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 프리초프 카프라. p370
The Tao of Physics, 1975. Fritjof Capra.
An exploration of the parallels between modern physics and Eastern mysticism
현대 물리학(상대성 이론과 양자 물리학)의 자연관은 고전 물리학적 자연관과는 극히 대조적이다
고전물리학의 기본 태도는 순수한 객관주의(합리주의)로 자연 관찰(절대 공간, 절대 시간, 인과율, 질량적 물질,..)
이와는 반대로 불교 등의 동양 사상은 주관주의에 입각한다. 그것은 주관적인 마음이 인식의 주체이므로 객관적 존재란 신빙성이 없다고 본다. 고전 물리학이 사변적인 방법으로 一(부분)에서 多(전체)를 보려 하고 물체를 3차원 공간에 현존하는 것으로만 보는 데 반해 동양 사상은 그 직관적인 방법으로 多(전체)에서 一(부분)을 보려 하고 일체를 생멸하는 변화로서 초월적으로 보는, 즉 4차원적 시공의 차원에서 보려 한다. (절대/객관 vs 상대/주관)
아인슈타인은 관찰의 대상과 관찰자의 관계를 세밀히 분석함으로써 상대성 이론을 수립하기에 이른 것이다(절대 공간은 없다는 것을 밝혔다!)
고전 물리학의 두 법칙(질량 불변의 법칙과 에너지 보존의 법칙)을 하나의 등식으로 묶었다(질량은 실체와 관계없는 에너지의 한 형태일 뿐이다!)
양자 물리학은 여기에서 한 발 더 주관주의의 방향으로 나아간다
아직도 현대 물리학을 뒷받침할 만한 사상적 체계는 마련되어 있지 않다. 고전 물리학이 데카르트나 칸트를 가졌다면 현대 물리학은 새로운 데카르트나 칸트를 찾고 있으며, 이 책의 저자 카프라 박사는 이것을 동양 사상의 테두리 안에서 찾아 본 것이다.
“신비란 일어난 일이 없지만 언제나 있는 것이다”-4세기의 사리치우스
물질의 본질을 탐구하는 물리학
우리의 합리적 이해의 한계성이 이미 드러난 것이라면 이 설문의 내용과 형식도 바뀌어야 할 것이다(질문이 답, 상자밖 사고 필요)
고전 물리학을 뒤따른 과학과 기술의 발전은 물질의 풍요를 가져왔지만 그에 수반한 결정론적•기계론적 세계관은 인간의 마음과 정서를 경시하는 풍조를 일게 하였으며, 시대가 경과함에 따라 심화되는 이 물심(物心)의 불균형은 드디어 현대 문명에 난치의 중병을 초래한 것이다.
이러한 현대 문명의 중병을 진단한 어떤 사람들은 자연으로 돌아가서 조화를 되찾으라고 충고하지만, 이미 분별지를 발전시켜 고도의 기술 사회를 이루어 놓은 현대인에게는 낙원을 지키는 불칼이 없다 해도 자연의 동산에의 단순 회로(回路,돌아가는 길)는 보이지 않는다.
내가 이 책을 쓰게 된 것은 5년 전 한 가지 아름다운 체험에서 비롯되었다(아름다운 체험에서 비롯된 깨달음! 보고 느끼고 깨달았다)
현대 물리학의 성과는 과학자들이 가야 할 전혀 다른 두 길을 열어 넣었다. 극단적인 표현을 쓴다면, 한 길은 부처님으로 나아가고, 다른 한 길은 폭탄으로 이어진다. 어느 길을 갈 것인가-그것은 과학자 자신에게 달려 있다.
‘지식은 곧 변혁이’다’
오늘날의 물리학자의 대부분은 그들의 이론에 내포되어 있는 철학자이고 문화적이며 정신적인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또한 물리학의 철학적인 면에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여태껏 동방의 종교적 철학에 접촉을 가져 보지 못한 물리학도들이 많이 이 책을 읽어주었으면 한다.
#1 현대 물리학-마음을 담은 길?
어떠한 길도 하나의 길에 불과한 것이며,
너의 마음이 원치 않는다면 그 길을 버리는 것은
너에게나 다른 이에게 무례한 일이 아니다…
모든 길을 가까이, 세밀하게 보아라.
네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몇 번이고 해 보아라.
그리고 오직 너 자신에게만 한 가지를 물어 보아라.
이 길이 마음을 담았느냐? 그렇다면 그 길은 좋은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 길은 소용 없는 것이다.
-카를로스 카스타네다, <돈환(Don Juan)의 가르침>
현대 물리학은 인류 사회의 거의 모든 분야에 막중한 영향을 끼쳐 왔다!
핵무기! 전세계 정치 구조에 끼친 영향력은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이다
미시 세계의 현상- 현대 물리학과 동양적 신비주의의 유사성
이 책의 논점을 대범하게 일반화하자면, 현대 물리학이야말로 이제까지 모든 시대와 전통의 신비주의자들이 지녀 왔던 관점과 매우 유사한 세계관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물리학의 목적? ‘피지스physis’, 사물의 본질, 진정한 구조를 밝히는 것!
정신과 물질의 분열, 서양철학의 특성이 된 이원론으로 이끌어간 시조? 엘레아Elea 학파
근대과학의 아버지? 갈릴레오는 실험적 지식을 수학과 경주시는 최초의 사람이었다.
정신•물질 이원론의 극단적인 공식화를 초래한 철학 사상의 발전이 근대 과학의 탄생을 선행하고 동반했다
데카르트는 분할과 기계론적 세계관은 혜택이 된 동시에 유해한 것이었다. 그것은 고전 물리학과 기술의 발달에는 극히 성공적이었지만 우리 문명에 대해서는 많은 역작용을 초래했다.
불교철학의 아비댜, 무지란 마음의 불안한 상태
마음이 흔들리면 잡다한 사물이 생기지만,
마음이 고려하면 잡다한 사물이 사라진다.
반과학적인 태도? 그들은 과학, 특히 물리학을 현대의 기술 문명이 초래한 모든 사악에 책임져야 할 상상력 없고 편협한 교조라고 보는 경향이 있다!
#2 아는 것과 보는 것
수학의 고도로 정교한 언어로 표명된 정밀 과학 vs 명상에 기반, 그들의 직관은 언어로 전달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정신적 수련의 유사성?
추론적 지식, 선적인 구조? 한편으로 자연계는 무한히 다양하고 복잡한 세계로서 거기에는 직선으로 완전한 정사각형은 들어 있지 않으며, 사건이 정연한 순서대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한데 어울려서 일어난다(자연에 직선은 없다!-훈데르트 바서)
휘어진 지구를 평면 지도로? 왜곡은 필수
뜻이 통한 다음에는 말을 잊는다
절대지란 전적으로 실재의 비지성적인 체험이다? 우리는 항상 상대방이야 근사치에 머무는 분별하고 추상하고 분류하는 지성에 의존한다!
“말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다”(개구즉찰)
우리 언어의 부정확성과 모호성은 잠재 의식층과 그 연상 작용에 따라 시를 쓰는 시인들에게는 필수적인 것이다.
과학적 추상 방법은 아주 효율적이고 강력하지만 우리는 그 대가도 치러야 한다. 우리의 개념 체계를 더 정확히 정의하고, 그것을 더욱 능률화 시키며, 그 연결을 더욱더 엄밀하게 한다면 그것은 실재의 세계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된다
“네가 그것을 말하는 순간 그 표적을 잃어버린다”(개구즉찰)
개인적 체험은…불교 철학의 기반이다. 이런 의미에서 개오 체험의 뜻을 찾기 위하여 후에 어떠한 논법이 발전되었든지간에 불교는 철저한 경험론 또는 실험주의인 것이다.
동양적 신비론들이 경험에 그 지식의 기반을 확고히 두고 있다는 사실은 과학적 지식이 실험에 확고한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과 유사함을 암시하고 있다.
불교적 인식론? 모든 지식은 본다는 데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궁극적으로 실재를 본래 면목대로 보는 것을 지향한다(정견, 진여)
대체로 심오한 신비적 체험은 오랜 준비가 없이는 일어나지 않지만 직접적인 직관적 통찰은 우리 모두의 일상 생활에서 경험되는 바다.
“학문을 닦으면 나날이 지식이 늘고, 도를 닦으면 나날이 준다.”-노자
그것은 모든 분별이 정지되고 분별이 없는 통일체로 사라져 가는 의식 상태다
***언어란 언제나 추상적이고 실재의 근사한 지도에 불과하기 때문에 과학적 실험이나 신비적 직관을 언어로 해석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애매하고 불완전하게 마련이다!
“수학의 법칙들이 실재에 관해 언급하는 한 그것은 확실하지 않고, 그것들이 확실하다면 실재를 가리키지 않는다.”-아인슈타인
현상의 특정한 일선을 연구하는 것은 그 한정된 범위에 국한된 물리적 속성에 대한 연구를 의미할 수 있으며, 이것이 그 이론이 근사치가 될 수 밖에 없는 또 다른 이유가 되기도 한다!
“신화는 말로써 표현될 수 있는 절대적 진리에 가장 가까운 것을 구현한다.”-아난다 쿠마라스와미
인도의 신비주의, 특히 힌두교는 신화와 형식을 빌려 이것을 기술하고 있는데 은유와 상징과 시적 이미지와 직유와 우화가 동원되고 있다. 신화적 언어는 논리와 상식에 의해 훨씬 덜 제약을 받는다.
동양의 신비가들은 언어와 그 ‘직선적’ 사유에 의해 야기된 한계를 잘 알고 있다
예컨대 물질에 대한 어떤 아이디어가 양자장 이론의 어떤 국면에 의해 물리학자들에게 전달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힌두교도들에게는 시바신의 우주적 무도에 의해 전달된다. 춤추는 신과 물리학적 이론은 양쪽 다 마음의 소산이며, 그 지어 낸 이의 실재에 대한 직관을 기술하는 모형인 것이다.
#3 언어를 초월하여
모든 과학적 모형과 이론들은 근사치밖에 안되고 그것의 언어적 해석도 우리의 언어가 지닌 애매 모호성 때문에 곤란을 겪는다는 생각은 군세가 초 새롭고 전혀 예기치 않던 발전이 이루어지면서 과학자들에 의해 이미 널리 받아들여졌다
*그것은 일상언어를 통해서는 말해질 수 없다!
언어의 문제는 여기에서 정말 심각한 것이다. 우리는 원자의 구조에 관하여 어떤 방식으로든 말하려고 하지만…그러나 일상 언어로써는 아무래도 이야기할 수 없다.-베르너 하이젠베르크Werner Heisenberg
실재가 일상 언어를 초월한다? 동양의 신비 사상이 부딪친 언어의 문제는 현대 물리학이 당면한 문제와 똑같다!
원자 물리학에 있어서 역설적 상황의 대부분은 빛-좀더 일반적으로 말해서-전자장 방사의 이중적 성질과 관련이 있다(입자와 파동 이중성, 언어나 상상력의 어느 쪽도 이 부류의 실체는 그렇게 잘 다룰 수가 없다)
선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진리는 논리적 추리로써는 해결될 수 없는 역설 속에 감추어져 있어서 원자적 실체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통해서만 이해되어야 했다!
원자(미시) 세계? 사물의 본질적인 속성이 지성으로 분석될 때마다 그것은 불합리하거나 역설적인 것으로 보이게 마련이다(우리가 가진 감각적 상상의 한계를 뛰어넘었다)
#4 새로운 물리학
개오(깨달음의 체험)-“경험의 모든 표준 형태를 다 뒤엎는, 인간의 의식의 영역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장 놀라운 사건”
동양의 신비가에 의하면 실재(진여)에 관한 직접적이고 신비적인 체험은 그 사람의 세계관의 근본을 뒤흔드는 중대한 사건이다.
금세기 초에 물리학자들이 원자적 실재를 새로 경험함으로써 그들의 세계관의 기초가 충격을 받았을 때 이와 아주 똑같은 식으로 동요를 느꼈다.
뉴턴식 우주의 무대는 고전적인 유클리드 기하학의 3차원적 공간이었다. 그것은 언제나 정지하여 있고 변화할 수 없는 절대적인 공간이었다(주관이 철저히 배제된 절대공간과 절대시간)
데카르트에 의해 시작된 나와 세계의 구별, 관찰자없이 기술되는 객관적 세계
***객관적 기술이야말로 모든 과학의 이상이 되었던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시간과 공간의 전통적인 개념을 철저히 변화시켰으며 뉴턴적 세계관의 한 근본을 전복시켰다
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공간은 3차원이 아니며, 시간은 별개의 실체가 아니다. 둘은 밀접하게 관련되어 4차원의 ‘시공’ 연속체를 형성한다(전일적 흐름의 존재)
E=mc2, 가장 중요한 결과는 질량은 단지 에너지의 어떤 형태에 불과하다는 깨달음이다!
물리학자들이 원자적 실험을 통해 자연에 질문을 제기했을 때마다 자연은 이에 욕설로 대답하였다. 그리고 그 상황을 더욱 명백히 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그 역설은 더욱 날카로워졌다(인위의 역설?)
“아무튼 그들은 양자론의 정신 속에 들어선 것이었다.”-하이젠베르크
존재하려는 경향성, 어떤 ‘양자 상태’에서 돌연히 다른 상태로 전환하는 원자들, 그리고 모든 현상들의 본질적인 상호 연관성-이런 것들은 원자 세계에만 있는 몇 가지 특징이다
현대 물리학에 있어서의 두 가지 발전은 물질의 근본적인 단위로서의 소립자라는 개념은 폐기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밝혀 주었다
상대성 이론은 입자에 관한 우리의 개념을 본질적으로 바꾸게 함으로써 우리의 물질상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질량은 어떤 실체 같은 것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에너지의 한 형태라는 것을 밝혀 주었다!
그리하여 현대 물리학에서 우주는 본질적으로 항상 관찰자를 포함하는 역동적이며 불가분의 전체로서 체험된다(주관적 체험, 천상천하유아독존!)
그런데 이러한 체험은 동양 신비가의 그것과 매우 유사하다!
#5 힌두교
힌두교도들은 이처럼 수많은 신들에 어떻게 다 대처하는가를 이해하려면 우리는 그 모든 신들이 그 본질에 있어서는 다 동일하다는 힌두교의 기본적 태도를 먼저 알아야 한다
#6 불교
소위 ‘역사상’ 부처, 싯다르타 고타마
4성제(고집멸도)
#7 중국사상
#8 도교
도교적 해방은 특히 인습의 엄격한 규율로부터의 해방을 뜻했다
“아무리 넓은 지식이라도 도를 반드시 아는 것은 아니고, 이성이 인간을 현명하게 하는 것도 아니다. 현자는 이런 방법들을 반대해 왔다.”-장주
“개가 잘 짖는다고 좋은 개로 인정받는 게 아니고, 사람이 능숙하게 말한다고 슬기롭다고 인정되는 게 아니다.”-장주의 추론과 변설을 경멸하는 글귀
“논쟁은 분명하게 보지 못한 증거다.”
도가에서 깨달은 가장 중요한 통찰 중의 하나는 변용과 변화가 자연의 본질적인 모습이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또한 ‘저것’이다. ‘저것’ 또한 ‘이것’이다…’이것’과 ‘저것’이 대립자임을 그만두는 것이 바로 도의 본령(essence)이다(어떤 것을 달성하려고 할 때 그 반대편에서 시작해야 한다)
“좁히려면 반드시 먼저 펴 주고…빼앗으려면 먼저 주어야 한다. 이것을 오묘한 지혜라고 한다.”-노자
텅 비게 하라, 그러면 당신은 가득 찰 것이다(채움을 위한 비움)
무위, 비행동성? “자연의 질서를 따르는 자는 도의 물결을 타고 흐른다”
도, 무위자연? 자발성은 도의 행동 원리, 스스로의 본성에 합치되는 행위를 뜻한다!
“무위로 모든 것이 성취될 수 있다”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 최상이다. 현자는 행함이 없이 그의 일을 수행하고 말함이 없이 그의 가르침을 준다.”
#9 선(禪)
선의 체험은 깨달음의 체험
선은 언어로써 궁극적 진리를 나타낼 수 없다고 확신하고 있다(선문답, 공안)
선에 있어서의 개오? 이 세상으로부터의 물러남을 뜻하지 않고 그 반대로 일상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을 뜻한다!
당신이 선을 공부하기 전에는, 산은 산이고 강은 강이다; 선을 공부하고 있는 동안에는 산은 더 이상 산이 아니고 강은 더 이상 강이 아니다; 그러나 당신이 일단 개오(開悟)를 얻고 나면 산은 다시 산이고 강은 다시 강이다.
(무지(無知)/구분(분별)/무차별지)
‘무심결에’-선 생활의 특징인 자발성, 단순성, 엄정한 평정의 표현
#10 만물의 통일성
(동양의) 정신적 전통들은 여러 세부 사항에서는 비록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그 세계관에 있어서는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일상적 생활에서는 우리는 이 만물의 통일성을 깨닫지 못하고 세계를 개별적 사물들과 사건들로 나눈다. 물론 이 분할이 우리의 일상적 환경을 다루는 데 유용하고 필요하나 그것이 실재의 참 모습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분별하고 범주화하는 지성이 궁리해 낸 하나의 추상이다(마음에서 생겨난 무명(無明)에 바탕을 두고 있다)
고립된 실체들로서가 아니라 단지 전체의 완전한 부분들로서만 이해될 수 있다
동양의 신비주의에서 이 우주적 상호 연결성에는 언제나 관찰자와 그 의식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 점은 원자 물리학도 마찬가지다.
“자연과학은 자연을 단순히 기술하고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연과 우리 자신 사이에 일어나는 상호 작용의 일부다.”-하이젠베르크
“우리가 관찰하는 것은 자연 그 자체가 아니라 우리의 질문 방식에 따라 도출된 자연이다.”-하이젠베르크(질문이 답이다)
#11 대립의 세계를 넘어서
개별성을 인정하는 동시에 모든 상이성과 대비점들을 포용하는 통일체
대립자란 사고의 영역에 속하는 추상적인 개념들로 상대적인 것이다(단지 동일한 실재의 양면, 단일한 전체의 양극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현세의 대립성을 넘어서, 영원한 진리 속에 안주하라!”- 경전
불교의 근본 이상은 지적인 분별과 감정적인 오탁으로 만들어진 이 대립적인 세계를 넘어서 정신적인 무분별의 세계를 깨닫는 것이다.
덕? 선과 악 사이의 역동적인 균형 유지, (음양의 상호작용과 조화, 양극적인 대립의 역동적인 통일)
노자의 완전히 깨달은 사람? “남성적인 것을 알고서도, 여전히 여성적인 것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
상대성 물리학의 4차원적 세계는 힘과 물질이 통일된 세계다
원자적 단계(양자)의 물질과 복사의 양면성
“그것은 움직인다. 그것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것은 멀다. 그리고 그것은 가깝다.
그것은 이 모든 것 속에 있으며 이 모든 것 밖에 있다.”
대립 개념 너머에 있는 실재에 직면해서 물리학자와 신바가들은 특별한 사유 방법을 채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원자적 입자의 변화하는 확률 모형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 사이의 불확실한 관계에 대한 정확한 수학적 공식은 하젠베르크의 불확정성 관계, 혹은 불확정성 원리로서 잘 알려져 있다.(입자를 발견할 확률)
#12 공간과 시간
현대 물리학은 동양의 신비주의의 기본이 되는 사상의 하나를 가장 극적으로 확정시켰다. 그것은 곧 우리가 자연을 기술하기 위해서 쓰고 있는 모든 개념들이 한계가 있다는 것이며, 우리가 믿고 있는 것과 같이 실재의 특성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단지 마음의 소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지도의 부분들과 같은 것이지 영토가 아니라는 말이다.
상대성이론이 의해서 제기된 이들 기본적인 개념들에 관한 일대 수정은 과학사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혁명의 하나였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에서 비롯된 진정한 혁명은 공간-시간의 좌표계가 제각기 독립된 물리적 실체로서의 객관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생각을 버리게 한 것이다. 이러한 생각에 대신하여 상대성 이론은 공간-시간 좌표계는 관찰자가 그의 환경을 기술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하나의 언어적 요소에 불과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제 앞으로는 공간 그 자체나, 시간 그 자체는 단지 그림자로 사라질 운명에 처해졌으며 오직 이 둘을 하나로 결합함으로써만 하나의 독립적인 실재로서 지속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어떤 사람의 그림자의 실제 길이가 얼마나 되는가를 묻는 것이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것처럼, 한 물체의 ‘진정한’ 길이를 묻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림자란 3차원 공간에 있는 점들이 2차원 평면 위에 투영된 것이며, 그래서 그 길이는 투영의 각도에 따라서 달라질 것이다.
상대성 이론에서 공간은 시간과 결코 분리될 수 없다(중력에 의한 공간의 만곡)
#13 역동적인 우주
동양 신비주의의 주요한 목적은 이 세계의 모든 현상들을 동일한 궁극적인 실재가 현현하는 것으로서 경험하려는 것이다.
2천5백 년 전의 부처-사물의 무상성과 끊임없는 변화와 전환에 감명을 받고 세운 역동적인 개념? 삼사라(윤회)!
불교도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계를 글자 뜻 그대로 ‘쉬지 않고 움직이는 것’을 의미하는 ‘삼사라(samsara/윤회)’라고 부른다.
아원자 입자들의 속성은 역동적인 맥락안에서만, 즉 운동, 상호작용, 변형을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물질의 근본적인 불안정성restlessness)
양자론에 의하면 물질은 결코 정태적인 것이 아니라 항상 운동의 상태에 있다.
우주는 정지해 있는 것이 아니라 팽창하고 있다
부처의 주요 가르침 하나? “모든 복합된 사물들은 무상하다”
“유럽 철학이 실체에서 실재를 찾으려고 했던 반면에 중국 철학은 그것을 관계에서 찾으려고 하였다.”-조지프 니덤
#14 공(空)과 형상
현대 물리학은 물질적 대상은 뚜렷한 실체가 아니라 그 주위 환경과 불가분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밝혀 주었다.
무형, 공, 허? 궁극적 실재!
“천도(天道)는 공(空)하며 무형(無形)하다”-관자
영원히 비어 있는 그릇? 무한한 것들을 담을 수 있는 가능성!
끝없이 이어지는 탄생과 죽음, 윤회의 세계
물질은 극도로 강하게 집중된 장의 공간 영역? 장이 곧 유일한 실재!
“기가 응축된 때 그것은 거시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그때는 개별적인 것들의 형체가 된다. 그것이 분산될 때에는 불가시적인 것이 되고 형체들도 없어진다… “-장재
“현대 이론 물리학은 물질의 본질에 관하여 다른 각도에서 생각하도록 해주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색불이공 공불이색(色卽是空 空卽是色 色不異空 空不異色)
살아 있는 허? 진공이란 완전히 비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반대로 그것은 끝없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무수한 입자들을 함유하고 있다!
진공의 동적인 성질에 대한 발견은 많은 물리학자들에 의하여 현대 물리학에서 최고로 중요한 발견 중의 하나로 간주되어 있다!
#15 우주적 무도(舞蹈)
시바 신은 악마의 몸 위에서 춤을 추고 있는데, 이 악마는 해탈을 하기 위해서 반드시 극복되어야 하는 인간의 무지를 상징한다.
“모든 사물의 근본적인 본성은 이름지어질 수도 설명될 수도 없다. 그것들은 어떤 언어의 형식으로도 적절하게 표현될 수 없다.”-아슈바고샤
동양의 종교적 철학들은 추론적인 것을 초월하고 존재하는, 말로는 충분히 표현될 수 없는 무시간적이며 신비적인 인식에 관심을 두고 있다. 이러한 인식과 현대 물리학의 관계는 다른 여러 면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그것이 결정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직접적이고 직관적인 방법으로 체험되어야 한다는 한 예에 지나지 않는다.
‘유기적’이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는 신비가들의 견해는 우주의 모든 현상을 불가분하고 조화된 전체의 불가결한 부분들로서 간주하기 때문에 이러한 기계론적 세계 개념에 반대된다.
무엇보다도 먼저 그들의 방법은 철두철미 경혐적이다. 물리학자는 그의 지식을 실험으로부터 유도해 내고, 신비가는 명상적 통찰로부터 끌어낸다. 둘 다 관찰 행위인데, 이 두 영역에 있어서 이러한 관찰이 지식의 유일한 근원으로 인정되고 있다.
나는 현대 물리학에 의하여 암시되고 있는 세계관이 현재의 우리 사회와는 일치하지 못하고 있다고 믿는다. 오늘의 우리 사회는 우리가 자연에서 관찰하는 조화로운 상호관계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한 역동적인 형평의 상태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다른 사회적•경제적 구조가 요구될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문화 혁명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전복적 이성?)
인류 전체 문명의 생존? 자연의 전체성을 경험하고 그것과 조화를 이루며 사는 역량이 있는가에 달려 있을 것이다!
#다시 찾은 신물리학
“만물은 서로 의존하는 데에서 그 존재와 본성을 얻는 것이지, 그 자체로서는 아무것도 아니다.”-1천8백년전 불교 고승 나가르주나
#신물리학의 미래
새로운 패러다임의 사고
지식을 어떤 확고한 토대도 없는 그물로 비유하는 새로운 비유는 과학자들에게는 대단히 못마땅한 일이다.

좋은 글 잘 읽어 보았습니다.
혹시 책의 저자인 카프라의 연락처를 알 수는 없을까요?
제가 태극도를 연구하다가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의 177P에 나오는 “하나의 수파” 도표와 똑같은 도표를 얻어 냈는데, 그 내용을 카프라가 본다면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서 여쭙습니다.
저도 독자일뿐이라….출판사에 문의를 해보시면 도움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