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 승효상. p281
#서시
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_박노해
#진실은 현장에 있다
건축설계라는 것은 우리 삶을 조직하는 일이며, 건축은 어디까지나 삶에 관한 이야기이다. 삶의 실체를 그려야 하는 건축가에게 가장 유효한 건축 공부 방법이 바로 여행이다.
건축을 어떻게 보야야 그 본질에 대해 알 수 있을까. 간단히 말하면, ‘공간의 조직’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건축의 외관이란 내부 공간을 감싼 결과일 뿐이어서 부차적인 것이다. 공간의 조직이란 우리가 ‘사는 방법’을 의미한다. 쉽게 말해 집의 거실과 주방, 침실 등을 얼마만큼 크게 하고 어떻게 배치하느냐에 따라 사는 방법이 달라진다. 그러니 건축설계라는 것은 우리 삶을 조직하는 일이며, 건축은 어디까지나 삶에 관하 이야기이다.
건축설계라는 일이 남의 삶을 조직해 주는 것인 만큼, 건축가가 좋은 집을 설계하고 짓기 위해서는 당연히 그 집에 사는 이들의 삶에 대한 애정과 존경을 가져야 하고, 이는 우리 삶에 대한 지극한 관심의 토대 위에서 가능한 일이다. 그러니 바른 건축 공부란 우리 삶의 형식에 대한 공부여야 한다. 남의 삶을 알기 위해서는 문학과 영화 등을 보고 익혀야 하며, 과거에 어떻게 산 것인지 알기 위해서는 역사를 들추지 않을 수 없고, 나아가 어떻게 사는 게 옳은가를 알기 위해 철학을 공부해야 하므로, 건축을 굳이 어떤 장르에 집어넣으려 한다면 그것은 인문학이어야 한다.
내가 여행을 통해 얻는 첫 번째 유효함은 ‘진실의 발견’에서 비롯된다.
우리에게는 일상의 삶을 사는 동안 알게 모르게 축적되는 환상이 있다. 저 멀리 내가 가보지 않은 곳에 사는 이들과 그들의 환경에 대해 읽고 들은 지식으로 생긴 상상인데, 이는 가공이라는 거짓이기 쉬우며 그래서 힘이 없다. 건축은 현실의 땅을 디디고 선다. 그래서 나는 여행을 통해 현장에 서서 그 건축의 실체를 보면서 내가 가졌던 환상이 무너지고 새로운 힘을 얻게 되는 경험을 수도 없이 해왔다. 바로 진실은 현장에 있고, 그 실체는 동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행을 마치고 온 사람의 얼굴은 늘 광채를 띠게 된다.
#영적 성숙을 이루게 하는 건축
영혼이 거주할 수 없는 건축, 그것은 박제이며 세트일 뿐이다.
무려 15년 동안 김수근 건축을 추종했던 나는 이미 내가 아니었으므로 급격한 정체성의 혼란을 겪어야 했다. 그러다 두 개의 건축을 만나게 된다. 바로 이것이 내 건축을 찾는 데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첫번째는 서울에 있는 ‘종묘’이다.
서울은 6백 년 고도의 역사를 자랑하지만 개발지상주의자들의 광풍이 불과 지난 3,40년 사이에 서울의 동양화적 아름다움을 왜곡된 서구의 도시이론으로 황칠하고 덧칠하여, 도시는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졌고 고요한 풍경은 온갖 악다구니의 모습으로 개벽되고 말았다. 도처에 물신주의의 망령이 꿈틀대는 이 서울 안에, 그래도 부패한 서울을 끊임없이 정화시키는 장소가 있으니 여기가 종묘다.
그 이후 나는 샌디에이고에 있는 ‘소크 연구소’를 방문하게 된다. 루이스 칸이 설계한 이 건축은 가운데에 비어 있는 마당을 두고 두 연구동이 양편에 도열하여 빈 공간을 태평양으로 연결시킨 불후의 명작이다. 이 건축에서 마당은 가장 본질적인 요소이다.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태양과 그 태양이 만드는 그림자의 농도와 깊이에 의해서, 변하는 계절에 따른 하늘의 색깔에 의해서, 기후에 따라 변화하는 바다와 하늘의 표정에 의해서 비워진 마당은 수시로 다른 표정을 짓는다…이 마당은 더불어 무한히 열려 있으며 떄로운 어두운 색으로 변한 하늘의 벽으로 닫힌다. 아마도 일몰 시간이면 태평양의 수평선은 불타는 벽으로 나타날 것이며, 하루의 이 마지막 시간이야말로 칸이 줄곧 추구해 온 절대공간, 본질적 공간에 가장 근접해 있는 건축의 장엄미일 것이다. 실로 이는 비움이 갖는 절대미학이었으니, 수천 년 동안 채우기를 목표 삼아 온 서양인들에게 충격으로 다가온 것이다.
’비움’, 이 용어는 이제 서양의 현대건축에서 새로운 시대 새로운 건축의 키워드가 되어 있지만, 이는 본디 우리 선조들의 상용어였으며 우리의 옛 도시와 건축의 바탕이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우리에게 비움은 추방해야 할 구악이 되었고, 채우기에 몰두한 나머지 우리 도시는 악다구니하는 한갓 조형물과 건조물로 가득 차고 말았다. 우리의 삶과 공동체는 그래서 서서히 붕괴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마당 깊은 집, 그 ‘불확정적 비움’의 아름다움
부산 구덕산 기슭 밑에 지어진 그 마당 깊은 집의 풍경은 지금도 내 가슴에 뚜렷한 비움의 이야기이다.
일본 교토에 있는 ‘료안지’라는 절의 마당. 15세기에 서종 불교의 계열로 세워진 이 절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도시인 쿄토에 있는 모든 역사적 건축 중에서도 가장 서양인들을 매료시킨 건축일 게다. 나에게도 그렇지만, 관점은 그들과 대단히 다르다…모든 것은 정지되어 억만 년의 세월이 화석화된 것처럼 보였다…그러나 의문이 들었다. 이게 과연 비움일까? 더구나 불확정적 비움이라니…지금도 내 가슴에 뚜렷한 비움의 이야기. 화장실과 우물이 하나씩 있는 길다란 마당의 아침은 매일 북새통이었고, 해질녘엔 저녁 짓는 냄새와 웃음이 늘 마당을 메웠으며, 곧잘 비워진 마당은 햇살과 빗줄기를 시시때때로 받았다. 그게 하이데거가 이야기한 거주의 아름다움이며 우리 존재 자체라는 것을 늙어서야 알았다.
#홀로 됨을 즐기는 고독의 집, 독락당
위엄 있는 다른 집의 사랑채와 달리 독락당은 집 자체가 그리 중요하게 보이지 않는다.
이 집의 모든 건물들은 그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철저히 마당을 형성하기 위한 한낱 도구였으며. 각기 다른 마당은 각기 독립된 세계였다. 불혹을 넘어 지천명을 앞둔 회재는 그런 마당 어디에서도 은둔하며 ‘독락’하려 한 것이다.
#화和와 화華 그리고 화禍
창호지를 투과하며 밀려드는 빛에 몸을 일으켜 하얀 장지문을 밀었다. 아, 그 눈부심이란, 밤새 내린 눈으로 천지는 완벽히 순백이었다. 이런 지극한 아름다움…그게 화和였다.
#베를린과 김수근 건축
거의 모든 행정의 결과는 건축으로 남아 후세에 전해진다.
PQ(Pre-Qualification입찰 참가자격 심사제)라 고 해서 큰 프로젝트는 경험이 있는 자에게만 준다고 하니, 그렇다면 대통령은 해본 자만 하는가? 이를 바로잡으라고 국가건축위원회를 만들었더니 이름도 모르는 위원들로 채워져 정부마저 무시하는 있으나마나 한 위원회로 추락하고 말았다. 그러니 민간에서도 용산지구 같은 엄청난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모두 외국의 건축가들만 초청하며 우리 스스로를 조롱하는 판국이라 우리의 변두리성은 헤어날 길이 없다.
한국건축이 이런데 오히려 베를린은 2011년, 25년 전에 세상을 떠난 건축가 김수근을 초청하여 전시회를 열었다…55세의 나이로 요절. 지금 세계에 남아 있는 걸작들이 그 건축가들의 나이 일흔 즈음에 설계된 것을 상기하시라. 그가 아직 살아 있다면 얼마나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였을까.
오프닝에 참석한 한 건축평론가는 이런 놀라운 김수근의 유산을 이어받은 한국의 현대건축이 어떤지 내게 물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까.
국가여, 한국건축에 도움 주지 않아도 되니 부디 방해는 하지 말라.
#책을 불태우는 자는 결국 인간도 불태우게 된다
20세기의 베를린은 광기의 세계사를 특별히 압축한 도시이다
베를린을 여럿이 여행하는 것, 그것은 야만이다.
#코르도바의 골목길에는 시간의 윤기가 흐른다
그 길에 서면, 나는 그들의 삶이 만드는 일상의 예기치 못한 풍경에 새롭게 감동받는다. 건축은 건축가가 완성하는 게 아니라 그 속에서 이뤄지는 삶에 의해 완성된다.
지도에서 결코 파악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이미 많은 정보를 통해 짐작할 수 있지만 백이면 백, 천이면 천, 다 다른 삶의 실체적 풍경은 그 자리에 서서 그들의 숨소리를 듣지 않으면 도무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지도 속에 나타난 마을 구조를 머리에 넣고도 그 길에 서면, 나는 그들의 삶이 만드는 일상의 예기치 못한 풍경에 새롭게 감동받는다.
건축은 건축가가 완성하는 게 아니라 그 속에서 이뤄지는 삶에 의해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 이름으로 건축해야 하는 때가 되었지만 나는 나를 모르고 있었다. 김수근이라는 이름의 건축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치장하고 있었으므로, 그리고 그게 너무도 익숙하였던 까닭에 나는 내가 생소하였다. 밤바다의 노도와 광풍, 암흑에 휩쓸려 처절히 고독할 수밖에 없는 몇 년을 보낸 다음인 1992년 가을, 나는 ‘빈자의 미학’이라는 어귀를 내세우며 ‘승효상 건축’을 하겠다고 선언하게 된다…그리고 다시 우리 사회를 바라보며 지식인으로서, 건축으로써 할 수 있는 나의 의무와 능력을 파악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니 다시 배울 게 너무도 많았다. 달동네를 후비고 다녔고, 읽었던 책도 다시 들추어 또 깨달았다. 일상에서 만나는 이들이 달라 보였으며 심지어는 아침에 문살을 문지르는 햇살과 저녁의 석양빛에서도 혹은 나뭇잎과 한 줄기 바람에서도 나는 배우게 되었다.
세상이라는 자체가 배움터였다. 이들과 모든 사물들이 다시 나의 멘토가 된 것이다…그러니 우리 일상은 너무도 신비스럽다.
#죽음의 형식
스톡홀름에 있는 우드랜드 공동묘지에 대해서는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 옹고집쟁이 건축가 시구르트 레베벤츠의 건축적 서사로 이루어진 그 죽은 자의 세계는 ‘사는 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가’를 우리에게 일깨워 주는 성서적 풍경이었으며, 그래서 한 바퀴를 돌고 나면 우리는 우리 삶의 아름다움에 대해 다시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현실을 떠올리면 ,이내 정기용 선생과 나는 우리들이 가진 죽음의 풍경에 좌절하였다.
집값의 하락만을 걱정하는 천박한 물신주의는 죽음의 형식을 우리 주변에서 내쫓아 우리의 도시에서 경건은 눈을 씻고 보아도 볼 수 없게 되었음을 한탄하였다. 저 멀리 외진 곳으로 몰린 묘지들은 하나같이 기괴한 돌 장식으로 범벅이 되어, 그 천박함에 절망하였다.
#영원한 안식은 최초의 집에 거주하리니
직육면체의 석회암으로 만든 유대인의 무덤. 그들이 최후에 가진 가장 작은 석조의 집이었다. 그들의 최초의 집도 이랬을 게다.
#역사는 중단함으로써 존재한다
어떤 이유에서 세워지건, 건축이나 도시는 결국은 붕괴되기 마련이다.
조경가로서 토속적 풍경에 대해 영향력 있는 글을 남겼던 미국의 존 B.잭슨은 『폐허의 필요성』이란 글에서, ‘폐허는 우리가 다시 돌아가야 하는 근원을 제공하며, 우리로 하여금 무위의 상태로 들어가 그 일부로 느끼게 한다’고 하였다. 내가 폐허지를 여행할 때면 언제나 머릿속을 맴도는 글귀이다.
나에게 건축과 도시는 무생물이 아니다. 건축이란 건축가가 설계한 건물을 완공함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라 그 속에서 살게 되는 거주자의 삶으로 이루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나로서는, 도시 역시 태어날 뿐이어서 끊임없이 생성하고 변하는 생물적 존재라고 여긴다. 만약에 건축이나 도시가 완성되는 순간이 있다면, 어쩌면 그것은 붕괴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다. 극단적이지만 그 완성의 존재체가 폐허인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 세워지건, 건축이나 도시는 결국은 붕괴되기 마련이다.
#보이지 않는 절
보이는 것은 침묵의 세계였으며 아마도 그게 이 절을 세운 목적이었다
건축의 본질이 ‘공간’에 있다고 하지만, 사실 눈에 보이지 않는 물질인 공간을 설명하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다. 우리가 어떤 건축을 보고 감동을 받는다면 그것은 건축의 공간이 특별하기 때문인데도, 대개는 그 감동을 건축의 모양이나 크기 혹은 색채나 문양 같은 것을 통해 설명하곤 한다. 이는 건축을 공간이 아니라 큰 조각 같은 시각적 오브제로 인식하는 것이니, 결국 건축의 본질과는 거리가 있게 마련이다.
우리 땅의 보령에 있는 ‘성주사지’의 폐허. 감히 말하건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폐허이다. 처음 갔던 때가 10년 전이었지만 그때 받은 깨달음은 너무도 귀하고 아름다웠다.
#보이지 않는 길
종교의 목표가 우리의 삶에 대한 성찰이라면, 절로 가는 길은 그 종점이 있을 수 없는 게다.
길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내 마음 속에 떠오르는 길이 있다. 이제는 어쩌면 실제보다 좀 더 과장된 상상을 하고 있을 수 있다고 인정하더라도, 믿기로는 이 길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 중의 하나일 것이다. 바로 대구 달성군 유가면에 있는 ‘유가사’라는 이름의 절에 이르는 길이다.
이집트의 길은 단순하고 명료하다. 도무지 구부러지지도 않고 애매한 곳도 없어 어떤 길을 가든지 자기가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미로가 있을 수 없는 도시인 것이다. 미로란 무엇일까.
서양의 도시 이론을 근거로 만들어진 우리의 신도시에서 이 미로는 반도시적이요 의심할 바 없는 금기사항일 게 틀림없다. 이러한 미로를 제거하고 직선의 길을 만드는 것이 우리에게 기능적이고 편리한 삶을 보장해 주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일 게다. 그러나 그런 편리라는 말이 행복한 삶과 동의어가 아니며, 더욱이 우리가 살아야 할 지혜로운 삶과는 거리가 멀다는 데서 심각한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바로 가난한 이들이 사는 달동네의 길을 보면 우리가 길에 대해 대한 생각을 원래 어떻게 가졌던가를 잘 알 수 있다.
이곳에서 길은 선이 아니라 공간이며 지나가는 곳이 아니라 머무는 곳이고, 눈으로 보는 곳이 아니라 마음으로 느끼는 곳인 것이다. 그러나 이 길들은 여전히 개발이라는 전가의 보도 앞에 맥없이 허물어지고 제거되고 지워지며 직선으로 뭉개지고 있다.
그렇다. 언제부터인가 우리에게는 마음으로 걷는 길이 없어진 것이다. 우리의 발걸음을 재촉하며 우리를 길에서 내모는 대로와 광로들이 수많은 경고 표지와 함께 우리 앞에 나타나 있다. 그래서 더 이상 우리의 길을 갖지 못하게 된 우리의 삶은 연결되지 못해 파편적이며 가두어진 채 때로는 방황하며 때로는 부유하는 것이다.
‘좋은 길은 좁을수록 좋고, 나쁜 길은 넓을수록 좋다’-김수근
이 유가사의 길으 지금 내가 쓴 그대로 아직도 있다고 여긴다면 너무도 순진한 것이다. 이 시대를 점거한 물신은 종교마저 정복하여 이제는 그런 선한 아름다움을 우리에게 허용하지 않는다. 이미 전체 길을 죄다 콘크리트로 깔아 덮었고 해괴망측한 석물들을 곳곳에 세워 보지 않는 길의 아름다움을 추악한 길로 뚜렷이 바꿔 놓았다. 결단코 가지 마시라.
#배롱나무 붉은 꽃
꽃 이름을 아는 게 그 꽃의 의미를 발견하는 일이며 그 속에 내재된 자연의 질서를 깨닫는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면 그 꽃을 다시 보았고 더욱 아름다웠다.
#인문정신의 소산, 소쇄원
광풍제월이라 했던가. 비 갠 후 떠오른 달빛에 부는 청명한 바람…참으로 기운이 맑고 밝아 가히 소쇄하지 아니한가.
나는 외경한다. 우리 선조들의 그 끝 모른 성찰의 깊이를…
#새로운 세계를 지향하는 출발점, 병산서원
건축은 대상이 아니라 매개자일 뿐이다.
외국인들에게 우리 건축의 특징을 알려주고 싶을 때, 그가 시간만 있다면 나는 하회마을 언저리에 있는 ‘병산서원’으로 안내한다. 이제까지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다. 거의 반드시 그들이 이 놀라운 공간과의 조우로 깊은 사유에 들어간다.
병산서원은 건출물로만 따지면 참으로 별 볼 일 없는 건축이다. 결구방식이나 규모나 장식 등은 흔해 빠지고 엉성하기까지 한데도, 이 작은 건축은 특히 지적 감수성이 예민한 이들에게 늘 감동을 준다. 처음만이 아니다. 몇 번을 찾아가도 그렇다.
#좁을만정 오기를 부리는 집, 기오헌
우리의 하나밖에 없는 삶을 의탁하는 주거를 돈의 가치로만 따져 자신도 모르게 물신의 노예적 생활을 청하는 이 시대 내 이웃들에게 나는 정말 이 기오헌을 보여 주고 싶다. 그래서 우리 속에 사라진 선조들의 향내 나는 삶의 품격을 다시 살리고 싶다.
내 건축사무소의 이름은 이로재,’이슬을 밟은 집’…효성이 지극한 가난한 선비가 사는 집이 이로재의 뜻이다.
요즘에야 자기가 사는 집에 이름을 짓는다는 일이 극히 드문 일이 되었다…로열층이니 무슨 팰리스니 하는 것도 되다 주거를 환금성 가치로 인식하고 있는 결과여서 우리 주거의 품위는 오로지 물신주의 속에 매몰되어 간다. 건축이 우리의 삶을 바꾼다는 명제에 동의한다면 그런 천박한 이름의 주거에서 만들어질 삶 또한 천박할 것은 불문가지이다.
#사무치게 그리운 부석사, 수도자의 도시 선암사
부석사 대석단은 일개 토목이 아니라 지극히 아름다운 건축이다. 흔히 잉카인들이 쌓은 면도날 하나 들어가지 않ㅇ르 정도로 정교하지 짝이 없는 석축을 제일로 치거나, 일본인들이 만든 아주 일정한 크기의 석축을 앞세우지만, 우리 부석사의 석축이 가지는 풍부함과 여유로움에 비할 바 못 되며 특히 자연을 대하는 태도로 치면 상대가 되지 않는다. 그네들의 석축은 천 년이 경과한 지금에도 인공적이며 적대적인데 반해 우리의 부석사 석축은 자연적이며 관대하다.
#스스로가 풍경이 되는 도시, 페즈
우리 지자체장들은 사막 위에 급조된 두바이를 벤치마킹 하느라 소란 떨지 말고, 이런 천 년 도시에서 그 비밀을 배워야 한다.
#하늘 아래 가장 아름다운 마을
그런데 그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달동네의 공간 구조가 산토리니 마을의 것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그러나 그 후 불과 10년 사이에 우리의 달동네는 거의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소위 재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천민적 토건자본이 덮쳐 그 기억을 깡끄리 지우고 만 것이다. 예컨데 내가 가장 좋아했던 금호동 달동네는 숨 막힐 듯한 아파트가 빽빽하게 산비탈을 헤집고 들어서서 도시 속의 암 같은 덩이로 나타났다. 이것은 건축도 아니다.
다도해의 2천 3백 개 섬이 이루는 아름다움…세계 어디를 가도 이 황홀한 풍경을 찾기 힘든데 왜 이를 관광자원화하지 않을까. 아니다. 못난 우리 세대가 손대면 또 뻔한 몰골을 만들게니 그대로 놔두는 게 더 맞는 말이다.
#성찰적 풍경, 제주
왜곡하는 풍경은 헛되다.
제주가 겪은 아픈 상처는 별개의 문제로 간주하고 제주의 풍광이 이국적이라고, 그래서 흔히 신혼여행지로 혹은 간혹 가서 놀다 오는 곳으로 나도 막연히 동의해 왔던 잘못된 생각을 직시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지금이라고 그리 다들 것도 없다. 지금의 제주 역시, 육지인들에게는 오로지 수단일 뿐이다. 투기와 투자의 최적지이며 위락과 유흥의 대상인 것이다.
문화적 풍경.
제주가 가진 천혜의 아름다움이 빚는 서정적 풍경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 서정적 풍경이 우리가 빚은 서사적 풍경을 더할 때, 그때에만 그 속에 사는 우리들은 존엄할 수 있을 게다. 그를 성찰적 풍경이라 한다.
#르 코르뷔지에의 오딧세이
주택마저 살기 위한 기계라고 칭할 정도로 그는 기계미학의 창시자였다. 그러나 기계가 전쟁을 통해 끔찍한 인명살상의 도구가 된 것을 목격한 그는 기계의 냉혹함을 떠나고 만다.
위대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는 그는 어떻게 교육을 받았을까? 바로 여행을 통해서다.
정식 건축학교에서 한 번도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그는 이 동방여행을 통해 스스로 건축을 배웠고 건축의 본질을 깨닫게 된 것이다.
#대상무형 大象無形, 큰 사유는 형태가 없다
그렇다. 대상무형이라 했다. 큰 사유는 형태가 없으니, 부실한 영산암이 내게는 더욱 크다. 이제, 완벽한 르토로네에는 그만 와도 될 것이가.
#위대한 침묵
그 지루한 영화에 파격이 하나 있었다. 아시아인으로 보이던 어느 신입 수도사로부터 수도원 생활을 견디지 못하여 나가겠다는 의사를 전해 들은 수도원장이 그 수도사와 이 영화 속 유일한 대화를 나누는데, 어디로 가느냐고 묻는 말에 젊은 수도사는 서울로 간다고 했다. 위대한 침묵의 수도원에 비해 서울은 대치의 극점으로 놓이게 되어 속되고 소란한 세계의 대표로 그려진 것이다.
#기억만이 진실하다, 사라지는 기념탑
그렇다. 모든 도시와 건축은 사라지게 마련이다.
미개한 사회로 갈수록 기념탐의 숫자가 많다. 기념탑이란 게 본시 구호와 선전을 위한 원초적 도구인 까닭이다.
사방 1미터 높이 12미터의 기념탑, 매년 2미터씩 땅 속으로 꺼져 들어가도록 되어 결국에는 모두 사라지는 안이었다.
#후기
건축가와 같이 여행을 떠나면 얻게 되는 것이 참 많다. 본디 건축가는 사는 방법을 아는 자이니, 무엇을 어떻게 보는 게 좋은지, 어디서 자는게 좋은지, 무엇을 어떻게 언제 먹는 게 좋은지 잘 안다. 게다가 여행지뿐 아니라 사물에 대한 인문학적 지식도 적절히 갖추고 있을 테니, 그가 사람만 좋다면 여행의 안내자로서는 그만일 게다.
일상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의 종류와 빈도 그리고 무게가 만만치 않은 나지만, 그 요청 중에서 수도원을 가자는 것이면 어떻게든 일정을 만들어 보려고 애쓰게 된다. 같은 곳을 또 가도 좋다. 그럴 만큼 수도원 여행하는 일이 내게는 늘 새롭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승효상은 건축을 통해 수도하는 것이 확실하다…그래서 이 책을 내 건축학습의 기록이라고 해도 좋다. 나를 늘 좋게 봐주는 유 회장의 말을 따라 좀 더 거룩하게 표현하면, ‘건축에 대한 수도록修道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