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완전성. 레베카 골드스타인. p285
쿠르트 괴델의 증명과 역설
모든 오류는 (감정이나 교육과 같은) 외부 요인 때문이다. 이성 자체는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쿠르트 괴델
“히틀러가 나무를 흔들고 나는 사과를 줍는다”
프린스턴의 주민들은 히틀러를 피해 유럽으로부터 건너온 수많은 고급 인력들 때문에 더욱 세계화되었다…그 가운데 가장 탐스러운 몇몇 사과들은 지구의 한 좁은 구석에 지나지 않는 이곳으로 굴러 들어오게 되었다.(아인슈타인과 괴델, 둘 만의 오붓한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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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한 지식의 유용성”에 바칠 새로운 유형의 학술기관? 프린스턴의 고등과학원
존경받으며 이곳으로 모셔진 학자들은 마치 순수이성의 왕자들인 양 대우받았다. 그들은 충분히 많은 보수를 받았고, 무제한의 사색 시간이라는 귀중한 사치를 누릴 수 있었다. 학생들을 위해 강의노트를 준비하거나 시험답안을 정정해 줄 필요도 없었으며, 한마디로 학생들과 관련된 일체의 부담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웠다.(순수학문의 천국)
“이곳은 학자들의 자유로운 사회여야 한다”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천재들로부터 원하는 결과를 이끌어 내는 데에 훨씬 유리한 장소
수학자들이 추구하는 엄밀성과 확실성은 선험적으로 이루어진다. 이는 그들이 수학적 통찰을 얻는 동안 어떤 관찰에도 의존하지 않으며 그렇게 얻는 통찰 또한, 본질적 및 자연적으로, 아무런 관찰도 수반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경험적으로 얻은 그 어느 사실도 수학적 통찰에 대한 기반을 훼손할 수 없다.
아인슈타인의 뒤를 이어 유럽에서 건너온 유명인들 가운데 헝가리 출신의 눈부신 석학 존 폰 노이만이 있다. 그는 고등과학원에 있는 동안 세계 최초의 검퓨터를 제조하려 함으로써 고등과학원이 모든 “유용한” 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플렉스너의 설립 취지에 공감하는 사람들을 심란하게 만들었다.
“만일 이성과 상식이 차이를 보인다면,…..,그만큼 잘못된 것은 이성이 아니라 상식이다! 상식이란, 멀리 내다볼 때, 통상적이란 것 외에 무엇이란 말인가?”
불완전성의 정리. 그의 업적은 지난 세기의 가장 근본적이고 엄밀한 소수의 성과들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 함께 이론적 대격변을 초래한 이 세 이론은 “정밀과학”의 기반을 송두리째 뒤흔들었으며, 그 결과 우리는 아주 생소한 세상으로 인도되었다. 여기서 펼쳐지는 상황은 너무나 기이하여 그때까지 지녀왔던 가정과 직관에 들어맞지 않으며 거의 한 세기가 흐른 오늘날에도 우리가 정확히 어떤 땅에 이르렀는지 밝혀내려고 힘겨운 투쟁을 벌이고 있다.
“괴델이 논리학을 수학의 영역으로 옮겨 왔습니다”? 괴델이 등장하기 전에 논리학자들은 철학과에 속하는 게 통례였다.(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최고의 논리학자, 괴델)
“그(괴델)는 수학에 대한 악마이다. 괴델 이후에는 수학이 신의 언어일 뿐 아니라 우리가 우주와 만물을 이해하기 위해 해독해야 할 언어라는 생각는 더 이상 성립할 수 없게 되었다. 이는 우리가 살고 있는 방대한 포스트모던적 불확실성의 일부이다.”
참으로 확실하여 어떤 개정 가능성도 없을 것처럼 보이는 진리들도 본질적으로는 모두 만들어진 것들이다. 실제로 객관적 진리라는 관념 자체도 사회적으로 구축된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의 인식 기능은 진리에 근거해 있지 않다. 오히려 진리라는 관념 자체가 우리의 정신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잘 의식되지는 않지만 정신은 다시 영향력의 유기적 형태에 대한 충복일 따름이다. 이런 점에서 인식론은 권력의 사회학에 지나지 않는다. 괴델 논리의 포스트모던적 버전은 대략 말하자면 이런 식으로 전개된다.
괴델의 정리들은 인간 정신의 한계를 보여 주는 게 아니며, 오히려 인간 정신의 계산적 모델, 곧 모든 사고를 규칙전개로 보는 모델에 내포된 한계를 보여 준다. 그 정리들은 우리를 포스트모던적 불확실성에 빠뜨리는 게 아니라 인간 정신에 대한 특정한 환원적 이론을 배격하는 것이다.
그(아인슈타인) 또한 진정으로 훌륭한 과학은 모두 넓은 철학적 조망을 가진다는 신념을 공유했으며, “인식론 없는 과학은, 정녕 그런 게 있기라도 한다면, 원시적일 뿐 아니라 혼란스런 것이다”라고 말했다.
괴델의 불완전성의 정리,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원리. 우리는 이 이론들 이름 자체로부터 이미 이것들이 견고한 학문들에게 부드러운 인간적 요소를 주입하는 듯한 감질난 암시를 느끼게 된다.
배렛은 제1불완전성정리의 내용이 수학은 결코 완전한 체계로 구성될 수 없다는 것이라고 정확히 기술했다.
“이 문장은 거짓이다.”
거짓말쟁이역설? 이 문장은 참이면서도 거짓이라는 심각한 문제를 낳으며, 이에 따라 우리의 이성은 허물어진다.
#실증주의자들 중의 플라톤주의자
‘왜요 씨’? 어린 시절 괴델의 강력한 호기심은 나이가 들어서도 지속되었고, ‘왜요 씨’라는 꼬마는 “세계는 합리적이다”라는 것으로 시작되는 개인적 신념이 서린 14개의 원리를 품은 어른이 되었다.
러셀의 유명한 역설은 “이 문장은 거짓이다”라는 거짓말쟁이역설과 같이 자기언급적 역설의 일종
#힐베르트와 형식주의자들
괴델의 정리가 지고의 중요성을 가진 것으로 인정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가 진정으로 하고 싶어하는 말을 그것으로부터 제대로 헤아려 내지 못한다는 것은 일종의 아이러니이다. 사람들은 줄곧 빈서클이나 실존주의나 포스트모더니즘 등 20세기에 유행처럼 번진 여러 사조들의 이야기에만 귀를 기울였을 뿐이다. 한마디로 괴델이 말하고자 한 것 이외의 것만 모두 들은 셈이다.
#불완전성의 증명
“언어에 대해 생각하면 할수록 사람들이 과연 정말로 서로 이해하고나 있는지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가장 조용한 혁명? 괴델의 선포에 대한 반응이 이처럼 놀라운 침묵뿐이었다는 사실은, 이제 돌이켜 보면, 토마스 쿤이 그의 유명한 저서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이야기한 ‘무관심’의 고전적 예 가운데 하나로 여겨진다.
폰 노이만이 암시를 붙잡다. 따름정리!(괴델의 제2불완전성정리)
산술체계 안에서 그 공리들의 무모순성을 유한한 형식적 증명으로는 결코 밝혀낼 수 없다..형식주의의 귀결은 완전히 파멸인 셈이다.
증명의 세부 사항들은 어렵지만 다행스럽게도 전반적 전략은 아주 단순하다
불완전성정리의 증명은 완전히 새로운 연구 분야를 이끌어 냈는데, 그 가운데 특히 재귀론이나 모델론이 두드러진다. 하지만 괴델 자신은 이런 분야의 문제들에 대해 결코 특별한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영혼의 동반자인 아인슈타인처럼 괴델도 아인슈타인이 ‘진정한 중요성을 가진 문제’라고 부르는 것들을 추구하는 데에만 관심을 쏟았다.
1961년 옥스퍼드의 철학자 존 루카스는 괴델의 제1불완전성정리와 지성의 본질 사이의 관계에 대한 논증을 처음으로 펴냈다…루카스의 논증은 대담하고 직설적이다.
우리가 아무리 아무리 복잡한 ‘사고기계’를 만든다 하더라도 어차피 이 기계는 형식체계 안에서 기술되는 경직된 규칙을 따라 작동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가 이 기계에게 참 명제가 무엇인지 이야기하라고 하면 그것은 오직 체계의 규칙에 따라 어떤 명제가 도출되는지를 살펴볼 수 있을 뿐이다. 이처럼 규칙에 얽매인 증명가능성이 기계가 아는 진리의 한계이며, 괴델의 정리에 따르면 이것을 벗어나는 명제들이 항상 존재하는데, 우리의 지성은 기계와 달리 이런 진리들도 파악할 수 있다.
옥스퍼드대학교의 수학자 로저 펜로즈는 지성이 컴퓨터는 아니지만 물리적 기계라고 믿었다. 곧 지성이 바로 뇌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괴델의 제1불완전성정리를 통해 간파할 수 있는 비기계적 본질은 우리의 사고를, 예를 들어 양자역학에서 제시되는 것들과 같은, 비기계적 물리법칙 쪽으로 이끌어 간다고 주장한다. 수학적 직관을 낳는 지성은, 기계적으로는 포괄할 수 없음이 밝혀졌지만, 물리적 계의 일종이다.
우리의 모든 수학적 직관을 형식화(또는 기계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우리는 정녕 기계가 아니다. 물론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우리가 알고 있다는 점에 대한 증거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형식화할 수 없기 때문이며, 이것도 불완전성의 한 측면이다.
#괴델의 불완전성
“정수의 산술이라는 가장 기본적이고도 친숙한 수학 분야의 증명법에 대한 그의 혁명적인 분석은 인간의 지성과 그것이 애호하는 공리적 방법론이라는 지적 도구에 관한 우리의 이해를 뿌리째 흔들었다. 모든 중요한 혁명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혁명 또한 옛 방법의 한계는 물론 새 방법의 비옥한 원천성을 밝혀 주었다. 그의 결과가 지나간 자취로부터 새롭고도 풍요로운 분야가 열렸으며, 논리학과 수학과 철학 모두 이를 토대로 가늠할 수 없는 수확을 거두고 있다.”
미국시민권 시험에 대비 철저히 공부했다. 그런데 그는 너무 철저히 공부했던지, 한 가지 말썽의 소지가 있는 발견을 했다고 믿었는데, 이는 미국의 헌법에 내적 모순이 있어서 이 헌법이 옹립하는 민주주의가 오히려 독재정치로 변질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코첸의 표현에 따르면 두 사람(아인슈타인과 괴델) 모두 자신의 강한 율법주의적 성향을 탈속적이고 사실상 거의 초현실적인 능력과 결합하여 자기충족적인 세계를 창조했는데, 그 세계는 언뜻 얼굴을 붉힐 정도로 비논리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가장 근본적 논리와 결합되어 있다.
“두 사람의 업적에는 모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적인 요소가 깔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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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 없는 파도를 따라 덧없이 흘러가는 절대적 현재라는 게 없다는 뜻이 담긴 상대성이론을 이해했기에 다모클레스의 칼 아래서 살아간 아인슈타인은 시간적 관념이 배제된 물리적 실체를 상정하는 자신의 세계상 속에서 평온을 얻었던 것 같다.
동료 물리학자이자 오랜 친구였던 미켈레 베소의 미망인에게 보낸 위로의 편지에서 아인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썼다. “이 기이한 세상을 떠나는 데에 그는 다시 저보다 조금 앞섰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어떤 의미도 없습니다. 우리와 같은 믿음을 가진 물리학자들에게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구별은, 비록 끈질기기는 하지만, 오직 환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괴델은 일반상대성이론에 나오는 아인슈타인의 장방정식을 만족하는 매우 독창적인 해를 얻었는데, 이는 그가 이룩한 어떤 것들보다 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적’인 것이었다.
괴델의 모델에서 시간은 순환적이다. 모든 사건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구별에 상관없이 펼쳐질 뿐 아니라 무한 반복패턴으로 나타나고, 상대성이론에서 암시된 시간과 공간 사이의 대응 구조는 더욱 뚜렷이 드러난다…또한 이에 아인슈타인은 과거로의 여행을 허용하는 시간성폐곡선(closed timelike curve)의 가능성 때문에 당황했다고 썼다.
나중에 알고 보니 괴델은 증거를 얻기 위한 준비작업으로 스스로 엄청난 『허블 은하 도감』을 섭렵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수학자 중의 수학자로 알려진 그가 자와 각도기를 들고 나서서, 얻어진 수들의 통계처리를 하고, 통계적 오차범위안에서 우주의 회전에 대한 어떤 증거도 찾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괴델이 평생 갈구했던 초월적 경험? 괴델은 또한 세상을 새로운 빛으로 비춰 볼 통찰을 고대했지만 끝내 얻지 못했다. 나와의 대화에서 그는 플라톤이나 데카르트나 후설은 모두 그런 경험을 해 봤다고 되풀이해 이야기했다.
그는 철학을 목표로 살았으며, 철학의 빛으로 자신의 생애를 판단했는데, 결론은 불완전하다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선험적 증명으로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믿게 된 그는 자신의 마음을 바꿀 통찰을 갈망했다. 하지만 자신의 불완전함에 대한 깨달음…때문에 그는 순환적 시간이 상징하는 영원한 삶의 모델을 불러들이게 되었으며, 이 모델을 통해 개인적 죽음의 현실성을 허물어 버리고자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