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름은 왜 죄가 되었나. 이옥순. p232
부지런함이 숨긴 게으름의 역사
근면이 근대 산업사회의 기반이 된 이래 게으름을 경고하고 열심히 살라고 일러주는 책은 이미 많이 나왔습니다.
게으름을 찬양하는 책도 아주 많습니다
『게으름에 대한 찬양』 , 러셀
『오래 살려면 게으름을 즐겨라』 , ‘느림의 철학자’ 피에르 쌍소
게으름에 대한 학문적 연구? 이 책에서는 게으름에 관한 환상과 실재를 시공간적, 즉 역사적 · 문화적으로 살펴봅니다.
이 책이 게으름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어떻게 권력과 연계되는지를 추적하면서 게으름을 자책하는 사람들에게 약간의 해방감을 주길 희망합니다. 게으름이 ‘나쁘다’는 건 만들어진 개념이니까요.
산업사회에선 노동이 중요해지면서 게으름도 중요해졌습니다.
일하는 걸 좋아하지 않아도 일을 잘하는 사람은 게으르다고 여겨지지 않지만, 일하는 걸 아무리 좋아해도 일하지 않으면 게으르다고 간주됐습니다. 이건 일종의 거짓 의식입니다.
게으름에 죄책감을 갖는 이유는 어려서부터 게으름이 나쁘다는 말을 자주 들으며 자랐기 때문입니다.
일하는 즐거움이 있다면 노는 즐거움도 있어야 마땅합니다.
“사람들은 휴식을 부끄러워하고 긴 시간을 들여 사색하는 걸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점심을 먹을 때도 손목시계를 들여다보고, 주식시장의 최신 뉴스를 읽으며 뭔가 대단한 것을 놓칠까 봐 늘 조바심을 내지요.” 오늘날도 100퍼센트 유효한 19세기 니체의 이야기
게으름을 문화적으로 억압하는 이유? 힘의 논리가 들어 있습니다. 게으름이 사회질서와 권력을 유지하는 데 악영향을 주기 때문이랍니다.
게으름이 폄하되고 근면이 장려된 것은 근면이 힘이나 권력과 깊이 연계되기 때문이었습니다…하층민에게 일하지 않으면. 게으르다고 가르친 건 그들의 노동력을 이용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게으름이 야만과 후진성으로 상징되면서 근면하고 역동적인 서구 제국주의자들은 게으른 동양에 대한 침투와 정복을 정당화했습니다.(더운 열대지방에서는 느리게 움직이는 게 더 효율적)
약자에게 게으르다는 편견을 갖는 쪽은 늘 강자입니다…힘이 지배하는 건 정글만이 아닙니다.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 정보화시대 정보의 홍수,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모든 조직은 생각하는 사람보다 행동하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게으른 사람은 생각을 많이 하고, 생각하는 사람은 기존 제도에 거부감과 불평불만을 갖는다는 것이 조직 위쪽의 판단이지요.
게으름을 가난과 연계하는 것도 강자의 전략입니다…그렇게 함으로써 약자의 가난이나 고단한 삶은 개인의 잘못인 게으름으로 고정됩니다. 사회적 약자의 가난과 고통은 지배자의 책임이나 의무와 무관해지고, 지배자들의 심리적 부담은 한껏 줄어들지요.
강자가 게임의 법칙을 규정하는 정글의 법칙은 눈에 보이지 않는 인식 영역에서도 작동합니다…게으르다는 소리를 듣는 사람은 언제나 사회적 약자입니다.
게으름은 상대적입니다.
게으름은 절대적 가치가 아닙니다. 빈곤한 사람에게는 부지런함이 강조되지만, 돈과 지위가 높은데도 여유 없이 돈과 명성을 얻으려고 바쁘게 돌아치는 사람이 존경을 받지는 않습니다.
개미와 베짱이의 우화는 아이들에게 사회구성원으로 필요한 가치와 지침을 가르치는 좋은 수단입니다. 그 결과로 충분히 자야 할 아이들이 잠이 부족해지는 해악이 생겼습니다.
낮잠을 자면 오히려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처칠의 말처럼 더 일하기 위해 게으를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에는 게을러서 건강하게 오래 사는 동물이 많습니다. 악어와 거북이가 그렇습니다.
게으름을 부추기는 책? 남에게 휘둘리지 않고 자기운명을 스스로 능동적으로 이끌어가는 길을 생각해보려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이 책은 남이 아니라 자기가 일하고 노는 시간을 조절해 지금보다 시간과 마음을 보다 여유롭게 쓰자고 제안합니다.
오늘날의 각박한 세상에는 일벌레보다 인간이 많아야 합니다.
#서양의 게으름
게으름은 하늘의 선물
『구약성경』의 ‘집회서’도 “학자가 지혜를 쌓으려면 여가를 가져야 한다. 사람은 하는 일이 적어야 현명해진다.”라고 전합니다. “저꽃들이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라. 저들은 수고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결코 이 꽃만큼 화려하게 차려입진 못했다.” 예수의 ‘산상수훈’에도 수고하고 길쌈하지 않는 게으름을 칭찬하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시인들이 게으름을 찬양한 것을 보면 고대 그리스인들은 일을 싫어한 모양입니다.
그리스의 철학자들도 노동을 경멸했습니다. 노동이 자유인을 타락시킨다고 가르쳤지요. (학문의 어원? schole한가함, 여유!)
“진정 자유로운 사람이란 언젠가 한번쯤은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고 빈둥거릴 수 있는 사람이다”고 주장한 사람은 로마의 키케로였습니다. 로마공화정 시대의 정치가이자 웅변가인 키케로는 『의무론』에서 “자신의 수고와 근면을 팔아넘기는 형태는 천박하고 혐오스러운 짓이다. 돈 때문에 자신의 수고를 제공하는 것은 자신을 파는 것이며 노예로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게으름뱅이로 불리는 동물은 영어로 나태sloth와 같은 이름을 가진 나무늘보입니다. 그는 부지런한 동물이지만 오명을 가지게 됐습니다.
산업혁명 이후 자본을 갖고 공장을 세운 공장주와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임금노동자가 생겨났습니다. 노동을 제공하고 임금을 받는 소위 직업은 소수의 지배계급이 자신을 위해 고안해냈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증기기관이 나오기 이전의 영국에서는 근면이 지상제일의 덕목은 아니었습니다.
기술문명이 인간을 고된 노동에서 해발시킬 것이라고 기대한 사람도 있었으나 상황은 다른 방향으로 흘렀습니다.
나쁜 노동조건과 과로로 병에 걸리거나 죽는 노동자도 많아졌습니다. 1840년 영국의 리버풀 지역에 거주한 노동자들의 평균수명은 겨우 15세였습니다!
“시간은 금” 시간을 아껴 쓰고 근면하라고 강조한 프랭클린? 사람은 기계가 아니건만 녹이 슬게 하는 나태와 태만을 모든 실패의 시작이라고 여긴 그는 게으름만큼 해롭고 치명적인 습관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그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돈을 낭비하는 것이었지요.
미국의 문화제국주의적 영향이 전 세계로 확대되면서 죽도록 일하지 않는 사람을 게으름뱅이라고 낙인찍는 분위기가 세상을 지배하게 됐습니다. 독일의 니체가 바쁘게 움직이는 것을 신대륙의 끔찍한 본질이라고 한 것은 이런 상황이었습니다. 그 분주함이 유행처럼 퍼지고 “숨 돌릴 틈도 없이 성급하게 일하는 미국인들의 문화가 유럽까지 감염시키기 시작했다”고 개탄했습니다.
게으를 수 있는 권리
땅과 하인들을 많이 가진 귀족들은 개미처럼 일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일하지 않은 그들이 하인이나 농민들에게 게으르다고 말했지요. 게을러서 가난하다고 말하는 것도 힘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게으름은 가진 자의 특징이었습니다.
지배층의 입장으로 보면, 농민과 노동자가 가난한 근본적인 원인이 게으름과 무절제한 생활습관이라고 말하는 것이 의무를 덜어줍니다.
영국의 산업혁명으로 힘을 가지게 된 자본자들, 곧 부르주아들은 임금노동자들이 노동을 강요당하는 걸 깨닫지 못하도록 교묘하게 근면성을 강조했습니다.
“게으름이란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지배 계급의 편협한 테두리 안에서 인정받지 못할 뿐이지 오히려 더 많은 일을 한다.”- 보물섬 작가,영국의 소설가 스티븐슨
“노예는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한다. 주인은 다른 사람의 노동으로 살아간다. 노예는 오늘날 임금을 받는 노동자들이다. 노예와 임금노동자의 차이는 후자가 그만둘 수 있다는 점이다. 더 명예롭고 덜 가혹하지만, 임금노동자는 노예와 같다.”-러시아의 무정부주의자 미하일 바쿠닌
그들은 근면과 절제가 하층의 삶이 개선되도록 보장하지도 않았습니다.
자본주의가 발달하고 산업혁명이 일어나자 천한 사람들의 활동이던 노동이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됐습니다. 그러면서 열심히 일하지 않은 사람은 나쁜 사람이 됐지요. 게으름뱅이나 쓸모없는 사람은 문제를 가졌다고 비판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근면이란 영어 단어 ‘Industry’는 산업을 의미합니다.
권력이나 금력을 가진 계층은 아래로부터의 반란을 두려워합니다. 생각하는 자는 일반적으로 반동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집니다. 게으른 자는 생각하고 비판할 시간이 많고, 그래서 위험하다고 간주됐지요. 프로테스탄트들은 사람들이 깊이 생각을 하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사람들이 게으르지 않도록, 불온한 생각을 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일하게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그들이 강조하는 노동의 윤리였습니다.
힘의 논리는 오래갑니다. “근면은 행운의 어머니”라는 금언은 생명력이 아주 길지요…노동력이 필요한 계층이 낮은 계층 사람들을 세뇌시키는 말이었습니다.
가난뱅이=게으름뱅이라는 등식은 가진 자들에게 효과적인 구호가 됐습니다. 가난이 개인적인 게으름에서 기인한다 여기고, 한 사회의 낙후성도 그 구성원의 나태와 천성적인 게으름이 주범으로 간주되면서 위의 책임은 없어지니까요.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산업혁명 이전에는 노동자들이 과로를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각자가 필요한 만큼 일하면 됐지요…산업혁명 이후 임금을 받는 노동자는 모두 열심히 일하는 것으로 표준화됩니다. (더 일하는 것은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생겨났다)
유한한 세상에서 무한 노동을 강조하는 것은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의 본성은 노동을 싫어합니다.
잠자는 것을 시간의 낭비로 여긴 근대의 대표적인 인물은 미국의 토마스 에디슨일 겁니다. 로마제국이 멸망한 원인이 게으름이었다는 책을 읽은 에디슨은 평생 근면하겠다고 다집했다고 합니다.
에디슨의 백열전구 발명? 그 덕분에 공장의 기계는 낮이나 밤이나 돌아갔고, 노동자들은 밤에도 교대로 근무하면서 더욱 더 노동에 매이게 됐습니다.
에디슨이 왔다 간 뒤로 인간의 생존에 필요한 정상적인 수명시간은 게으름이란 낙인을 받고 크게 줄었습니다.
대표적인 잠꾸러기 동물? ‘동물의 왕’ 사자입니다. 하루 24시간 중 20~21시간을 쉬거나 잔다고 알려진 사자는 진정한 ‘잠의 왕’입니다. 사자가 번재처럼 달릴 수 있는 거리는 100미터 정도입니다. 그 짧은 거리를 질주해 정글의 모든 동물을 떨게 만드는 거죠.
필요한 만큼 사냥하고 남은 시간에는 에너지를 아끼며 휴식을 취하는 사자를 게으르다고 할 순 없겠지요. 그러나 “일하는 개가 게으름 피우는 사자보다 낫다”는 근대 서양의 구호였습니다.
압셍트와 홍차
자본자들은 노동자들이 기계처럼 일하기를 바랐지만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었습니다. 노동자는 덜 기계적이고 더 인간적이길 바랐으니 양측의 갈등은 필연적이었지요.
과로의 부담을 술로 해결하는 노동자. 돈을 주고 일을 시키는 고용주 입장에선 음주를 좋게 볼 수가 없었습니다? 금주 대신 ‘각성작용’ 홍차 권장(티타임까지). 음주는 산업화의 걸림돌로 여겨졌습니다.
산업화과정의 고통스러운 노동? 독한 술로 사막과 같은 근대의 삶을 이기려 한 것이지요.
금주에는 정치적 의도도 섞였습니다? 영국의 술집이 부당한 노동조건에 불만을 가진 노동자들의 주요 모임장소로.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금주운동엔 노동자들의 음주를 막아서 술 취한 노동자들이 야기할지도 모를 위험을 미리 막으려는 의도가 포함됐습니다. 음주의 결과는 일을 못하는 게으름이었습니다.
홍차의 인기는 산업자본가들이 술을 대신하는 음료로 홍차를 장려한 덕분에 생겨났습니다…설탕이 제공하는 칼로리와 카페인이 주는 각성작용이 노동자의 생상효율을 높이기 때문입니다.
근면을 지탱하고 게으름을 억제하는 데 큰 공을 세운 것이 바로 오늘날 많은 이들이 좋아하는 커피였습니다
#동양의 여유
게으름과 여유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강조하는 한가로운 비서구 세계는 일을 끝난 뒤에 쉬거나 휴가를 갖는 서구와 달리 일상에서 일과 휴식의 구분이 분명하지 않았습니다…그렇다고 그것이 서구보다 열등함을 의미하는 건 아니었지요. 다만 문화가 다를 뿐이었습니다.
삶의 여백이 부족한 세상에서 여유나 게으름이 생겨나긴 어렵습니다. 물욕이 적어야 느리게 게으름뱅이로 살 수 있는 것이고요.
『모모 』 로 유명한 미하엘 엔데의
[엔데의 메모] 인디오 원주민 짐꾼 이야기? “너무 빨리 걸었기 때문에 영혼이 우리를 따라올 때까지 기다린 겁니다.”
악착같이 돈을 추구하는 삶에서 벗어난 상태, 생산적인 의무가 없는 상태가 게으름이었습니다.
서양과 비서구 세계의 상이한 시간개념이 게으름을 다르게 인식하도록 이끌었습니다? 먼저 윤회와 환생을 믿으며 시간을 넉넉하게 사용하는 힌두인들의 시간개념을 봅시다.
인도인에게 시간은 직석적인 흐름이 아닙니다. 전생에 일어난 일은 반복되고 다시 돌아오며, 시간은 시작도 끄도 없는 순환고리와 같다고 여기지요.
인도 못지않은 역사와 영토를 가진 중국의 시간개념도 광대무변합니다.
곳간에서 인심이 나오듯이 시간을 많이 가진 자가 여유로운 겁니다.
열대지방에 사는 인도인이 활동량이 적고 시간에 관대한 세계관을 가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나쁜 천성으로 돌리는 건 과도한 일반화입니다.
종교와 게으름
『생각의 지도』 리처드 니스벳. 그는 ‘옳고 그름’의 구조인 서양의 종교와 달리 순환과 윤회사상인 특징인 동양의 종교가 ‘둘’이나 ‘함께’를 지향한다고 파악했습니다. 그래서 종교전쟁이 거의 없지만 서양에서는 종교전쟁이 격렬하게 진행됐다고요.
게으름이 어떻다는 것인가? 그냥 가만히 앉아서 먼 곳의 소리가 점점 가까이 오는 것을 듣는 것이 무슨 잘못이란 말인가? 아침에 잠자리에서 가까운 나무 위의 새들을 보거나 다른 잎은 그냥 있는데 아뭇잎 하나가 바람에 춤을 추며 떨어지는 것을 보는 것이 어떻다는 것인가? 잘못한 것이 무엇인가? 게으른 것을 잘못이라고 생각하기에 우리가 게으름을 탓하는 것이다….진짜 무지는 자신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 것, 당신의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당신의 동기, 당신의 반응이 무엇인지 느끼지 못하고 마음이 잠들어 있을 때 그것이 게으름이다.-[게으름이 어떻다는 것인가?],크리슈나무르티
사람은 자신이 정말로 게으른지 아닌지 잘 살펴야 한다…그러나 살피는 사람은 가끔씩 조용히 앉아서 나무와 새, 사람과 별, 조용한 강물을 바라보아도 게으른 것이 아니다.
낮잠Siesta은 열대의 더운 나라에서는 필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베리아의 요가?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한때 낮잠을 공식적인 근무시간에 포함했습니다.
게으름이 사상
게으름은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입니다. 그것은 슬기로움이나 너그러움의 한 형태죠. 이러한 삶의 방식은 한가로이 거닐기, 남의 말 들어주기, 꿈꾸기나 글쓰기처럼 사람들이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버려진 순간에 들어 있습니다. 게으름은 어디 아픈 것처럼 꼼짝도 하기 싫어하는 증세가 아니라 천천히, 느리게 있는 그대로 삶을 누리려는 몸가짐이자 마음가짐입니다.-느림의 철학자, 쌍소(무가 아닌 무위의 철학)
“과욕보다 더 큰 죄악은 없다. 탐욕보다 더 큰 결점은 없다.”-노자
“현자는 분주하지 않다. 분주한 자는 현자가 될 수 없다.”-임어당
“효율성을 추구하고, 시간을 정확히 지키며, 성공하기를 희망하는” 것이 미국인의 세 가지 악습이라고 지적한 임어당은 중국인의 게으름을 깊고 오랜 습관이라며 좋게 생각했습니다.
‘탈아입구脫亞入歐’를 외치며 ‘아시아에 있는 서양’을 자처하며 산업화를 추구한 일본? 근원이 무엇이든 근면함은 일본인이 자랑하는 최고의 덕목입니다.
선비가 게으름뱅이는 아니었습니다? 선비들의 가난은 게을러서가 아니라 비세속적인 생활과 가난을 가치로 여기는 자발적 선택이었습니다.
#식민주의와 게으름
『오리엔탈리즘』으로 유명한 에드워드 사이드의 말을 빌리면, 약자인 동양은 말할 수 있는 힘 센 서양을 돋보이게 하는 존재였습니다. 동양이 열등하면 서양은 우수하고 동양이 후진적이고 비합리적이면 서양은 진보적이고 합리적으로 여겨지지요. 따라서 열등한 동양의 이미지는 서양의 우월하다는 정체성을 완성해주고 확인해줍니다.
서구인들은 아프리카, 아랍, 동남아, 남미의 시간개념이 자기들의 것과 다르다는 걸 인정하지 않았습니다..나태한 동양, 게으른 원주민이라는 신화는 식민이념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투사投射? 피지배자를 나쁘게 생각함으로써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자신이 나쁘게 생각되는 것을 피하는 것. 에드워드 사이드는 투사를 “유럽인의 마음속 깊은 속에 반복되어 나타나는 타자의 이미지”라고 했습니다. 투사는 힘 센 서양이 힘없는 동양을 인식하고 권력을 행사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나태와 게으름은 단순히 사람의 형태를 이르는 단어가 아니라 정치적 의미를 품었습니다. 게으름은 실재하기보다 게으름에 대한 혐오감이 상상의 영역에 전이된 겁니다.
느리고 빠른 것은 상대적인 개념입니다.
문명개화를 내세웠으나 식민주의는 본질적으로 경제적 이득이 최우선이었습니다. 식민체제에선 생각하는 원주민이 아니라 일하는 원주민이 필요했고, 그래서 열심히 일하지 않는 원주민은 도덕적으로 알이라고 판단했지요.
게으른 원주민? 문명개화를 식민통치의 가치로 내세운 식민지배는 원주민을 개화할 필요로 게으름을 이용했습니다.
유럽인들이 비서구 세계를 묘사한 비효율적, 게으름, 비협조적이란 수식어는 미개인이나 야만인처럼 문명인이 위에서 내려다보고 깔보는 의미를 내포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보는 자가 권력을 가지고 그가 기준이라고 말했습니다.
열대지방의 더운 기후가 삶의 속도를 느리게 만든다.
게으름은 절대적인 개념이 아니라 상대적입니다
조신일보에 실린 몽골이야기? “그들은 일에 매여 노예처럼 살지 않았다…이분들, 돈 안 벌어요. 돈 벌 필요 없어요…”
세상에는 강자만 모르는 진실이 많습니다? 하인들에게 둘러싸여 아무것도 안 하는 인도 동인도회사의 영국인들. 오히려 피지배자들로부터 게으르다고 비난받는 걸 몰랐으니까요. 게으른 건 원주민이 아니라 백인들이었던 겁니다.
당시 조선에서도 노동자를 근로자라고 불렀습니다. 열심히 일하는 노동자라는 의미를 가진 근로자라는 명칭은 큰 저항감이 없이 받아들여졌습니다. 게으름이 큰 비판을 받는 분위기에서는 무력함도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조선의 농민이 빈곤한 원인도 나태함에서 나온다고 선전했습니다…그러나 소수를 속이거나 다수를 잠시 속일 수 있지만 모든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순 없었습니다. 1924년 11월 11일자 동아일보는 빈곤의 책임이 농민의 게으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일본인과 총독정치에 있다고 맞받았습니다.(식민지 착취란 구조적 원인)
“근면하라, 나태는 우리 민족의 결점이다” “모든 일에 근면하라” 훈시하는 학교장? 이런 인식에는 지배자 일본의 성공이 근면에 있다는 전제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나태와 게으름을 물리치고 산업화를 일군 우리의 시선이 강자를 닮아가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우둔하고 활기가 없으며 무식하고 선척적으로 게으른 민족이라는 평가를 받은 한국이 세상에서 일을 가장 많이 하고 가장 빠르게 움직이는 나라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그 모든 것이 20세기 후반의 아주 짧은 기간에 일어났습니다. 그 과정에는 과거 지배자인 일본에게 보내는 ‘우리도 할 수 있다’는 메시지와 그들을 이기고 싶은 안간힘이 배어 있습니다. 더구나 발전의 모델이 일본이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지 않습니까?
#소비주의와 게으름
소비를 자극하는 광고? 기업이나 광고주들이 사람들에게 근면을 장려하는 셈입니다.
광고 속 세상은 게으름뱅이는 절대 살 수 없는 환상적인 세계입니다…그곳에 가는 길은 열심히 일하고 돈을 버는 것입니다. 게으름은 그 기회를 막는 나쁜 습관이고요.
그런데 한 달이 지나면 광고는 다시 더 좋고 기능이 더 뛰어난 새로운 상품이 나왔다고 알려줍니다. 다람쥐가 쳇바퀴를 돌리듯이 바쁘고 분주한 일상이 반복됩니다.
노동자는 언제는 소비자가 될 수 있으나 다시 일을 해야 소비를 보장받습니다. 게으름이 낄 자리가 없지요.
오늘날 게으르면 안 된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은 광고주입니다. 한때 힘을 가졌던 귀족들이 아랫사람에게 일을 시켰고, 근대의 산업자본가들이 노동자에게 게으리지 말라고 강조했다면 이제 매혹적인 상품을 파는 글로벌 기업들이 근면을 강조하고 강제합니다. 그들이 만든 광고는 돈이 있어야 행복하다는 환상을 심어줍니다. 게으름을 누리면서 그걸 가질 순 없지요. 돈을 벌기 위해 대중의 약점과 두려움을 이용하는 그들에게 길들여진 소비자들은 힘들여 일하고 소비합니다.
기독교의 십계에서 탐욕은 맨 마지막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만족을 모르기 때문에 탐욕도 끝이 없습니다. 끝이 올 때까지 끝이 없다는 점에서 탐욕은 무섭습니다. 근면을 강조하고 게으름을 억압하는 사회적 분위기는 탐욕과고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게으를 수 없는 것은 욕심이 있어섭니다.
“그게 바로 문제야. 우리는 모두 길들여졌거든.”
일은 우리의 종교
근면은 종교가 됐습니다.
오늘날 중요한 것은 돈이고 돈이며, 그저 돈입니다.
게으름이 사회적으로 무능한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일하는 기쁨이 없어도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해야 합니다. 오늘날에는 일하지 않는 사람이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니까요. “나는 일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된 셈이지요.
느림은 게으름의 짝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를 펴낸 농부 전우익 선생은 현대인이 “죽도록 일하고, 죽도록 먹고, 죽도록 버리는 삶”을 살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우리는 죽도록 일하는 사람을 일벌레라고 부릅니다.
안녕하세요. 이곳에 들른지는 꽤 되었는데 처음 댓글을 남기네요. 항상 제가 관심 가지고 있는 분야의 좋은 책들을 소개해 주시는 덕에 ‘읽고 싶은 책 목록’이 점점 늘어갑니다. 고맙습니다.^^
독서의 즐거움도 나눌수록 더 늘어가겠죠…^^
안녕하세요.
저는 지성의 전당 블로그와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데,
크리슈나무르티에 대한 글이 있어서 댓글을 남겨 보았습니다.
인문학 도서인데,
저자 진경님의 ‘불멸의 자각’ 책을 추천해 드리려고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와 죽음에 대한 책 중에서 가장 잘 나와 있습니다.
아래는 책 내용 중 일부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제 블로그에 더 많은 내용이 있으니 참고 부탁드립니다.
—
인식할 수가 있는 ‘태어난 존재’에 대한 구성요소에는, 물질 육체와 그 육체를 생동감 있게 유지시키는 생명력과 이를 도구화해서 감각하고 지각하는, 의식과 정신으로 나눠 볼 수가 있을 겁니다.
‘태어난 존재’ 즉 물질 육체는 어느 시점에 이르러 역할을 다한 도구처럼 분해되고 소멸되어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육체를 유지시키던 생명력은 마치 외부 대기에 섞이듯이 근본 생명에 합일 과정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육체와의 동일시와 비동일시 사이의 연결고리인 ‘의식’ 또한 소멸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추후에 보충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이러한 총체적 단절작용을 ‘죽음’으로 정의를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감각하고 지각하는 존재의 일부로서, 물질적인 부분은 결단코 동일한 육체로 환생할 수가 없으며,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의식’ 또한 동일한 의식으로 환생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정신은 모든 물질을 이루는 근간이자 전제조건으로서, 물질로서의 근본적 정체성, 즉 나타나고 사라짐의 작용에 의한 영향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타날 수도 없고, 사라질 수도 없으며, 태어날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는 불멸성으로서, 모든 환생의 영역 너머에 있으므로 어떠한 환생의 영향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신에 대한 부정할 수가 없는 사실이자 실체로서, ‘있는 그대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본체에 의한 작용과정으로써 모든 창조와 소멸이 일어나는데, 누가 태어나고 누가 죽는다는 것입니까? 누가 동일한 의식으로 환생을 하고 누가 동일한 의식으로 윤회를 합니까?
정신은 물질을 이루는 근간으로서의 의식조차 너머의 ‘본체’라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윤회의 영역 내에 있는 원인과 결과, 카르마, 운명이라는 개념 즉 모든 작용을 ‘본체’로부터 발현되고 비추어진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자신을 태어난 ‘한 사람’, 즉 육신과의 동일성으로 비추어진 ‘지금의 나’로 여기며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착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한 사람’은 스스로 자율의지를 갖고서,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행동한다고 믿고 있지만 태어나고 늙어지고 병들어지고 고통 받고 죽어지는, 모든 일련의 과정을 들여다보면 어느 것 하나 스스로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책임을 외면하기 위해 카르마라는 거짓된 원인과 결과를 받아들이며, 더 나아가 거짓된 환생을 받아들이며, 이 과정에서 도출되는 거짓된 속박, 즉 번뇌와 구속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환영 속의 해탈을 꿈꾸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저는 ‘나는 누구이며 무엇이다’라는 거짓된 자기견해 속의 환생과 윤회는, 꿈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습니다. 더불어서 ‘누구이며 무엇이다’라는 정의를 내리려면 반드시 비교 대상이 남아 있어야 하며, 대상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는 그 어떠한 자율성을 가졌다 할지라도, ‘그’는 꿈속의 꿈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뚜렷하고 명백하다 할지라도 ‘나뉨과 분리’는 실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는 ‘나’에 대한 그릇되고 거짓된 견해만을 바로잡았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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