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경의 신화로 읽는 세상. p240
생각하는 법을 바꿔야 한다
13 가우디를 통해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언제나 근본적인 생각이나 상상력의 전환은 그 문화의 가장 깊은 바탕을 이루고 있는 신화적 틀에 대한 재해석에서 출발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우리의 경우는 전혀 그렇지 못한데 그건 일시적인 비정상적 상태이고, 이제 그 비정상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생각하는 법을 바꾸어야 함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왕따, 일진회..교실 붕괴…나는 이러한 아이들의 문제를 서구 모델 따라가기의 획일적 시스템을 넘어서고자 하는 변화의 징후로 받아들였었다. 나는 아이들의 의식구조가 어떻게 변화한 건지, 그러한 의식구조의 변화가 왜 아이들로 하여금 학교 시스템과 부딪치게 만드는지를 살펴보다가, 우리 신화를 포함한 동북아시아 신화를 혼자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의식구조가 변화한 아이들이 우리 세대보다는 훨씬 더 신화적 상상력을 친근하게 여길 것 같은데 그 신화적 상상력이라는 건 도대체 뭔가 궁금해서였다.
그렇게 10년 가까이 혼자서 신화를 공부하다가 2000년 무렵부터 판타지 동화 『고양이 학교』를 썼다. 생각하는 법과 상상력의 근본적인 전환이 필요한데 그걸 보여주는 데 판타지 동화만큼 적절한 장르가 따로 없을 것 같아서였다.
16 한 문명이 독자적인 문명이기 위해서는 자기 성찰과 자기 인식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있어야 문명 간의 대화와 교섭이 가능해지고 그래야 비로소 독자적인 한 문명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다.
서구 모델 따라가기에서 모델 없는 창조적 성장의 길로 나가는 것은 단순히 경제만의 문제가 아니다. 모델 없는 성장은 정치 외교 경제 사회 문화 전반의 근본적인 성찰과 변화를 요구한다…그렇기 때문에 생각하는 법과 상상력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한다. 이것이 내가 1990년대 이래 내가 가지고 온 문제의식이다. 여기에 모아진 글들은 그 문제의식의 부산물들이다.
한국의 미는 곡선의 미? 바람의 신화! ‘신명 난다’ ‘신바람 난다’. 샤먼에게 신이 내린 상태.
신명神明난다? 신이 내려 신의 밝은 눈으로 본다
28 세계에서 바람을 가장 웅장하고 아름답게 표현한 글을 하나 들라면 나는 서슴없이 『장자』의 「소요유」편을 들겠다.
북해에는 곤이라는 물고기가 사는데 그 등이 몇천리인지 알 수 없다. 곤이 파도를 일으키며 놀다가 한 번 몸을 뒤집으면 거대한 새가 되어 구만 리 하늘 높이로 날아오르는데 그 날개가 몇천 리가 되는지 알 수 없다. 이 새가 붕鵬이다. 붕은 6개월을 날아간 뒤에야 남쪽 바다에서 쉰다.
곤이라는 물고기는 북쪽 바다에 머물러 있는 바람이다. 이 바람이 파도를 일으키는 모양이 꼭 거대한 물고기가 노는 것 같다.
바람의 언어. 우리말에서 바람은 참 표현하기 어려운 미묘한 것을 표현할 때 많이 쓰인다. ‘하는 바람에’, ‘바람나다’, ‘바람피우다’, ‘바람 들다’, ‘신바람 난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등 모두 무어라 꼬집어 말하기 어려운 것을 표현하는 말들이다.
바람의 미학
_백석의 시를 다시 읽는다
우리가 쉬는 숨으로서의 문체
87 샤먼의 본질은 시인의 본질, 문학의 본질과 별로 다르지 않다.
샤먼은 샤먼이 되기 전에 무병을 앓는데 이 무병은 개인의 병 같지만 사실은 예민한 샤먼 후보자가 공동체가 안고 있는 문제를 먼저 않는 것일 뿐이다. 이 무병은 샤먼 후보자가 샤먼으로서의 소명을 받아들이는 순간 낫는다. 즉 자신이 겪는 아픔을 개인적인 것만으로 보지 않고 시야를 넓혀 공동체의 문제로 볼 때 아품의 원인이 제대로 이해되어 낫는 것이다. 정신적인 데서 기인하는 아픔은 그 아픔의 이유를 이해하는 순간 낫는 법이다.
88 암울한 자기 시대와 대결하는 방식에는 지사, 전사, 계몽가 등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백석은 그중에서 시인의 자리를 자각하고 오로지 시인의 자리를 선택한 시인이다. 오로지 시 하나로 시대의 모든 무게를 감당하려 했다. 그래서 그의 시는 시인으로서의 재탄생 과정 자체를 그린 것으로 읽힌다. 이 시인의 자리에 대한 자각 과정은 시를 넘어서 우리가 지켜야 할 신성한 것이 무엇인가를 참으로 선명하고 아름답게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백석은 시인 중의 시인이다.
붉은 악마의 서사적 정체성
_신세대와 신화
용의 기원과 치우 용
고대 용의 모양은 다양했다. 자라를 토템으로 하는 부족이 중심이 되어 이루어진 부족 연합의 깃발이 자라나 거북의 형상에 다른 동물의 특징을 합한 비희 용이 되고, 사자가 토템인 부족이 중심이 되어 이루어진 부족 연합의 깃발이 사자 모양에 다른 동물의 합한 조풍 용이 되는 식이다.
치우 용과 도깨비
106 대장장이 신과 도깨비의 기원
야철 기술의 발달은 비약적인 생산력의 발전으로 인간에게 풍요를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동시에 대량 학살의 전쟁을가능하게 한 위험한 것이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대장장이 신은 양면성을 갖는다. 풍요의 신이면서 동시에 전쟁과 파괴를 가져오는 악한 신이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도깨비 역시 희화화된 형태이긴 하지만 이러한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113 도깨비의 기원를 중화주의, 소중화주의의 틀을 넘어 유목의 시대로까지 확장. 돌궐족은 대장장이 족속이었고…앞선 청동기 철기 문화를 중국, 만주, 한반도에 전파한 것이 유목민들이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 역사와 문화의 기원을 유목의 시대로까지 확장하는 것은 우리 사회를 지배해왔고 지배하고 있는 동일률의 논리에 어긋난다.
과거 우리나라는 중국을 모델로 해서 중국과 동일하게 되려는 동일률의 논리가 지배했다. 이것이 소중화주의이다. 지금은 서구, 특히 미국을 모델로 해서 그와 같아지려는 동일률의 논리가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그 대상은 변했지만 동일률의 논리에는 변함이 없다.
이러한 동일률의 논리에 따르면 우리 역사와 문화의 기원을 유목의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스스로를 오랑캐로 비하하는 것이거나 덜 문명화된 종족의 미신을 좇는 무가치한 일이 된다. 이러한 거부감은 논리적 추론이 아니라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적 벽이다.
경주 김씨의 기원은 객관적인 자료들을 따라 추적해보면 흉노족에 있다…앞선 철기 문화를 가지고 들어와 신라의 지배 종족이 된 것이다. 그렇지만 학자들은 경주 김씨의 기원이 흉노족에 있다고 밝히지 못한다. 그러한 사실을 모욕으로 받아들여 야기되는 반발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간달프인 줄 알았더니 오르크였네?
_신화는 어떻게 재해석되고 재창조되는가?
148우리의 신화 해석 폭이 이렇게 왜소해지고 폐쇄화된 데는 남북 분단의 영향이 큰 것 같다. 분단이 장기화됨에 따라 우리의 시간이 남한만의 소민족주의에 함몰되어 대륙으로 열린 시야를 잃어버린 건 아닌지, 서구 중심의 질서에 익숙해진 나머지 다른 아시아권 국가들에 대해 상대적 우월주의에 빠져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볼 일이다.
신화와 페미니즘
169 1960~70년대 농촌의 가족들을 생각해보자..이 무렵 한국의 경제성장은 이 공장에 간 딸들과 대학에 간 아들들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의 자본은 저임금 노동력과 고급 인력의 양성에 비용을 거의 지불하지 않았다. 그랬기 때문에 한국의 자본은 비약적 자본축적을 이룰 수 있었다.
그 비용을 대신 지불한 것은 농촌의 가족들이었다. 한국의 자본은 농촌의 대가족이 가지고 있던 자원과 생명력을 약탈하여 고도성장을 이루었다고 볼 수도 있다.
170 로자 룩셈부르크
비자본주의적 조직들은 자본주의를 위한 비옥한 토양을 제공한다. 자본은 이러한 조직의 잔해를 자양분으로 삼으며, 이러한 비자본주의적 환경이 축적을 위해 필수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는 이러한 매개물을 먹어치우는 대가로 전진한다.-로자 룩셈부르크
172 출산률 0에 가까워진다. 한국 사회는 지속가능한 사회가 아닌 셈. 자본주의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말대로 결국 자기 자신의 꼬리부터 먹어치우는 뱀과 같은 존재인 셈이다.
정신병? 유아 때의 어머니와의 이자 관계로 퇴행하는 것. 이렇게 되면 환각 속에서 살아가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정신병이라는 것이다.
175 정말 여성들의 사회적 정치적 자각이 필요한 때인 것 같다. 한국 자본주의의 가족에 대한 약탈 체제를 넘어서지 않으면 여성의 진정한 권리 신장은 가능한 일이 아니다.
신들의 시장
_인간은 경제적 동물인가?
196 새들의 이야기를 알아듣는 자는 왜 성스러운가?
응시 이론에 따르면 그림이란 화가의 일방적 시선이 포착한 대상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화가만이 일방적으로 시선을 보내는 게 아니라 사물도 화가를 향해 응시를 보내온다. 그림은 이 시선과 응시가 만나는 지점에서 이우러진다고 한다.
198 4대강 사태는 응시가 없는 외부자의 시선이 지배하는 한국 사회를 과연 하나의 공동체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한다. 응시, 신화적 표현으로 하면 새들의 이야기를 알아듣는 능력은 어쩌면 한 사회를 공동체일 수 있게 하는 신성한 것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그것이 가볍게 무시되는 사회는 공동체로서는 이미 해체된 사회가 아닐까?
201 신화와 고대의 기록을 보면 마르크스가 말한 시장의 기원을 틀렸다. 시장은 공동체와 공동체가 만난 시점에 기원을 두고 있는 게 아니라, 그 이전에 하나의 자족적 공동체 안에서 발생했다.
사라진 신들의 연대기
_우리는 어떻게 아파트라는 거주 기계에서 살게 되었나?
서울 단독주택에서 23년 살기 혹은 23년간의 고행.
서울의 도시 정책이란 게 단독주택 거주자들에겐 한마디로 ‘너 이래도 계속 단독주택에 살래?’하고 윽박지르며 가하는 고문에 가깝다.
211 서울이란 도시는 잠시 머물다 떠나기 위해 만들어진 도시지 영구히 깃들어 살 수 있는 도시가 이미 아니었다. 재개발을 추진하는 곳까지 치면 서울은 아파트라는 콘크리트 덩어리에 불과했다.
212 어릴 적 시골집에는 수많은 신들이 살고 있었다.
백석의 시 「마을은 맨천 구신이 돼서」
218 옛날의 집들은 말하자면 우주의 축소판이었다. 지붕은 집이라는 소우주의 하늘에 해당, 성주신이 이곳을 관장한다. 집터는 땅에 해당, 터주가 이곳을 관장한다. 기둥은 지상 세계와 하늘의 세계를 잇는 하늘 사다리, 이 하늘과 땅 사이에 조왕신, 업, 변손의 신, 수문장, 그리고 인간이 깃들여 산다.
사라진 신들의 연대기-우리가 산 흉가들.
229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다. 6 25라는 극한의 파괴를 견딘 신들이 지금은 감쪽같이 사라져 흔적조차 남기고 있지 않다. 도대체 왜, 어떻게 해서 집에 깃들여 사는 신들은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져버린 것일까? 그 답은 우리 자신들에게 있다.
얼마 전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가 자기가 어머니한테 한 일 중에서 가장 후회되는 일이 무언가에 화제가 미쳤다. 한 친구가 갑자기 가슴을 치며 내가 그때 왜 그랬는지 지금 생각해도 얼굴을 들 수 없다며 이야기를 꺼냈다….중학교 때, 어머니가 굿을, 우리는 학교에서 무당 등의 민속적인 것은 미신이고 버려야 할 낡은 것이라 배웠고 친구는 그걸 곧이곧대로 믿고 있었다…그래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무당을 내쫓고 쓸데없이 미신을 믿는다고 어머니를 나무랐다…그런데 나이가 들어 생각해보니 집을 성스러운 것으로 축복하고 가족들이 그 안에서 보호받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마음만큼 귀중하고 고귀한 것이 세상에 어디 있겠나 싶었다. 교회나 성당에서 목사나 신부들이 기도하고 축복하는 거나 무당이 집을 축복하고 기도하는 거나 별로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드니까 학교에서 들은 서푼짜리 지식을 믿고 어머니를 윽박질렀던 일이 혼자서도 낯이 붉어질 정도로 부끄럽고 죄송하게 생각되었다.
우리가 어릴 때만 해도 시골집에 살고 있던 그 수많은 신들이 어떻게 그렇게 짧은 순간에 감쪽같이 사라졌는가 하는 이유는 이 이야기 속에 잘 압축되어 있다.
239 신들이 사라진, 즉 공동체적 가치가 스며들지 않은 도시는 와우아파트처럼 필연적으로 무너질 수밖에 없다.
240 우리가 이 무너짐 속에서 반성하고 배워야 할 것은 시장이 아니라 공동체적 가치이며, 공동체적 가치와 시장의 균형이다.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서 굳이 사라진 신들의 연대기를 되짚어보는 것도 이 때문이리라.
사라진 신들은 공동체적 가치의 다른 이름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