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환시대의 논리. 리영희. p438
-아시아·중국·한국
#강요된 권위와 언론자유
임금에게 있지도 않은 옷을 입혀놓고 아름답다고 한 임금 측근자들의 이해관계는 어디를 향해 있던 것일까. 임금이란 으례 아첨배에 속게 마련일 것일까. 그리고 옷을 걸치지 않고서도 입었다고 우기는 ‘통치자의 진리와 권위’는 임금의 것인가 측근 아첨배의 것일까. 이와같은 ‘허구와 허위’는 통치자들의 속성이어야 하는가. 허위가 진리의 가면을 쓰고 나타날 수 있는 그 사회의 제도와 풍토는 어떤 것일까.
그 많은 백성들 가운데 임금의 알몸뚱이를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도 많았을 텐데 왜 모두들 입을 다물고 사실을 말하지 않았을까. 또는 못했을까.
인간해방과 사상의 자유의 역사는 어차피 독선에 대해 회의가, 권위에 대해 이성이 승리를 거두는 긴 투쟁의 되풀이임에 틀림없다. 우화도 그렇고 현실도 그렇고 역사는 한 단계의 투쟁이 끝나면 으례 ‘임금은 알몸이다’라고 폭로한 소년의 용기에 열중한 나머지 힘없는 소년에게 그런 엄청난 임무를 떠맡기게 된 그 사회의 실태에 대해서는 눈이 미치질 않는다. 문제시해야 할 중요한 것은 그 영광(또는 해결)까지의 과정에 얼마나 많은 인간적 타락과 사회적 암흑과 지적 후퇴가 강요되었느냐 하는 사실을 인식하는 일이겠다.
‘문제는 법적 구조보다도 정치의 내면정신에 있다’
월남전쟁 비밀문서를 에워싸고 일어난 미국 내의 사태는 법적 구조의 굳건함과 아울러 정치의 내적 정신의 건전함도 입증했다고 할 수 있다. 하나의 국가나 국민의 생활원리가 되어주는 일반적 정치의 내적 정신이 건전하지 못할 때 법적 구조의 건전이란 기대하기 어렵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 어리고 힘없는 소년이 나타나서 진실을 지적할 때까지의 오랜 시간에 걸쳐서 이루어진 그 왕국의 사회적 침체와 그 신민(臣民)들의 도덕적 타락에 관해서는 언급되지 않고 있다.
국록을 먹는 선비나 학자들도 많았을 터인데 그들은 왜 임금이 소수의 무리들에 의해서 농락되고 있다는 것을 몰랐는가 하는 문제도 그렇다. 모든 어른들은 임금이 분명히 옷을 입고 있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그들이 입을 열지 못하게끔 했던 그 왕국의 제도는 어떠했고 누가 그렇게 만들었는가 하는 문제를 구명하는 데서 우리는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다.
『뉴욕타임즈』 사건과 ‘월남전쟁에 관한 미국정부의 비밀문서’? 국가권력이 이성을 상실해가는 이 긴 과정을 뉴렌베르크의 전범재판 기록 이상으로 상세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이 문서는 역사적 가치가 있다.
이 비밀문서는 한 국가의 지도자와 국민이 방향감각을 상실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며,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지식인들이 어떻게 해서 그 책임을 포기하게 되는가는 여실히 밝혀주었다.
알고 있으면서도 말도 발표도 못하고 있던 언론이나 지식인들…지식인과 언론의 소임에 이처럼 모독적인 유형은 없다.
우리의 언론과 지식인은 한마디로 반공(反共) 이외의 따 가치나 진실을 말하지 못했다. 그 지식과 사상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에는 가치가 없다…운명을 같이할 수밖에 없는 한 사회의 대중이 오도된 사고방식이나 정세판단을 하고 있을 때 그것을 깨우쳐야 하는 것은 언론과 지식인의 최고의 책임이자 의무이다.
관리가 된 지성인
월남전쟁 비밀문서는 마치 드라마의 대사를 읽는 느낌을 준다. 첫 중에서 마지막 페이지까지 국가정책 수립과정에 참여한 행정부 관료기구 속의 지성인들이 월남전쟁이라는 비극 속에서 제각기의 성격배우의 파트를 연출한다…형식에 있어서 어떻든 본질적으로 비민주적이고 소수이익의 위탁자 역할을 하거나 부패한 정권을 돕는 지식인은 반지성적이고 따라서 반국민(민중)적일 수밖에 없다.
“권력자란 자기의 부정과 과오를 은폐할 수만 있다면 그 목적을 위해서는 언제는 국민의 자유를 부정하려 한다. 그리고 권력자에 의한 이 자유의 부정이 성공할 때마다 다음번 자유를 부정하는 것은 그만큼 쉬워진다.”-헤롤드 라스카,『현대국가에서의 자유』
국가안보라는 이름으로 집권세력이 내세우는 국가이성은 처음부터 이성적 토의를 그 분야에서 배제해버리려는 원리이다. 바로 이처럼 간단한 이유에서 그것은 자유와 어울릴 수 없다. 국가이성은 진리도 정의도 전제하지 않으며 오직 항복을 요구한다.-헤롤드 라스카,『현대국가에서의 자유』
메카시즘의 결과
미국의 병은 정신과 영혼의 병이다
냉전용어의 반지성성
그와같은 인식이 섰을 때 제1차적으로 시도해야 할 지식인의 과업은 우리의 생활 속에서 냉전용어를 정리·청소하는 문제이겠다.
옛날 공자는 어떤 제자로부터 그가 만약 제왕이 된다면 제일 먼저 무엇을 하겠는가라는 질문을 받았다. 공자는 서슴지 않고 ‘바른 말을 쓰도록 백성을 가르치겠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른바 정명론(正名論)이다. 이것은 지극히 옳은 견해라고 생각된다.
여기서 말하는 ‘바른 말’이란 요새 우리 사회에서 말하는 ‘예의바른 말’의 뜻은 아니다. 그것이 아니라 ‘관념(생각)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언어’라고 풀이함이 나을 것이다. 인식은 관념을, 관념은 개념을, 그리고 그 개념을 담은 용어가 커뮤니케이션의 형태로 상대방에게 관념표상의 작용을 일으켜 다시 그 과정을 반복한다. 이 과정에서 어떤 사상을 표현·전달하려는 용어가 그 사상의 내용이나 성격의 정확한 반영이 아닐 때에는 전달된 뜻이 더욱 왜곡·변형되거나 혼란이 생기게 마련이다. 일그러진 유리를 통해 보는 사상은 일그러질 것이고 그것으로 형성된 개념은 일그러질 수밖에 없다.
공자의 말은 오늘날 진실과 지성과 이성을 회복해야 할 우리 사회에서 가장 절실한 문제이겠다.
“오늘날 교육(직접·간접)이라는 것은 문자를 통해서 기만당하는 것을 가르치는 기술이라고 정의해도 결코 부당한 말은 아니다. 이와같은 기만으로써 이익을 얻는 사람들은 현재로는 사회의 지배자들이다”라고 갈파한 서양의 유명한 석학의 말은 귀담아 들을 가치가 있다. 자유의 나라 서구에서도 그렇다. 하물며….『문학과 지성 1971년 가을호』
#중국 외교의 이론과 실제
우리 사회의 여러가지 사정으로 해서 중공문제를 논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기초적인 것은 용어의 문제이다…중공(中共)이라는 표현과 중화(中華)인민공화국이라는 개념은 아주 다르다.『政經硏究 1971년 1월호』
#조건반사의 토끼
우리들의 인식론적 기능은 냉전 사상과 체제 속에서 조건반사의 토끼가 되어버린 감이 있다. 예로 ‘중공’이라는 용어는 즉각적으로 ‘기아’ ‘괴뢰’ ‘피골상접’ ‘야만’ ‘무과학’ ‘반란’ ‘정권타도’ ‘침략’ ‘호전’…등 냉전용어와 그것이 담고 있는 그와같은 관념을 우리에게 일으켜왔다. 우리는 강요된 조건반사의 토끼가 되어 있다. 예로 든 중공이 그런지 안 그런지는 알 길이 없다. 레스톤이라는 사람이 권위있고 양심적인 기자이며 세계 최대의 권위지인 『뉴욕타임즈』의 부사장이라 하더라도 “그 친구는 빨갱이야” 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한반도 1971년 9월호』
#텔레비전의 편견과 반지성
글을 전혀 모르시는 노모가 소일거리가 없어 늘 갑갑해 하시기에 자그마한 효도라고 생각하여 푼푼이 모은 원고료와 촉탁료 로 들여다 놓은 텔레비전…그러나 나에게는 텔레비전이라는 문명의 이기 때문에 생기는 고민이 늘어났다…나의 고민은 아예 텔레비전이라는 ‘이기’가 과연 가정에 필요하고, 있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냐 하는 회의가 굳어짐에 따라 일어나는 가족들과의 충돌 그리고 나아가서는 텔레비전 그 자체의 처치에 있었다.
나 자신은 선택적인 프로그램을 제외하고서는 텔레비전과 인연을 맺지 않고 살지만, 그래도 어쩌다가 노인과 어린것들이 옆방에서 왁자지껄 떠들고 웃어댈 때에는 호기심 때문에 방문을 열고 들여다보게 되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대개는 입맛이 쓰다. 그런 것을 보고 좋아하는 노인과 어린것들을 나무랄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런 지적 계층만이 좋아할 것 같은 것을 골라서 만들어내는 방송국에 대해서 혐오감 같은 것이 이는 것도 참을 길이 없다. “용케도 저런 것을 매주, 매일 끈질기게 만들어내는구나”하는 놀라움과 철저한 상업주의적인 소위 ‘백치화’ 기능에 대한 두려움이 좀체로 가시질 않는다…그것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즐거움을 느끼거나 감각과 지성이 어울려서 유쾌한 웃음이 유발되기에는 억지로 웃기려는 의도에 대한 저항감이 앞선다.
이런 종류의 오락물이라는 것은 대개가 우리에게 가장 절실하게 요구되는 스스로 ‘생각하는 기능’을 마비시키고 마는 것만 같다.
텔레비전 분야의 전문가들은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알 수 없으나, 그런 장면의 시청자 군중을 볼 때마다 완전히 사고정지증 환자들을 보는 듯한 딱한 심정이 되어버린다. 그런 프로그램 속에 교묘하게 엮어넣어진 정치선전이 가장 쉽게 뚫고 들어가는 것도 이런 ‘나이 먹은 유아’들의 두개골이 아닐까 싶다.
이성적인 사회비판력의 상실이라는 우리 사회 지식인들의 일반적인 병폐가 그 뒤에 자동적으로 따르는 현상이 아닌가 한다. 브라운관과 10인치의 유리창을 통해서 원거리 조작되는 지배층의 의도는 자기 자신의 감각과 지각으로 이 사회의 실태를 꿰뚫고 살피려는 노력을 포기한 이와같은 치매증 대중을 대량생산해내는 데 성공한 듯하다.
텔레비전 방송시간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문화·연예물이라는 것이 철두철미 부유층 취미의 도시중심적이고 소비문화적인 데도 마음이 개운칠 않다. 어떤 나라에서는 모든 면에서 도시와 농촌의 격차와 단층을 줄이고 메우려는 노력이 하나의 사회원리로 내세워지고 있는데, 우리의 경우는 온갖 문화적 노력이 오히려 그것을 넓히고 깊게 하려는 데 치중되어 있는 듯한 인산을 받는다.
전문가의 연구를 빌 필요도 없이 극히 상식적인 것이다. 자라나는 어린 세대의 건전하고 폭넓은 사고능력과 비판력이야말로 가정과 사회의 건전한 발전의 토대임을 생각할 때, 나는 그들의 지적 발육에 점점 큰 영향을 주는 텔레비전에 대해 아무리 목적이 정당하더라도 지나친 편견의 주입과 비정상적인 정치적 선전물을 삼가주었으면 싶은 아버지로서의 간절한 희망을 말하고 싶은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기에 텔레비전을 놓고서의 나의 고민은 오늘도 내일도 계속될 것이다. 『新東亞 1972년 3월호』
#미군 감축과 한일안보관계의 전망
#베트남 전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