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뜻으로 본 한국역사. 함석헌. 496쪽
“여럿인 가운데 될수록 하나인 것을 찾아보자는 마음, 변하는 가운데서 될수록 변하지 않은 것을 보자는 마음, 정신이 어지러운 가운데서 될수록 무슨 차례를 찾아보자는 마음, 하나를 찾는 마음, 그것이 뜻이란 것이다.
그 뜻을 찾아 얻을 때 죽었던 돌과 나무가 미(美)로 살아나고, 떨어졌던 과거와 현재가 진(眞)으로 살아나고, 서로 원수되었던 너와 나의 행동이 선(善)으로 살아난다. 그것이 역사를 앎이요, 역사를 봄이다.”
#넷째 판에 부치는 말
고난의 역사. 역사는 첫머리에서 나중 끝까지 고난인가, 역사가 고난이요 고난이 역사인가? 속만 아니라 겉까지도, 뜻만 아니라 그 나타내는 말까지도 고난이어야 하는 것인가? 이 씨알의 역사를 나는 고난이라 하였고 그 고난의 모습을 그려보자는 것이 이 조그마한 책인데, 이 책을 세상에 내놓는 데도 어찌 그리 어려움이 많은가? 끝에서 끝까지 그 받는 고난을 통한 시련으로 하여금 완전한 것이 되게 하기 위해서인가? 나는 이 네 번째 새 판을 내면서 속속들이 그것을 느낀다.
‘성서적 입장’이라는 대신 ‘뜻으로 본’이라고 붙일 때 나는 여러가지로 생각하였다…나는 이제 기독교인만 생각하고 있을 수 없다. 그들이 불신자라는 사람도 똑같이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게는 이제 믿는 자만이 뽑혀 의롭다 함을 얻어 천국 혹은 극락세계에 가서 한편 캄캄한 지옥 속에서 영원한 고통을 받는, 보다 많은 중생을 굽어보면서 즐거워하는 그런 따위 종교에 흥미를 가지지 못한다. 나는 적어도 예수나 석가의 종교는 그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혼자서 안락하기보다는 다 같이 고난을 받는 것이 좋다. 천국이 만일 있다면 다 같이 가는 데가 아니겠나!
다 같이 가는 데가 어디일까? 의인, 죄인, 문명인, 야만인을 다 같이 구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유신론자, 무신론자가 다 같이 믿으며 살고 있는 종교는 무엇일까? 그래서 한 소리가 ‘뜻’이다. 하나님을 못 믿겠다면 아니 믿어도 좋지만 ‘뜻’도 아니 믿을 수는 없지 않느냐….그래서 뜻이라고 한 것이다.
이야말로 만인의 종교다.
‘성서적 입장’이라는 대신 ‘뜻으로 본’이라고 붙일 때….내게는 이제 믿는 자만이 뽑혀 의롭다 함을 얻어 천국 혹은 극락세계에…나는 적어도 예수나 석가의 종교는 그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다. 고난의 까닭을 알 사람이 없다. 여러 날 후에야 가슴속에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고난의 역사는 고난의 말로 써라.”
나는 이제야 비로소 역사적 현재의 쓴맛을 알았다. 가슴에 들어오는 보름달을 받아들이는 산 속 호수 모양으로 나는 ‘고난의 역사’를 와 비치는 대로 반사하였다.
누가 과연 고난의 역사의 뜻을 알까?
새로 고쳐 쓰는 역사
현대를 건지려면 군축회의도 필요하고 경제회의도 필요하겠지만,
그보다 먼저 새로운 세계이상을 세워야 할 것이다.
머리가 달라져야 한다.
그것을 위하여 역사를 고쳐 읽자는 것이다.
뿌리의 일은 두 가지다. 하나는 자리 잡고 서는 것이요, 하나는 양분을 빨아올리는 것이다. 생명의 목적이 마지막에는 날아다니기까지 하는 데 있지만, 그것을 위해서는 우선 자리 잡고 서는 것이 필요했다.
삶의 뿌리. 그럼 뿌리가 뭐냐? 생각함이다. 그럼 어디다 박으란 말이냐? 사실의 대지에다 박으란 말이다.
중요한 것은 사실이요, 그 사실을 삭여서 살로 만드는 사색이다.
사실은 두 면이 있다. 인생과 역사다. 식물생활의 근본이 되는 땅이 흙과 물이 합한 것이듯이. 인간생황의 근거가 되는 사실은 인생적인 면과 역사적인 면 둘로 되어 있다. 물 없는 흙 없고 흙을 떠난 물 없듯이, 역사 없는 인생도 없고 인생을 내놓은 역사도 없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두 대립하는 면으로 되어 있는 것만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세계가 하나된 시대
이것이 역사의 새 장의 제목이다. 이제는 모든 인류의 아들들을 지금까지 서로 원수인 듯 서로서로 다투고 죽이던 모든 민족, 나라, 인종, 교도, 주의자를 총동원하여 한 전선에 내세워서 모든 모순, 모든 허비, 모든 오해를 다 내버리고 새로운 건설적인 하나로 향하게 하여야 한다.
새 종교, 하나의 종교, 참종교가 필요하다
경전의 생명은 그 정신에 있으므로 늘 끊임없이 고쳐 해석하여야 한다.
위대한 전도자로서 역사에 무관심했던 사람은 없다.
새 프로테스탄트가 나와야 한다. 종교개혁이 다시 나와야 한다…그들의 사명은 진리를 현대 속에 살리는 데 있다.
사관
역사의 정의
역사를 안다 함은 지나간 날의 일기장을 외운다는 말이 아니다…역사를 참으로 깊이 알려면 비지땀이 흐르는 된 마음의 활동이 있어야 한다. 마치 먹을 것을 먹어 살을 만드는 것과 같은 일이다.
역사는 새 세계관을 지어내는 풀무다
역사에 적는 일은 단순한 사실이 아니라 골라진 사실이요. 그 고르는 표준이 되는 것이 지금과의 산 관련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사실이라기보다는 그 사실이 가지는 뜻이다.
뜻이 문제다.
그다음은 기록이라는 말이다.
기록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풀이(해석)라 함이 옳을 것이다. 그보다도 한 개 예술적인 창작이라 하는 것이 옳을지도 모른다.
42 뜻과 해석
사실은 결국 사실이라고 알려진, 혹은 해석된 사실이다.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이미 현재적으로 골라진 것이다. 지금의 우리가 사실이라고 보는 대로의 사실이다. 삭아서 내 살이 된 물건이다.
바름이란 내게 좋기 위하여 역사적 판단을 구부리지 않는다는 말뿐이지, 도대체 판단하기, 해석하기를 금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의 자세한 기록은 전문가의 일이다. 그들의 역사는 사실의 역사, 기술(記述)의 역사, 연구의 역사다.
그러나 씨알은 그것보다 해석의 역사, 뜻의 역사를 요구한다.
세계의 밑을 흐르고 있는 정신을 붙잡게 해주는, 어떤 분명한 주장을 가지는, 말씀을 가지는 역사를 요구한다. 그리고 전문가의 사명은 마지막에 한 권의 씨알의 역사를 쓰는 데 있다. 바다같이 넓은 연구가 있어도, 산같이 쌓인 사료가 있어도 그것만으로는 부족한다.
그중에도 가장 긴요힌 것은 식이다. 식은 뚫어봄, 내다봄, 맞춰봄, 펴봄이다. 이른바 눈빛이 종이를 꿰뚫는다는 것이요, 줄 사이를 읽는다는 것이다.
잘된 역사책이 나타나는 꼴 뒤에 정신을 밝혀주는 글인 것같이 잘하는 역사 읽는 법도 글자 밖의 정신을 읽어내는 해석에 있다
여럿인 가운데서 될수록 하나인 것을 찾이보자는 마음, 변하는 가운데서 될수록 변하지 않는 것을 보자는 마음, 정신이 어지러운 가운데서 될수록 무슨 차례를 찾아보자는 마음, 하나를 찾는 마음, 그것이 뜻이란 것이다. 그 뜻을 찾아 얻을 때 죽었던 돌과 나무가 미로 살아나고, 떨어졌던 과거와 현재가 진으로 살아나고, 서로 원수되었던 나와 나의 행동이 선으로 살아난다. 그것이 역사를 앎이요, 역사를 봄이다.
종교적 사관
사랑은 구체적인 생명활동이요, 결코 추상적인 이름이 아니다. 종교도 구체적인 것이요, 추상적인 것인 아니다. 그것은 물론 보편적인 진리이지만, 보편적이기 때문에 반드시 추상적일 필요는 없다. 우리가 물질이라 부르는 세계에서는 가장 보편적이려면 추상적이 되어야 하지만, 정신의 세계에서는 그와는 반대다. 가장 구체적이 아니고는 가장 보편적일 수 없다.
51 생명을 문제로 삼는다면 역사는 무시할 수 없다. 생명은 역사적으로 발전하는 것이요, 역사를 낳는 것은 생명이기 때문이다.
과학적인 사관에서는 역사에서 뜻이란 것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마치 자연현상을 대하듯이 순전히 원인, 결과의 관계로 설명한다. 과학적인 사관은, 불철저한 중간적인 태도에 그치지 않는 한, 결국 유물사관으로 가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정말 과학적인 태도는 인간에게는 과학 이상의 것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이다.
마치 가까운 언덕보다 저 무한한 거리의 별이 도리어 확실한 목표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별을 바라보고 가도가도 별이 있는 곳에는 가지지 않는다해서 별은 거짓이란 말은 되지 않는다. 가도가도 잡히지 않기 때문에 참이요, 지도목표가 될 수 있다.
실현되는 것이 이상이 아니라, 영원히 실현 안 되는 것이 이상이다.
그는 이 우주 속에 자유의지를 넣었다. 자유하는 의지가 있어서만 참정신적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생명의 근본 원리는 스스로함이다.
역사는 결코 똑같은 것을 영원히 되풀이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산 것이기 때문에 그 운동은 그저 되풀이 되풀이 끝없이 하는 것이 아니요, 자람이다. 생명은 진화한다. 적게 보면 되풀이하는 듯하면서 크게 보면 자란다
수레의 바퀴는 밤낮 제자리를 돈 것 같건만 결코 제자리가 아니라 나아간 것이요, 나사는 늘 제 구멍을 돌고 있는 것 같은데 사실은 올라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역사를 이해하는 데 그 근본 생각은 영원히 앞으로 나아가는 혹은 위로 올라가는 단 한 번의 운동, 곧 뜻을 이루기 위한 자람이라는 것이지만,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무도 본 자가 없고 볼 수도 없는 그 영원의 바퀴를 이 인생의 일생으로 비유해보는 수밖에 없다. 제대로 완성인 듯하면서 영원의 미완성이요, 늘 되풀이인 듯하면서도 진화인 이 일생이다.
역사를 한 개의 음악에 비해 말할 수 있다. 소리의 음악이 공기의 파동으로 되는 것이라면 역사는 생명의 파동으로 되는 음악이다.
81 세계역사는 한 위대한 교향곡이다. 영원에서 나와 영원으로 흘러드는 행진곡이다. 영원의 미완성곡이다.
82 역사의 모든 일, 그 일을 하는 모든 사람은 다 서로 떨어진 것이지만, 또 떨어진 것이 아니다. 서로 다르면서도 하나를 이루는 무엇이 있다. 그 무엇 때문에 한 역사를 이룬 것이다. 그 무엇을 붙잡는 것이 역사의 시작이요, 끝이다. 그것이 뜻이다. 팔과 다리를 하나로 만드는 것은 산 인격이다. 그리고 그 인격이란 각 사람이 서로 같지 않다. 같지 않으면서도 또 같이 사람이다.
94 이렇게 단언한다. 한국의 역사는 고난의 역사다.
고난의 역사! 한국역사의 밑에 숨어 흐르는 바닥 가락은 고난이다…그러나 부끄럽고 쓰라린 사실임을 어찌할 수 없다.
112 도깨비가 있어서 무서운 게 아니라 무서운 생각을 하기 때문에 도깨비가 생긴다.
114 작용과 반작용은 하나다. 나와 전체가 대립되지 않는 데가 참나일 것이다. 나이자 곧 전체, 전체이자 곧 나다.
125 우리 민족의 결점. 우리는 이제 신화도 없어지고 민족의 영웅도 없어졌다. 감격도 없고 흥분도 모르는 민족이다. 약아빠진 것은 국민적 이상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고도 나라를 할 수 있을까?
128 자존하기 못하기 때문에 자유가 없다. ‘스스로’라는 것이 생명의 원리 아닌가? 자유 없이는 모처럼의 ‘인(仁)’도 얼빠진 것에 지날 것이 없고, 그 좋은 평화주의도 못난 것밖에 될 것 없고, 그 장한 용맹도 짐승에 다를 것이 없다. 종은 불행일 뿐 아니라 죄악이다.
올라오는 역사 내려가는 역사
5천 년 역사를 가만히 씹어보면 모든 시대의 일은 각기 다르면서도 한결같이 그 밑을 꿰뚫어 한 개의 뜻이 움직이고 있음을 할 수 있다.
133 글워리 없는 역사. 우리 옛날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누구나 다 같이 하는 탄식이 글워리(史料)가 부족하다는 것이다…기록이 없는 5천 년 문화, 이것이 바로 한국역사다.
218 쓰다가 말고 붓을 놓고 눈물을 닦지 않으면 안 되는 이 역사, 눈물을 닦으면서도 그래도 또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이 역사, 써놓고 나면 찢어버리고 싶어 못 견디는 이 역사, 찢었다가 그래도 또 모아대고 쓰지 않으면 아니 되는 이 역사, 이것이 역사냐? 나라냐? 그렇다. 네 나라며 내 나라요, 네 역사며 내 역사니라.
219 역사의 흐름에 맑은 물, 흐린 물 따로 없다. 역사의 음악에 높은 악기 낮은 악기의 구별이 없다. 다만, 다만 오직 하나, “살아라! 뜻을 드러내라!”하는 절대 명령이 있을 뿐이니라.
221 팔만대장경. 그 경판은 백성을 버리고 강화에 가 있으면서 부처임더러 나라를 건져달라고 발원해서 만든 것이다. 그 높고 묘하고 아로새긴 탑이 정말 민중의 살림을 표하는 것일까? 우뚝 선 그 모양은 민중을 무시하고 저만 잘살자는 귀족주의 그대로 아닌가?
228 최영과 이성계. 둘의 사상과 마음씨는 정반대였다. 하나는 진취요 하나는 보수며, 하나는 자주독립이요 하나는 사대 예속적이며, 하나는 이상주의요 하나는 현실주의며, 하나는 의리요 하나는 권리다.
섭리는 이 가장 중요한 위기에 이 두 반대되는 정신과 사상을 두 인물에 대표시켜 이 민족을 시험한 것이다.
229 이성계의 반란. 최영이 진 것이 아니라 단군이 지고, 동명왕이 졌다. “상국지경을 범하면 천자께 죄를 짓는다”고 한 이성계는 뉘 아들인지 모르지!
어째 일이 이렇게 될까? 이상주의가 죽고 현실주의가 이겼구나. 이소사대(작은 것으로 큰 것을 섬김, 곧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일)의 국책이 결정된 날이로구나. 스스로 소국·소민이 되었구나. 이 나라 역사의 키가 아주 결정적으로 고난의 바다에 놓인 날이다….집은 잊은 날이다. 집을 잊은 날은 집을 빼앗기던 날보다 더 슬프고 아픈 날이다. 빼앗길 때는 집이 밖에 없는 대신 속 깊이 들어왔지만, 잊은 날에는 마음의 집마저 없어지지 않았느냐? 빼앗길 때는 집이 없어졌거니와 잊은 날에는 자라가 없어지지 않았느냐?…하나님의 시험에 한국은 완전히 낙제하고 말았다.
자유를 판 놈은 마지막에는 모든 것을 다 빼앗기는 법이다.
239 저자로 내려온 불교. 종교가 그렇게 썩었으므로 도덕이 썩었고, 도덕이 썩었으므로 그 망국이 냄새를 피웠고, 혁명이라 하여도 그 공기 속에서 된 것이므로 마찬가지로 냄새가 난다.
났느냐 났느냐 났느냐
단군시대 이후 역사는 삼국시대로 가장 볼만한 때를 이룬다.
수난의 오백 년. 이제는 발을 구르고 몸부림을 치며 통곡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개가 온 것이다. 그것이 수난의 시대다.
245 이제 우리가 보려는 이조 오백 년의 역사는 지리산 남쪽 갈기갈기 갈라지는 소백산 줄기의 낮고 약한 산줄기들이다. 잔지러지다 잔지러지다 못해 물속으로 빠져들고 마는 작고 어지러운 산 갈래들의 헤어지고 얼크러지는 모양이다. 물론 아주 사라져 없어지는 것은 아니요, 아주 헤어져 흩어져버리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멀지 않은 바닷속에 제주도와 그 한라산이 솟는 것을 본다. 한라산은 백두산이 그대로 다시 나타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같은 식이다…그것은 잃어버렸던 통일을 다시 찾는 상징이 아닐까? 섬 하나에 산 하나, 이름도 하나.
247 중축이 부러진 역사
덕 없이 세운 나라. 무엇 때문에 수난인가?… 그 잃어버린 정신 때문이다. 이조 한 대의 역사는 한마디로 중축이 부러진 역사다. 축이 부러진 수레가 어찌 나갈 수 있을까? 정신도 없이, 국민 이상도 없이, 수레의 바퀴 같은 모든 제도, 조직이 있다 한들 어떻게 역사의 진행이 있을 수 있을까?
역사도 정신이 빠지면 아무리 정치를 하고 모든 문화활동을 하여도 어지러울 뿐이다. 그러므로 수난이다.
하필이면 이조에는 서로 물어 뜯고 하는 당파 싸움이 그리도 많은가? 하필 이조에는 외국이 쳐들어옴이 그리도 많은가? 하필 이조의 종교와 학문만이 폐해가 많은가? 이 모든 것은 중축 혹은 등뼈가 부러졌다는 사실을 모르고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다.
별이 주는 것은 방향인데, 확실한 방향을 줄 수 있는 것은 무한히 높이 있기 때문이다. 이상도 인생에 방향을 주는 것뿐이요. 그러기 위해서는 될수록 높고 멀어야 한다.
쓸데없어진 세종의 다스림.
이때에도 세종이 백성을 위하여 글자를 만들어 반포하는 데 가장 반대한 것이 누구냐 하면 집현전 학자들이었다. 그들은 장차 나라를 맡아 정치할 사람들이다. 그러면 그 정치가 어떤한 것인가 짐작할 수 있지 않나?
수양의 시꺼먼 마음. 온통 원수인데 어찌 이루 다 갚으며, 풀어서 풀리느냐? 그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갚지 않고, 풀지 않고, 단번에 다 풀고 갚는 일이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뜻을 생각하여 꺠닫는 일이다.
사육신. 의(義)의 씨. 의인의 피를 요구하는 데는 값을 받는다는 것보다 한층 더 싶은 뜻이 있다. 그것은 의를 살리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사즉생)
283 회칠한 무덤. 김시습. 역사의 표면에서 피상적 관찰을 하는 시속 역사가들은 세조를 가리켜 영주라 명주라 명군이라 하고 성종의 시대를 일컬어 태평성세라 하나, 한 시대의 의미는 결코 그 정부가 발표하는 형식적인 문구나 통계숫자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도 사회의 뒷면을 보지 않으면 안 된다. 큰 거리보다 뒷골목에, 서울보다 시골에, 드러난 지위에 있는 사람보다 이름없는 존재를 가지고 가는 지아비·지어미의 생활을 본 후에야 비로소 그 시대의 참모양을 보았다고 할 수 있고, 그 시대의 참뜻을 붙잡았다고 할 수 있다.
사회의 겉보다 속을 보아야 한다. 우리가 세조·성종의 시대를 이렇게 볼때 그것은 회칠한 무덤이다.
293 고질. 당파 싸움의 시작. 사람을 죽이는 놈은 언제나 비겁한 놈이다. 제 가진 지위에 자신을 가지지 못한 자가 늘 신경과민으로 세상을 보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자기를 잃은 결과. 당쟁의 근본 원인은 이조시대에서만 찾을 것이 아니라 삼국시대까지 올라가야 한다.
민족적으로 자기를 잃어버린 것이 그 원인이다…나를 잊었기 때문에 이상이 없고 자유가 없다. 민족적 큰 이상이 없기 때문에 대동단결이 안 된다.
민족을 묶어매는 것은 폭력이나 법이 아니고 민족적 이상이다.
뜻이 하나일 때 통일은 저절로 된다.
또 자유가 없기 때문에 당파를 짓게 된다. 당파 싸움의 목적은 작은 세력을 다투는 데 있으니 강한 자에 대하여 비굴하게 구는 놈일수록 심한 법이다. 그러므로 당쟁은 노예근성에서 나온 것이다. 망국민일수록 싸움이 많다. 그러나 나라를 찾으려면 죽기로써 서로 양보하고 한 이상을 세워 싸움을 그치지 않고는 안 될 것이다.
율곡의 헛수고. 율곡은 당론의 원인을 너무 옅고 가까운 데에서 구하였다. 이제 와서는 율곡의 수고가 쓸데없었던 것이 스스로 환한 일이 되었다.
전쟁에도 아니 없어진 것. 의병. 민중은 그와 같이 맑은 정신이 드는 기색을 보였는데, 나라의 지배자와 지도계급은 여전히 가위에 눌려 있었다. 그 맥빠짐과 그 당파심만은 그대로 계속되었다.
전쟁의 뜻. 전쟁의 의미는 전쟁 때보다도 전쟁 후에, 전장보다 학교와 공장과 농터와 가게에 있다…땅을 빼앗고 사람 죽이기를 마음대로 하는 것이 승리자가 아니라, 이 시련으로 일단 정신의 향상을 얻는 국민이 참 승리자요,…이 시련에 낙제하고 정신이 내려가는 국민이 정말 진 자다. (로마제국이 멸망한 이유)
자유는 얻어서 자유가 아니라 얻으려는 데가 자유다…자유는 안에 있는 것이지 결코 밖에 있지 않다.
이조의 학문이라면 오로지 지배계급에 한한 것이다. 그러므로 학문은 온전히 정치의 연모가 되고 일신의 영달을 목적으로 하는 지극히 고루한 것이 되어버렸다.
한국의 연구한다 함은 죽은 과거의 고분을 캐는 고고학이 아니라 한국의 개성을 앎이요, 그 개성을 가지고 자라나는 역사의 현재에 대하여 가지는 사명을 깨달음이다. 이 세 가지가 있어야 정말 자기를 안 것이다.
357 한 시대가 새로워지려면 결국 기적이 일어나야만 한다. 기적을 행하는 것은 외물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하는 정신만이다.
그러므로 결국 종교 문제다.
369 기독교가 맡은 역사적 과제. 첫째는 계급주의를 깨뜨리는 일이요, 둘째는 사대사상을 쓸어버리는 일이요, 셋째는 숙명론의 미신을 없애는 일이었다.
특권계급이 또 민중 압박으로 쓴 방법은 중국을 아주 대국으로 섬겨야 한다는 사상을 가르쳐준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민중을 중국에 팔아먹은 대신, 그 지위를 가지고 그 대국의 세력을 빌려서 자기네의 지위를 튼튼히 하고, 그 대신 반도 안에서는 마음 놓고 짜먹었다.
373 천주교가 실패한 큰 원인은 이 민중교육을 하지 않은 데 있다.
382 지친 민족. 이때 역사의 요청은 한마디로 깨는 데 있었다. 민족으로 깨고, 세계에 깨고, 시대에 깨야 한다. 기차·기선이 나오고, 전신·전화가 생기고, 이제부터 세계 역사는 급템포로 달리게 된다.
큰 혁신. 그것을 하자는 실학이었는데 실학파가 그것을 못 하고 낡은 책장만 뒤집다 말았지 민심을 뒤집지 못하였다. 그래서 천주교였는데 천주교가 또 천당·지옥만 찾다 말았다.
386 마지막 막. 대원군, 민비, 수구파, 개화파, 친일이요 친청이요, 친로요 친미요….그 모양이 꼭 늙은 갈보와 같았다. 제가 스스로 제 운명을 개척하고 사람 노릇을하자는 생각이 없고 오늘 이놈에게, 내일은 저놈에게 붙어 그때그때 구차한 안락을 탐하는 것이었다.
해방. 알면서도 모를 것은 역사다. 역사를 연구하는 것은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서라지만, 미래는 예측 못 한다…그러나 그래도 예측해보아야 한다…예측할 수 없건만 예측해보는 데 역사가 있다.
도둑같이 온 해방. 하늘이 준 떡. 아무도 모른 것은 아무도 꾸민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꾸미지 않고 온 것은 하늘의 선물이다.
그런데 그 해방이 하늘에서 내리자마자 씨알의 손에 있지 못하고 도둑을 맞았으니 웬일인가?
국가사상의 결핍. 나라 생각 아니 하는 죄.
408 사상의 빈곤. 그러나 새 나라를 맡아놓고 가장 큰 불행은 정신의 혼란, 사상의 빈곤이었다.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은 민중의 혼을 깨우쳐야 할 것이다…그러면 다 살아난다. 그런데 못 하지 않았나?
천당 가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구원 얻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형제의 죄를 사해주는 것이 기독교다. 그러면 구원을 저절로 될 것이다. 그런데 천당만 찾고 구원만 부르는 데서 잘못을 하였다.
419 6·25. 역사는 점점 더 알 수 없다. 해방이 갑자기 온 것도 알 수 없거니와, 6·25전쟁을 당하고 나서는 점점 더 알 수 없다.
그러나 알 수 없는 것은 생각하라는 말이다.
427 38선은 칼로 해결할 수 있는 선이 아니요, 이성으로, 도리로, 천리로, 본성으로 해결해야 할 선이다. 살 생각만 있으면, 삶이 무엇이며 어떻게 하면 사는가를 깨닫기만 하면, 이제 곧 없어지는 선이다. 백만 대군이 양쪽에 서 있더라도 서로 손을 잡고 “우리는 하나다” 하는 민족을 가를 수는 없다. 자를 수 없던 물이 얼면 잘라지듯이 우리도 우리 본성을 잊고 얼어버리고, 생명이 아닌, 사상이요, 주의요, 방침이요, 방법이요, 공산당이요, 중경파요, 미주파요 하는 잡생각이 들어왔기 때문에 분열이 생긴 것이다.
고난에 뜻이 있다
역사는 두 가지로 남는다. 하나는 뒤에 남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속에 남는 것이다.
고난의 의미. 자기를 들여다 봄
고난에 뜻 있다. 고난은 결코 정의(情意)없는 자연현상이 아니다…고난은 인생을 위대하게 만든다. 고난을 견디고 남으로써 생명은 일단의 진화를 한다.
살았다 함은 결국 살 이유를 알았다 함이다. 그렇지 않고 아무 이유를 깨달은 것 없이 그저 살고 싶으니 살겠다는 것을 가지고는 이 투쟁적인 생에서는 힘이 없다.
까닭이 곧 힘이다.
사명의 자각이야말로 재생의 원동력이다…쇠망은 결국 정신적 쇠망이요, 정신은 결국 명이다. 하나님의 명이다.
미래의 역사는 종교적인 믿음의 눈을 가진 자가 아니고는 알 수 없을 것이다.
미래의 싸움은 진리로 싸우는 싸움이요, 믿음으로 이기는 싸움이다.
역사가 주는 교훈. 국민적 반성. 사람에게 가장 귀한 것은 자기를 돌아볼 줄 하는 일이다. 사람이 사람 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진보냐 퇴보냐. 역사의 진보, 퇴보의 표준은 무엇이냐? 한 말로 묶어서 자유다…인간의 자유가 점점 발달해간 과정…그러나 다른 면에서 생각할 때, 그것은 퇴보다. 왜 그러냐? 자유가 밖으로는 는 것 같으나 속으로는 줄었다.
해방 후의 역사는 겉으로는 자유나 속으로는 자유가 없다. 그러나 또 한 번 더 깊이 들어가면 자유다. 독재화되어가는 정치 밑에서 자유는 점점 준 듯하나 국민의 속에는 반항의식이 점점 더 높아간다. 씨알은 점점 깨어간다. 그러므로 이것은 진보라는 것이다. 본래 역사는 절대의 진보다.
지성의 미래. 인물의 빈곤, 지도자 없음을 한탄. 능(能)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나 그 능은 개인의 는이 아니라 대중의 능, 전체의 능이다. 중인(衆人)의 능, 전체의 능을 얻기 위해 필요한 것은 지식이다. 그러므로 지도자로서 능보다 더 필요한 자격은 지성이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먼저 필요한 것은 덕이다.
덕이 무엇이냐? 자기 속에서 전체를 체험하는 일이다. 이것을 현대적으로 나타낸 것이 헌법이다. 옛날 임금의 덕이 발달하면 헌법이 되었다.
어려워진 나라. 서로 얽혀서 무엇부터 풀어야 할지를 알 수 없는데…모험이라면 모험이다. 그러나 마땅히 모험해야 하는 올바른 지점은 지(知)에 있다. 나라를 바로 잡기 위하여 한번 모험을 할 전략적인 지점이 셋이 있다. 부(富)가 그 하나요, 권(權)이 또 하나요, 그 다음은 지(知)다. 그러나 이 셋 중에 반드시 골라야 하는 것은 지라는 말이다…호모 사피엔스…앞으로의 역사는 점점 더 지성의 역사가 될 것이다. 칼을 꺽고 생각을 깊이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