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한국현대사. 유시민. p418
1959-2014, 55년의 기록
#위험한 현대사
모든 역사는 ‘주관적 기록’이다. 역사는 과거를 ‘실제 그러했던 그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방송뉴스와 신문보도가 현재를 ‘실제 그러한 그대로’ 전해주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예컨대 『조선일보』와 『한겨레』가 보여주는 2014년의 대한민국은 큰 차이가 있다…서로 다른 목적과 시각을 가지고 그 사실을 해석하기 때문이다…많은 세월이 흐른 후 생존자들이 그 기록을 토대로 과거를 복원한다면, 어느 신문이 남았는지에 따라 그들이 기록하는 역사는 크게 달라질 것이다.
현대사를 이야기하는 데는 위험이 따른다. 다수 대중의 판단과 정서에 어긋나게 말하면 험악한 구설에 휘말린다…권력자의 심기를 거스를 경우에는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 역사학자 서중석 씨를 석좌교수로 초빙하기로 했던 연세대학교는 그가 백낙준 초대총장의 친일행적을 비판한 적이 있다고 해서 초빙 결정을 취소했다. 이런 위험 때문에 박근혜 대통령의 지명을 받아 국회인사청문회에 나온 공직 후보자들은 5·16을 쿠데타로 보느냐는 질물에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삶에서 안전은 무척 중요하다. 하지만 감당할 만한 가치가 있는 위험을 감수하는 인생도 그리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런 마음으로 내가 보고 겪고 참여했던 대한민국현대사를 썼다.
나는 이 책이 자신의 시대를 힘껏 달려온 동시대의 모든 사람에게 작은 위로가 되길 기대한다. 아울러 기성세대가 만들어놓은 사회적 환경을 딛고 오늘과는 다른 내일을 만들어갈 청년들에게 의미있는 조언이 되기를 기대한다.
#프티부르주아 리버럴의 역사체험
흐름 속에 있는 것은 사건만이 아니다. 역사가 자신도 그 속에 있다. 어떤 역사책을 집어들 때, 책 표지에 있는 저자의 이름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출간 일자나 집필 일자도 살펴보아야 한다. 그런 것이 때로 훨씬 더 많은 것을 누설한다.-에드워드 H. 카, 『역사란 무엇인가』
‘출신성분’은 의미 있는 정보를 담고 있다. 사람은 가정환경의 영향을 받으면서 인격과 개성을 만들어나가기 때문이다. 나는 뚜렷한 자유주의 성향을 지니고 있는데, 이것은 소자산계급의 문화적 특징으로 알려져 있다.
역사책을 읽을 때는 글쓴이가 어떤 사람인지 먼저 살피는 게 좋다. 그래서 자서전도 아닌 현대사를 쓰면서 먼저 개인사를 이야기 한 것이다. 이 책은 그런 출신성분과 경력과 성향을 가진 사람이 쓴 한국현대사다.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이며,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이다.”-헤겔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은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으며 그 이유를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하는 것이 지식인의 할 일이라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라는 ‘현실’을 ‘이성적’으로 설명하려면 투표소에 가서 그에게 표를 던졌던 1,577만 명의 행위동기를 들여다 보아야 한다. 그들은 도대체 어떤 소망과 감정과 기대를 실어 박근혜 후부에게 투표했던 것일까.
2012년 대선의 실체는 ‘역사전쟁’이었다고 나는 판단한다. 극단적으로 갈라진 세대별 투표성향은 한국현대사를 대하는 감정과 태도의 차이와 관계가 있다…나는 고령 유권자들이 투표행위를 통해 자신의 삶과 시대를 인정받으려 했다고 추측한다.
민주화세력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딱 10년 동안 정치권력 하나만을 장악한 적이 있다. 경제권력과 언론권력 등 사회의 다른 모든 권력은 언제나 산업화세력의 수중에 있었다.
한국현대사는 이 두 세력의 분투와 경쟁의 기록이다….산업화시대와 민주화시대는 모두 우리의 과거다. 대한민국은 박정희의 시대와 김대중·노무현의 시대를 거쳐 여기까지 왔다. 둘 중 하나만을 긍정한다면 역사와 현실의 절반을 부정해야 한다. 이것은 온전한 역사인식과 현실인식일 수는 없다.
2012년 대통령 선거는 단순한 정당 사이의 권력다툼이 아니라 서로 다른 가치관과 인생관의 투쟁이었고, 서로 다른 문화의 갈등이었으며, 서로 다른 역사인식의 충돌이었다.
현재는 과거의 산물이며 미래는 현재의 연장이다. 그럼 점에서 미래는 언제나 오래된 것이다. 내일 오는 게 아니라 우리 내면에 이미 들어와 있다.
내가 이 책에서 독자들과 나누고 싶은 것은 우리 안에 있는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한 감정과 느낌이다. 기성세대 독자에게…그 느낌 그대로 다음 세대에 물려주어도 좋겠다고 생각하십니까?…젊은 독자에게 묻는다. 그래는 부모 세대의 삶과 그들이 만든 역사를 생각할 때 어떤 느낌을 받습니까? 화가 납니까? 자랑스러운가요? 기성세대가 어떻게 해주기를 바라며 스스로는 무엇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역사는 주관적 기록…역사적 사실 그 자체가 객관적 진리를 이야기한다고 믿는 것으 순진한 착각일 뿐이다. 사실은 스스로 말하지 못한다. 역사가가 허락할 때만 말을 한다. 역사가는 제멋대로 사실을 만들거나 바꿀 수 없지만 사실의 노예인 것도 아니다. 사실과 역사가는 평등한 관계에서 서로를 필요로 한다…역사는 역사가와 사실들의 지속적 상호작용이다…역사는 어떤 사실을 선택해서 어떤 관계를 맺어주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당신, 역사를 잘못 하는 거야!” 이것은 단순히 과거의 사실에 대한 인식과 견해를 비판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의 인생에 대한 비난일 수 있다. ‘뉴라이트’ 한국사 교과서를 둘러싼 논쟁이 ‘친일파’,’극우’,’좌파’,’종북’이라며 서로를 손가락질하는 감정적·정치적 공방으로 확산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이 책도 그런 감정싸움에 휘말릴 위험이 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감당할 가치가 있는 위험이라고 믿는다.
#1959년과 2014년 대한민국_역사의 지층을 가로지르다
우리를 압살하고 지나가는 근대화와 자본의 맹목적이고 무서운 속도를 일시 정지시키고 ‘이것이 과연 인간가운 것인가’ 물었던 것, 그것이 1980년에서 내가 가져온 작은 불꽃이다.-김진경, 『30년에 300년을 산 사람은 어떻게 자기 자신일 수 있을까』
#평등하게 가난했던 독재국가_국민들은 평등하게 가난했다
우리 역사에서 모든 청년에게 ‘제대로 된 일자리’decent job가 주어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무능하고 이기적인 ‘폭력가장’이었을 뿐이다. 국민의 삶은 불안하고 비참했다.
1959년 7월 31일, 이승만의 정적 조봉암의 법살(사법살인). 1959년의 대한민국은 말 그대로 목숨을 걸지 않고는 권력의 불의에 대항하거나 헌법이 보장한 기본권을 행사할 수 없는 나라였다. 제헌헌법은 민주공화국을 선포했지만 대한민국에는 민주주의가 없었다…대통령과 정부를 찬양할 자유만 있었을 뿐 비판할 자유는 없었다.
#불평등하게 풍요로운 민주국가
대한민국은 1959년과는 거의 모든 면에서 다른 나라가 되었다.
주거환경은 그야말로 상전벽해가 되었다. 초가집은 특별한 보호를 받는 구경거리로만 남아 있다. 절반이 넘는 국민이 아파트에 살며 난방과 취사는 주로 가스와 전기, 석유로 해결한다.
그러나 대한민국이 모두에게 살기 좋은 나라인 것은 결코 아니다. 1959년에는 평등하게 가난한 독재국가였던 대한민국이 2014년 현재는 불평등하게 풍요로운 민주국가가 되어 있다.
그런데 아직도 크게 변하지 않는 것이 하나 있다. 휴전선의 존재와 분단 상황, 그리고 그에 대한 국민들의 생각과 태도다…북한을 대할 때 우리는 대체로 이성을 따르기보다는 감정에 휘둘린다. 6·25전쟁에 대한 원한이 있다…우리도 북한에 대해 비슷한 일을 했다. 국민들이 그 사실을 잘 모를 뿐이다.
#욕망의 위계
무엇이 역사의 지층을 가로지른 것 같은 대한민국의 변화를 일으켰는가?..누구도 ‘위대한 지도자’라고 할 수는 없다. 그들은 자신의 과제라고 믿은 일들을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하려 했을 뿐이다.
나는 대한민국현대사를 만든 힘이 욕망이었다고 생각한다.욕망이라는 단어가 주는 부정적인 느낌 때문인지 사람들은 욕구라는 말을 선호한다…’대한민국의 기적’을 만든 힘은 국민이 개별적·집단적으로 분출한 욕망이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사람의 행동이며, 행동을 일으키는 것은 욕망이다.
인간의 모든 행동은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합목적적 활동이다. 만약 충족하고자 하는 욕망에 일정한 순서가 있다면 사람의 행동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국가의 진화도 같은 원리를 따른다. 3·1독립투쟁과 상해임시정부 수립에서 오늘까지 대한민국 역사 100년은 1만 년에 걸친 국가의 진화과정 전체를 압축·반복했다.
#그라운드 제로, 그리고 욕망의 질주
대한민국의 변화를 추동한 힘은 대중의 욕망이었다.…대한민국에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가 거침없이 질주할 수 있는 사회정치적 환경이 조성되었으며 국민들은 개별적·집단적으로 욕망을 실현하는 방법을 신속하게 터득했다.
혁명이 아니라 망국이 봉건체제를 해체한 것이다...한국전쟁 이후 대한민국은 권위와 힘을 가진 지배층이 존재하지 않는 ‘그라운드 제로’ 사회였다…대한민국은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없는’ 신천지였다. 하지만 자연이 진공을 허락하지 않는 것처럼 사회는 권력의 공백을 허용하지 않는다. 냉전시대가 올 것임을 일찌감치 예견한 ‘빈손의 망명객’ 이승만이 미군정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대통령이 되었다…반민특위는 친일파의 역습에 해산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민주주의와 법치주의가 있어야 할 자리를 독재와 반칙, 부정부패가 점령해버렸고, 헌법은 그저 이념만으로만 존재할 뿐 현실을 지배하지 못했다. 대한민국은 그렇게 첫걸음을 내디뎠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가 ‘그라운드 제로’ 대한민국을 질주했다. 그 욕망의 탁류는 누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대중의 내면에 존재하고 있던 것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둑을 터뜨려 물길을 냈고 그 욕망의 탁류 위에서 위험천만한 ‘역사 래프팅’을 했다.
일제침략기의 국채보상운동, 외환위기 때의 금모으기운동. 공동의 사회적 목표를 이루기 위해 자원을 동원하고 의지르 묶어내는 집단적 능력은 경제통계에 잡히지 않는 사회적 자원이다. 이렇게 보면 대한민국의 변화는 기적이 아니다. 일어날 법한 일이 실제로 일어난 것일 뿐이다.
#난민촌에서 태어난 이란성 쌍둥이_4·19와 5·16
사고하는 역사가는 엄밀하게 말하면 과거의 문제를 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문제와 씨름하고 있는 것이다…-한스 위르겐 괴르츠, 『역사학이란 무엇인가』
오랜 세월 그것들과 씨름하고 나서야, 나는 그 둘이 부모는 같지만 외모와 성격과 취향이 완전히 다른 이란성 쌍둥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머니는 이승만 대통령 시대의 분단국가 대한민국, 아버지는 대중의 욕망이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4·19를 좋아하고 5·16은 싫어한다. 하지만 5·16이 결코 일어나지 말아야 했거나 오로지 나쁜 결과만 남긴 사건이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둘 모두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모든 국민은 자기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토크빌, 프랑스 정치가
토크빌이 전적으로 옳다. ‘국민의 수준’에는 훌륭한 사람을 대통령을 선출하는 능력뿐만 아니라 자유롭고 민주적인 선거제도를 만들고 운영하는 능력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지금 나는 이승만 정부도 박정희 정부도, 심지어 전두환 정부조차도 모두 국민의 수준을 반영한 정부였다고 생각한다. 그때 대한민국 국민에게는 민주주의를 손에 넣을 만한 의지와 능력이 없었다.
애초에 주권을 지키지 못했고 자기 힘으로 광복을 이루지 못한 것은 우리의 부족함 탓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분단의 책임을 우리 민족에게 묻는 것은 강도 피해자에게 범죄의 책임을 지우는 것과 마찬가지다.
#반민특위의 슬픈 종말
그 절정은 1949년 1월 반민특위가 노덕술을 체포한 사건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노덕술을 즉각 석방하고 반민특위 관계자를 처벌하라고 지시했다. 그에게 노덕술은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체포해 악랄하게 고문했던 일제 특고형사가 아니라 투철한 반공정신으로 공산당을 때려잡는 대한민국의 경찰관이었다. 노덕술이 국회보다 더 중요했다. 이때 살아남은 노덕술은 후일 민주화운동을 탄압하고 죄 없는 사람들을 고문해 반국가 인사 또는 간첩으로 조작하는 고문수사의 노하우를 대한민국 경찰과 정보기관에 전수했다.
국회는 친일파 비호세력을 주축으로 새로운 특위를 구성했다. 반민특위는 이렇게 막을 내렸고, 국회는 1951년 반민법을 폐지했다. 처발받은 사람은 단 하나도 없었다!
친일파를 처단하고 친일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것은 두고두고 대한민국의 약점이 되었다. (북한의 집권세력은 독립운동가 김일성)
‘자주’ 이념은 지금까지도 북한의 마지막 자존심으로 남아 있다. 반면 남한의 민족주의자들은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한 채 미국에 종속되어 살고 있다는 열등감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경제적 번영과 정치적 독재의 빛과 어둠이 공존했던 1980년대 대한민국 사회 한복판에서 주사파가 탄생한 배경에는 바로 이 뿌리 깊은 민족주의적 열등감이 놓여 있었다.
나가자! 자유의 비밀은 용기일 뿐이다.-서울대학교 문리대 학생회 4·19 선언문
미완의 혁명 4·19. 부정선거 규탄으로 시작해 민중의 힘으로 독재자를 축출하고 새 정부를 세웠다는 점에서 분명 성공한 정치혁명이었지만 그 혁명을 완성할 능력과 의지를 가진 주체가 없었기에 혁명의 정치적 결과는 기존 정치세력 민주당의 집권으로 귀착되었다.
성공한 쿠데타 5·16. 5·16은 단순히 제2공화국을 무너뜨린 것이 아니라 4·19가 만든 모든 것을 파괴해버렸다. 그러나 4·19혁명 그 자체까지 죽여 없애지는 못했다. 적어도 말로는 4·19혁명을 인정했다.
혁명과 쿠데타 구분의 기준? ‘결과’가 아니라 ‘과정’. 쿠데타는 혁명과 달리 민중의 동의와 지지와 참여가 없이 폭력으로 국가질서를 전복하고 권력을 장악하는 행위. 군대를 동원해 이런 일을 하는 것이 군사쿠데타다.
박정희 대통령은 결코 고결한 인간은 아니었으나 독재자로서는 크게 성공한 것이다…세계사에 이만큼 성공한 군사쿠데타는 별로 없었다.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을 가장 좋아하는 시민들이 진정으로 좋아하는 대상은 사실 그의 인격과 행위가 아니라 그 시대를 통과하면서 시민들 자신이 쏟았던 열정과 이루었던 성취, 자기 자신의 인생일 것이라고 나는 추측한다!
#절대빈곤, 고도성장, 양극화_경제발전의 빛과 그늘
물질적 풍요에 대한 열망은 인간의 모든 욕망 중에서 단연 강력하다. 이 욕망을 어느 정도라도 충족해주지 못하는 국가는 민중의 자발적 협력과 복종을 얻어내지 못한다.
‘한강의 기적’? 하지만 사람들은 한국경제를 불평등과 반칙이 난무하는 약육강식의 ‘정글자본주의’라고 비판하며 그 책임을 박정희 대통령에게 묻는다.
역사적 경로의존성? 역사에는 연습이나 실험이 없으며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는 바꿀 수 없다.
이륙? 농업중심의 전통사회는 변화가 느리고 성장률이 낮다. 그런데 어느 시점에 특정한 조건이 충족되면 갑자기 빠른 속도로 경제가 성장한다
로스트는 마르크스와 달리 경제를 움직이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이 계급투쟁이 아니라 인간의 보편적 욕망이라고 주장했다. 로스트는 마르크스를 이기고 싶었던 것 같다…현실은 이론보다 훨씬 복잡하다.
나는 인간 박정희는 아무 ‘주의자’도 아니었다고 본다. 민족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반공주의, 군국주의, 자유주의, 그 어떤 이념도 그를 온전하게 사로잡지는 못했다. 생애 전체를 볼 때 그가 일관성 있게 추구한 것은 권력 하나뿐이었다(권력주의)
한국경제는 시장경제체제가 아니었다...대통령과 참모들의 신임을 받은 기업인들은 물가상승률보다 훨씬 낮은 이자를 내는 정책자금을 받았다. 각종 특혜와 행정편의를 제공받으면서 국내시장의 독과점 공급자가 되어 소비자인 국민을 착취했다. 그렇게 번 돈으로 여러 산업 분야에 진출해 거대한 기업집단을 형성했다.
노동력의 이동 배치를 위해 정부가 특별히 한 일은 없었다. ‘잘살아보세’라는 구호를 외치는 것으로 충분했다. 물질적 풍요를 바라는 욕망이 사람들을 움직였다. 먹고살기 힘든 농민들이 가족을 데리고 농촌을 떠났다…’무작정 상경’ 열풍이 불어 농촌 인구가 급격하게 줄고 도시 인구는 급증했다.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와 주변지역에 빈민가와 달동네가 형성되었다.
경제성장은 자전거를 타는 것과 같아서 계속 달리지 않으면 쓰러진다. 성장을 멈추면 형상유지를 하는 게 아니다. 성장속도가 둔화되기만 해도 경기가 급강하하며 때로 붕괴의 위기에 빠진다.(불가능한 지속 성장?)
수입차 시장점유률 0%? 소련과 동유럽의 사회주의 국가들보다 낮은 수입률, 소비재 수입을 사실상 금지한 대한민국에서 시장을 독식한 재벌 대기업들은 마음껏 독점이윤을 얻었다.
재벌이 국가를 관리하는 세상(삼성공화국)
산업화의 성공은 정부와 재벌의 관계를 바꾸어놓았다…자본권력이 국가권력과 정치권력을 포획한 것이다…윗물이 혼탁하면 아랫물도 흐리기 마련, 우리 사회 전체가 부패문화에 젖어들었다…재벌이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헌법 위에 군림하는 사태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국가권력을 통한 정치적·민주적 개입과 통제뿐이다. 나는 이것이 ‘경제민주화’의 핵심이라고 본다.
이익은 사유화, 손실은 사회화. 도덕적 해이
#전국적 도시봉기를 통한 민주주의 정치혁명_한국형 민주화
대중이 크게 호응하지 않으면 집권세력은 신경 쓰지 않고 같은 행태를 반복한다.
일제 징병 탈출, 6,000리 길을 걸어 임시정부를 찾아갔던 ‘영원한 광복군 장준하’
유신독재. 돌이켜보면 우리 국민은 아직 민주주의를 누리는 데 필요한 용기와 의지를 충분히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는 유신독재를 끝내지 않앗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죽였을 뿐이었다. 10·26에서 5·18까지, 그 다섯 달은 안개 속이었다.
신군부가 광주에서 무자비한 살상을 저지를 수 있었던 것은 다른 지역 시민들이 계엄군의 폭력에 굴복했기 때문이었다.
1982년과 83년 전국 대학에서 시위. 이 시기 정부를 상대로 싸울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대학생뿐이었다.
지금은 성숙한 민주주의를 구현하기 위한 시민참여의 시대다
#단색의 병영에서 다양성의 광장으로_사회문화의 급진적 변화
라이프스타일은 그 사람의 신념과 취향, 개성과 욕망을 드러낸다.
학교는 일상적으로 폭력이 저질러지는 인권 사각지대였다…하지만 10대 때의 경험은 많은 세월이 흐른 후에야 비로소 그게 무엇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그것은 대한민국이 난민촌에서 병영으로, 병영에서 광장으로 진화해가는 과정에서 우리 세대가 겪을 수밖에 없는 일들이었다.
#거짓 혁명과 거짓 공포의 적대적 공존_남북관계 70년
‘레드 콤플렉스’는 단순한 반공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이념이 아니라 자신의 생존과 안전을 지키려는 삶의 방편이다. 북한 편으로 몰릴 위험을 피하기 위해 양심의 자유를 포기하고 자유와 권리의 박탈을 묵인하는 정신적 병리현상이다…’친북’,’종북’ 모함…많은 시민이 침묵하거나 동조하는 시늉을 한다. 반드시 그것을 믿어서 그러는 것은 아니다. 자신과 가족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이다.
정성택과 이석기. 박근혜 정부의 공안당국과 보수세력은 여전히 공포감을 부추기는 ‘안보마케팅’으로 권력을 창줄하고 유지하고 있다. 이것은 북학 권력집단이 독재체제를 지키는 수법과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다.
#에필로그: 세월호의 비극, 우리 안의 미래
역사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니, 그것은 엄청난 재산을 소유하지도 않으며 전투를 벌이지도 않는다.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은, 소유하고 싸우는 것은 오히려 인간, 즉 현실의 살아 있는 인간이다.-에드워드 H. 카,『역사란 무엇인가』
기성 세대를 사로잡은 것은 욕망, 그것도 물질적 풍요에 대한 욕망과 분단상황이 강요한 대북 증오와 공포감이었다. 그런데 젊은 세대는 그들보다 더 강하게 자기 존중과 자아실현의 욕망, 그리고 타인의 고통과 슬픔에 대한 공감에 끌린다.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의 앞날에 무엇인가 진보적인 변화가 찾아들려면 그 동력은 이들 젊은 세대가 지닌 ‘고차원적 욕망’과 공감의 능력일 것이다.
만약 오늘의 50대가 10년 후 지금의 60대와 같아진다면, 오늘의 40대가 지금의 50대와 비슷해진다면 대한민국에는 희망이 없다고 본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것이 아니다. 미래는 우리들 각자의 머리와 가슴에 이미 들어와 있다.
지금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이 미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 시각 우리 안에 존재하고 있는 것들이 시간의 물결의 타고 나와 대한민국의 미래가 된다. 역사를 만드는 것은 사람의 욕망과 의지다. 더 좋은 미래를 원한다면 매 순간 우리들 각자의 내면에 좋은 것을 쌓아야 한다…
벗이여, 미래는 우리 안에 이미 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