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지의 상상력. 김종철. 347쪽
그러나 포스터모더니즘이라는 것은, 따져보면, 맑스주의의 현실적 ‘실패’를 보고 충격과 좌절을 경험한 서구의 진보적 지식인들의 환멸감에서 비롯된 허무주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결정적으로 내 관심이 다른 데로 옮겨 간 계기는….그곳의 우수한 대학 도서관에 매료…’에콜로지’에 관한 자료들…나는 그런 글들을 읽으며, 우리가 사는 세계가 이대로 가면 조만간 멸망을 면치 못한다는 것을 확실히 느끼고 전율을 금치 못했다.
그리하여 내가 구상한 것이 <녹색평론>의 창간이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맑스의 사상이나 그 밖의 다른 사상가•철학자에 대한 학습의 경험이 그들의 세계에 대한 이해와 판단의 기초를 형성하는 힘이 되었다고 한다면, 내 경우에는 내가 지난 30년 남짓 동안 생태주의적 세계관에 의지하여 작업을 해온 것은 단지 미국의 대학 도서관에서의 독서경험만이 아니라 그 이전에 열중했던 문학공부를 통해서 자신도 모르게 형성된 일정한 사고습관과 감수성 덕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적어도 <녹색평론>이라는 잡지가 어떻게, 무엇 때문에 생겨났는지, 그 배경을 이해하고자 하는 독자들이 혹시 있다면, 그들에게는 이 책이 다소간 도움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흔히 ‘상상력의 시인’ 혹은 ‘에너지의 시인’으로 일컬어져온 윌리엄 블레이크(1757-1827)에 대한 관심은 근년에 이르러 점점…아마도 이것은 억압과 비참을 제도화해온 산업문명의 위기와 모순이 갈수록 심회되고 있는 오늘날의 삶의 상황 때문인지도 모른다.
불의와 불경이 만연한 시대에 “바이블을 옹호한다는 것”은 “생명을 희생하는 일”이 될 정도로 매우 위험한 일이기도 했다. 그것은 당대의 지배체제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반역행위였고, 따라서 거기에는 가혹한 징벌이 수반되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블레이크 당대의 ‘국가종교’란 체제의 버팀목으로 기능하고 있는 기독교 교회였다. 블레이크가 이해하는 당대의 기독교 교회는, 간단히 말하면, ‘사탄’이었다.
블레이크는 “바보들의 눈에는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이 한 닢의 금화로 보이겠지만 상상력의 눈으로 보면 천사들이 합창하는” 모습으로 보인다고 말했던 것이다.
블레이크의 시대는 무엇보다 전쟁과 억압의 시대였다.블레이크는 이 타락의 기원을 인간이 사적 이익을 배타적으로 추구하기 시작한 데서 찾고 있다.
참다운 자유는 대지를 자유롭게 향수하는 데 있다.
사탄은 인간적인 생존이 아닌 죽음의 상태,
그것은 인간이 선천적으로 인간의 적이 되는 세계이다.
이기적인 탐욕과 그것을 제도화하는 사회체제야말로 악의 근본이라고 보는 블레이크의 상상력은 윈스턴리가 대변하는 오랜 민중적 전통에서는 극히 자연스러운 생각이었다.
악마의 공장..보잘것없는 한 조각의 빵을 얻기 위하여그들은 지혜의 나날을 우울하고 따분한 노역에 소모하고,무지 속에서 작은 부분을 보며 그것을 전부라고 생각하고그것을 ‘증명’이라고 부른다.
생의 온갖 단순 소박한 법칙을 보지는 못하고.블레이크의 시인으로서의 위대성은 온갖 사회적 현상과 경험들을 하나의 연속적인 체계 속에서 파악할 줄 아는 그의 비상하게 총체적인 통찰력에서 연유한다고 할 수 있다.
절제•기율•참을성 등 생활규범을 널리 보급…감리교파의 이러한 활동은 그 반세속적 입장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는 노동자들로 하여금 새로운 산업체제에 순응하도록 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실제로 존 웨슬리 자신이, 정부와 국왕에 대한 복종이야말로 하느님의 가르침이며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을 아는 행위라고 명시적으로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결국 보수적 지배세력의 종교적 동반자였던 셈이다.
예컨대 전통적으로 민중생활에서 빠뜨릴 수 없는 기능을 해 온 “건강하고 즐겁고 따뜻한” 대중 술집들이 사라지고 그 대신에 여기저기에 “차가운” 교회가 들어서게 되었다는 점이다.
디킨스는 자신의 작품이 어디까지나 사회적 공기로서 기능하는 것으로 간주했고, 자기의 작가적 임무의 하나는 소설을 통하여 중요한 사회적 이슈들을 제기하고 토론하는 것에 있다고 생각했다.
한 작가의 위대성은 그가 어떠한 인간경험을 소설의 소재로 취하는가에 이미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작가생활 전체를 통해서 디킨스의 일관된 주제 중의 하나는 근대 자본주의 문명이 초래하는 도시환경과 인간생활의 관계였다.그들에게는 어제나 내일이나 똑같았고, 작년이나 내년이나 똑같았다…코크타운에서는 심각하게 부지런히 일하는 것밖에는 볼 수 없었다.
디킨스의 소설에서 진정으로 문제되어 있는 것은 이러저러한 산업문명의 개별적인 해악을 열거하는 것이라기보다 산업자본주의 체제하의 본질적인 인간위기였다.
디킨스의 소설에서 보다 큰 의미를 갖는 것은 자연스러운 인간관계를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하는 산업체제하에서 일반적으로 인간의 삶이 억눌리고 갇혀 있다는 인식이었다.
산업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은 무엇보다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의 불가분리성에 대한 철저한 인식응 요구하는 것이다.격렬한 사회변화의 시기, 즉 사회라는 것이 실제 사람들의 손으로 만들어진다는 사실이 매우 뚜렷하게 드러나는 시기였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는 사람들에게 ‘선택의 위기’로 받아들여졌다.
결론적으로, 디킨스는 근원적인 감수성에 있어서는 민중문화의 상상력에 친근했으나 역사적 변혁의 실질적인 주체로서의 민중의 존재를 발견하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했고, 그럼으로써 결국 프티부르주아 작가로서의 궁극적인 한계를 드러내고 말았다. 그 자신이 옹호해마지 않은 ‘순진한’ 삶을 지키려면 무엇보다 현실의 억압적 힘들에 맞선 치열한 투쟁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디킨스에게는 이 점을 깊이 성찰할 수 있는 시력이 약했던 것으로 보인다.
문학적인 사고와 논리가 가진 고유성…백낙청 교수는 어느 강연에서 이런 의미에서의 문학의 고유한 성격을 언급하고, 문학적 사고습관이 어떤 혁신적인 사상을 이끄는 선구적인 힘이 될 수 있는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과학은 오직 논리와 지식에 관계하지만 인문적 교양은 인간생활 전체에 관계하고 그 전체를 구성하는 개별적•구체적 항목들 상호 간을 연결해준다. 실제로 어떻게 참되게 사느냐 하는 것을 아는 것은 자연과 우주에 대한 어떠한 특수한, 정확한 지식에 근거하지 않는다.
“이론이 없으면 운동이 없고, 문화가 없으면 이론이 없다”
오늘의 삶의 근본적 위기가 ‘의미’의 박탈을 강요하는 산업문명 그 자체에서 연유한다면, 정말 필요한 것은 전통적인 의미의 계급투쟁이 아니라 일종의 ‘문화혁명’이라고 보는 게 자연스럽다.
교육이 맞서 싸워야 할 가장 큰 적대 세력으로 리비스가 본 것은 바로 광고기업이다…리비스에 의하면, 광고야말로 오늘날에 있어서 문화의 급속한, 그리고 전면적 쇠퇴를 초래하는 원흉의 하나이다.그는 이러한 개념을 사전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기도 하고 무의미하다는 점을 인정하고, 이 ‘삶’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대뜸 알아차릴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진정한 교육을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강조한 것은 ‘삶의 가치’에 의해 이끌리지 않는 과학기술이란 삶을 근원적으로 그르치는 재앙이 될 뿐이라는 점이었다.
리비스가 여기서 정말 유감스러워하는 것은 단지 농촌적인 삶이 도시적•산업적인 생활로 변했다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 시간의 리듬에 따라 영위되던 유기적 삶의 소멸로 인해 이제는 농촌이나 도시를 막론하고 ‘살아 있는 문화’를 모두 잃어버렸다는 사실이다.
현대세계에서 정보라는 것은 ‘일종의 뿌리 없는 지식’에 지나지 않는다.
결코 잊어선 안될 것은 민중의 언어야말로 “하나의 총체적인 유기적 문화의 표현”으로서 발달되어왔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현대세계에서 셰익스피어와 같은 위대한 문학의 창조가 불가능한 것은 분명한 까닭이 있다. 바로 그러한 살아 있는 토착적 언어의 토대인 유기적 공동체가 더이상 존재하고 있지 않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산업화가 내포하고 있는 근본 문제는 본질적으로 식민주의적 사회관계에 뿌리를 두고 있을 뿐만 아니라 거기서 파생된 문제들과 불가분리적으로 얽혀 있다는 사실이 간과되어서는 안된다.
식민주의는 생각하는 기계도 아니고 이성적 능력을 갖춘 신체도 아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폭력이며, 더 큰 폭력 앞에서만 항복할 것이다.
파농은 과학의 비정치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요컨대, 다리 하나를 건설하는 일에도 그것이 건설작업에 임하는 사람들의 의식을 풍부하게 하지 않는 한, 그 다리는 건설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다리의 건설이 위로부터 ‘낙하’될 때, 그것은 모든 정치적•경제적 권력이 민중의 이익에 반하는 소수 계층에 장악되어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증거가 된다고 파농은 말한다.
파농이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 전체를 통하여 말한 것은 제3세계가 존재해야 할 방식에 대한 원칙의 천명이었다…인간과 휴머니즘에 관해 쉴 새 없이 이야기하면서 세계 도처에서 인간을 말살해온 서구 식민주의의 방식을 제3세계가 모방해서는 안된다고 파농은 역설한다. 그리고 제3세계의 문제는 “다른 대륙의 다른 시대의 사람들에 의해 설정되었던”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사이의 선택의 문제도 아니라는 것을 강조했다.
중요한 것은 제3세계가 새로운 사회관계, 새로운 인간의 이념을 독자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상품가치와 양립하기 어려운 예술은 점점 고립되고 주변적인 위치로 떨어져 나올 수밖에 없었다…대중문화라는 것은 문자 그대로 대중 자신의 주체적 문화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주의해야 한다. 발달한 기술공학의 성과에 크게 힘입은 대중문화는 대중이 가진 진정한 인간적 욕구를 반영하기는커녕, 오히려 소비사회의 생활양식을 항구화하는 데 필요한 소비심리와 거짓 욕망을 대중적으로 확산하는 데 이바지한다. 따라서 대중문화란 상품소비사회 체제의 존속과 확대에 불가결한 구성요소인 셈이다.
독서는 정열이 되어버렸다…이제 나는 그를 알고 그의 제한된 삶의 한계를 알 수 있다는 느낌이었다. 이것은 내가 조지 배빗이라는 신비로운 인물에 관한 소설을 읽었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었다. 소설의 구상이나 줄거리보다 거기에 나타난 관점에 더 흥미가 있었다…소설 덕분에…내 주위의 백인들이 내가 변하고 있으며 그들을 다른 눈으로 보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느낌을 버릴 수가 없었다.
한글전용정책의 후유증….’고해정토’라고 한글로 써놓으면 무슨 말인지 모른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책을 출판하면서 ‘슬픈 미나마타’로…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제목을 변경함으로써 이 작품이 갖고 있는 핵심적인 메시지를 완전히 놓쳐버렸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공해문제를 주제로 한 소설도, 환경보호를 얘기하는 소설도 아닙니다. 그보다 훨씬 더 깊은 얘기를 담고 있는 작품입니다.
국가와 기업은 오리발을 내미는 게 뿌리깊은 체질이에요…산업사회라는 시스템은 이렇게 늘 약자들을 희생시키지 않고는 단 한순간도 버티지 못하는 괴물입니다.식민지 조선 땅에 있던 흥남질소비료회사…경찰관 입회하에…공권력이라는 이름으로 폭력을 휘두르며 저항하는 주민들을 쫓아냈겠지요. 예전이나 지금이나 조금도 달라진 게 없어요.그러니까 2009년 용산참사의 역사는 뿌리가 깊어요.
“내가 만난 그 환자나 가족이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을 글로 옮기면, 그렇게 되는걸요.”
그러니까 작가는 한 사람의 무당으로서 글을 쓴 거예요. #이시무레미치코
좋은 문학이란 결국 삶에 대한 근본적인 긍정이라는 매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아무리 지독한 악마의 정신이 지배하고 있더라도 끝끝내 꺽이지 않는 인간정신이 있고, 아무리 할퀴고 짓밟아도 끝끝내 소멸될 수 없는 근원적인 기운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믿을 수 있게 하는 게 좋은 문학과 예술의 몫입니다.
https://photos.app.goo.gl/ji7LphpFs6STWUfz5
철학이나 사상이 아니라 문학이 생태주의 감수성과 상상력의 토대가 되어 <녹색평론> 발행,편집인으로 국내 생태주의 운동의 큰 물결을 이끌었던 김종철님 문학론집. 위대한 문학적 상상력의 바탕은 대지에 뿌리를 둔 휴머니즘에 대한 상상력임을 깊고 풍부한 독서경험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들려줍니다. 책은 멀리서 찾아온 위대한 스승이자 훌륭한 벗일 수밖에 없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