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 고미숙. p214
Boys, be Homo Kungfus!
질문하지 않으면 걸을 수 없다
참 희한하다. 이렇게 세상이 많이 달라졌는데, 어째서 학교는 여전히 전쟁터인가…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 이런 식의 공부, 아니 전쟁에 대하여…경쟁력의 함정에 스스로 걸려든 꼴이다. 자승자박!
하지만 진정 놀라운 건 그게 아니다. 그 누구도, 어떤 청소년도 이런 상황에 대해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는 것, 그게 더 끔찍한 일이다.
공부란 세상을 향해 이런 질문의 그물망을 던지는 것이다. “크게 의심하는 바가 없으면, 큰 깨달음이 없다.”(홍대용) 고로, 질문의 크기가 곧 내 삶의 크기를 결정한다!
일단 내공이 쌓이면 그 주변에 ‘에너지장’이 형성되어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게 막 끌리게 되어 있거든. 문자 한 번 더 써볼까? “덕은 외롭지 않으니 반드시 이웃이 있다네!(德不孤 必有隣)” 역시 공자님의 주옥같은 말씀이야.
더 중요한 건 그런 공부를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사는 것 자체가 다 공부가 된다는 사실이지. 몸과 인생과 공부가 완전 하나 되는 오묘한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 이 말씀이야. 그러고 나면 아무리 남한테 퍼줘도 깊은 산속 옹달샘마냥 계속해서 솟아나게 되어 있어. 이게 바로 ‘밑져도 남는’ 장사 아니고 뭐냐구?
#’세 개의 절망과 하나의 희망’이 있는 풍경
맹목적 질주-“아무 이유 없어!”
“공부를 왜 하지?” 10억!
그건 질문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 미신도 이런 미신이 없다.
“아무 이유 없어!” 맞다. 이 욕망의 질주에는 아무런 이유도, 명분도 없다. 그저 자본과 권력이 촘촘히 깔아놓은 레일 위를 열나가 밟아갈 따름이다. 앞만 보고 달리는 맹목의 질주-이게 우리 시대 공교육의 현주소다.
“누구냐? 넌!”
제도교육의 부조리보다 대안교육의 부재가 훨씬 더 심각하다…대안이 없는 대안 교육이라? 말장난처럼 들리겠지만, 엄연한 사실이다.
대안학교가 진정 대안이 되려면 가족의 지평을 넘어서는 공동체에 대한 비전이 있어야 한다.
대학은 죽었다!
한마디로 ‘맛이 간’ 지 오래다. 교수와 학생을 ‘스승과 제자’로 엮어주는 지적 파토스가 사라져버렸다. 대학은 더 이상 ‘큰 배움터’가 아니다. 취직 시험에 올인하고 소비의 그물에 걸려 허우적대고, 노후 대책에 골몰한다. 청년이라 하기엔 너무 늙어버린 그들.
대중지성-“찹초는 범람한다”
##학교, 공부에 대한 거짓말을 퍼뜨리다
#학교, 공부를 독점하다
학교는 교육을 위해 이용할 수 있는 자금, 사람 그리고 선의를 독점하고 있을 뿐 아니라, 다른 사회제도나 교육에 관여하는 것을 단념하게 만들고 있다.-일리히, 『학교 없는 사회』
즉, 노동과 여가, 정치 활동과 가정생할 등 삶의 모든 것이 공부가 되는 것을 포기하도록 만들고, 나아가 “그것에 필요한 관습이나 지식을 가르쳐주는 것을 모조리 학교에 맡겨” 버린다.
거짓말 하나- 공부에는 때가 있다?
‘학번 공화국’
연령별 균질화가 만들어내 가장 심각한 망상은, 학교를 떠나는 순간 공부는 ‘이제 끝!’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는 것이다…이건 그야말로 새빨간 거짓말이다. 인간은, 아니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평생 뭔가를 배운다(학인!)
우리 시대는 성차별이 사라진 대신 경제적 가치 이외는 아무것도 사유하지 못하는 지적 주체들을 길러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단언컨대, 그런 것은 공부가 아니다!
공부란 눈앞의 실리를 따라가는 것과는 다른 방향의 벡터를 지닌다. 오히려 그런 것들과 과감히 결별하고, 아주 낯설고 이질적인 삶을 구성하는 것, 삶과 우주에 대한 원대한 비전을 탐구하는 것. 그것이 바로 공부다.
대학로에서 젊은이들이 즐길 수 있는 문화의 내용이란 ‘뻔할뻔자’다. 패스트푸드를 먹고, 카페에서 데이트를 하고, 주말에 공원에서 댄스를 추는 것 정도. 길거리 농구나 연극 감상에 참여하는 이들도 소수의 마니아에 불과하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건 종묘의 노인들이 즐기는 문화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노인의 지혜와 10대의 역동성이 자연스럽게 소통할 수 있는 길은 진정 없는 것일까?…공부 앞에선 모두가 초발심과 호기심으로 가득한 어린아이로 돌아가기 때문. 그러고 보면 공부야말로 노화를 방지하고 노녁을 행복하게 보낼 수 있는 최고의 비결이 아닐까? 대학로와 종삼, 아니 청년과 노인이 ‘통’하는 길은 그렇게 멀리 있지 않다.
거짓말 둘-독서와 공부는 별개다?
제갈량과 허생. 초야에 묻혀 밭을 갈며 살던 제갈량…그 저력의 원천은 대체 무엇일까? 다만 독서를 했을 뿐이다.
남산 아래 묵적골에 살던 허생. 그가 묵적골에서 한 일은? 7년 동안 주구장창, 다만 독서를 했을 뿐이다.
그렇다! 독서야말로 골방에 앉아서도 혹은 초야에서 밭을 갈면서도 천하고금의 이치를 한눈에 꿰뚫을 수 있는 최고의 비결이다.
패스트푸드가 문제인 건 중독성 때문이다. 거기에 길들여지면, 다른 종류의 음식은 숫제 먹을 수가 없게 된다.(게임 중독)
이렇게 된 가장 근본적인 요인은 학교에서 공부와 독서를 분리시켜왔기 때문이다. 학교식 공부법은 애초부터 독서는 그저 개인적 취미나 교양의 영역이고, 공부는 그것과 달리 구체적이고 실용적 지식을 배우는 것이라는 이분법을 유포시켜왔다. 그리고 여기에 대해선 누구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그러니 입시제도가 아무리 바뀌어도, 또 논술이나 수능에서 좋은 점수를 받으려면 독서를 해야 한다고 아무리 떠들어대도 이 이분법적인 통념을 깨기는 무리다.
독서를 외면하는 대안학교라? 언어도단!
『도쿄대생은 바보가 되었는가』를 쓴 다치바나 다카시에 따르면, 도쿄대 학생들 역시 스스로의 힘으로 책을 읽는 능력이 거의 없다고 한다. 그 결과 물리학과 학생들이 대학에 와서 기초 수학에 대한 과외를 받는 실정이란다. 그는 이렇게 단언한다. 그건 “일본의 대학이 모두 쓸모없는 것이 되었다는 의미이다”라고.
거짓말 셋-창의성만 있으면 만사 OK?
문제는 창의성의 구체적 내용. 누구를 위한, 누구에 의한, 어떤 창의성인가가 문제라는 거다.
이반 일리히에 따르면, 학교가 유포한 환상 가운데 가장 나쁜 것이 사람들을 제도적 서비스에 길들이는 것이라 한다. 즉, 서비스가 좋아질수록 삶의 질이 향상된다고 착각한다는 것. 예컨대 의료체계가 복잡해지면 건강해진다고 여기고, 학교가 많아지면 교육수준이 높아진다고 착각하고, 고속도로가 뚤히면 생활수준이 높아진다고 생각하는 식으로. 하지만 그 결과는 자립적 활동력을 상실한 신체, 곧 제도에 길들여진 노예들을 길러낼 뿐이다…우리 교육 현실이 딱 그 꼴이다.
서비스? 환경은 아무리 좋아봤자 환경일 뿐이다.
결국 우리는 모두 속은 것이다.
여건만 좋으면, 지원만 충분하면 활동은 저절로 굴러가리라는 발상, 이것이 바로 학교가 퍼뜨리고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수락한 거짓말의 덫이다.
렛잇비!- 자율성에 대한 심각한 오해. 대책 없는 자유, 정처 없는 방황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카프카가 말했듯이, 추상적인 자유란 없다. 다만 지금 나의 자유를 가로막고 있는 문턱이 있을 뿐. 그 문턱을 넘어설 때 비로소 그 만큼의 자유의 공간이 열리는 법이다. 가령, 지금 10대들은 게임과 포르노에 전면 노출되어 있다. 이 둘의 공통점은 치명적 중독성에 있다. ***거기에 한 번 붙들리면 헤어나기가 어렵다는 것. 그게 바로 억압이다.자유란 ‘그 억압에 얼마만큼 저항할 수 있는가’, ‘그에 맞서 얼마나 능동적으로 새로운 공간을 창출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는 법이다.
학생들은 삶과 사회에 대한 물음이 없다. “공부하는 사람이 의심할 줄 모르는 것은 크나큰 병통이다. 오직 의심해야 자주 분석하게 되고, 그렇게 해서 의심을 깨뜨리면 이것이 바로 깨달음인 것”(이탁오,『분서』)이라 했다.
##고전에서 배우는 ‘미-래’의 공부법
#새로운 지도 그리기
학교는 20세기 초 근대 국민국가의 도래와 함께 시작.
학교는 어디까지나 20세시 근대의 산물일 뿐이다. 따라서 정말로 학교식 공부의 대안을 꿈꾼다면 근대적 제도교육의 틀을 넘어서는 탈근대적 운동이 요구된다.
고전이야말로 진정, ‘미-래’적인 것. 미래는 영원히 오지 않는 시간이지만, ‘미-래’란 ‘아직 오지 않았지만, 곧 도래할’ 시간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미-래의 맔스주의』
#’앎의 코뮌’에 접속하라!
학교는 배움터가 아닌 제도로서 존재하는 것. 근대 사회에서 학교란 스승이 있고 학문이 있는 곳이 아니라, 어떤 제도나 시스템으로만 작동한다.
근대 이전, 학인들은 스승을 찾아 천하를 떠돌았다.
그 시절엔 공부를 한다는 건 어떤 스승의 문하에 들어간다는 걸 의미했다. 다시 말해, 그 스승의 경지에 도달하고 싶다는 발심이 공부의 출발점이자 원동력이었던 셈.
근대 이전, 배움터란 기본적으로 ‘코뮌’이었다.
스승, 도반, 청정한 도량으로 이루어진 앎의 ‘코뮌’. 코뮌이란 기성의 권력과 습속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삶을 구성하고자 하는 이들의 자유롭고 창발적인 집합체 혹은 네트워크를 말한다. 스승을 만난다는 건 바로 그 코뮌에 접속한다는 뜻이었다.
그럼, 왜 그토록 스승을 찾아 헤매었던가? 스승을 만나야만, 그 ‘코뮌’에 접속해야만, 지리멸렬하던 공부가 단번에 도약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그리하여 스승이면서 친구이고 제자이면서 동시에 평생의 지기가 되는 ‘코뮌적’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요즘 부모들 역시 자식 교육에 일생을 다 걸지만 자식에게 좋은 스승을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경우는 별로 보지 못했다.
공부는 네트워킹!
가장 쉬운 방법은 세미나 때마다 소박한 파티를 여는 것. 세미나를 지식의 향연이자 음식의 향연이 되게 하는 것.
지금 당장 동료들을 불러 모아 살아 움직이는 학습망을 조직하라…최근의 뇌과학 성과에 따르면, 뇌의 존재 이유는 ‘네트워킹’하는 데 있다. 네트워킹을 하지 못하면 신경망이 점차 끊어져 결국 치매나 죽음에 이른다는 것. 공부 역시 마찬가지다. 스승과 벗을 찾아가는 네트워킹을 멈추지 않는 것, 그것이 곧 공부다.
”군자는 글로써 벗을 만나고, 벗으로써 어짊을 북돋운다.” 『논어』, 안연편
#암송과 구술- 아는 만큼 행복하다!
암기를 하면 신체가 허약해지지만, 암송은 신체 전체의 기운을 활발하게 소통시킨다. 좋은 공부는 반드시 몸을 건강하게 해준다. 따라서 몸을 소외시키지 않는 공부, 그게 진짜다!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
근대 이전, 모든 교육은 소리를 통해 이루어졌다. 선비들의 하루 일과는 사서삼경을 비롯한 각종 고전들을 소리 높여 읽는 것으로 시작됐다.
다산 정약용의 시.「산 북쪽에서 책 읽는 소리를 듣고 짓다」
온 세상에서 무슨 소리가 가장 맑을꼬/눈 쌓인 깊은 산속의 글 읽는 소리로세…사람 집에 잠시라도 끊겨서는 안 되는 것/ 마땅히 세상과 더불어 함께 이루어야 할 일이로세
아울러 소리를 내려면 턱관절을 유연하게 움직여야 하는데, 이 운동은 특히 뇌를 자극하는 데 아주 효과적이다. 음식을 꼭꼭 씹어 먹어야 한다고 하는 것도 바로 이 점과 관련이 있다.
구술, 리더십과 유머의 원천
지금 ‘학교식 공부’는 말 따로 몸 따로 삶도 따로 논다…몸과 삶이 일이관지하는 공부를 해야 한다. 어떻게? 암송과 구술이 그리로 인도해줄 것이다.
#독서로 인생역전!-호모 부커스(Homo Bookus)
학교가 퍼뜨린 가장 질 나쁜 거짓말은 공부로부터 독서를 분리시켰다는 사실에 있다. “책 보지 말고 공부해!”
“내 마음은 책을 열면 곧 거기에 있다. 책을 읽으면 그 사람이 보일 것이요. 정신은 또 천만 배나 잘 알게 될 것이다. 그러면 나 이탁오를 하루 종일 면대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탁오, 『분서』
장금이. 그녀는 늘 뭔가를 배우고 터득해 나간다. 언제 어디서나 스승을 만나고, 친구들과 깊은 우정을 나눈다. 말하자면 그녀는 늘 어디서건 앎의 코뮌에 접속한다.
고전 읽기. 골방에 앉아서도 천하의 이치를 관통할 수 있는 건 바로 이 때문이다.
고전 읽기는 어렵다? 나는 체력도 약하고 장비도 불충분하다.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친구를 불러 모으면 된다! 당연히 혼자서는 어렵다.
스승과 친구는 하나다. 스승이면서 친구처럼 속내를 털어놓을 수 없으면 스승이 아니고, 친구면서 스승처럼 배울 게 없다면 역시 친구가 아니다.
내가 꿈꾸는 ‘인터-꼬뮈넷’. 세상 사람들이 편안히 앉아 글을 읽는다면, 천하가 태평해질 것이다. -『연암집』, 「원사」
#글쓰기는 신체를 어떻게 단련시키나
공부의 최종심급, 글쓰기.
모든 공부가 귀환하는 최종심급, 그것은 바로 글쓰기다.
차이를 구성하라. “기존 연구와 다른 주장이 뭐야?”, ‘너 자신의 고유한 문제를 설정하라’
일이관지(一以貫之). 하나의 이치로 모든 것을 꿰뚫는다. “착상은 흥미롭지만 논리가 거칠다”
새로운 질문을 던질 것, 하나의 논리로 관통할 것. 이 두 가지가 내가 석사과정 내내 갈고닦은 글쓰기의 초식이었다.
지전능변(知典能變),고전을 알아야만 능히 변신을 꾀할 수 있다
돌이켜보면, 내가 그 ‘살벌한 무림’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무엇보다 텅 비어 있었기 때문이다.
지식의 양이 많건 적건 ‘비움’은 배움의 필수적 조건이다.
그때 이후 연암 박지원은 내 평생의 사우(師友)-스승이면서 친구이고, 친구이면서 스승인 존재-가 되었다. 무엇보다 그를 통해 우주 만물이 다 텍스트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세상이 책이다)
삶이 곧 글이고, 글이 곧 삶이 되는, 이런 경지를 일러 유목적 글쓰기라 할 수 있을까?
“어떤 글을 쓰고 싶으세요?” 생각의 지도를 변경하고 삶의 행로를 바꿀 수 있는 글, 그것이 내가 꿈꾸는 글쓰기의 지평이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싶으면 자신의 문체를 주의 깊게 살펴보라. 거울보다 더 투명하게 자신을 비춰줄 것이다.
운명의 궤적을 바꾸고 싶다면, 문체를 바꾸면 된다. 거꾸로, 문체를 바꾸고 싶으면 모름지기, 표정을, 몸을, 삶을 바꾸어야 할 것이다.
“생긴대로 쓰고, 쓰는만큼 살아간다.” 호모 쿵푸스의 글쓰기 이념은 이 한 구절로 압축된다.
##인생의 모든 순간을 학습하라-“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평생 일대사
공부를 하다보면 또 한 번의 비약이 일어난다. 즉, 언어와 문자의 경계를 넘어 세상 모든 것이 ‘책’이 되는 경이를 체험하게 된다. 그야말로 문자와 몸과 세계가 혼연일체가 되는 순간, “앎은 행위에서 시작되고, 행위는 앎의 완성”(왕양명)이 되는 ‘지행합일’의 경지, 이것이 바로 고전의 학인들이 지향했던 공부의 진경이다.
불행히도 근대 지식은 이런 역동성과 충만감을 다 잃어버렸다. 근대 지식은 지식의 주체도, 그것이 겨냥하는 대상도, 그 누구도 행복하게 해주지 못한다. 앎이 일상과 분리되면서 외부와의 소통을 근절한 대가다.
#”천지에 가득한 책의 정기”
고전의 시대엔 무엇보다 자연이 최고의 책이자 스승이었다. 자연과의 끊임없는 대화가 고전 공부의 가장 중요한 영역이 된 것 그 때문이다. 연암은특히 자연에 대한 사유가 남달랐다.
#몸과 일상, 문명의 거처
우리는 연암 시대처럼 자연의 기호을 읽어낼 기회도, 능력도 거의 없다. 문명이 자연을 저 아득한 변경으로 몰아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겐 이 문명이 곧 텍스트가 되는 셈이다.
자폐증을 앓는 사회. “죽고 싶지 않으면 도서관엘 가라!”
학교에서 밥에 대해 가르치지 않는 건 정말 문제가 많다. 요즘 학교에선 다 급식을 한다…음식 문화에 대하여 본격적인 탐구에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만 돼도 학생들이 편식과 탐식을 고칠 수 있을 텐데 말이다…요즘 애들은 빗자루를 쥐는 법도 모른다는데 더 말해 뭣하겠는가.
이게 다 교육의 질을 서비스의 개선으로 착각한 데서 온 결과다.
스승, 배움의 전령사
스승이면서 친구이고, 친구이면서 스승인 사우.
계몽이 아니라 촉발, 훈계가 아니라 감염. 이것이 동서고금의 위대한 스승들이 취한 최고의 교육법이다.
그런 점에서 부모들 역시 마찬가지. 왜 부모들은 공부하지 않는가? 따지고 보면 부모 자식 관계를 돈독히 하는 데도 공부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배움과 가르침이 하나라는 걸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 ‘토요서당’ 요가, 논어, 현대시와 고전시, 영시와 팝송 등을 암송하는 프로그램. 이걸 담당하는 선생님들은 소위 전공자가 아니다.
천하를 그대 품안에. 학교는 공부를 독점함으로써 전 사회를 학교화하고 말았다. 자격증과 학벌, 국경 등 온갖 차별을 뼈와 살에 사무치게 만들어버린 불모적 공부법! 하지만, 그런 공부를 전복해버리면 천하가 다 배움터가 된다…필요한 건 배움의 열정뿐. 그러므로 스승이란 무엇인가? 가장 열심히 배우는 이다. 배움을 가르치는 이, 배움의 열정을 촉발하고 전염시키는 배움의 헤르메스, 그가 곧 스승이다.
“두번째 화살을 맞지 마라!” 살아가면서 부딪히는 희노애락은 그 자체로는 번뇌가 아니다. 다만 사람들은 거기에다 자신의 전도망상을 덧씌움으로써 스스로 번뇌를 쌓아간다. 그게 바로 두번째 화살이다. 그렇구나! 그동안 나를 사로잡았던 온갖 감정의 회오리는 내 스스로 지은 두번째 화살이었구나.
뇌과학적으로 볼 때 ‘꿈과 상상, 그리고 생각은 동일한 형태’라는 것. ‘생각을 생각하기를 멈추지 말라’, ‘진화론적으로 보면 꿈은 인류가 발명해낸 것이다’
누구나 지금, 그 자리에서 함께 행복해야 한다. 공부 또한 그러하다. 공부하면 이 다음에 훌륭한 사람이 되고, 뭔가를 얻게 될 거라고 말해선 안 된다. 공부하는 순간, 공부와 공부 사이에 있다는 바로 그것이 공부의 목적이자 이유여야 한다. 고로 공부는 존재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공부는 어떻게 혁명과 조우하는가?
고향은 없다. 완벽한 자는 자신의 장소를 없애버린다.
노동해방이란 노동자가 중산층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그대로 오늘은 이 일, 내일은 저 일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야만 ‘소외된 노동’이 아니라 자유로운 활동을 능동적으로 창안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선 무엇보다 스스로 자율적 존재가 되어야 한다. 즉 나의 일상과 세계를 하나의 ‘서사’로 엮을 수 있는 통찰력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삶으로부터 소외되지 않을 수 있다.
일상의 억압적 배치를 전복하는 운동이 될 때 공부는 혁명과 조우한다.
#공부해서 남 주자!
삶이냐? 소유냐?
‘돌 화폐 섬 이야기’, 관리들이 각 집에 있는 ‘페이(돌)’위에다 정부 소유의 검은 표시를 하였다. 그러자 원주민들이 나와서 일을 시작했고 일이 끝난 다음, 정부는 그 표시를 지워주었다고 한다. -고병권, 『고추장, 책으로 세상을 말하다』
재테크, ‘부동산 시세’라는게 아파트라는 돌 화폐에다 낙서를 했다 지웠다 하는 것과 대체 뭐가 다르단 말인가.
“삶이냐? 소유냐?” 이 고전적 질문은 이제 이렇게 바꾸어야 한다. “삶의 주인이 될 것인가, 자본의 노예가 될 것인가?”
미꾸라지-되기. 자신의 본성대로 움직일 뿐인데, 다른 이들에게 절로 생명의 기운을 전파해주는 존재! 이것이 근대 이전, 지식인들이 추구한 이상형이다.
탈학교적 대안이란…공공의 재원을 이용하는 일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과 환경 사이에 새로운 양식의 교육적 관계를 만들어 내는 일이다…-일리히, 『학교 없는 사회』
이런 변혁을 추동하려면 사적 소유로부터 자유로운 존재들이 출현해야 한다. 진정한 공부는 그 자체로 이미 축복이다. 천하를 품을 수 있는데, 대체 뭐가 더 필요하단 말인가?
“무릇 어진 이란 자기가 서고자 하면 남을 세워주고, 자기가 성취하고자 하면 남을 성취하게 해준다” 『논오』, 「옹야」편
최고의 경지에 오르면 ‘공부의 달인’들처럼 퍼준다는 생각조차도 없이 퍼주게 된다. “다만 힘차고 유유히 장강과 대해를 헤엄쳤을 뿐인데, 그 기운으로 다 죽어가는 뱀장어들을 살려낸 미꾸라지”처럼 말이다.
고로, 공부해서 남 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