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과 실천. 함석헌학회. 305쪽
함석헌사상의 인문학적 조명
민족주의를 넘어서 인류 보편의 세계주의로
왜, ‘생각과 실천’인가
함석헌, 깊고 폭넓은 사유 내용을 보여준 실천적 사상가
함석헌의 말글은 당면한 문제를 헤쳐나가기 위해 나온 것
유기적 생태론의 통전성 존재로 모색
함석헌의 씨알교육론
구제신애. 함석헌 교육론
스스로 구하고 바치고 믿고 사랑할 수 있어야 진정한 배움이라 할 수 있다.
삶은 맞춤(적응)이다…둘째, 생명은 대듦(거부)이다…셋째, 생명은 지어냄(창조)이다.
동행에서 가장 중요한 벗은 타인이 아니라 자기자신이다. 자기가 자신한테 가장 충실한 벗이 될 수 있어야 다른 사람과도 충실한 벗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라.”…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에서는 바로 말조심이고 언사조심임을 바울은 강조했던 것이다.
커뮤니케이션 과정에서 약호화와 기호해석이 늘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함석헌의 종교다원주의 사상이 한국의 현대화에 미친 영향
진보나 발전이라는 결국 단순 간단화에서 복잡 복합화의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함석헌은 가장 높은 수준의 삶에서는 다양성이 풍부하게 넘쳐흐르지만, 지극히 낮은 수준의 삶에서는 규격화와 획일화가 판을 친다고 생각했다.
한국 기독교 비판
한국의 기독교(개신교)인들이 압도적으로 근본주의 경향을 갖게 된 데는 초기 미국 선교사의 영향이 크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의 한반도에 상륙한 미국 선교사들의 복음화를 향한 열정은 의심할 여지없이 뜨거웠다. 초기 선교사들은 한결같이 나이가 20대(언더우드 26세, 아펜젤러와 앨런은 27세)로서 그들의 헌신적 자세와 정열은 대단한 것이었지만, 다른 한편 그들에게는 사회경험이 부족했고 충분히 성숙했다고 보기 어려울뿐더러 어떤 면에서는 순진한 청년에 불과했다. 한국 기독교는 이들 선교사들로부터 복음에 대한 순진한 열정과 더불어 인간적 미숙함과 무경험을 신앙적 유산으로 물려받은 셈이다. 그리하여 오늘날…종교가 자기 이외의 다른 영역, 문화적이고 사회적이며 정치적인 환경과 깊은 상관돤계에 있다는 한결 성숙한 의식에는 도달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하나님 섬김은 민중 섬김에 있다. 가장 높음이 낮음에, 가장 거룩함이 가장 속됨에, 가장 큼이 가장 작음에 와 있다. 진리는 민중에 있다. 하나님 말씀은 민중의 입을 통해 온다. 사람 없이는 하나님이 일하지 못한다.”
아나키스트 함석헌의 생태철학
아나키즘: 인간이 만든 법에 의해 구속되지 않는 자유에 기초한 새로운 사회질서를 창출하려는 철학. 모든 형태의 정부는 폭력에 의존하고 있고, 따라서 그런 정부는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잘못된 것이고 해로운 것이라는 이론.
오늘날 언어를 통해 시대적 문제와 통찰을 가져오는 말은 적고, 숱한 말장난과 속임, 그리고 포장된 언어만이 난무하고 있다.
아니키즘이 모든 지배와 위계적 질서를 거부하고 개인의 자유를 위해서 저항…자연은 정복이나 지배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가 되어 어울려 살아야 하기 때문…그런덴 자본과 정부(국가)가 결탁되어 자연과의 어울림을 지향하지 않고 오히려 인위적 지배와 통제 속에 가두며 또 자연을 수단화해서 인간의 문화나 여가 혹은 경제적 가치로 환원하려고 하는 근시안적인 정책이 시행되고 있기 때문이다.(자유주의)
자연의 오염은 먼저 인간의 정신이 오염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의 이성이 부단히 저항하는 이른바 ‘생태적 레지스탕스’가 필요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자연의 오염도 문제이지만 그보다 더 근원적으로는 정신의 오염이라는 것을 지적한 그는 자연을 위대한 스승이자 어머니로 인식했다.
이제 우리는 아나키즘에 대해서 새롭게 평가, 해석하고 인간의 세계경험에 대한 오만한 인식에 대해서 냉철한 이성을 가지고 비판, 성찰하는 태도가 필요하다…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아나키즘은 새로운 희망으로 다가온다.
오늘의 사회인식과 함석헌의 인식 비교
“통일의 주체세력은 민중 곧 씨알이다…그 주체는 씨알이어야 한다.”
이제 역사기록은 딜라져야 한다. 역사를 지배층의 입장에서 볼 게 아니다. 인민의 입장에서 보면 민란은 분명 지배층의 못된 짓거리에 대한 자유(정의)와 평등의 항거였다.
인민에게 있어서 국가주의는 자신들을 억압하는 무익한 울타리일 뿐이다. 그래서 함석헌은 “씨알은 자신들을 가두고 속박하는 울타리 속에 갇혀 살지 말아야 한다”고 늘 가르쳐왔다.
함석헌과 사회진화론
힘센 자가 한없는 제 욕심을 채우려 남의 생존에 필요한 것을 마구 빼앗기 때문이다. 본래 정치란 것은 그것을 금하자는 것인데 정치 자체가 그렇게 될 때 세상은 어지러워질 수밖에 없다.
멸망의 길은 뭐고 새 길은 뭔가? 생존경쟁을 원리로 삼는 국가주의의 가는 길이 곧 멸망의 길이요, 사랑으로써 자유와 평등을 동시에 가능하게 하는 같이삶의 길이야말로 새 길이다.
“책이 없으면 어떻게 전해질 수 있겠는가”
“그사람은 있다 해도 그 책이 없으면 아무리 어떻게 전해질 수 있겠는가? 옛날을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지금 세상에도 이런 일은 이루다 헤아릴 수 있으랴, 하늘이 인재를 낳으매 넓은 하늘에 새가 스쳐가듯, 연기가 사라지고, 안개가 잠기는 것만 같다. 책이 있어 전하지 않으면 하늘이 사람을 낳고 책을 낳은 뜻이 어디 있겠는가?“