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민하는 힘. 강상중.p177
감정 기복이 심했던 내 청춘을 수놓은 위대한 존재? 나쓰메 소세키와 막스 베버
나는 이 두 사람에게서 ‘고민하는’ 것이 ‘사는’ 것이며, ‘고민하는 힘’은 ‘살아가는 힘’임을 배웠습니다
그들이 문학과 학문을 통해 계속해서 던지고 온몸으로 받아들이려고 했던 물음. 그것은 ‘근대’라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인간적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근본적인 문제였습니다
#지금을 살아간다는 고민
“호모 페이션스(고민하는 인간)의 가치는 호모 파베르(도구의 인간)보다 더 높다”-빅터 프랭클
현대의 가장 큰 특징? 세계화
자유가 확대되었다지만 그에 어울리는 행복감을 맛보며 살고 있습니까? 만족감과 안도감을 맛보고 있습니까?
실제로는 새로운 빈곤이 퍼져 나가고 있고, 빈부 격차는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과거에는 경험하지 못한 고립감에 시달리고 있는 듯합니다
‘변하지 않는 가치’와 같은 것은 거의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렇지만 인간은 ‘변하지 않는 가치’를 찾으려고 합니다.
#근대 문명의 어둠을 밝힌 소세키와 베버
현재 우리가 안고 있는 고민의 대부분은 ‘근대’라는 시대와 함께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소세키가 품고 있던 문명에 대한 생각? 문명이 발전할수록 인간의 고독은 깊어지고 구원받기 어렵다
막스베버는 서양 근대 문명의 근본원리를 ‘합리화’로 보고, 그것을 통해 인간 사회가 해체되고 개인이 등장해서 가치관과 지식의 모습이 분화해 가는 과정을 해명하려고 했습니다
막스 베버의 ‘사회학’으로 통해, 나쓰메 소세키의 ‘문학’을 통해 ‘근대’라는 것이 인간의 생활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를 배웠습니다
소세키와 베버는 ‘개인’의 시대가 시작되었을 때 시대의 흐름에 올라타 있으면서도 그 흐름에 따르지 않고 각각 ‘고민하는 힘’을 발휘해서 근대화는 시대가 내놓은 문제와 마주했다
#1 나는 누구인가?
자아는 타자와의 ‘상호 인정’에 의한 산물,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자기를 타자에 대해 던질 필요가 있다. 타자와 상호 안정을 하지 않는 일방적인 자아가 존재할 수 없다. 확실하게 말하면 타자를 배제한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
‘자아’와 자주 혼동을 일으키는 ‘자기중심주의’? 타인의 기분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생각만을 밀어붙이는 사람. 이런 사람과 함께 있으면 ‘자기만 생각하는’ 모습에 피곤함을 느낄뿐
#사회의 해체와 자아의 과잉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자기와 타자를 각각 자아로 독립해 있는 것으로 보면 인간 사회는 각양각색의 ‘자아의 무리’가 되고 만다
문명은 우리를 고립시킨다고 다이스케는 해석했다
자기의 성만을 만들려고 하면 자기는 세워지지 않는다? 자아라는 것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성립한다!
‘상호인정’ 이외 다른 방법은 없다
‘진지함’이란 ‘어중간함’과 반대되는 말이다
#2 돈이 세계의 전부인가?
현대 사회에서 돈 때문에 고민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 가족 사이의 갈등이나 인간관계나 일의 갈등에서 사회 범죄에 이르기까지 사회의 심각한 문제에는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돈이 문제가 얽혀 있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고작해야 돈, 그리도 돈’!
“보라, 근대적 세계는 이런 것이다.”-막스 베버
#과거의 제국주의 , 현재의 월스트리트
돈은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성질을 지니고 있어 ‘노동의 보상’과 같은 의미를 떠나 ‘돈’으로 독립하게 되면 그 자체가 목적이 되고 만다. 원래는 ‘돈을 위해 일을 한 것이 아닌’ 사람들도 점점 ‘돈을 위해 일을 하게’ 되고 점점 원래의 모습에서 벗어나 ‘돈을 위해 돈이 도는’ 상태로 변하며, 결국에는 ‘돈이 돌면 돌수록 돈이 늘어나게’ 된다(‘세계화’가 국경을 넘어 세계를 넘나드는 현재의 상황)
IT기술을 구사해서 글로벌 머니 네트워크를 구축한 금융자본
돈만을 만들기 위한 자본주의의 문제점은 모험가들뿐만 아니라 ‘돈과 관계된 일을 하는 모든 사람’의 인간성을 왜곡시킬 가능성이 있다는 것
자본주의에 기생하며 살아가는 ‘등을 치는’ 논리
#3 제대로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
‘알고 있다(know)’와 ‘사고하다(think)’는 다르다. ‘정보(정보통)’와 ‘지성’은 같지 않다. 박식함과 지성의 차이
옷의 주머니에 잔뜩 휴지 조각으로 꽉 채워 놓은 듯한 지성, 이것을 ‘알고 있잖아?!’뿐인 지성
#과학은 모든 것을 가르쳐 주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자기들이 미개사회보다 훨씬 진보했고 미국이 선주민들보다 훨씬 자기 생활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입니다. 우리는 모두 전차를 타는 방법을 알고 있으며 아무런 의문 없이 전차를 타고 목적지로 가지만 차량이 어떤 메커니즘으로 움직이고 있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미래사회의 인간들은 자기들이 사용하는 도구에 대해 우리보다 훨씬 잘 숙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주지화나 합리화는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생활의 지식을 늘려주는 것은 아닙니다.”-막스 베버, 직업으로서의 학문(과학)
“…즉 과학은 그 행위의 궁극적이고 본래적 의미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대답하지 못합니다”
“현대 문명은 완전한 인간을 매일매일 불구자로 망가뜨리며 앞으로 나아간다고 평해도 큰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오래된 야만 시대에는 남의 힘을 빌리지 않고 자기 스스로….”
모든 것의 경계가 허물어진 사회? 엄청난 정보들!
자연에서 얻는 지식을 다시 보아야 하지 않을까? 현실의 육체나 감각에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자기 세계를 확대하는 것이 아니라 적당한 형태로 한정한다. 그 경우에 세계를 닫는 것이 아니라 계속 열어 둔 차로 자기 신체에 맞춰 한정한다. 그렇듯 자연에서 얻은 ‘지’의 모습은 그 세계에 있는 것에대해서는 속속들이 알고 있다. 이것은 ‘반과학’이 아니다. 어떤 의미에 있어서는 ‘비과학’도 아니다.
#4 청춘은 아름다운가?
우리 모두의 인생 속에 반드시 존재하는 ‘청춘’을 알지도 못하고 끝내거나 그 소중한 청춘을 매일 한 장씩 떼어서 버리는 것, 그것은 불행이 아닐까? 그렇게 살다가 10년 후에 자기 삶을 돌아보면 거기에는 삭막함만이 남이 있을 것입니다.
해답이 없는 물음을 가지고 고민한다
따라서 나는 청춘이란 한 점 의혹도 없을 때까지 본질의 의미를 묻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방문 서울대 모습? 내가 목격한 것은 학생들이 “필요 없는 것을 생각하고 있을 여가가 있으면 스킬을 몸에 익히고, 전문지식을 몸에 익히고, 유용한 정보를 가능한 많이 획득해야 한다. 놀고 있을 시간이 없다”는 분위기에서 미국화된 프로그램을 필사적으로 소화시키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청춘은 좌절이 있기 때문에 아름답고 실패가 있기 때문에 좋은 것입니다
#5 믿는 사람은 구원받을 수 있을까?
인생이란 자기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선택해야만 하는 순간들의 집적이며, 그것을 초월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믿고 해답을 발견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자유로부터 도망치고 싶어한다
과학과 합리주의의 세례로 ‘탈마술화’ 된 근대이후의 종교? 근대 이전과 비교할 때 그 어떤 종교도 ‘유사 종교’가 될 수밖에 없다!(막스 베버가 말했듯이, “인식의 나무 열매를 먹은” 뒤였기 때문)
모두가 교주가 되는 1인 종교의 세상? 궁극적으로 ‘믿는다’는 것은 ‘그 어떤 것을 믿는다’가 아니라 ‘자기를 믿는다’를 의미합니다(자기가 교주)
확신할 수 있을 때까지 고민할 수밖에 없다
#6 무엇을 위해 일을 하는가?
일을 한다? ‘사회 속에서 자기 존재를 인정받는다’
일을 통해서 비로소 ‘거기에 있어도 좋아’라는 인정을 얻는다
그래서 나는 ‘사람은 왜 일을 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 ‘타자로부터의 배려” 그리고 ‘타자에 대한 배려’라고 말하겠습니다. 그것이 없다면 일하는 의미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 일이 그 사람에게 보람이 있는지 없는지, 그의 꿈을 실현시켜 줄지 그렇지 않을지는 다음 단계의 이야기입니다.
자기 존재를 확인받기 위해
#7 변하지 않는 사랑이 있을까?
돌이켜 생각해보면 사랑은 그때그때 상대의 물음에 응답하려는 의지입니다. 사랑의 모습은 변합니다. 행복해지는 것이 사랑의 목적이 아닙니다. 사랑이 식을 것을 처음부터 겁낼 필요는 없습니다.
#8 왜 죽어서는 안 되는 것일까?
예외 상황과 마음의 준비
죽음이 무의미하면 삶도 무의미하다!
“자유와 고립된 자아로 가득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모두 그 대가로 쓸쓸함을 맛보아야만 하겠지요”
관계를 계속해서 찾아라
타자를 인정하는 것은 나를 굽히는 일이 아닙니다. 내가 상대를 인정하고 나도 상대에게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거기서 얻은 힘으로 나는 내가 되어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내가 비로소 내가 된다는 의미에 대해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나로서 살아가는 의미를 확신할 수 있게 되면 마음이 열립니다
#9 늙어서 ‘최강’이 되라
분별없는 노인들만 생긴다
다음으로 생각해 볼 것은 노인은 ‘분별력’이 있어 ‘원숙’한 지혜를 갖고 있다는 이미지입니다
제 2인생? 이제는 고령자가 문화를 만들어야 하는 시대
살벌한 세상과 희망이 보이지 않는 사회?
고민은 사라지지 않는다. ‘인간적인’ 고민을 ‘인간적으로’ 고민하는 것은 살아 있다는 증거
길을 찾고 보따리를 찾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고민하는 것이다. 고민 속에 거대한 미로와 같은 우리 삶에서 길을 찾을 수 있는 힘이 있다. 또한 우리가 서 있는 지점을 알 수가 있다.
막스 베버의 ‘의미의 거미줄(web of meaning)’에 매달려 있는 거미, 우리는 이 거미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다만 그 의미를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할 것인지는 상당 부분 우리에게 달려 있다. 그리고 길은 얼마나 깊고 넓게 고민하는가를 달려 있다.
그 사람이 무엇을 고민하느냐가 결국 그 사람의 그릇이다
“고민하는 힘 | 질문이 답이다”에 대한 1개의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