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분 인생. 우석훈. p375
야옹구 치료가능한지 검사만 20만원! 반려동물이라 할지라도 그 생명 하나도 병원식 표현대로 보호자의 ‘능력’에 달려 있다는 것이 정말 무서웠다.
경제학자는 세상을 돈을 중심으로 본다…그렇지만 세상은 돈만으로 구성된 것도 아니고, 사람들의 일상성을 구성하는 많은 동기들이 꼭 돈이나 경제적 이유인 것만은 아니다.
마흔 살이 넘어가면서, 일상성을 구성하는 것들 혹은 또래 친구들에게 하고 싶었던 얘기들을 모아놓은 에세이집
시대의 상황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40대 중반, 불혹. ‘혹시는 없다’, 즉 이미 너무 많은 것들이 결정되어버렸다는 의미가 아닐까? 아직도 모르는 뭔가가 문득 튀어나와서 신데렐라 같은 스토리가 벌어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너도 알고 나도 알고, 그런 삶이 마흔이라고 했던 것 아닐까?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진짜 구질구질한 질문? ‘명박 시대’!
#1 유일한 자신의 삶조차 자기답게 살지 못한다면
#낮은 곳으로 낯선 곳으로
달라진 주변 사람들? 고학력자들은 이제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예전에는 정말 몰랐지만 이젠 아는 농부들도 하나둘 생겨났다!
이런 변화는 내게 무엇을 가져다주었을까? 일단 마음이 아주 편해졌고, 삶에서 평온을 되찾았다. 높은 곳에 있거나, 쉬이 만나기 어려운 사람들과 지내는 것은, 그 자체로 긴장도가 아주 높은 일이다.
인생의 전환점? 내 인생에서 한 번은 주변 사람들이 완전히 바뀌는 경험을 한 셈이다.
“신은 한쪽 문을 닫을 때 반드시 다른 한쪽 문을 열어놓는다.”-사운드 오브 뮤직
현대판 귀족사회, ‘네트워크 사회’? 선택이다. 나는 더 낮은 곳으로 그리고 더 낯선 곳으로, 그걸 선택했다. 아마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것과는 정반대의 원칙을 세울 것이다. 높은 곳을, 더 익숙한 곳으로.(신영복 선생의 하방연대!)
[아낌없이 주는 나무] 나무는 주기만 하고, 소년은 별로 고마운 줄도 모르고 받기만 한다
마흔이 되면 우리는 이제 누군가에세 나무가 되어주어야 한다. 정신적인 것이든 물리적인 것이든, 이제 받아야 할 것보다 주어야 할 것이 더 많아진다.
인생은 길다. 그 나머지 시간을 허무하게 안방 도련님처럼 지내고 싶지 않다면 늘 낮은 곳으로, 늘 낯선 곳으로, 그런 마음과 자세로 주변을 구성하는 것이 좋다. 낮은 것은 사회를 위한 것이고, 낯선 것은 자신을 위한 것이다. 그래야 늙어가는 인생이 허무하지 않은 여행의 연속과 같아 질 수 있다.
사람은 스스로 성찰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 거울처럼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서야 비로소 성찰이 가능한 존재다. 너무 비슷한 사람들끼리 ‘덩더쿵 덩더쿵’, 그렇게 보내다가는 어느날 문득 한나라당 할아버지들처럼 바뀌어버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놀랄지도 모른다.
#나는 누구인가, 피부인가, 정신인가?
디디에 앙지유의 ‘피부적 자아’
‘사회적 피부’? 사회적 존재로서 자신을 구정하는 피부
민족, 국가, 거대 조직, 이런 것들이 사회적으로 미성숙한 사람들이 빌려쓰는 사회적 피부라는 게 디디에 앙지유의 테제인 셈이다
‘마케팅 사회’, 소비사회? 자신이 걸치고 있는 옷이 자신의 피부라고 믿게 된다면…정신적으로도 황폐해질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황폐해진다.
자신의 소비자 만들어주는 사회적 피부가 자신의 존재 의미이자 동시에 자존심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에게, 그리고 한 번도 그런 것을 의심해본 적이 없는 분들에게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월든]이라는 책을 권해드리고 싶다.
나이 마흔, 단순함과 복잡함이 교차하는 순간이 오는 듯하다. 복잡하게 생각했던 것은 의외로 별 거 아니라는, 마치 뭔가 꺠달음의 마음이 한편에 있다. 그러나 동시에 단순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은 의외로 복잡하게 느껴져서 세상은 역시 어렵다고, 다시 마음 한편이 무겁다. 그런 게 교차하는 게 마흔이 아닐까 싶다.
#독립을 준비해주는 부모를 위하여
독립하지 못하는 스무살의 미성숙? 자신이 스스로 삶을 책임지지 못하는 것, 그것은 경제적 의미로서의 미성숙이자, 동시에 문화적 의미로서의 미성숙이기도 하다
미친 교육? 혼자서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 그건 대치동이나 목동에서 절대로 가르쳐주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기 시작해야, 비로소 남의 자식도 눈에 들어오고, 사회도 눈에 보일 것이다.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할 때 행복하고, 누군가를 돕고 있을 때 행복한 것, 사람은 원래 그렇게 디자인되어 있는 존재다
#혼자 떠나는 여행, 처음으로
마흔 살 먹은 아빠들과 가끔 자녀들의 교육에 대한 얘기를 할 때가 있다. 그들은 정말 자녀의 삶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있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야말로 대화 부족 혹은 집안에서의 소외와도 같다. 아빠는 집안에서 지워진 존재다(엄마들의 교육공동체, 아빠는 투명인간)
엄마표 프로그램을 돌리다 보면 아이들은 오히려 미성숙을 강화시키고, 정신적 독립을 늦출 뿐이다.
지나친 교육열도 부모의 정신세계의 궁핍함을 자녀를 통해 보상받으려 하는, 다른 의미의 학대인 셈이다!
이렇게 바꿔서 질문을 해보자. 자신이 자녀가 몇 살에 혼자 여행을 떠나는 것이 좋을까?
돈이 삶을 풍요롭게 만들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가 않다. 기억, 추억, 경험, 이런 것들이 길게 보면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준다.
여행. 그것은 일상으로부터의 단절이며, 동시에 익숙한 것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다. 그럴 수 있는 기회를 자녀에게 원천적으로 박탈하는 것, 가난이 아니라 풍요가 오히려 사람들을 어렵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주말여행의 로망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과 진짜 자신이 삶은 종종 괴리가 있다
#문과쟁이니까
구조라는 것이 인간에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종종 있지만, 문과쟁이와 이과쟁이. 이 간단한 구분조차도 벗어나기 힘든 사람들에게 구조는 플라톤이 말했던 ‘동굴의 비유’가 정말 딱 맞는 것 같다
#”나는 다 안다”, 이게 적이다
“아는 것 같다”? 내 생각에는 이게 제일 큰 문제다. 아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도 모르고 있는 게 더 많다. 글을 써보면 이게 확연히 드러난다. 알면 뭔가 틀리더라도 쓸 수 있고, 모르면 하나도 쓸 수가 없다.
모르는 건 사실 문제가 안 된다. 누구든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으니까. 그렇지만 뭘 잘 모르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것, 그떄가 제일 위험한 순간이 아닐까 싶다.
명박, 그도 나름 해본 게 많았던 인생인 것 같다. 그렇지만 “해봐서 아는데”. 이게 얼마나 위험한 순간인지, 우리도 그를 겪어보고서야 그것을 알게 된 것 아닌가?
#결국 동기의 문제
돌아오지 않는 책들을 생각하면서, 마음이 아팠지만, 결국 해결책을 찾았다.
“내 머리에 없는 책은, 내 책이 아니다! 그래, 책 껍데기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게 내 책이겠나?”
#부모에게도 설명을 못하는데, 어떻게 사람들에게
평범한 사람들과 정답은 다르더라도 같이 나눌 수 있는 얘기가 아니라면 어쩌면 이 모든 게 위선이거나 현학일지도 모른다는 고민을 그때 많이 했던 것 같다
너무 같은 편, 같은 생각을 공유하는 사람 그리고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 그렇게만 있으면 어느 순간 더 이상 새로운 생각을 끌어낼 수 없는 순간이 오는 것 같다.
#2 욕망의 좌절과 존재의 상실감으로 힘들다면
#마흔, 다시 시작하는 습작
사회과학, 경제학.
농민과 얘기하려 할 때, 책을 놓고 얘기하기란 어렵다.
책으로 얘기한다, 이건 그들과 얘기하지 않겠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사회과학이라는 게, 이런 한계를 가지고 있다.
한국의 학자들은, 글만 읽어보면 꼭 한국에 안 사는 사람들 같다. 마치 뉴욕 시민이나 시카고 시민이 쓴 것 같다. 글 안에, 우리의 삶이 전혀 없다. 오히려 영국에 있는 장하준이 쓴 책에 우리의 일상성이 더 녹아 있는, 이 비루한 현실을 어쩌면 좋을까? 그런 게 내가 늘 하는 고민이다.
#넌 배부르니, 난 배고픈데
마이너의 마이너? 20대* 여성* 지방거주자* 고졸* 장애인* 농민
참, 기이하게도 이런 기가 막힌 핸디캡들을 달고 있는 여성 농민들이 오히려 대체적으로 행복하고 건강하다(이게 내가 농업이 지닌 사회적 가치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본 결정적 계기 중의 하나가 되기도 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반면, “내가 참 운이 없다”며 자신을 가장 박복한 사나이로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 의외로 서울대 출신들이 많았고, 서울대에서도 마이너 전공 혹은 좌파를 선택한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콩세알
서른 살을 넘기며 내가 손에 쥔 원칙은, 수입은 노동소득으로만 올린다는 거다(불한당의 불로소득)
사교육…자판기에 동전 넣고 금방 뭔가 뽑아 먹는 것…결국 우리는 교육을 자판기로 이해하는 모자란 부모들을 잔뜩 만들어낸 것이다
#심사위원에 대한 생각
심사라는 게 일종의 권력이다…그런 걸 자꾸 탐하다 보면 ‘작은 정치’ 같은 걸 하게 된다.
원래 사람은 큰일로 분노하는 게 아니라, 작은 일에 더 분노하는 그런 존재다. 그래서 작은 정치가 큰 정치보다 더 무섭다.
문학동네, 동네, 교회, 업계 조정회의,…거기도 작은 정치 작렬이다!
마흔, 이제는 내려놓을 시간. 진리라는 게 돈의 법칙이나 권력의 법칙과는 다르다는 게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내려놓으면 내려놓을수록, 진리를 조금이라도 볼 수 있는 가능성이 더 높아지는 것, 이제 삶의 오묘함이다!
#저잣거리에 서서
식민지형 학문, 직업으로서의 학문
저잣거리? 배워서 하는 것과 몸으로 느끼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고나 할까?
“그들이 대체 뭘 아는데?” 민주당도 마찬가지.. 저잣거리에 내려와 보지 않고 그들만의 리그에서 도도하게 살았던 사람들만으로는, 이미 눈이 높아질 대로 높아진 한국 민중들을 만족시키기 어렵다.
#3 먹고사니즘의 문제와 삶의 고민들로 불안하다면
#바깥부인, 집 남편
삶이라는 게 참 덧없다. 한평생 도대체 뭘 남기려고 그렇게 아웅다웅 하면서 살아가는 건지…
이렇게 이상하게 사는 나라는 OECD국가 중에서 한국과 일본 뿐
아침 10시 문열고, 12시부터 2시까지 점심시간, 4시면 문 닫는 프랑스 공공기관
집에서 점심밥 먹지 않는 한국 사람들과 일본 사람들, 도대체 왜 그러고 사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취리히 공장 노동자들
열심히 출근하고 열심히 일하면 잘산다? 그런 일은 통계적으로 전혀 관찰되지 않는다!
사는 게 도대체 뭐라고, 점심도 밖에서 먹고 죽어라고 일하는데, 노르웨이 같은 나라가 9만5천 달러를 넘어서는 이 세상에서 왜 우린 자기 나라 노동자들을 이렇게 살기 힘들게 만드나? 이게 내가 출근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생각이다.
내가 한국의 경제학자들에게 가지고 있는 불만 중 하나가 사람들 삶을 너무 안 본다는 점이다. 경제학 책에는, 한국인의 삶이라는 게 없다!
#인간은 과연 이기적인가?
현대 경제학는 인간은 모두 이기주의적이라는 가정에서 시작된다. 만약 인간이 이기주의적이 아니라면, 우리가 경제학 이론이라고 알고 있는 거의 대부분이 무너진다(이타적 인간의 출현!)
한국에서 경제학은, 인간은 어차피 다 그렇고 그런 이기적 존재라는 말 외에는 한 게 없는 것 같다. 한국에서 정치학은, 어차피 전라도 사람은 전라도 찍고, 경상도 사람은 경상도 찍는다는, 출생학 외에는 한 게 없는 것 같다. 왜 한국의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정당 한나라당에 투표하는가? 왜 우리에게 계급투표 현상은 없는가? 우린 이런 걸 설명하지 못한다.
#내 주변에 굶은 사람이 없어야
악마교육? 모두 남을 죽이고 살아남아라 이렇게 가르치고 있는 교육..이건 경제학도 아니고, 교리도 하니고, 교훈도 아니도, 그냥 악마교육이 아닌가?
#취집, 그 쓸쓸함에 대하여
#지금 사면 내년에 부자된다?
자본주의가 사람을 유혹하는 건 “너도 돈 벌 수 있어, 증권 해.” 그런 거다. 그러나 결국 돈 버는 사람은 따로 정해져 있다.
수익률의 눈만으로 세상을 보게 되면, 삶의 진실과 세상의 진짜 작동방식을 잊어버리고, 수치만으로 모든 것을 보게 된다. 그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결국 불행만을 만나게 될 뿐이다.
#첫 집회
무섭다, 첫 집회는. 그러나 그걸 한 번쯤 넘지 않으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무섭게 느껴지기만 한다. 내 경우도 그랬다. 하지만 감옥에 가는 걸 한 번 각오하고 난 다음부턴, 세상이 몇 뼘은 더 넓게 보였다.
#4 삽질하고 노력해도 안 되는 게 자꾸만 쌓인다면
몇 개국어를 한다? “별의미도 없는 욕심들을 일찌감치 버려라”, 그 시간에 경제하 공부나 더 하라! 7개국어 하는 프랑스 외교관들의 충고!
#만남은, 그가 어려울 때
“도움은 어려울 때 돕는다.”
살다보면 누구나 다 절실하게 도움이 필요한 순간이 있는데, 그때 서로가 어떤 사람인지 확인할 수 있다
#고진감래?
지금 즐겁지 못한 삶이 언젠가 즐거울 수 있을까?
이 얘기가 내가 10대들에게 정말 해주고 싶은 얘기다.
#삶은 단계적으로 행복해지는 게 아니다
삶, 그것은 복잡미묘하며 행복은 기기묘묘한 것이다. 삶, 그것은 승진에 실패한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만 부여되는 것이 아니고, 행복 역시 그렇다. 삶은 우리 모두에게 내려진 것이고, 행복 또한 단계적이 아닌 언제 어디서든 추구할 수 있어야 한다
#5 의욕도 재미도 없는 무미건조한 일상이 지겹다면
#고양이 보는 맛에 산다
고양이 등쌀에 명랑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야말로 고양이 보는 맛에 산다
#책에 대한 얘기
문무? 문이라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읽고 쓰기, 무는? 나는 농업과 스포츠라고 생각한다
죽고 싶지 않다면 책을 집어야 하는 나이, 그게 바로 마흔이다. 책에 길이 있다. 옛말 틀린 거 하나도 없다. 책을 많이 읽는 사람들이 평가받는 시기가 앞으로 한국에도 오게 된다.
노회찬, 심상정, 유시민은 물론이고 차세대 지도자…안철수, 조국, 박경철, 박원순은 모두 대표적인 열성 독서가들이다. ‘나꼼수’로 김어준의 시대를 열어 제친 김어준 역시 독서 내공이 진짜 만만치 않다.
떠오르는 야권의 정치 지도자들을 보라. 미친 듯한 독서가이면서 동시에 저자인 사람들 아닌가?
틀에 박힌 삶? 어떤 스타일의 어른이 될 지 전혀 할 수 없는 어린이? 어린아이는 왜 그 자체로 또 하나의 우주라고 하는지, 요새는 조금 알 것 같다!
눈 감기 전에 꼭 해놓고 싶은 것? 가난한 10대 소녀들을 위한 수학 도서관,혼자서 스스로 길을 찾아 볼 수 있는 그런 수학 도서관 하나 한국에 만들고 싶다
#낭만과 해학으로 함께 가는 길
실천이 하나도 없다면, 이 표현은 정말 허망하다
증오가 힘은 좋지만 오래 가진 못한다
#6 여기 아닌 어딘가, 어제와 다른 내일을 꿈꾼다면
#우리는 과연 발전하고 있는가?
“아버지는 낙타를 타고, 나는 롤스로이스를 타고, 내 아들은 제트기를 타고, 내 아들의 아들은 다시 낙타를 탈 것이다.”-사우디에서 요즘 유행하는 말? “석유로 흥한 자, 석유로 망하리라” 석유 고갈, 사라지고 나면…
발전에 대해 혹은 경제에 대해서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설득하거나 납득시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난 이 질문을 멈출 수가 없다!
첫번째 의문, 과연 중산층의 자식이 다시 중산층을 될 수 있는가? 부모가 소유한 집, 언젠가 자식이 독립해서 스스로 장만할 수 있는가?
자기 자식이 자기보다 경제적으로 더 열악할 것이라는 걸 한국의 중산층이 집단적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그때가 사회 변화의 첫 지점이 될 가능성이 높다!(부동산 거품운 미래 세대에 대한 착취)
우리의 자식이 자신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가?
어쩌면 우리는 심각하게 퇴보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삶의 기본은 의식주이고, 이것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다. 지금 한국은 최상위 일부를 제외하면 의식주 자체가 힘든 시대를 살고 있다
지금의 한국 40대 중산층은, 부모에게는 마음을 받고, 자식에게는 돈을 주려고 한다. 그것도 직접 주는 게 아니라 ‘사교육’이라는 형태의 학벌로 말이다…마음을 주는 법을 잊어버렸는가?
돈으로 뭔가 보상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돈이 해결해주는 건 생각보다 적다
#흐르는 물, 다시오기 어려워라
10대들의 변화는 아주 빠르다!
“흐르는 물을 다시 만질 수는 없다”
고등학교 갈 때마다 난 이 말을 떠올리곤 한다.
#꿈 같은 건 없어도 괜찮아?
곰곰히 생각해보면, 꿈 같은 것 만들어놓고 자기 플레이만 하다 보면, 다른 사람들의 삶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꿈을 키운다고 하면서 정작은 다른 사람을 이해하거나 마음을 나눈는 감수성과 공감 능력 같은 것을 죽이는 셈인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사회의 리더가 되어서 진짜로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까?
진로교육으로 꿈을 가지라고 해서 진짜 꿈이 아닌 가짜 꿈을 갖는 순간, 10년 후의 삶은 평균적으로 너무 뻔하다. 꿈같은 것은 없어도 괜찮다. 10대에는 더더군다난 꿈 같은 건 없어도 좋다.(순리대로 살자)
강요된 꿈. 그건 많은 사람을 결국은 불행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내려놓을수록 더 많이 찬다”는 자연의 이치가 사람의 이치와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로봇교육은 이제 그만
“선생님들 형편없다”? 이게 다 학원쟁이들이 만들어낸 이데올로기 아닌가 싶다
대안학교가 우선이 아니라 공교육을 살리는 게 더 중요하다고. 아마 나 혼자 그런 목소리를 냈던 것 같다.
얼마 전에 강남에 갔다가 ‘자기주도형 학습’ 플랜카드 걸어놓은 노란색 학원버스를 보고 엄청 웃었다!
초등교육에서는 무엇보다 노는 것과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가르치고, 중등교육에서는 자생력을 가르치는 게 맞지 않나? 중고등학생들을 ‘암기 기계’, 빙신으로 만들고, 경제 괴물로 만드는 게 딱 한나라당식 교육이다. 그 앞에서 그래도 버팀목이 되어주고 있는 게 전교조 선생님들이시다.
그래서 힘들어도 어진간하면 전교조 선생님들 강연에는 가려고 한다. 진짜 100번은 채울 생각이다.
#증오 위에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을까?
역사를 통해 보더라도 증오는 단기적으로 강렬했어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무엇보다, 계속 증오하게 되면 결국에는 지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사랑도 영원한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증오보다는 오래 간다.
증오 위에 세울 수 있는 것은, 사실상 아무것도 없다.
진짜로 이기고 싶다. 증오와의 싸움에서 난 이기고 싶다.
#우리가 차를 마시며 혁명을 논할 수 있었다면
정작 중요한 일들은 아예 까먹거나 혹은 취중에 생긴 각자의 이해대로 생각하고, 그 오해를 풀기 위해 또 술을 마시고, 또 진짜 중요한 것은 까먹고…
그걸 꽃다운 그 나이에 우리들은 왜 몰랐을까!
“사람은 마흔에 죽고, 예순에 묻힌다”
이제 마흔이 되면, 이제 놓아 보내야 할 것들에 대해서 조금은 더 많이 생각하게 되는 듯 싶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언젠가 다시 사람들을 만나게 될 때, “이게 내가 내린 소주야, 맛있지?” 이럴 수 있는 것.
옛말에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입은 다물고 지갑은 열라고 했다
그만두는 순간과 내려놓은 순간을 상상하지 않으면 한없이 부여잡고 싶어지고, 한없이 움켜쥐고 싶어져서, 결국 추레하고 탐욕스런 노인으로 남는 길을 가게 될까 봐 두려움이 있다…마흔을 넘어선 친구들에게, 이제 우리는 슬슬 내려놓을 준비를 하면서 비우는 것을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얘기를 해주고 싶다.
그래야 진짜로 사랑할 것들이 보이게 될 것 같다.
#고양이는 길들지 않는다
난 고양이의 야성이 좋다.
길들여진 바보? 지식인은 길들여져서는 안 된다.
한 조각씩 던져주는 고기조각에 길들여져서 사는 강아지보다는 언젠나 야성으로 남는 고양이에게 배워야 한다. 지식인들은 말이다…
고양이는 길드는 것을 거부한다. 나는 그런 고양이가 좋다.
“1인분 인생 | 낮은 곳으로 낯선 곳으로”에 대한 1개의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