것, 이것이 내가 알고 있는 한 한국 사회 구성원인 우리의 비극이다.
사람의 관심은 누구나 자신의 몸이 놓이는 자리에 집중되기 마련. 그것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니며 살 수 있는지를 가늠하는 기준이 되는 까닭에, 그로 인한 불안이 자신을 지배할 때 사람들은 그 속에 갇힌다. 자유와 존엄의 조건을 보장해 주지 못하는 체제에 분노하기도 전에 우리는 새로운 자본의 질서에 의해 분노를 스스로 거세당해 버린 것이다. 분노도 수입해야 하냐고? 한국 사회에 한 번도 알려지지 않았던 94세의 프랑스 노(老) 지식인의 책 『분노하라』를 우리는 그렇게 만난 것이다.
그는 말한다. “지금은 철학을 논할 때가 아니라 인류학을 논할 때”라고, ‘정의란 무엇인가?’를 논하는 것은 물론 의미가 없지 않다. 하지만 정의를 실어 나르는 그릇인 분노가 없다면 그 정의란 대체 인간에게 무엇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윤리적 질문에 이르지 못하는 학문은 대체?
한 인간이 거의 100년을 살았다. 그저 생존한 것이 아니라, 다른 인간을 향해 “공감하라! 행동하라! 세상을 바꿔라!”라고 호소할 수 있다는 것! 나는 스테판 에셀의 생애와 정신이 하나의 기적이라고, 인류에게 주어진 마지막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나비로 변신할 수 있는 애벌레와 비슷하다. 분노하지 않는 한 완전한 인간은 아니다”라는 에드가 모랭의 비유를 인용하면서. 우리는 이 세계가 변하기를 바라는가? 그렇다면 우리의 얼굴에서 공허한 웃음을 지우고, 우리를 옥죄어 온 불안을 던지고 분노한 얼굴로 세상을 되돌아보아야 한다. 그리고 스테판 에셀의 다음과 같은 말을 언제나 기억할 일이다.
“자신의 삶을 바꾸어야 한다. 무엇 때문에 분노하는가? 아직 우리 자신의 삶을 바꾸지 않았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