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생활의 혁명. 라울 바네겜. p392
원제『젊은 세대를 위한 삶의 지침서』
프랑스 68혁명 세대의 지침서, 상황주의인터내셔널
#삶의 일상적 영원성
한 시대를 읽고자 하는 책은 부정확한 생성의 역사만을 증언한다. 시대를 바꾸는 책은 미래에 있을 변혁의 밭에 변화의 씨를 뿌린다.
고립을 바꾸고 단조로움을 바꾸고 거짓말을 바꾸는 것이 무엇에 쓸모가 있는가! 실제적 변화의 환상이 고발되는 곳에서는 환상의 단순한 변화도 참을 수 없는 것이 된다. 그런데 그런 것이 현재의 상황이다. 경제는 끊임없이 더 많이 소비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쉼 없이 소비하는 것은 가속화된 속도로 환상을 바꾸는 것이며 그것은 점차 변화의 환상을 무너뜨린다. 사람들은 ‘가제트’와 폭스바겐과 ‘포켓북’의 폭포수에 의해 만들어진 빈 공간에서 변화되지 않고 얼어붙은 채 홀로 발견된다.
풍요로운 상태는 훔쳐보기의 상태이다. 각자는 자신의 만화경을 갖고 있다. 손가락을 조금만 움직여도 영상이 변한다.
문화가 각자의 창조성에 던지는 도전은 더 이상 이론적인 ‘무엇을 할 것인가?’에 있지 않다. 그것은 혁명적 사실의 실천 안에 있다. 모든 다른 열정들을 가능케 하는 축이 되는 열정을 혁명 안에서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은 쾌락의 그림자만 가질 뿐이다.
우리가 얻을 것은 즐거움의 세계요, 우리가 잃을 것은 권태뿐이다.
#어떻게 착한 아이를 악하게 만들 것인가?
“착한 아이”는 “착한 노동자”가 된다. 스타의 스펙터클을 소비하는 동안 청소년이 아무런 불만을 느끼지 않는 것처럼 스펙터클에 길들여진 착한 노동자는 소비를 할 수 있는 능력이 보장되는 한 행복하고 순종적이 된다. 미디어의 스펙터클에 자기를 맡기는 데 익숙해진 청소년은 노동자가 되어서는 소비의 스펙터클에 삶을 맡기고 허구의 행복을 만끽한다.
하지만 스펙터클은 완전한 자아일치의 행복감을 제공하지 못한다. 스펙터클은 불안감을 잠시 은폐할 뿐 해소시켜주지 않기 때문이다. 청소년이 행복감을 느끼는 것은 스펙터클 속에서 스타와 자신을 일치시키고 상품을 소비할 때뿐이다. 스펙터클이 끝나고 소비가 완료되면 청소년은 다시 불안정한 상황 속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절망한다…이렇게 청소년은 자신의 진정한 삶에서 벗어나 스펙터클의 세계 속으로 편입된다. 이렇게 해서 청소년은 정말로 “착한 아이”가 된다.
어떻게 하면 착한 아이를 악하게 만들 수 있을까? 다시 말하면 어떻게 아이가 스펙터클에 저항할 수 있도록 할 수 있는가? 어떻게 청소년의 전복적 파괴력을 강렬한 소비욕구로 전환시키지 않고 고스란히 청소년 자신의 삶을 향해 사용하도록 만들 수 있는가? 어떻게 청소년이 생존을 거부하고 삶을 선택하도록 할 수 있는가? 라울 바네겜은 이 책에서 이런 질문들에 대해 답을 하고자 하는 것처럼 보인다.
40년 전에 쓴 책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설득적인 것은 사회가 아직도, 아니 오히려 더 심하게 생존만을 강요하는 스펙터클의 사회이기 때문이다.
상황주의자들의 탈출구는 먼 시간 저편의 혁명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일상적 삶을 재창안하는 것이었다. 세계에 대한 지각을 변형시키는 것과 세계의 구조를 변화시키는 것은 동일한 일이다. 사람들은자신을 해방시킴으로써 권력관계를 변화시킬 수 있고 그리하여 사회를 변형시킬 수 있다. 따라서 그들은 사람들을 습관적인 사고방식과 행위양식으로부터 떠밀어 내기 위해 일상적이고 통상적인 것을 뒤흔들어 놓을 상황들을 구성하고자 했다 http://blog.aladin.co.kr/mramor/921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