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올 김용옥의 금강경강해
32-33 우리는의 종교의 언어적(제도적) 측면을 총칭하여 “교리”라고 부른다. 그러나 교리가 곧 종교는 아니다. 불교의 교리가 곧 종교(불교)가 아니며, 기독교의 교리가 곧 종교(기독교)가 아닌 것이다. 교리란 곧 교회조직이 요구한 리인 것이다. 교회가 없다면 교리가 필요할 이치가 없는 것이다. 교리는 어느 경우에도 종교가 아닌 것이다. 교리는 종교가 요구하는 제도가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리는 반드시 종교조직이라는 이해관계와 얽혀 있다. 인간의 사회조직이라는 것은 이해가 발생시키는 관계로 형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교리는 인간세의 이해관계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이해하여 온 인류의 종교사는 바로 이 교리간의 충돌과 분쟁의 역사인 것이다. 그것은 제도적 이해관계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그렇게도 화평한 듯이 보이는 깊은 종교심성의 인도인들이건만 항상 종교분쟁으로 나라가 갈라지고 지도자의 암살과 전쟁과 분쟁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모두 이 교리간의 이해관계의 충돌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우리가 종교를 곧바로 교리라고 이해한다면 종교는 중상, 모략, 전쟁, 질투, 암살, 음모, 살상, 등등의 단어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인류의 역사에 가장 큰 죄악을 저질러온 것이 바로 종교요, 종교간의 분쟁인 것이다. 그러나 이때의 종교란 곧 교리인 것이다. 그것은 제도화된 종교를 말하는 것이다. 종교는 분명 교리와 더불어 존립한다. 그러나 종교는 분명 교리 이전의 그 무엇이다. 종교는 교리 이전의 그 무엇이 아니면 아니 되는 것이다. 종교를 교리라고 이해하게 되면 다른 종교를 가진 아버지와 아들이 싸움을 하게 되고,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알목하게 될 뿐이요, 더 크게는 나라와 나라가 전쟁하게 될 뿐인 것이다. 종교는 분명 교리가 아니다.
34 자아! 한번 다시 생각해보자! 종교란 믿음이 아니요, 종교란 하느님이 아니요, 종교란 제도도 아니다. 종교란 성경도 아니요, 말씀도 아니요, 인간의 언어도 아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종교란 무엇이란 말인가?
종교란 무엇인가? 바로 나는 여기에 대답을 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나의 입을 열어서는 아니된다. 입을 여는 순간, 나는 ‘아닌’ 또 하나의 종교를 말해버리거나, 나 자신이 하나의 종교를 만들거나, 또 하나의 제도를 만드는 죄업을 쌓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나는 침묵한다. 그러나 나는 말한다. 여기 바로 내가 <금강경>을 설하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금강경>은 내가 발견한 유일한 종교에로의 해답이다.
종교란 무엇인가? 침묵할지어다.(개구즉찰,도가도비상도) 구태여 나의 구업을 빌리지 않아도 <금강경>이 그 질문에 답할 것이다. 내가 말하면 그것은 나의 소견이 되어버리고 만다…”나”는 침묵하지만, <금강경>은 침묵하지 아니한다.
35 <금강경>은 교리가 아니다. 그것은 통찰이다!
종교란 무엇인가? 나는 독자들이 <금강경>에서 그 해답을 발견하기를 원하지 아니한다. 나는 독자들이 <금강경>이 설하는 몇몇의 통찰에 감입됨으로써, 불교도든, 기독교도이든, 이슬람교도이든, 유교도이든, 자기 나름대로의 해답을 구성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러한 해답의 구성을 위하여 나는 <금강경> 이상의 좋은 참고서는 없다고 단언한다.
새로운 21세기의 인류의 과제는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된다고 나는 말한다. 그 첫째가 자연과 인간의 슬기로운 공존, 그 둘째가 모든 종교·이념간의 배타의 해소요, 그 세째가 학문의 생활화이다.
36 인간세의 화평을 저해하는 가장 큰 요소가 바로 이 “종교”라는 문화현상이었다. 종교가 제각기 인류를 구원한다고 선표하면서, 종교야말로 인간의 죄악에 대한 평화로운 해결이라고 선전하면서, 종교야말로 사랑과 자비와 은혜의 원천이라고 선언하면서, 종교야말로 인류를 억압하고 대규모의 잔악한 살상을 자행하는 명분이 되었으며, 인간을 노예로 만들고 무지하게 만드는 모든 끔찍한 죄악의 온상이 되었으며, 질투와 배타와 저주의 원천이 되어왔다는 이 인류사의 역설이라말로 더 이상 감내할 수 없는 무명의 소치인 것이다. 이제 우리는 종교라는 제도를 말해서는 아니 된다. 이제 우리는 종교 그 자체를 이야기해야 되는 것이다. 종교를 나의 주관적 믿음의 체계로서 접근하거나, 신의 권위나 이름으로 접근하거나, 제도나 규약의 이해로서 접근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서로 알목하고 배타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저주하기만 할 수밖에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마는 것이다. 인간을 구원한다고 하는 종교가, 나의 마음에 화평을 가져온다고 하는 종교가, 나의 고통을 덜어준다고 하는 종교가 어찌하여 서로 알목하고 배타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저주해야만 하는가?
37 신약. 새로운 약속이란 나만 잘났다고 하는 선민의식의 파기에서 성립라는 보편주의적 사랑의 약속인 것이다. 신약의 약속을 유대인만을 위한 사도가 아닌 이방인을 위한 사도, 바울을 통하여 만방에 전파된 것이다.
그런데 요즈음 더욱 희한한 사태는 만교를 통섭해야 할 불교가 매우 배타적인 의식에 사로잡혀 간다는 것이다. 많은 스님들이 불교만이 구원과 해탈의 유일한 길이라고 아집상을 틀고 앉아 있는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의 배타주의적 환경과의 접촉에서 반사적으로 형성되어간 병폐라 할 수 있다. 내가 원광대학교를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원불교도들과 많은 접촉을 가지게 되었고 또 깊은 이해를 하게 되었는데, 원불교도 애초에는 조선의 땅의 고유한 환경속에서 피어난 혁신불교운동이었다. 그런데 원불교에서 내가 가장 상찬하는 것은, 바로 그 핵심교리에 있어서 모든 교리의 포용, 인간세의 모든 종교와의 화해흫 적극적으로 표방하고 또 실천하고 있다는 것이다. 제잠의 시골구석에서 태어났건만 그 생각의 포용성이 소박하면서도 세게의 여타 종교의 편협성을 뛰어넘는 면이 있다고 할 것이다.
38 배타는 결국 배자이다. 남을 배척한다는 것은 결국 나를 배척하는 것이요, 나를 배척한다는 것은 결국 나를 옹졸하고 졸력하고 치졸하게 오그려 붙이는 것이다. 배타를 통해 나를 확장한다는 것은 일시적인 성과를 거둘지 몰라도 결국은 나의 축소와 소멸을 초래할 뿐인 것이다.
배타는 배타로 맞서서는 아니 된다. 배타는 자기논리에 의하여 붕괴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역사의 정칙이다. 배타에는, 수모가 따를지라도, 끊임없는 포용의 자세로 임할 것이다.
최근에 개인적으로 만난 인도의 한 현자의 말을 나는 생각한다. “종교한 본시 사람의 수만큼 각기 다른 종교가 필요한 것이지요. 종교에 대해 일원적인 논의를 한다는 것처럼 어리석을 일은 없습니다. 훌륭한 종교의 교사라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제각기 다른 종교의 형태를 발견해주는 것입니다. 마치 옷이 사람마다 그 취향과 색감과 크기가 모두 다르듯이….”
62 (똥숫간 휴지쪽 한 장으로 만났던) <금강경>은 고졸하나 참신하기 그지없고, 소략하나 세밀하기 그지없고, 밋밋하나 심오하기 이를 데 없다. 개념과 개념의 충돌의 벌판에서 논리의 창칼을 휘두르는 호전의 만용을 즐기었던 동승, 도올이 그러한 고졸한 청신의 맛을 흠상하기에는 너무도 어렸던 것이다. 삼십 년의 세월이 흘러서야 겨우 그 일단의 묘미를 씹게 될 줄이야!
63 <금강경>은 문자화되기 전에 구전으로 성립했을 가능성이 크다. 다시 말해서 <금강경>은 보고 분석해야 할 철학서가 아니라, 듣고 즐기고 깨달아야 할 음악이오, 한 편의 시인 것이다.
65 생활 속에서 느껴야 한다. <금강경>은 그 향기 속에 취해 있을 때만이 그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그 묘미는 곧 간결한 주제와 그 반복의 묘미인 것이다.
<금강경>은 어느 경우에도, 한 구절도 똑같이 반복되지 않는다. 세밀하게 들여다보면 조금씩 다 다르게 되어 있다. 그것은 반복이 아니라 변주다. 그리고 그러한 반복이 없으면 <금강경>은 <금강경>의 오묘한 맛을 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금강경>은 워낙 심오하고 워낙 근본적이고 워낙 철저한 “무아”의 주제를 설하고 있기 때문에, 그 주제는 끊임없이 변주형식으로 반복되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인지될 길이 없다. 그것은 철학의 논서가 아니라 깨달음의 찬가이다. 그것은 번쇄한 개념의 나열이 아니라 득도의 환희를 불러일으키는 신의 부름이다. 아~위대하도다! 금강의 지혜여!
<금강경>은 사람을 취하게 만든다. 천하의 명주보다도 사람을 취하게 만든다…나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이 <금강경>의 향기에 취했던 자로서, 두 얼굴의 사나이, 총명과 예지로 번뜩이는가 하면 탐욕과 음험한 살육의 화신인 사나이, 경세치용의 명군인가 하면 조선의 역사를 부도덕의 나락으로 떨어뜨린 사나이, 수양대군 세조를 서슴치 않고 들겠다.
216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되: “무릇 있는 바의 형상이 모두 허망한 것이니, 만약 모든 형상이 형상이 아님을 보면 곧 여래를 보리라.”
217 원불교는 법당에 모신 법신불이 참으로 법신이라면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는 등신불일 필요가 하나도 없다 하여 아예 그것을 원메(동그라미)의 모습으로 추상화시켰다. 과감하고 혁신적인 발상이다. 원불교도 처음에는 이러한 혁신불교로서 출발한 콤뮤니티운동이었다. 그러나 원불교의 과제상황은 바로 그러한 혁신적인 발상을 지속적으로 그리고 일관성 있게 유지시킨다는 것이 참으로 어렵다는 데 있다. 원불교도들에게 끊임없는 반성을 촉구한다.
224 어째서 그러한가? 이 중생들은 다시는 아상 • 인상 • 중생 상• 수자상이 없을 것이며, 법의 상이 없을 뿐 아니라, 법의 상이 없다는 생각조차 없기 때문이다.
무비법상은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조차 버려야 한다는 뜻이다. 무아 ,” 그 이 실체화되어 또 하나의 아를 형성하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서양에는비교적이러한사상이빈곤하다. 기독교가천박한전도주의에머물고있는역사적현실도이런깊은생각이부족하기때문이다.
228 똇목의 비유는 참으로 기발한 것이다. 강이 많은 지역에서 생활한 인도사람들에게서 생겨난 지혜의 비유인 것이다.

이승에서 저승으로,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건너 간다 할 때에 우리는 뗏목과 같은 수레를 이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목적지에 도착했다고 하자! 어렵게 뗏목을 구했고, 똇목은 아주 훌륭한 나무로 곱게 다듬어져서 잘 만들어져 있다. 내가 이 강을 건너기 위해 이 뗏목을 얼마나 어렵게 구했던가? 그래서 뗏목이 저쪽 언덕에 도착을 했는데도, 뗏못이 좋고 뗏목이 아름답고 뗏목이 귀하여 그냥 뗏목 속에 주저앉아 있다면 도대체 어느 날에 피안의 땅을 밟을 것인가?
아무리 어렵게 예수님을 만났다 하더래도, 진정한 신앙인은 예수를 버려야 한다. 아무리 전지전능한 여호와 하나님을 만났다 하더래도,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을 버려야 한다. 그래야만 참으로 예수의 축복을 받을 수 있을 것이요, 그래야만 참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방편”의 사상은 결코 단단한 사상이 아니다. 인류최고의 지혜를 결집한 두 마디인 것이다: 황 삐엔! (부처를 쏴라!)
229-230 <장자> <외물>편 마지막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통발은 물고기를 잡기 위한 것이다.
물고기를 잡으면 통발은 버려야 한다.
올가미는 토끼를 잡기 위한 것이다.
토끼를 잡으면 올가미를 버려야 한다.
우리 인간의 말이라는 것은
뜻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다.
그 뜻을 잡으면 말은 버려야 한다.
말을 버릴 줄 아는 사람,
나는 언제 그런 사람과 더불어 말을 해볼 수 있을 것인가?
장자의 제일 마지막 말은 매우 아이러니컬하다: “말을 버릴 줄 아는 사람과 더불어 말을 한다.” 여기에 바로 방편의 본직이 있는 것이다. 붓다는 장자가 죽은 약4·5세기 후에 장자를 만나러 중국에 왔다. 이 두 위대한 영혼은 그리운 만남의 회포를 풀었다. 이것이 바로 인류문명사의 가장 위대한 전기의 출발이었다. 이것이 실크로드의 출발이요, 이것이 격의불교의 시작이요ㅡ 이 지구상에 존재했던 가장 대규모의 문명교류의 시발이었다.
233 실재에 대한 언어적 규정의 가장 큰 문제점은 실재는 무상하여 찰나찰나 변해가고 있는데 그것을 규정하는 언어는 그것과 무관하게 대상세계를 고정시킨다는 것이다. 따라서 언어로 구성한 세계는 무상의 세계가 아니라 상의 세계다. 상의세계는망상인것이다. 천당의 불변적 삶을 추구하는 소승적 기독교인의 망상이 어떠한 오류에 속하는 것인지 이제 좀 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천당도 무아속에만 있을 수 있는 것이다.

426“너희들 비구들아, 나의 설법이 뗏목의 비유와 같음을 아는 자들은, 법조차 마땅히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법이 아님에 있어서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