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읽느냐는, 그 자체로 하나의 학문이다.
사실을 넘어선 텍스트 읽기
‘사실’과 ‘언어’를 매개하는 ‘저자’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흐르는 물을 보며 공자가 남긴 한마디에서 선인들을 무엇을 읽어냈는가?
독서의 학? 언어를 단순히 ‘사실을 전달하는 매개’로 간주하는 견해, 즉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기만 하면 만족하는 데 그치지 않고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를, 저자의 심리를 파고들어 파악하는 능력
#언어와 사실
본래 책의 언어는 잊히고 버려진다. 처음에 말한 것처럼, 그것은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저 이 자연스러움에 따르기만 하는 것이 인식의 방법으로, 또한 학문의 방법으로 충분하고 완전할까.
‘언어’라는 것은 본래 일정한 사실을 전달하는 기호로 발생한 소리다. 똑같은 소리지만, 음악이 막연한 사태의 상징인 것과 다르다. 언어가 있는 곳에 반드시 그것과 관련된 사실이 있다. 사실과 연결되지 않는 언어는 있을 수 없다.
어째서 사실만 기억되고 언어는 기억되지 않을까.
#명자실지빈야
‘언어’란 사실의 빈객, 사실의 종자이다.
명목적인 것 일반에 대한 불신은 『장자』라는 책의 철학에서 하나의 테제를 이루고 있다. 『장자』의 문장이 동시대의 여느 산문과 달리 기묘한 난해함을 품고 있는 것도 언어불신 사상을 실천한 방식이 아니었을까.
#말과 글
서부진언, 언부진의 (書不盡言 言不盡意).
“글은 말을 다 표현하지 못하고, 말을 뜻을 다 표현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성현의 뜻은 볼 수 없는 것일까.
서書 는 언言을 기록하는 수단이나, 언에는 번쇄함이 있다. 혹은 초하 같지 않아, 언이 있으나 자字가 없어, 서록書錄하려 해도 그 언을 남김없이 다 (서록)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서부진언書不盡言이라 말한 것이다.
#고립어, 넣고 빼는 자유
중국에서처럼 ‘서’와 ‘언’ 양자의 괴리가 심한 경우는 세계 언어사에서 보기 힘들다. 그것을 가능케 한 것은 중국어 구조가 ‘고립어’라는 점이다. 고립어란 어는 단어든 필연적으로 맺어져야 할 상대를 갖지 않는 성질이 있다. 즉 ‘넣고 빼는 것’이 자유롭다.
#간결함, ‘서書’의 이상
#『신당서』, 문장의 변혁
어찌해서든 당나라 역사는 다시 쓰여야 했다. ‘당’이라는 왕조가 빛나는 시대였던 만큼 더욱 그러했다는 것이 『신당서』를 저술한 동기이고 이유였다. 그래서 올바른 문체로 고쳐 쓴 『신당서』는 “그 사事가 전보다 늘었고, 그 문文은 전보다 줄었다.”
‘자네 같은 사내에게 역사를 쓰게 했다가는 얼마만큼이나 글자 수가 필요하겠는가. 나라면 이렇게 쓸 것이네’하며, 간결한 글자 수로 고쳐 써서 보여주었다. ‘문文의 생省’이야말로 『신당서』파가 생각한 문장의 정도였다.
#저자의 태도 읽기: 사마천
저자가 전달한 사실 만큼, 사실을 전달하는 저자 자신도 중시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개인의 바깥에서 펼쳐지는 것이 무한함과 동시에, 개인의 내부에 펼쳐지는 것도 무한할 터이다. 학문은 바깥에 펼쳐진 무한을 추구하는 데만 너무 열중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마천이 ‘말한’ 언어를 만약 모든 학자가 망각한다면, 그것은 학문에 중대한 결함을 낳는다. 역사가가 얻어낸 사실을 인용문과 같은 언어로 저자 사마천이 썼다는 것 또한 인간의 중대한 사실임을 놓쳐버리고 마는 것이다.
#’생략’의 문제
『사기』에 있었던 여덟 자가 『한서』에서는 생략되어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다음 대목에서 부모의 칭호가 제시되므로 이 여덟 자를 중복이라 여긴 것일까. 아니면 사마천의 원문은 제실의 선조에 대한 경의를 지나치게 잃었다고 보아 생략했던 것일까.
#저자를 읽는 독서
저자 사마천이 ‘고조의 범상치 않은 인상’이라는 외적 사실을 전달하려고 이 다섯 자를 쓴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또한 ‘隆準而龍顔’ 다섯 자로 이루어진 언어가 지닌 기괴한 분위기에 마음이 기울어진, 사마천 자신 안의 내적 사실에 의해서 이 다섯 자는 쓰였다.
#저자의 마음을 읽다
고대의 합리주의자 사마천은 인간의 용모란 우연히 부여받은 것으로 인격과 그다지 관계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즉 용모는 인간의 전기에서 그렇게 중하지 않다, 그러므로 기록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다, 그러한 주관이 있지 않았을까.
#역사 쓰기에 대하여
『태시공자서』는 말한다. 치욕을 당하면 노예조차 자살한다. 어째서 나는 자살하지 않았을까. 인간이 이룬 인간의 역사를 인간을 위해 쓴다. 그 일을 아직 완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고금의 문장에서 이처럼 비통한 글을 나는 알지 못한다.
#독서의 학: 인간의 필연을 더듬다
‘어학에 의한 철학’이라는 지점이야말로 ‘독서의 학’의 요체다. 우리 시대에 인간의 필연을 추구하는 학적인 작업, 즉 철학은 ‘총론의 언어’로 말하는 것이 일반적 관습이 되어 있다. ‘독서의 학’은 그것과는 다른 방법으로 인간의 필연을 더듬으려 하는 작업이다.
‘독서의 학’이란 언어를 통해 인간을 탐구하는 작업이다. 책의 언어에 입각하여 사색하는 일이다. 생각하기 위해 읽는 일이다.
#문학의 직무
좀 더 보편적인 것으로 향하는 파문을 낳는 개체를 소재로 삼는 것이 문학의 직무이다. 이는 복수의 개체가 보이는 방향을 처음부터 문제로 삼는 철학의 언어와는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소설에는 반드시 주인공이 있고, 시는 시인 개인의 찰나의 감정이다.
#공자의 진의를 읽다
#독서의 학: 이법理法에 대한 성찰
유한한 것, 더구나 이미 주어진 유한한 것을 가지고 무한에 대응해야 하는 언어는 본래 운명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이렇게 근본적으로 존재하는 부자연스러움에 대한 저항으로, 뛰어난 언어는 있는 힘껏 복잡한 파문을 담으려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모든 오의는 누군가 궁구할 이가 있으리라. 이 리理가 있다고 믿고, 거짓을 버리고, 마음이 미치는 곳 성실하게 다하면, 신명도 이것을 받아줄 것이다.
모든 서물 깊숙한 곳에 숨어 있는 진실과 성심정의한 독서라는 작업이 존재하는 한, 가령 내 손에서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미래의 학자가 반드시 도달할 것이라고 말하는, 겸허하고도 적극적인 말로 읽을 수 있다.
『신당서』의 저자들은 왜 『구당서』를 새로운 언어로 다시 썼을까? 『논어』부터 『만연집』에 이르기까지 어째서 주석가들의 설이 이다지도 분분할까? 이는 선인들이 언어가 전하는 ‘객관적 사실’을 넘어 ‘언어 자체가 갖는 사실’을 읽어왔기 때문이다. 언어는 이러한 독법을 통해 중량을 더하고 무한으로 나아간다(‘텍스트 읽기’의 무한). 그러나 우리 시대는 이러한 독법을 잃어버렸다. 언어의 사실과 더불어 텍스트를 읽는 것, 이것이 요시카와 고지로의 “독서의 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